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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김소월 -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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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렘굴드

 

     

     


    그의 연주는 기계적인 정확성과 제어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의 바탕 위에 섰다.

    그리고 성부간의 우열이 없다. 바흐에서처럼 다른 곡들도 각 성부가 평등하게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소니)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굴드의 최종 목표는 바흐가 항상 그랬듯이 푸가였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예술의 구현을 위해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


    -월간 객석

     

     

     

    1962년 CBS 녹음실의 글렌 굴드

     

     

    Glenn Gould, piano

    Goldberg Variation G Major, BWV988

    Variation 4 (J. S. BACH)

     

     


    Stuttgart Chamber Orchestra



    Glenn Gould, piano Recorded 1955



    Andras Schiff, piano



    Rosalyn Tureck, piano 1998 Digital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당시

     

     

     

 

                        글렌 굴드 (1932 - 1982)

                                                        Glenn Gould

젊은 시절의 굴드    
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1982)에 대해 Oxford의 'Musician Dictionary'에서는 'Canadian Pianist, Composer and Writer'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굴드는 '전위예술가'라고 불리어야 옳을 것이다. 길지 않았던 그의 생애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약한 것은 10년 남짓한 시간이며 오로지 레코드를 통해서만 청중들과 접할 수 있었던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 정확히는 바흐의 음악 - 에는 살아 숨쉬는 듯 한 생명력이 있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골드베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한 것도 바로 굴드였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서 청중 앞에 서는데에 사용될 노력을 절약했으며 남아도는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하였다. 굴드는 우리가 좋지 않은 의미로 흔히 이야기하는 '짜집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중에 대한 거부감과 편집, 합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에의 매료, 굴드를 대표하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음악가 (musician), 혹은 연주자 (performer)라고 부를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굴드의 생애
굴드의 다소 유별난 연주방식과 음악 해석은 음악을 배운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이 보 인다. 굴드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1932년 9월 25일에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그 (Edvard Grieg)는 굴드 외고조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굴드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전기에서 굴드의 어머니를 '피아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회를 가지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굴드가 10살이 될 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굴드의 이웃집에 살던 아홉 살 때에 그를 만났다 (당시 굴드 역시 아홉살이었다). 그는 "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 - 굴드는 "피아노는 슈나벨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대한 접근이었다" 라고 평했다 - 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한다. 1946년 그는 로얄 코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고 그 음반의 모든 뉘앙스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는 데에 다소 각오가 필요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다음 해에 굴드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퍼니와 연주하였고 어떤 비평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가졌다 (굴드는 뉴욕을 'Debutow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날 CBS와의 녹음계약을 맺었다.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에 CBS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때에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어 버렸지만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굴드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게 된다.

1957년에 굴드는 러시아 (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으며,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이 연주를 해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유럽순회동안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연주하였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에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과 함께 미국 텔레비젼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는 캐나다의 TV에서 이미 유명인물이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캐나다의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그런데 굴드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굴드는 그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똑 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는 기술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된다. 굴드는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 이상 굴드의 생애의 일부는 SONY의 글렌 굴드 공식 홈페이지 (http://www.glenngould.com/)에서 수정, 번역한 것입니다.


특유의 옷차림의 굴드    
굴드의 음악
위의 간략한 그의 일대기에서도 소개되었듯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별도의 음악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굴드의 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음악의 중심지'가 그의 성장환경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굴드는 빈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음악을 배우지 않았으며 19세기의 흐름을 이어받은 대가들에게 사사받은 일도 없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템포의 설정도, 프레이징 도, 장식음의 처리도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여기에 기괴한 그의 성격까지 더해져서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굴드의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 못지 않은 중요한 특징으로 음악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활동한 음악가와는 달리 미국 대륙에서 활동한 덕분에 비교적 풍부한 영상자료가 남겨져있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기괴한 표정과 허밍, 고무로 만든 놀라운 의자, 호로비츠 못지 않게 '불량한' 연주자세 등을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특이점은 그의 음악에의 몰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취하는 제스츄어를 모두 쇼맨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굴드의 연주자세는 청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집중력이라는 의미에서 굴드는 바흐 전문가인 칼 리히터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독일적인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굴드는 바흐의 음악에 잠재하는 본질을 확실히 이끌어 내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자유롭게 바흐를 연주했다. 그는 현대 피아노를 사용하였고, 주법도 바흐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굴드가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바흐의 연주에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잃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보를 있는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내는 행위의 무미건조함을 굴드는 의표를 찌르는 연주를 통해 새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바흐가 그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도취되었음에 분명한, 약동하는 생명력을 굴드는 극히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와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영롱한 트릴, 때때로 어이없이 빠르거나 혹은 느린 템포, 지나칠 정도의 논-레가토 주법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결코 큰 음량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와 협연한 지휘자들은 굴드의 음량이 비교적 작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흐 시대 악기의 작고 변화가 없는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굴드는 오래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수리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피아노는 매우 가벼운 건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종종 굴드의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스피드는 아마도 이 피아노의 특성인 듯 하다. 굴드가 만드는 소리는 과격한 해석과는 반대로 매우 섬세한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내기를 원했던 음색의 미묘한 차이, 주법의 극적인 변화는 연주회장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레코드만을 통해 - 눈의 미세한 결정을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듯이 - 그는 자신의 말을 다할 수 있었다.

결국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굴드의 음색은 매우 예쁘다. 호로비츠의 스카를랏티 소나타를 들어봐도 이와 유사한 예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소니의 SBM기술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훨씬 이전에 발매된 CBS의 오리지널 음반을 들어 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굴드의 깔끔하고 예쁜 음색은 여전하다. 아마도 굴드는 녹음과정에서 피아노 소리의 의도적인 수정을 가했던 것 같다. 이것은 현대 피아노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기술적인 (음악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굴드의 '창의력'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음향과 트랙의 합성에 몰두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단순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은 굴드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서 평생을 거기에서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굴드는 아무 거리낌없이 새로운 음악의 창조에 골몰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굴드의 바흐가 기적적으로 훌륭한 연주들임에 비해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 등의 연주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바흐의 연주에서는 충분히 허용되고 새로움을 줄 수 있었던 자유로운 발상들이 그 이후의 음악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 당시와 현재의 악기 자체의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은 분명히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따라서 표현의 폭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굴드의 '전위'는 바흐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23번 소나타를 들어보면 바흐 때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해석은 분명히 참신한 것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1악장의 듣는 이를 초초하게 만들만큼 느린 템포에서 기존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바흐 때와 같은 음향상의 매력은 아무래도 훨씬 뒤쳐져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들에서는 어느 정도 참신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지만 베토벤 이후에는 해석상의 참신함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굴드가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연주한 음반을 들어보면 그다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작곡 당시의 악기를 사용하는데 굳이 기괴한 해석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 것일까?

