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사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핵심은 "종북주의"다. 그런데, 종북주의는 김창현씨 말대로 실체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접근한 면이 있다. "종북주의"는 남한 사회변혁 운동 세력 중에서 NL(민족해방)이라는 정파의 정치 이념의 현실적 경향을 말한다. 그러니 그 경향은 다양한 형태의 행위로 현상하기 마련이고 이를 뭉뚱거려 종북주의라는 표현으로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이 북한을 추종하든 김정일을 찬양하든 그건 그들의 사상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이념과 행위가 남한 전체 인민의 삶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끌고왔다는 점이다. 불과 20여년 전 그들은 한국 사회가 "반봉건식민지" 체제(혹은 식민지반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편향으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있었다- 뭐 대단한 이론적 논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적이 없어서 아직도 한국 사회를 '반봉건식민지'라거나 '식민지반자본주의'라거나, 또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의 심화로 인해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고통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물질적 현상이 아무리 황홀하고 휘황찬란하다 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부르주아들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물질적 풍요의 외양을 힐끔거리며 그 그림자를 밟을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은 욕망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의 실현은 댓가를 요구한다. 그 댓가는 노동의 고통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고행이며 노동은 자기 상실이며 온갖 악덕의 근원이 되었다.
인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인민의 삶으로 향하는 길은 어렵다. 인민과 함께 하는 것은 어렵다.
제3의 길, 자주파, 그리고 가짜들
(경향신문. 08.1.16, 이대근_정치·국제에디터)
당내 대통령 경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자 탈당해 상대당으로 옮겨 다시 경선할 기회를 얻었지만 거기서 또 패배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정치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요 정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손학규가 그렇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이 당을 살릴 구원자로 부활했다. 남들이 안 가진 무슨 기사회생의 묘약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남들이 안 가진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진 것을 안 가져서 대표가 되었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병자를 살리겠다며 내놓은 처방이 이미 이 동네에서는 말만 들어도 식상한 ‘진보의 수사학’이었다. 5년전 등장했다 사라진 가짜 진보가 이 엄동설한에 죽지도 않고 또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초기 노무현이 진보 수사를 구사할 때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그럴 듯했다. 그에 비하면 손학규의 진보 수사는 그냥 해보는 말이라는 게 바로 드러난다. 사실 그의 성향이 다 알려진 마당이라 그도 차마 진보라고는 말을 못하고 새로운 진보, 제3의 길을 꺼냈을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는 필요없다-
그러나 진보면 진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가 필요없다. 새로운 진보니 제3의 길이니 하는 것 자체가 수상한 것이다. 유시민이 탈당하면서 온건,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며 또 속임수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도 시장주의,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했을 뿐 그 대안의 길을 밟아본 적이 없고 그 대안세력이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낸 적도 없다. 진보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나서 싫증나 제3의 길을 가겠다면 시비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있어본 적도 없는 것을 극복하겠다면 그건 망상이다. 이런 혼돈은 열린우리당 몸통에 한나라당 머리를 얹힌 인공조합의 불가피한 결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사 구조적 산물이다. 권위주의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기간 진보를 대표할 정치조직의 부재로 인해 진보는 보수정당에 진보의 대표권을 위임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와 진보의 미분화는 정당의 정체성 상실 등 정치를 일상적으로 왜곡해왔다.
이제 진보는 진보정치 조직이 대표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온전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없다. 민주노동당? 자주파가 의미있는 세력으로 잔존하는 한 민노당을 진보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주파는 한국의 주요 모순을 민족(분단) 문제로 본다. 분단이 해소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의 길도 열릴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독재하의 상황인식이다. 민주화 이후 민족문제는 북한문제로 바뀌었다. 한반도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분단이 아니라 북한의 기아, 피폐한 삶, 열악한 인권, 핵무기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도 북한 경제 재건, 북한 인민의 삶 개선, 핵폐기, 평화로 변했다. 다행히 포용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얻었고, 남북간 대화와 협력은 국가적 과제로 자리잡았다. 그런 과제는 김대중·노무현정부가 잘해왔고, 통일부를 없앤다지만, 이명박정부도 크게 잘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자주파가 따로 할 일이 없다. 억압적인 김정일 정권을 변명하고, 핵보유 정당성을 설파하며, 부족한 자원을 군비에 쏟는 선군정치를 옹호하는 게 자주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보수나 반동들이 하는 것이다. 진보는 불평등과 맞서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소수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민노당 다수파인 자주파가 비밀결사처럼 활동하며 항상 당패권 장악에 골몰한 결과, 민노당 노선을 오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당은 따분하며 낡고 진부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자주파의 시효는 소멸했다. 북한문제는 차기 정부와 야당에 맡기는 게 좋다. 모든 번뇌를 잊고 해산하기 바란다.
-서민의 고통을 끌어안아야-
진보당이라면 서민들이 지금 겪는 고통을 자기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의 고민을 자기 고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공명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공상에 빠져 있는 가짜 진보당에 서민이 흥미를 느낄 것 같은가. 심상정 비대위가 민노당을 진보정당으로 바꾸는 작업을 떠맡았다. 진보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청소하고 겉과 속을 다 바꾸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기대한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반듯한 진보정당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