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시행되는 새로운 도로명 주소에 대해 "‘기억의 주름’, 3차원적 사고와 상상, 고향과 공동체의 경험 또한 잃는다"는 이도흠 선생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아마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시선을 가진 이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곳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한 곳, 이미 어떤 이름을 가진 것에조차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길 즐긴다. 그렇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익숙한 것으로 자기화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분명 우리가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인간화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주소지를 옮기면서 생판 처음듣는 낯선 주소를 주민등록증에 옮겼다. 낯선 지역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소명이 낯설기 그지 없었다. 무슨구 무슨동 몇 번지가 아니라 무슨동을 무슨'로'로 변경한 것일뿐인데 마치 다른 하늘 아래 다른 땅처럼 느꼈던 것이다. 주소를 변경하면 공식 문서와 공식 무슨무슨 등 온갖 것들을 다 바꿔야 할텐데 이거 돈이 엄청 들겠네, 이런 생각을 하며 멀쩡한 보도에 블록 공사 새로 하는 행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피같은 세금 낭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장일단이 있는 법. 이런 것도 일종의 부의 재분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근로제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부를 재분배할 수 있고 노동자들에게 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만 한국 공무원들은 영혼이 없는 존재들이니 그런 것까지 기대할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지리산 골짜기 시골에서 태어나 10살까지 그곳에서 자랐는데 마을 이름이 "새터"부락이다. 새터라는 이름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우리 마을 뒤에는 "구사"부락이 있었고, 바로 앞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최근 지리산 둘레길로 유명해진 "수철"부락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혹시 해서 다음 지도를 찾아보니 도로명이 "친환경로"라고 되어있다. 이런 걸 깬다고 하는 걸까?
마을 이름이 "새터"가 된 사연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알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지리산은 빨치산들의 무대였고 당연히 지리산 골짜기 마을은 빨치산의 수중에 있었고 마을 사람들 중에도 빨치산과 그 가족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부에서 지리산 골짜기 마을 소개령이 내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단다. 그래서 이름이 "새터"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 정부가 마련해준 새로운 터가 아마도 빨치산과 토벌대의 경계지점이었던 모양이다. 이래저래 한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20대 청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 긴 사연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필적하련만.
- [기고]도로명 주소로 잃어버리는 것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311948255&code=990304
새해 첫 아침의 동살은 희붐한데, 이제 50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마을이름을 잃게 되었다. 우리의 마을과 이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반도 지형은 대부분이 노년기의 암반이다. 30억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이 빚고 다듬으며 더 침식된 곳은 분지를 이루고, 내와 강이 흐르면서 퇴적토를 쌓아 숲과 들을 만들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신석기나 청동기부터 분지의 구릉 지역에 삼삼오오 모여 터를 짓고 밭을 갈고 논을 일구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과 논밭 사이로 냇물이 감돌아 흐르는 언덕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품새가 한국의 전형적인 마을 풍경이다. 이들은 함께 모여 보이는 것과 경험한 것을 종합하여 최상의 이름을 마을에 부여하였고, 그곳에서 산과 물로 막힌 채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유전자와 피와 마음을 섞었다. 언덕에 온갖 꽃들이 흐드러져 피기에 꽃매, 솔숲 아래에 자리하여 솔아랫말, 냇물이 둥글게 돌아 흘러 물돌이마을, 논이 많은 골짜기여서 논실, 큰 비석이 있어서 선돌마을,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만들어 사기마을 등으로 지었다. 마을이름은 공동의 역사적, 사회적 유산인 것이다.
신라의 신문왕은 685년에 이 마을을 450개의 군현(郡縣)으로 묶고 그 위에 9주5소경을 두었으며, 고려의 현종은 1018년에 5도(道)와 양계(兩界)로, 조선의 태종은 1413년에 8도(道)로 체계화하였다. 일제는 1918년에 토지를 수탈하고 조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지번 주소를 도입하였다.
2014년, 이제 오늘부터 도로명주소를 써야 한다. 신자유주의적이고 사대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근대화와 도시화로 체계적인 순차성이 많이 훼손된 지번주소를 없앤 것은 잘한 일이다. 지금은 혼란스럽지만 과도기를 지나면 더 편리하리란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4만여개에 이르는 마을이름이 사라지면, 그에 어린 ‘기억의 주름’, 3차원적 사고와 상상, 고향과 공동체의 경험 또한 잃는다. 숱한 도로명과 숫자는 텅 빈 기표다. 오늘 이후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마을이 아닌 ‘길에서 난 아이’가 되어 거리의 기억과 상상을 할 것이다.
신라 때부터 일제에 이르기까지 마을이름은 크게 변동이 없었다. 일제도 도와 군과 이(里)로 이어지는 마을이름 끝에 지번만 붙인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부터 한자화하여, 꽃매를 화매(花梅), 솔아랫말을 송하리(松下里), 물돌이마을을 하회리(河回里), 선돌마을을 입석리(立石里), 논실을 답곡(畓谷)으로 바꾸기도 했지만, 상당수가 아름다운 우리말을 유지했으며, 한자로 바뀌었어도 이름에 어린 기억은 남아 있었다.
마을이름은 그 자체로 ‘기억의 주름’이다. 그 주름을 펼치면 무진장의 기억이 샘솟는다. 필자가 작년까지 스무 해 남짓 살던 곳은 수촌(秀村)마을, 곧 뺌말이다.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뺑쑥’이란 것이 자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뺌말에 두레공동체가 있었으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산신당에 올라 산신제를 지내고 명절에는 윷놀이 대회를 연다.
도로는 선이자 2차원이다. 거기에 3차원적 상상과 삶은 자리하기 어렵다. 중국,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로는 소통과 교역, 자연과 타자에 대한 침략과 개발과 폭력의 산물이다. 미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일제는 신작로(新作路)를 통해 쌀, 광물, 소녀와 청년을 수탈하였다. 산업화 이후 마을을 잇는 도로로 인하여 잘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공동체의 유대와 가치를 시나브로 상실하였다.
대안은 간단하다. 2차원(도로명)과 3차원(마을이름)을 종합하고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해 텅 빈 기표에 맥락을 부여하면 된다. 각 지자체는 잘 지은 것은 남기되 졸속으로 지은 도로명은 폐기하고, 지역주민이 향토학자와 마을 어른들의 정보를 종합하여 역사성, 사회성, 지역성을 이름에 담을 수 있도록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다시 정하자. 정부는 도로명 뒤에 마을이름을 표기하여 도로명의 무의미하고 사대적이며 2차원적인 속성을 지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