굴드는 본질적으로 청중을 싫어했다.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러한 적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연주회장을 기피하였으며 청중의 비판적인 의견이 자신의 창조적인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 굴드의 이런 생각은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음악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나마 이래저래 평가하고 때로는 공격까지 하는 필자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리는 점이다.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음악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일 뿐, 연주자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굴드가 기계적인 편집과 조작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에 일말의 사심이 없었다는 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선구자'로서의 굴드에 대한 평가를 다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스트 음반 10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SONY)
1955 Mono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SONY)
1981 Digital

바흐: 6 파르티타 BWV 825-830
(SONY 2CD)
1957-1962 Stereo

바흐: 평균율 1권 BWV 846-869
& 2권 BWV 870-893
(SONY 4CD)
1962-1969 Stereo

바흐: 영국조곡 BWV 806-811 (SONY)
1971-1975 Stereo

바흐: 프랑스 조곡 BWV 812-817
(SONY 2CD)
1971-1973 Stereo

바흐: 인벤션 (Two Part)과 신포니아 (Three Part) BWV 772-801 (SONY)
1964 Stereo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SONY 4CD)
1965-1974 Stereo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5번
Columbia Symphony Orchestra (1-3번), New York Philharmonic (4번), American Symphony Orchestra (5번)
Vladimir Golschmann (1번), Leonard Bernstein (2-4번), Leopold Stokowski (5번) (SONY 3CD)
1957-1966 Stereo

쇤베르크: 피아노 작품집 (SONY 2CD)
1958-1974 Ster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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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산업

누가 거대 논술산업을 움직이나? [조인스]
논술? 386 운동권에 물어보라! `해직교수·노동운동가…논술산업 파워그룹 형성`
월간중앙대치동 학원가, 한 집 건너 한 집이 논술학원 간판이다. 박학천논술아카데미·초암C&C·유레카논술아카데미 조동기국어논술학원…. 논술시장을 휩쓸고 있는 주인공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논술학원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부상하고 있다. 웬만한 학원가 골목에서 ‘논술학원’ 간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류에 민감한 언론사들도 뛰어들었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의 언론매체에서 아예 논술아카데미를 차린 데 이어 기자 출신이 차린 논술학원도 대치동에서 성업 중이다. 2007학년도 수시전형에서 수리논술·언어논술 등이 등장한 이후에는 수학학원·사회탐구학원도 ‘논술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논술시장에 뛰어드는 추세다.

지난 4월 대우증권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 시장규모는 16조8,000억 원. 전문가들은 이 중 절반 정도가 논술시장으로 몰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 논술학원의 매출은 연간 100억 원이 넘는다.

전국 학원가에 논술 열풍이 불어닥친 것은 지난해다. 교육부가 지난해 초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등급제로 바뀌는 대신 내신과 논술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08년도 대학입시 전형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을 지망하는 상위 3~5% 학생만 준비하던 논술시장은 입시생의 30~50%가, 더 넓게는 초등학생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대시장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내신에 대한 불신이 큰 주요 대학이 교육부 발표에 대한 후속타로 2008학년도부터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자 논술시장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01 논술산업에 왜 엘리트 강사 몰리나?
상위 3~5% 시장에서 30~50% 시장으로 급팽창

논술 강좌에 대한 수요는 1994년 주요 대학에서 본고사가 부활한 이래 꾸준히 있어 왔다. 1997년 입시부터 대학별 영어·수학 본고사는 금지됐지만 논술고사는 허용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치동 일대에서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논술학원 붐이 일었다. 주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논술이 관건이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대치동 아줌마’들 덕분이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논술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한 사람은 고(故) 조진만 전 메가스터디 부사장이다. 1996년 대학입시에서 연세대·서강대·한양대·이화여대 등 4개 대학 논술 문제 6개를 맞힌 그는 일약 ‘족집게’ 강사로 등극했다. 폐렴에 걸린 후에도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강의에 쫓기던 그는 2001년 9월 32세의 나이에 과로사했다.

논술강사 1세대는 조진만 강사 외에 이석록(메가스터디 평가소장)·이만기(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조동기(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원장) 등을 꼽는다. 이들은 대부분 국어 강의를 맡았던 강사들이 논술까지 영역을 넓힌 경우다.

당시에는 일부 대학에서만 논술고사를 치렀기 때문에 언어영역 강사들이 수능 직전까지 언어영역 위주로 가르치다 수능이 끝나면 논술 강의에 매달렸다.

학원 강사들이 본격적으로 논술시장에 뛰어든 것은 수시전형이 본격화한 2000년 이후다. 이 즈음부터 논술 강의만으로도 1년간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조진만·이석록·이만기 등으로 대표되는 1세대 논술 강사에 뒤이어 현재 논술 학원가를 움직이는 2세대 강사는 박학천·윤성진(박학천논술학원), 이윤호·송재희(초암C&C), 장민성·박수림·박홍순(유레카논술아카데미), 김재인(유웨이중앙교육 오케이로직 논술 대표강사) 등이다.

이들 역시 1세대 강사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지만, 과거 10년간 논술이라는 한 우물을 판 결과 최근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1세대 강자들이 스타 강사 개인의 역량으로 승부를 겨뤘던 것과 달리 2세대 강자들은 시스템을 갖춘 팀 혹은 학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두고 압구정 조동기국어논술학원 안인숙 부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통 스타 강사라고 하면 지금까지는 ‘족집게’ 강사를 의미했습니다. 1996년 입시에서 4개 대학 문제를 맞힌 조진만 선생이 대표적 예죠. 그러나 지금의 논술 경향에서 ‘족집게’는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습니다. 특히 통합형 논술이 출제되면서 이는 더욱 불가능해졌죠. 결국 한 명의 강사가 전부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어떤 학원이 시스템을 잘 갖췄느냐가 관건이 됐죠.”

흥미로운 점은 강남 논술시장이 386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만든 학원에 의해 평정됐다는 점이다.


