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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고 싶지 않다

서둘고 싶지 않다

신동엽

내 고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새파란 풀을 씹는다. 큰가마 솥에 자운영, 독사풀, 말풀을 썰어 넣어 삶아가지고 거기다 소금, 기름을 쳐서 세 살짜리도, 칠순 할아버지도 콧물 흘리며 우그려 넣는다. 마침내 눈이 먼다. 그리고 홍수가 온다. 홍수는 장독, 상사발(품질이 낮은 사발), 짚신짝, 네 기둥, 그리고 너무나 훌륭했던 인생 체념으로 말미암아 저항하지 않았던 이 자연의 아들 딸을 실어 달아나 버린다. 이것이 인간들의 내질(內質)이다.
오늘 인류의 외피는 너무 극성을 부리고 있다. 키 겨룸, 속도 겨룸, 양 겨룸에 거의 모든 행복을 소모시키고 있다. 헛것을 본 것이다.  그런 속에 내 인생, 내 인생 설계의 전출(길게 벋어나가 너절하게 늘어진 줄기)을 뻗쳐 볼 순 없다.  내 거죽이며 발판은 이미 오래 전 찢기워져 버렸다. 남은 것은 영혼,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
노자 오천언(五千言) 속에 있는 말이다.
'대국을 다스림은 흡사 조그만 생선을 지짐과 같아야 한다.'
조그만 생선을 지지면서 젓가락, 수저 등을 총동원하여 이리 부치고 저리 부치고 뒤집고 젖히고 하다보면 부서져서 가뜩이나 작은 생선살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수선피지 말고 살짝 구우라는 것이다.
나도 내 인생만은 조용히 다스려 보고 싶다.  큰 소리 떠든다고 세상 정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삐 서둔다고 내 인생에 큰 덕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와서 이 옷을 벗을 때까지 산과 들을 바람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얼마 아니 지나면 가로수마다 윤기 짙은 새 잎이 화창하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신록의 푸짐한 경영 밑에 젊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먼 꿈을 싣고 사라져 갈 것이다.  그 사라져 가는 언덕 너머 내 소년시절의 인생의 꿈은 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무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중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서 있는  적이 있었다.  그 때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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