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본질에 관하여

2013/05/16 13:20

윤창중 보도와 댓글에 흔히 달라 붙는 '나랏망신'이란 표현. 나는 심히 거슬린다. 윤창중의 성추행(혹은 폭력)은 나랏망신이 아니다. 그건 그 개인의 잘못일 뿐이다. 몇년전 미국 총기 사고 때 죄송해서 몸둘바 모르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명백한 현행범을 도피시킨 청와대의 작태는 확실히 나랏망신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 보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왜 하필 남의 나라 가서 일을 저질렀냐는 것이다. 한국땅에서 했으면 아무 탈 없었을 텐데. 왜 방상훈이를 본받지 않았느냐? 나는 국가주의가 싫다. 장자연의 죄목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않은 것인가? 도미니크 칸 때, 그것을 프랑스의 수치라고 표현한 언론은 없었다. 그러나 10여년전 빼땡이 대선 결선 투표에 진출했을 때 그것을 프랑스의 수치라고 많은 언론이 망연자실했다. 윤창중이 나랏망신이라고? 뭐 그까이 것 가지고~ 서울 광장에 모여 부시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영어로 설교하고 "Bombard north Korea!!"를 외치던 그 수많은 기독교도분들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하자는 전라도 새끼보다 전라도 새끼들 학살한 내 고향사람이 좋다던 87년 대선 당시 800만 대구.경북분들에 비할 바는 더더욱 아닌듯. 아! 경상민국을 외치면서 주구장창 한나라당만 지지하는 분들은 또 어떤가?

 

성폭력, 성매매, 불륜 등의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딸같은 여자'라는 표현도 참으로 거슬리다. 딸같은 여자랑 섹스하면 안되는가? 딸같은 여자랑 연애하면 안되는가? 딸같은 여자는 강간하면 안되고 딸같지 않은 여자는 강간해도 된다? 딸같은 여자랑 불륜에 빠지면 안되고 딸같지 않은 여자랑은 불륜에 빠져도 된다? 뭐 이런 엿같은 가족주의가 있는가? 나는 가족주의가 싫다. 언젠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새끼. 기자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는 '식당 아주머니인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강간해도 되는 여자가 있고 하면 안되는 여자가 있는가?

 

수잔 브라운밀러는 'against our will'에서 강간범은 모든 남성의 전위부대라는 탁월한 그리고 완벽한 분석을 하였다. 강간을 하는 나쁜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착한' 남성을 찾고 그에 의탁하려는 여성의 모습. 그것이 성폭력이 세상의 여성들에게 부여한 가장 최악의 선물이다. 강간을 아주 나쁜 범죄로 묘사하고 강간범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하면 할수록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이 역설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폭력을 이해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겠다. 어디까지나 예일 뿐이다. 아래 두가지 상황.

1. 강간당하는 여자가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상황.

2. 강간당한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에 신고하고, 친구들에게 혹은 회사 동료들에게(남자든 여자든) '아! 재수없어. 나 어제 집에 가다 강간당했다."라고 말하는 상황.

 

위 두가지 상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길가다 소매치기 당하면 수치심에 부르르 떠는가? 어떤 미친 놈이 당신 뺨을 때리면 부끄러워서 회사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는가? 강간당한 것을 부끄러운 그 무엇, 치욕스러운 그 무엇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의 여성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남성의 음모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성폭력의 본질은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폭력에 그 이외의 어떤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강간범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그러면 강간은 줄어들지언정 강간살인은 폭증할 것이다(증거인멸을 위해). 당신에게 두가지 선택이 있다. 강간당하고 집에 가는 것. 그리고 강간당하고 죽는 것. 물론 기꺼이 두번째를 선택하겠다는 이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다수의 선택은 다를 거라고 본다. 성폭력에 치를 떠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친구가 일반적인 폭력에는 덤덤하면서 유난히 성폭력에 치를 떤다면 곰곰히 고민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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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금'을 읽었다. 소금의 문학적 성취는 잘 모르겠으나 계급적 착취구조가 혈연 가족을 매개로해서 작동한다는 그의 인식은 참으로 탁월하다. 같은 시기에 the giver라는 에스에프소설을 읽었다.

 

"세상에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대처의 말(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이용해 먹으려는 개수작일 뿐이다. 일제식민지시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파시즘의 시절, 분명하고 명백한 불의 앞에 저항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용기부족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자본의 노예신세를 기꺼이 인내하는 이유. 가족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사회복지란 가족 단위의 생존 전략을 사회 전체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개별 가족의 불평등을 사회적으로 해소하자는 것. 플라톤이 왜 부인을 공유하자고 했겠는가? 상속과 증여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갈까?

 

존 레넌은 천국이 사라지고, 소유가 사라지고, 국가가 사라진 모습을 상상했다. 소유는 가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가 사라진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가족이냐? 사회냐? 그 대립구도가 분명하다. 단언컨데 혈연가족은 세상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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