02 고려대 운동권 집합소 ‘조동기국어논술학원’
후배들 먹고살게 만들려다 28개 직영점 갖춘 기업형으로…

▶조동기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원장

1세대 국어 강사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하게 논술시장에서 자리 잡고 있는 강사는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조동기 원장이다. 85학번인 조동기 원장은 고려대 총학생회에서 집행위원장을 지낸 이른바 386 운동권 출신이다.

연극에도 심취해 고려대 연극 동아리 ‘극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도 대학 졸업 후 독립영화를 만들기 위해 합류한 ‘서울영상집단’ 사무실 이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한때 영화배우를 꿈꿨을 만큼 준수한 외모와 목소리를 갖춘 그는 금세 인기 강사로 떠올랐다. 아시아선수촌 내 작은 보습학원 아르바이트 강사였던 그는 불과 5년 만인 1994년 강남 대일학원 대표강사가 됐다.
조 원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기본적으로 수능 언어영역이나 논술 과목이 운동권 출신들과 잘 맞습니다. 특히 운동권 출신들은 대학생활 동안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을 하며 고전과 인문사회과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죠. 저의 경우 여기에 극회 활동을 하며 예술의 흐름까지 익혔죠. 수능 언어영역에 나오는 웬만한 지문을 다 원전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쉬울 수밖에 없었죠. 대학 동기들 중에서 대학 때 공부한 내용을 아마 제일 잘 써먹는 사람이 저일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사회탐구 과목의 손주은, 과학탐구 과목의 이범 등과 함께 강남 최고 스타 강사 반열에 오른 그는 1998년 자신이 만들다시피 한 강남 대일학원을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에게 넘긴 뒤 ‘바보 과대표’로 알려진 이창기(필명 홍치산)와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을 차려 독립했다. 조 원장으로부터 강남 대일학원을 인수한 손주은 대표는 이를 오늘의 메가스터디로 키워냈다.

조 원장은 “원장이 고려대 운동권 출신이어서 조동기국어논술학원에는 고려대 운동권 출신 강사들이 많다”는 소문에 대해 “어디까지를 운동권으로 보느냐의 문제”라며 “1980년대는 누구나 싸우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고 말한다.

▶방학 중에도 학원에 나와 논술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 내신과 논술시험으로 합격이 결정되는 2008년도 대입전형 발표 이후, 논술시장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대학 시절 제적됐거나 감방 경험이 있는 운동권 출신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배들이 제가 나름대로 학원가에서 유명하니까 아는 학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많이 찾아왔죠. 그중에서 괜찮은 후배는 다른 학원에 보낼 것 없이 우리 학원에서 같이 일하자고 붙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려대 ‘극회’ 출신 강사가 많은 것은 사실이죠.”(웃음)

그는 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이 28개 직영점을 갖춘 기업형 학원이 된 것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업이 확대됐다”고 덧붙였다.

“영화판 가려던 꿈 결국 접었다”

“40세가 되면 학원을 그만두고 영화판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5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없어도 학원이 굴러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시스템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과정에서 후배들을 많이 끌어들였고요. 그런데 막상 시스템이 갖춰지고 나자 유휴 인력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남는 인력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2002년 문을 연 분당점과 2004년 문을 연 목동점입니다. 우리 학원은 3년 이상씩 계신 강사 선생님들께는 학원 지분을 드립니다.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이 저 개인 것이 아니라 강사 선생님들이 공동으로 지분을 소유한 구조인 것이죠. 지분을 가진 선생님 중 독립을 원하는 분께는 직영점을 내드리고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만약 저 혼자 잘살겠다고 했으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끝에 “네 달 전 영화배우의 길을 접었다”고 했다.

“학원이 확장되면서 조동기라는 이름이 많이 부담스러워졌어요. 우리 학원에 오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조동기라는 이름을 보고 옵니다. 그런데 정작 조동기는 학원에 없고 영화배우를 하고 있다고 하면 아무래도 시장에서 형성됐던 학원의 신뢰도가 떨어지겠죠.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를 개설하며 사이트 이름에서 조동기를 빼고 ‘1교시’라고 했어요. 한동안 두 개 브랜드를 함께 끌고 가 보자는 전략이었죠.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여전히 ‘1교시’보다 ‘조동기’가 더 먹힙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혼자 꿈을 이루겠다고 저를 믿고 따라온 300명의 선생님과 직원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눈물을 흘리며 꿈을 접었죠.”

그는 배우의 꿈을 접은 대신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을 더욱 튼실하게 키우기로 했다. 지난 4월 베이징(北京)에 직영점을 낸 데 이어 올해 안에 중국에 2개 점, 영국과 캐나다에 각각 1개 점의 문을 연다는 계획이다. 영국·캐나다에서는 현지에 유학 가 있는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하지만, 중국에서는 중국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반도 개설할 계획이다.


03 문화·대안교육운동가들이 차린 ‘초암’
현실참여 한 방법으로 논술학원 구상… 문화공동체 성격 강하다

▶이윤호 초암C&C 대표

2세대 강사 중에서 가장 먼저 논술시장에 뛰어든 사람은 이윤호 초암C&C 대표다. 81학번인 그는 대학을 3군데나 옮겨다닐 정도로 뜨거운 대학 시절을 보낸 학생운동가이자 문화운동가였다. 이 대표가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도 문화 비평지 <리뷰>를 만들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표가 서울노동자연합 등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 송재희 씨와 함께 시흥에서 초암논술학원의 모태가 된 세림보습학원을 차린 것은 1994년. 학원 주위에 학교라고는 3개밖에 없는 재래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동네 보습학원이었다.

“시흥은 서울에서도 가장 변두리 동네입니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곳이죠. 재래시장 골목에 학원을 열었는데, 첫해에는 초등부·중등부 통틀어 학생이 딱 3명이었어요. 다음해인 1995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들 87명이 등록하며 비로소 학원으로서 틀을 갖췄죠.”

이 대표의 말이다. 시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그는 1999년 방배동으로 학원을 옮긴다. 이때 초암논술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며 본격적으로 논술전문학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 대표는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학원이 딱히 글쓰기 학원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한번 제대로 된 청소년교육을 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문화 비평지를 만들며 일종의 현실참여의 방법으로 학원을 생각했던 것이죠. 청소년들에게도 제대로 된 문화를 누리는 법을 가르쳐 주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초기 멤버인 송재희 선생님도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님과 함께 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를 만든 분이죠. 때문에 시흥에서 방배동으로 옮겨올 무렵인 1997~98년도에 학원을 낼 것인지, 아니면 대안학교를 세울 것인지를 둘러싸고 우리끼리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론은 자칫하면 우리들만의 해방구가 될 수 있는 대안학교보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학원이 낫다는 것이었죠.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들이 하는 노동, 즉 공부로부터 소외된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 보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이 대표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방배동 시절 초암은 학원이라기보다 일종의 공동체 같은 조직이었다.

