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4년 인도에서의 메모들

1.

누가 인도인들을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하는가. 내가 목격한 인도의 충격적 가난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은폐-유지되는 재앙이다.

공중 화장실의 축축한 바닥에 옷을 다 벗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화장실 변기 옆

밑을 닦는 물로 온 몸의 때를 벗겨내는 사람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창문도 문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굴 속의 사람들 얼굴에서 난 그 어떤 '영적인' 충만함도 발견하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잘 웃지 않는다. 그것이 인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20040114 뭄바이.

 

2.

시간이 더디 흐른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리다.

하늘을 본다. 구름이 멈춰 잘게 흩어져 있다. 이런 걸 양털구름이라고 하나.

그 사이에 초생달 하나가 여리게 떠 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별이 그 달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빛나고 있다.

놀랍다. 아무리 찾아봐도 저 별 외에 그 어떤 별도 찾을 수가 없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서로 닿을 수 없는 달과 별. 그러나 저 거리 이상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질기고 강한 인력.

달과 별의 끈질긴 인연.

20049125 우다이뿌르

 

3.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아이, 유태인 거주 지역의 학살로 부모를 잃은 유태인 아이가

악취 풍기는 지하실 한가운데에 서서 세계와 인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 게스트하우스 안, 걱정을 달래기 위해 차분히 읽고 있는 '유럽의 교육' 중 빨치산 은신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아이의 모습에 대한 묘사 중.

20040204 자이살메르

 

4.

그래도 여행과 탐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만함을 죽이고 겸손해지기 위해서.

인간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내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추함과 짜증 속에서 문득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선 스스로 탄성을 내지르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지 않은가.

좁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당연하게 취해왔던 그 모든 방식에 대해 회의하는 것, 모든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시키는 연습.

그것은 결국 모든 문화와 인종과, 종교와 민족이 평등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각인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카슈미르 게이트에서 탄 버스 안에서 미친년처럼 짜증을 냈던 나.

나는 왜 문명화되지 못한, 도시화되지 않은 어떤 상태에 대해 그토록 화가 치밀었던 것일까.

발전-문명과 편리, 그리고 인간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3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내 인간성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20040220 델리

 

5.

터벅터벅 빨리까 바자르까지 걸어가다가 마주친 낯선 맥도널드 매장의 스피커에서

너와 내가 그토록 가사를 알고 싶어 했던 트레이시 채프먼의 "fast car"가 흘러나오고

있었라. 쓰레기같은 다국적 기업의 브랜치에서 흘러나오는 민중 가수(?)의 노래라니.

20040223 델리

 

6.

하루종일 생각, 생각 또 생각 뿐이다.

그리고 침묵, 침묵, 절대적인 침묵.

이러다 내 무의식까지 하나하나 끄집어 내 분석해 볼 수 있을 정도니.

모국어로 대화할 대상이 없다는 게 이렇게 쉽게 자폐아가 되는 길인 줄 누가 알았으랴.

아까 기차를 타고 오면서는 내 바나나와 오렌지를 다 줘버린 너무 예쁜 거지 남자 아이가

보내온 수줍은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를 지어보이다 울컥, 눈물이 났다.

20040248 잔시

 

7.

당신은 찬 적도,

           빈 적도,

           욕망하는 자였던 적도,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20040310 오로빌, 수르야의 일기

 

 

---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같던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낡은 메모들을 발견. 새롭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