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4년 5월 살롱 - 내 안의 여성혐오

1. 강씨 아주머니는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와서 여성 변호사와 상담을 하고 싶다며 제 방문을 두드린 분입니다. 올해 60세인 아주머니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2년 전부터 한 남자와 사실혼으로 재혼을 했다고 합니다. 양쪽 자식들도 모두 대학을 다니거나 직장 생활을 하며 함께 살고 있으니, 혼인 신고는 하지 않고 둘이 따로 원룸을 얻어서 동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혼한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는데, 그 동안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잘못들(남편의 숱한 외도, 이혼한 전처와 지속적인 연락, 침실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일본어가 쓰여진 정체불명의 약병- 나중에 알고 보니 성인용품점에서 판매하는 흥분제였다고요)에 대해서, 이대로 가만히 헤어지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 찾아오신 거였습니다.

혼인신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혼 관계도 종료되었을 때 이혼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한 배우자에게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다고 안내하면서, 위자료 청구에 대해서 말씀드렸어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모텔에 갔던 것을 들킨 후 자필로 쓴 각서 ('XXX는 XXX 이외의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는다. 둘 다 이를 위반시 이천만원을 각자 지급한다'는 내용), 생활비 지급을 약속하고 부부 관계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각서 ('4월 30일까지 삼백만원을 XXX에게 지급하고, 남편과 동일하게 한다')를 첨부해서 200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실혼 관계'였다는 것만 인정되면, 2주짜리 폭행 진단서와 경찰 출동 신고서까지 첨부했으니 일부금액이라도 승소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방 쪽에서는 분명히 '사실혼 관계가 아니다. 전처와 이혼 후 잠시 사귀면서 몇번 아주머니가 거주하는 집에 가서 밥 얻어 먹고 동침한 사이일 뿐이다'는 식으로 반박해올 것이 뻔합니다.

아주머니는 남편은 정년이 보장된 조선소 정규직 직원이라며, '정년퇴직시까지 매월 30만원을 지급한다'는 각서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솔직히 재혼에도 적당한 시기가 있는데, 전남편 사망 이후로 이 남자만 믿다가 그 시기를 놓친 것이 억울하다고고 하셨습니다.

2. 전문대학에서 미용 강의를 하는 한 30대 여교수도 제 의뢰인 중 한명입니다. 집안에서 소개해준 40대 사업가와 1년 정도 교제를 하면서 각종 명품 선물과 현금을 받았는데, 결혼에 대해서 여자 쪽에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점점 싸움이 잦아지고 결국 남자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통보했다고 합니다. 그 후 남자는 계좌이체 내역을 증거로 첨부해서, 빌려준 돈 2100만원, 신혼집 전세 알아보라고 입금한 1억 2천만원, 여자 아버지 집 공사대금 3000만원을 갚으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위 돈을 받은 것은 맞지만, 남자가 교제 중 '장인장모에게 모텔을 지어주겠다, 여자에게는 외제차를 사주겠다, 헤어샾을 차려주겠다'라는 등 재력에 대해서 끊임 없이 과시를 했고, 위 돈도 모두 남자가 재력을 과시하며 선물로 준 것이라며(화이트데이 선물 사라며 1000만원, 장모 가방 사라며 300만원, 마사지 받으라며 300만원, 같이 여행 갔던 사진값 500만원, 부동산를 하나 팔았는데 공돈이 생겼다며 차를 사든지 장인 배를 사라며 1억 2000만원) 모두 '증여'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법리적으로만 보면 남자 쪽에서 무리한 소송을 제기한 것이기에, 승소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자와 부모님은 '여자 변호사님이 이 사건을 맡게 되어 우리도 정말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여자가 남자와 주고 받은 카톡을 보고 나서는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남자는 존댓말을 쓰는데 여자는 낮춤말을 쓰고, 여자가 명품 가방 사진을 보여주니 남자는 '괜찮은데요 돈걱정 말고 사고 싶은 대로 사세요'라고 합니다. 결혼 전제에 부모님에게까지 소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뉴스에서 본 '스폰서' 관계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3. 저는 사무장님에게는 '판사가 강아주머니 혹시 꽃뱀으로 보고 사실혼 관계 인정 안할까봐 걱정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직원 한명은 '근데 교수님 가르치는 과목이 뭐래요? 미용? 아 무지 예쁜가보다...' 라고 코멘트합니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여성이 당사자인 사건에 대해서는 전제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그것이 최근 브로의 '그런 여자 (얼마전 계영이 보내준 관련 링크: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4040809441728009&outlink=1 )'라는 곡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여성혐오는 아니었는지, 쌀롱 여러분께 고백하고 묻고자 합니다.

괄괄한 친구(여자) 한명은 최근에 술을 마시며, '그런 여자' 노래 듣고 너무 웃겨서 빵 터졌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위 링크 기사에서 든 참이슬 CF (술 계산을 남자에게 미루는 여자에게 공효진이 “남자가 계산을 하면 박하사탕이라도 입에 까주라”고 핀잔을 준다는 내용)을 만약에 티비에서 봤다면, 뭔가 속시원하다는 마음이 들 뿐, 불편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여자' 노래가 재밌다는 친구에게 (늘 편하게 생각 나눌 수 있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위에 강아주머니가 우리 엄마라면 그런 관계는 시작조차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고, 여교수가 같은 반 친구였다면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이런 제가 '그런 여자'를 재밌다고 한 친구에게 어떤 의견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어요.

곰곰 생각해보니, 박하사탕을 까주라는 충고는 기존의 남녀관계를 전복하지는 말되 조금 '센스'를 부리라는 걸로 들려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친한 여자 친구가 술계산을 매번 남친에게 미룰 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살롱 친구들과 얘기 나눠보고 싶네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