따뜻했던 방배동 공동체 시절이 모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자기들끼리 ‘아름아리’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말이면 학원으로 놀러 왔어요. 학원 후배들에게 무료 과외도 해 주고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수업이 없는 날에도 학원에 나와 머물렀죠. 시험 때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밤을 새워 자기들끼리 토론하다 가고…. 학부모들도 ‘모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험 때면 학원으로 떡을 해 오셨죠.”

이 대표는 “참 따뜻했던 시절”이라며 “방배동 시절에 오늘의 초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당시 강사들이 초암의 초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송재희·이재륜·성민기·한사영·한경록 등이다. 음악평론가 강현,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한신대 서영채 교수, 숙명여대 권성우 교수 등 이 대표와 함께 문화운동을 하던 이들도 단골 논술 강사로 참여했다.

그러나 초암의 방배동 시절은 채 1년이 못 갔다. 학원 건물이 피라미드 조직에 넘어가는 바람에 쫓겨났던 것이다. 이후 초암은 약 1년간 강사만 있고 학원 건물은 없는 ‘학원 없는 학원’ 형태를 유지했다. 초암 강사들이 ‘초암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강사 네트워크를 만들어 학림학원·청산학원·대치A+학원 등 다른 학원에서 초암의 이름을 건 강의를 개설하는 형식이었다.

“방배동에서 쫓겨날 무렵 ‘우리가 만든 교육기관이 학원이 되는 순간 열정이 떨어지고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고민이 많았죠. 아이들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학원을 안 세우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암이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문을 연 것은 2001년 서울 목동에서였다. 역시 처음에는 강의실 4개의 작은 학원이었다.

“대박이 난 것은 다음해인 2002년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말 입시철에 1,200명의 학생이 몰려왔죠. 갑자기 폭발한 거예요.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죠. 다 돌려보내고 600명 정도를 끌고 입시를 치렀죠.”

초암의 수강생 대부분이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강생이 폭발적으로 몰려든 것이었다. 2002년 목동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다음해 대치동 학원가로 진출한 초암은 대치동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오늘의 명성을 쌓는다. 현재 초암은 목동·대치·반포·노원에서 4개 직영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만 160명에 달한다. 초암 콘텐츠를 공급하는 협력학원도 56곳에 이른다.


04 노동운동가들의 모임 ‘유레카’
연말 논술 시즌 팀 이뤄 논술 강의… 고전 읽기 수업 먹혀 명성

▶장민성 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인 장민성(서울대 84학번)·박홍순(성균관대 82학번) 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되는 386 운동권 출신이다. 초기 멤버인 이해웅(한국외국어대 85학번) 이사 역시 1988년 총학생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2년 자유민주통일(자민통) 사건으로 수배돼 3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이해웅 이사는 “학원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였다”고 말한다. 유레카의 대표강사인 장민성 강사가 논술 강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6년. 강동의 대표적 대형 학원인 청산학원에서였다. 처음에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강의였다.

“논술 강의는 첨삭을 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갑니다. 그래서 알음알음으로 알고 지내던 동료와 후배들을 하나 둘 끌어들이게 됐고, 이렇게 모인 팀이 오늘의 유레카를 만든 박홍순·임승철(82학번)·박규환(강의명 박수림, 86학번)·채기석(89학번) 씨 등입니다.”

이들이 대치동으로 진출한 것은 1998년. 장민성팀의 명성을 듣고 강북까지 넘어오는 학생들이 늘자 아예 대치동으로 진출하기로 했던 것이다. 대치동 진출 이후에도 한동안은 직접 학원을 낸 것이 아니라 다른 학원에 출강하는 형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논술 수업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수능시험이 끝난 후 잠깐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연말에만 반짝 성행하는 시장인 탓에 1년 내내 학원 문을 열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던 것이다.

이처럼 유레카 멤버들은 평소에는 지역 노조·시민단체 등 ‘본업’에 종사하다 연말이면 팀을 이뤄 논술 강의를 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논술시장에 뛰어들어 오늘날의 외형적 조직을 갖춘 것은 1998~2000년이다. 매년 입시 형태가 바뀌면서 논술이 점차 중요한 전형 요소로 부각됐던 것이다.

유레카가 대치동에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데는 서울대가 주최하는 논리·논술경시대회에서 유레카 출신 학생들이 발군의 성적을 올린 것이 주효했다. 2000년대 초반 서울대 주최 경시대회 입상은 곧 서울대 수시전형 합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는 유레카에 가야 한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해웅 이사는 유레카의 성공 비결에 대해 “고전 읽기 중심의 수업이 먹혔다”고 설명한다.

“유레카는 애초부터 고전 원전을 읽히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보통 30~50권의 고전을 중심으로 수업하죠. 학생들이 따라 하기에 재미도 없고 힘든 프로그램이죠. 3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러나 논술시험의 본질을 가르치기 때문에 유레카 출신 학생들은 논술 유형이 바뀌어도 적응력이 강합니다.”


05 해직교수가 만든 ‘박학천논술학원’
문학평론가 출신으로 교육출판사업에 주력하다 논술로 선회

가맹 학원 1,600개를 보유한 ‘박학천논술학원’의 박학천 대표는 학원가에서도 특이한 이력으로 꼽히는 교수 출신이다. 서울대 사대 출신으로 무학여중·서울사대부중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문학평론가로도 등단했다. <문학사상> <실천문학> <한길문학> <문학과 사회> <문학과 비평> 등에 30여 편의 평론을 발표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1990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1호 박사학위를 딴 그는 전주대 국어교육과 전임교수로 임용됐으나 1992년 교수협의회를 구성하려다 해직된다. 그는 한샘출판사로 자리를 옮겨 <독서와 논리> 편집주간 등을 역임하며 교육출판업자로 변신한다. 이 시기 그는 <한샘 수능 골드 시리즈>를 개발해 50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박학천 박학천논술학원 대표

교육출판업자로 성공한 박 대표가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은 1998년. 책을 집필하기 위해 동료 교수·교사·문인 등 60여 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박학천논술연구소’ 개소가 계기가 됐다.

