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노동, 야근, 철야. 겨울이었을 것이다. 아마 오늘같은 1월 1일은 아니었지만 신년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작업실 문을 열고 나오니 공장 마당이 온통 하얗게 서리가 피어있었다. 공장 담벼락 너머 길거리에는 옆 공장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리는 아직 푸른 빛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풍경과 그 순간의 느낌을 잊지 않고 있다. 스무살. 공장에 취직하고 처음으로 철야를 했다. 그 전에는 수도 없이 야근을 많이 했지만 철야는 처음이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첫 철야여서 그런지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새벽 찬기운을 맞으니 뿌듯하기도 했다.

 

아침에 잠시 집에가서 씻고 밥을 먹고 다시 공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이 후 일주일에 한 번은 밤샘을 했고 나는 그 고통스러운 밤들의 공포를 잊을 수 없다. 납땜을 하다 졸면 손가락과 손등에 화상을 입는다. 장갑을 껴도 뜨거운 납이 목장갑을 뚫고 손등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쏟아지는 잠을 참는 것이다. 쏟아지는 잠. 귀청을 두드리는 디스코 음악. 결코 되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
 

 

[경향시평]밤샘노동, 새해엔 추억이 되길

오민규 | 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경향신문, 2013. 1. 1. 

 

“섣달그믐에 밤을 새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린단다.” 어릴 적 어르신들 속임수에 뜬눈으로 지새다 잠든 탓에 새해 아침은 늦잠 자기 일쑤였다. 1년에 하루뿐인데 눈꺼풀은 왜 그리 무거운지…. 그래도 새해 소망을 새기며 보내던 ‘밤샘’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중·고교 시절 시험 벼락치기 하느라 밤을 새워보기도 했지만, 사회에 나와 잠시 공장 생활을 할 때만큼 밤이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1주일 주기로 낮과 밤이 바뀌니 몸의 리듬이 깨지고, 밤샘노동을 할 때마다 집중도는 더 떨어졌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 제조업 노동자들 대부분이 인생의 절반을 밤샘노동으로 보낸다. 2007년에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야간근무를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하기도 했다. 밤샘노동과 같은 2급 발암물질에는 납, 자외선, 니트로벤젠, 최루액, 다이옥신, 디클로로메탄 등이 있다.

 

야간 교대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수명이 주간근무만 하는 이들에 비해 13년 짧다는 독일 수면학회의 연구결과도 잘 알려져 있다. 유엔인구기금(UNFPA)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평균수명은 84.0세로 세계 8위인 반면 한국 남성은 26위인 77.3세다. 그렇다면 밤샘노동을 하는 제조업 남성 노동자들의 수명은 77세보다 13년 짧은 64세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가 운이 좋아 정규직으로 정년퇴직을 하더라도, 퇴직 후 4~5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셈법이 된다. 죽어라 일해서 부어놓은 국민연금조차 몇 달 타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료끼리 퇴직 후 5년밖에 못 산다는 말을 장난처럼 해요. 웃으면서 말해도 속으론 얼마나 무섭겠어요.”

 

2013년은 우리 사회에서 밤샘노동을 없애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1월7일부터 2주간 시범실시를 거쳐, 3월4일부터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주간연속 2교대가 본격 실시된다. 1조는 오전 7시 출근해 오후 3시40분에 2조와 교대하고, 2조는 잔업 1시간을 더해 새벽 1시30분에 일을 마친다. 일찍 퇴근해 늘어나는 여가시간만 생각해도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노동시간이 단축될 경우 기존 생산량을 유지하려면 신규 인력충원이 필수적이다. 제조업에서 잔업·특근과 심야노동만 없애도 수십만개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고용노동부도 하는 얘기다. 노동강도가 강화되면 심야노동 폐지의 효과도, 일자리 창출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노동강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엄청난 노동강도와 잔업·특근에 시달리는 쌍용차는 근무형태만 변경해도, 무급휴직자는 물론이고 정리해고자의 복직까지 꿈꿔볼 수 있는 상황 아닌가.

 

아울러 잔업·특근과 심야노동의 원인이었던 ‘생활임금 보장’ 문제도 중요하다. 휴일과 야간노동으로 부족한 임금을 벌충해야 했기 때문인데, 세계적으로도 형편없는 저임금인 ‘기본급’이 대폭 인상될 필요가 있다. 특히 노동시간 단축이 곧바로 ‘최저임금’ 생활로의 직행을 의미하는 사내하청과 비정규직의 임금 인상이 수반되어야만 전체 노동자의 생활수준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GM 노사 역시 2014년 1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는데, 이는 최근 GM이 차세대 크루즈 생산을 이전하는 등 본격적인 물량 경쟁을 시작한 상황에서, 주간연속 2교대 실시는 한국GM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다. 완성차가 선두에 서게 되면, 지난해 금속노조 중앙교섭 합의에 따라 2014년 3월 말까지 1차 협력사부터 순차적으로 교대제 변경이 이뤄지게 된다.

 

대선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실의에 빠져 있다. 목숨을 끊는 노동자들도 생겼다. 정권과 자본의 책임 못지않게 민주노조운동이 희망과 전망을 주지 못한 탓도 크다. 정권교체나 대통령 당선인에게 뭘 기대하기보다, 심야노동 폐지를 향한 거대한 물줄기를 만드는 데에서 스스로 희망을 만들 때이다. 올해가 절호의 기회 아닌가. 섣달그믐 밤샘처럼, 심야노동을 과거의 추억처럼 만들어버릴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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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1 21:48 2013/01/0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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