박학천논술교실은 최근 초암·유레카 등이 학원에서 시작해 교육출판업계로 진출하려고 하는 것과 반대로 교육출판업계에서 시작해 학원사업으로 뛰어든 경우다. 이 학원 윤성진 대표강사는 “역삼동에 사무실을 냈을 때만 해도 학원시장에 뛰어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집필을 위한 연구소였습니다. 사무실에 강의실조차 없었죠. 그런데 ‘논술연구소’라는 간판을 보고 논술학원인 줄 알고 찾아오는 분이 많았어요. 우리 생각에도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보면 아무래도 집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찾아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남과 서초동에 강의실 2개를 빌려 수업을 시작했죠.”

그는 “지금까지는 학원보다는 교육출판산업에 주력을 쏟았다”며 “학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구원들이 연구에 방해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운영했다. 지금도 직영 학원은 4개뿐이다. 학원시장에서는 오히려 초암이나 유레카보다 후발주자”라고 말한다.


06 왜 386 운동권인가?
고액과외와 다르다… 사교육 아닌 대중교육에 종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 정글보다 더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남 논술시장을 386 운동권이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압구정 조동기논술학원 최규윤 강사는 “386세대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세대”라며 “아무래도 대학 시절 밤을 새워 토론하고 고민하며 거대담론을 접했던 사람들인 만큼 다른 과목보다 논술, 특히 통합논술에 강점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또 “90년대 학번 강사들도 대학 시절 사회과학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무래도 논술에 강하다”고 덧붙였다.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이해웅 이사 역시 “논술 수업은 선배 한 명이 후배들과 팀을 이뤄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 형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논술시장에 뛰어든 운동권 강사들은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논술학원들이 입시논술에서 벗어나 ‘안정적 선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뛰어든 시장이 초등학교 독서·논술 시장이다. 학원 관계자들은 전체적으로 고등 입시 시장보다 초·중등시장이 훨씬 크다고 분석했다.


논술을 비즈니스 모델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논술 수업 자체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비즈니스 모델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동기 원장 역시 “운동권 사람들의 미덕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신뢰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들을 돈으로 본 적이 없다. 그 부분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한다.

초암 이윤호 대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 욕구와 강사들의 공동체 의식이 성공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고 분석한다. 한 예가 일요일마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열리는 밤샘 세미나다.

초암은 시흥 시절부터 지난 13년간 일요 밤샘 세미나의 전통을 지켜 오고 있다. 강사 전원이 예외없이 참석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토론한다. 초암은 여기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수업 모델을 개발하고, 학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 대표는 “강사를 뽑을 때 밤샘 세미나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다. 할 수 없다면 뽑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만큼 밤샘 세미나는 초암의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세미나가 끝나면 뒤풀이가 이어진다.

그런 만큼 이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 사람들이 학원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윤호 대표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또 “교육은 어떤 교육이든 공적 성격을 갖는다. 차이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다. 정작 입시 위주의 단편적 교육을 하는 것은 학원이 아니라 학교”라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이 대표의 주장.

“초암이 논술시장에 뛰어든 것도 주입식 제도권 교육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논술은 기본적으로 주입식 교육이 안 되거든요. 스스로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논술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우리가 대안교육, 교육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교육시장에 진출하며 고민이 많았지만, 대안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고민을 해결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고민의 산물이 지난해 4월 홍세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소장파 교수 등과 함께 문을 연 교사 아카데미 ‘풀로 엮은 집’이다. 이 대표는 학원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매달 2,000만 원을 ‘풀로 엮은 집’에 지원한다.

조동기 원장 역시 “핵심은 사교육이 아니라 사교육비”라고 지적한다.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자체를 나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비싼 사교육을 통해 부가 세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원 수업이 아니라 고액과외를 문제 삼아야죠. 한 달에 15만 원 남짓 하는 학원 수업은 오히려 대중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7 유명 논술 강사 얼마나 버나?
억대 연봉은 10명 내외… 4~5년차 연봉 6,000만~7,000만 원 선

흔히 ‘논술 강사=억대 연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른바 잘나간다는 논술 강사 중에도 억대 연봉을 많지 않다는 것이 논술학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 강사는 논술시장 전체를 통틀어 10명 내외라는 것. ‘브랜드’ 강사쯤 돼야 억대 연봉을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나 수학 과목과 달리 논술은 대형 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 스타 강사라고 하면 한 번에 적게는 100명, 많게는 300명씩 모아 놓고 대형 강의를 하는데, 논술은 과목의 특성상 한 번에 10명 내외의 수업을 해야 합니다. 많아야 20명을 넘길 수 없어요. 산업으로 치면 저부가가치 산업이죠. 때문에 스타 강사 혹은 억대 연봉이 나오기 힘든 과목입니다.”

유레카 이해웅 이사의 설명이다. 그는 “최근 다른 과목 강사 중에서 논술 강사로 전업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학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4~5년차 논술 강사의 평균연봉은 6,000만~7,000만 원 정도라는 것이 이 바닥의 통설이다.

예외적으로 초암논술아카데미는 4,500만 원 선에서 일종의 임금피크제를 정해 놓고 있다.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학원답게 강사 간 연봉 차이가 너무 크게 날 경우 위화감이 조성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논술 강사의 연봉이 다른 과목에 비해 적은 또 다른 이유는 다른 과목과 달리 논술학원은 입시철에만 반짝 성업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윤호 대표는 “8주간 일해서 1년치를 벌어야 하는 곳이 논술시장이다. 이는 유명 학원, 유명 강사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논술이 중요해졌다고는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 논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 수시전형을 전후해서 혹은 수능시험이 끝나고 8주간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 논술시장에 유독 ‘묻지마 고액과외’가 성행하는 이유다.

이 같은 상황 아래서 학원들이 ‘안정적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눈을 돌린 것이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장이다. 특히 논술학원 입장에서는 초등학생은 ‘방학’(각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내신학원을 제외한 나머지 학원은 거의 한 달씩 수업을 쉰다. 학원 강사들은 이 기간을 ‘방학’이라고 부른다) 없이 연중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학원 관계자들은 전체적으로 고등 입시시장보다 초·중등시장이 훨씬 크다고 분석한다.

초등학교 시장에 가장 먼저 뛰어든 학원은 박학천논술교실이다. 박학천논술연구소는 자체 개발한 초등학생용 교재 및 교육 프로그램을 가맹점 학원에 공급하는 형식으로 이미 2002년에 초등학교 논술시장에 뛰어들었다.

첫해 10개 가맹점으로 시작한 초등부사업은 지난해 불어닥친 논술 붐에 힘입어 지난 한 해에만 가맹점이 1,000개 이상 늘어나 현재 전국적으로 1,600개 가맹점이 성업 중이다.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은 중등부에서 강세를 보인다. 초암도 조만간 초등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논술시장은 이제 걸음마 단계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더 커질 가능성이 농후하는 것이다. 박학천논술학원 윤성진 강사는 “앞으로 3~5년 안에 각 과목에서 주관식 비율이 늘어나면서 결국 모든 과목이 논술 식으로 변화할 것”이라며 “오늘날 교육의 큰 흐름이 논술교육 강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유레카 이해웅 이사도 “수능시험이 처음 실시됐을 때는 모두 어리벙벙했다. 학원들도 수능 체제에 정착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논술시장도 비슷할 것 같다”고 말한다.

대학입시가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며 학원가에 일대 변화가 밀어닥쳤듯, 대학입시가 수능에서 논술 위주로 바뀌면서 학원가에도 3~4년 내 빅뱅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오효림 월간중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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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노력의

 
[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미미한 균열을 옹호함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낯설지만 부정할 수 없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경험이나 의지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순간 -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 꼭 거창하고 강렬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러한 순간은 하찮고 미약하고 야릇하다.

미세한 변화에 주위가 환기되고 흐름이 뒤바뀌고 감각이 동요한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를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순간이 우리를 찾아온다. 말하자면 그것은 ‘미미한 균열’의 순간이다. 바야흐로 치명적인 것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떤가. 마치 달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세계신기록을 향해 경이로운 질주를 펼치고 있는 장거리 육상 주자. 레이스의 3분의 2를 소화한 열여섯 바퀴째에도 그의 힘찬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다.

강인한 체력과 끈기와 집중력. 그는 다른 주자들을 일찌감치 따돌리고 홀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록의 갱신과 우승의 영광이 눈앞에 있다. 그의 코치도,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도, 수많은 관중도 모두 그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질주에 환호한다. 그러나 결승점을 얼마 앞두지 않고 주자는 문득 ‘멈추어 서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 미미한 균열의 순간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주자는 쓰러진다. 사람들은 그가 레이스를 잘못 계산한 것이라고, 불행하게도 부상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처럼 달리고 있던 그는 그저 달리기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을 뿐이다.

“천천히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며 머리를 들자, 아, 키 큰 나무들과 청명한 하늘과 느릿한 구름, 꼬여있는 나무줄기들과 나뭇잎들이 움직이고, 눈을 들어 그는 조화로운 새들의 움직임을 음미한다. 주위에선 아우성이 들려오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분명 원망과 모욕일 테지. 좌절한 그의 코치는 짧은 경주복을 입은 다른 주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볼 테고, 몇 명의 주자는 눈에 띄게 숨을 헐떡이며 코치는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놓는다. 아, 너는 끝내지 못하는구나, 너는 마무리 짓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저 위에선 어느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기묘한 공기 속에서 나무들이 흔들리고, 지금 금발의 선수는 경련과 통증을 겪는다. 내가 저 새를 본 적이 있던가? 아나운서는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을 보고하고, 그의 속도는 빛처럼 일정했지만 멈추어 서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거리 주자 멈추어 서다’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1941년생)는 우루과이 출신의 여성작가로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 스페인으로 망명한 후,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며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여성, 망명 작가, 동성애자, 좌파’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페리 로시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편린’이다.

30편의 짧은 소설들이 담긴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은 국내에 유일하게 발간된 페리 로시의 단행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공허와 소외가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회의하고 분열하는 인간의 모습을

독특하고 상징적인 구조와 간결하고 유려한 문장을 통해 보여준다.

‘틈’이라는 단편 역시 앞서 말한 미미한 균열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한 남자가 문득 멈칫거린다. 남자는 순간 자신의 행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의미와 목적이 갑자기 실종된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걷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계단을 올라가고 있던 중인지 내려가고 있던 중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사소한 망설임은 심각한 소요를 불러일으킨다. 바쁘게 계단을 오르내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멈칫거림으로 충돌을 일으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남자는 공공질서를 교란한 죄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지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가 없다. 심문을 받는 동안 그는 벽에 생긴 작은 틈을 발견한다. 남자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 틈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점점 더 커져간다.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미미한 균열의 순간이 바로 ‘인간의 순간’이다. 니체 식으로 말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무도 그 시스템 자체를 전복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 시스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지만 한편으로는 부조리하고 기괴하고 무모하고 엉뚱하고 모호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미미하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고 확인한다. 그것이 우리가 미미한 균열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다.

표제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은 그러한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페리 로시는 세상 어딘가에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 존재하고, 거기에 쓸모없는 노력을 수집하고 기록하고 관리하는 사람들과 쓸모없는 노력을 열람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상상한다.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에 가면 각기 다른 기구를 장착하고 일곱 번이나 날기를 시도한 남자와 불멸하기를 원했던 여자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20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 부은 남자의 쓸모없는 노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눈을 잘못 맞아 시력을 잃을 때까지 다섯 번이나 타이틀을 되찾으려 했던 권투선수와 현기증이 심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는 곡예사와 자신을 치료해줄 의사를 찾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난쟁이의 쓸모없는 노력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에는 나와 당신, 우리 모두가 심혈을 기울였던 그 수많은 쓸모없는 노력들 역시 빠짐없이 보관되어 있다.

쓸모없는 노력은 그저 쓸모없는 노력일 뿐이다. 그러나 쓸모 있는 노력만으로 일생을 보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쓸모 있는 노력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본질에 다가갈 수는 없다. 하여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란 책을 읽음으로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경이롭고 황홀한 쓸모 있음에 대해 굳이 말하려 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노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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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섹슈얼리티

한국인권뉴스

 

마르크스 "나는 추남이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살 수 있다"

[편 집 부]

(시몬 드 보부아르) “처에게도 창부에게도 성행위는 한 가지 의무이다. 전자는 오직 한 남자와 종신 계약을 맺으며, 후자는 돈을 지불하는 여러 손님과 일시 계약을 맺는다. 전자는 한 남자에 의해 다른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후자는 모두에 의해 각각의 배타적 속박에서 옹호를 받는다.”


[책소개] 노동하는 섹슈얼리티


5.성매매와 자본주의적 일부다처제

오구라 도시마루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학ㆍ철학 수고』에서 “매음은 노동자가 보편적으로 몸을 파는 행위의 어떤 특별한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결코 우리의 개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추남이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살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추남이 아니다.. 화폐 소유자인 나(남자)에게는 화폐의 권력이 바로 개성을 결정한다”고 자본주의에서 시장경제의 왜곡을 적확히 지적했다.

.. 애정을 동반하지 않는 성적인 욕망, 출산을 예정하지 않은 성적인 욕망을 처리하는 시스템은 시장이 담당한다. 그것이 바로 성매매이다. 성매매는 혼인 제도와 상관없이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매매는 근대 사회에서 연애결혼이라는 혼인 제도의 부차적인 하위 조직이며,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을 위해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시스템이다.

포르투나티 "가사 노동과 성매매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 조건"

이러한 성매매의제도화를 냉정하게 평가하면, 자본주의 아래서 가족제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일부일처제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일부다처제로 볼 수 있다. 성매매는 넓은 의미에서 혼인제도 안에 포함된다. 포르투나티가 가사 노동과 더불어 성매매를 노동력 재생산 노동의 조건으로 제시했듯이, 이러한 관점이 전혀 당치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또 보부아르(Beauvoir, Simon de)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인용할 수 있다.

“처에게도 창부에게도 성행위는 한 가지 의무이다. 전자는 오직 한 남자와 종신 계약을 맺으며, 후자는 돈을 지불하는 여러 손님과 일시 계약을 맺는다. 전자는 한 남자에 의해 다른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후자는 모두에 의해 각각의 배타적 속박에서 옹호를 받는다.”

이는 여성의 관점에서 처도 성매매 여성도 똑같이 노동으로서 성행위를 한다는 공통성을 지적한 것인데, 공통성은 이뿐만이 아니다. 남성에게도 처도 성매매 여성도 성적 욕망 충족을 위한 행위의 대상이며, 금전을 동반한 계약 행위라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다른 점은 처는 출산과 육아를 통해 세대 재생산을 담당하고, 그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받으며, 가족을 구성해서 영속적으로 섹슈얼리티와 관계없는 인간관계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연애와 성적인 욕망이 동일시되어 어서 혼인제도 안으로 들어가라는 재촉을 받는 개개인은, 자본주의의 의도와 충첩되면서도 이와 일치하지는 않는 동기를 갖는다.

자본주의는 가족제도(일부일처제)로 '여자 교환' 시스템 숨긴다

성 상품화로 다양한 형태의 성적 욕망을 부단히 환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렇게 해서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라는 가족제도를 내세우면서 그 배후에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특수한 ‘여자 교환’ 시스템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의 은유가 되는 자본과 남성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은밀한 계약이다.

.. 일부다처제는 모든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혼인제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의 남성이 선택하는 혼인제도이다. 성매매 시스템은 처 여러명을 남성에게 할당하는 일부다처제와는 달리, 여러 불특정한 여성이 시장에 의해서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불특정한 남성의 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매매 시스템은 근대 자본주의의 ‘평등’ 이념을 실현한다고 하겠다.

나는 성매매를 장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매매 노동을 선택한 여성들이 그 직업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사실상의 일부다처제 구조 아래서는 모든 여성이 이 구조에서 해방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임금 노동과 실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본의 착취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구라 도시마루]
1951년생, 도야마(富山)대학 교원. 주요 논저로 <지배의 경제학>, , <문화충돌>, <일하는 또는 일하지 않는 페미니즘> 등이 있다.

*한국인권뉴스는 우리사회의 성담론의 지평을 넓히고, 성노동자운동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하여, "성매매는 곧 성노동"이라는 입장에서 "단속"에 대한 저항을 기본으로 엮은 책 "노동하는 섹슈얼리티"(삼인 간)를 시리즈로 발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성매매 종사자들의 기본적 인권은 이들을 노동자로 간주하여 취업의 자유(물론 그만둘 자유도 포함해서)와 거주나 이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지켜지며, 또한 성매매를 성노예제로 보면 결국 성매매라는 직업과 성매매 종사자에게 찍힌 낙인(stigma)을 해소할 수 없다는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본지는 이 책 한국어판에서 'prostitution'을 성매매로, prostitute'를 성매매 종사자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겼다. 편집자) [한국인권뉴스]


※ 이 자료는 한국양성평등연대(평등연대)가 제공합니다. 평등연대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와 부르주아적 급진여성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네트워크입니다. http://cafe.daum.net/gender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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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one Of Us

Anyone Of Us-Gareth Gates

 

I've been letting you down, down
(나는 당신을 실망시켰죠)
Girl I know I've been such a fool
(난 정말 바보였어요)
Giving in to temptation
When I should've played it cool
(좀더 잘 했어야 했을 때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어요)
The situation got out of hand
(이제 어쩔 수 없네요)
I hope you understand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래요)


It can happen to..
Anyone of us, anyone you think of
(이런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수 있죠)
Anyone can fall
(누구나 그럴수 있어요)
Anyone can hurt someone they love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할수 있어요)
Hearts will break
Cause I made a stupid mistake
(저의 바보 같은 실수에 가슴이 아파요)


It can happen to
Anyone of us, say you will forgive me
(이런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죠, 용서해 주세요)
Anyone can fail
(누구나 실수할 수 있죠)
Say you will believe me
(나를 믿는다고 말해줘요)
I can't take my heart will break
Cause I made a stupid mistake
A stupid mistake
(바보 같은 실수로 제마음이 아픈걸 참을 수 없어요)

She was kind of exciting
(그녀는 좀 들떠있었죠)
A little crazy I should've known
(제가 알았어야 했는데)
She must have altered my senses
Cause I offered to walk her home
(내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그녀가 제 마음을 돌렸어야 했어요)
The situation got out of hand
(이제 어쩔 수 없네요)
I hope you understand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래요)


A stupid mistake
(바보 같은 실수)
she means nothing to me
(nothing to me)
(그녀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I swear every word is true
(맹세코 모든 말이 사실이예요)
don't wanna lose you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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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만세!

마술처럼 신비스런 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다.
사랑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자면
처음 순간부터 우연들이 사랑 위에 내려앉아 있어야 한다.
마치 성자 프란스 폰 아시시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새들처럼.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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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하타 먼슬리리뷰

 

세계의 진보매체 1. 아카하타(赤旗), 붉은 깃발

 

첫 번째 순서로는 최근 독도 문제로 우리와 사이가 삐그덕 거리고 있는 이웃 일본의 대표적 좌파 일간지 ‘아카하타(赤旗)‘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중동이라는 별칭이 있듯, 일본에도 이른바 3대 일간지가 있는데 아사히, 요미우리, 산케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산케이는 뭐 조선일보의 자매 신문(--;;)으로 불리는 신문이고 미디어재벌이자 프로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회사인 요미우리 또한 머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나마 아사히가 자유주의적인 신문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아이구 아카하타 이야기 한다 해놓고 딴 신문들 이야기를 잠깐 했네요. 하여튼 이른바 일본의 삼대일간지에도 못미치고 니혼게이자이 같은 거대 신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아카하타는 만만찮은 규모와 영향력을 자랑하는 신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카하타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로 창간됐습니다만 편집권은 완전히 독립되어 움직이는 매체입니다. 한 때는 아카하타 구독료로 일본 공산당이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있는 신문이었구요.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있는 1980년에는 유료 정기구독자 수가 355만에 달했을 정도라고 하는 군요. 최근에는 많이 쪼그라 들어 200만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아카하타는 일본공산당이 창당한지 6년이 지난 1928년에 창간됐습니다. 아카하타가 왜 아카하타가 되었는지 잠깐 유래에 대해 말씀드릴께요. 일본에서는 1898년 사회주의 연구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연구회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해산됐지만 후일 사회민주당으로 전화했습니다. 1906년 창당된 일본사회당은 같은 해 동경시 정부가 전기요금을 인상한 것에 대항해 대대적 민중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기동대와 대규모 충돌을 벌였고 이듬해인 1907년 대규모의 총파업을 진행해, 결국 일본군이 출동해 이들을 진압하기에 이르렀죠.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다시 사회당을 해산시키고 당원들을 대규모로 구속시켰습니다. 이 때 구속된 사회당원들이 출소하면서 붉은 깃발(적기, 일본어로 아카하타죠)를 들고 행진하는 것을 다시 경찰이 공격해 또 당원들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그 유명한 아카하타(赤旗)사건이고 그 이름은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명인 붉은 깃발, 즉 아카하타(赤旗)로 남은 것입니다. 헥헥..아휴 설명하느라 힘들다..물 한 잔만 마시구 계속 할께요.


이런 역사 속에서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다”라는 감동적인 창간사와 함께 1928년 7월 15일 제 1호가 발간됐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탓이 크겠지만 아카하타와 우리나라는 관계가 깊습니다. 특히 식민지배 당시에 아카하타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몸소 실현한 매체였죠.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엠비씨 PD 수첩에서도 다뤄진 이 인물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난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죠. 여담입니다만 일본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작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됐는데 우리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는 이 보다 더 늦은 올해 훈장이 추서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죠.


하여튼 후세는1902년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부터 일찌감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구요. 2·8독립선언 사건으로 검거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 유학생의 변론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운동 지원에 나섭니다.


그는 아카하타 창간호에서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면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활동을 쭉 펼쳐 어려움을 겪었구요.


1931년 3월 7일 아카하타는 “조선, 대만 등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합니다. 한달 후인 4월 일본 공산당 정치국 테제 초안에는 그 문구가 그대로 슬로건으로 채택되고 일본공산당은 ‘민족부’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민족부는 조선과 대만 내의 공산주의세력과의 연락유지, 일본내에 거주하는 조선, 대만인의 조직화가 주된 목적이다는군요.


자 그럼 1931년 8월 30일자 아카하타 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볼까요?


“일본 내에 있는 조선인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중대한 임무다.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투쟁은 일본프롤레타리아가 해야 할 책임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직장에서 조선인 일본인 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조직했고 또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충분치 못하다. 조선인노동자에 가해지는 비인간적 학대에 대해, 노예적 대우에 대해 그리고 조선인노동자 및 혁명적 인텔리겐챠에 가해지는 야만적 취급과 고문 등에 대해 강력한 반대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치욕이다. 조선인노동자 대중을 공산주의측에 획득할 것, 反일본 제국주의의 강한 힘으로 조직할 것-이것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및 조선공산주의자의 임무이다."


이건 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현재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나온 문건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군요^^


일본제국주의가 강고해지면서 아카하타는 엄청난 탄압을 겪고 폐간되기도 하죠. 2차대전 종전 이후에도 못말리는 반공주의자인 맥아더 군정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겪고 정간, 편집진 구속을 밥먹듯이 당합니다. 전공투 시절의 아카하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재밌는 가쉽 거리 하나 알려드릴께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좋아하시는 분들 많을텐데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데뷔가 바로 아카하타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을 통해 이뤄졌답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사회주의자인 하야오 감독은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정치 하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이요)을 전공했다는군요. 대학시절 그는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라는 만화를 연재하면서 애니메이션과의 행복한 만남을 시작했답니다. 물론 저는 ‘사막의 백성’을 본적은 없습니다만--;; 주 내용은 맑시즘과 공상과학이 결부된 것이었다는구요.(상상들 해보세요. 어떤 내용일지)


자 이것으로 뉴스메이커 13호가 드리는 ‘세계의 진보매체’ 1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때요? 재밌으셨나요? 아니면 너무 길어서 혹은 딱딱해서 재미가 없으셨나요? 소개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먹고 산답니다. 제가 굶어죽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 많이 보내주셈!


---- 새 민중언론 준비 블로그에서 펌 


세계의 진보매체 2. Monthly Review | 읽을거리 2005/04/04 21:02 

http://blog.naver.com/plsong/11554949

안녕하세요. 뉴스메이커 13호입니다. 세계의 진보매체 그 두 번째 순서로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 뵙게 됐습니다.(BGM은 두구두구두구둥-작은 북 트레몰로) 지난 24일 첫 번째 순서로 소개해드린  ‘아카하타’는 재밌게들 보셨나요? 그럭저럭 제 주위에서는 반응들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여러분들께서 겨우 리플 6개, 트랙백 하나라는 양식 밖에 안주셔서, 여러분의 사랑 아니 리플과 트랙벅을 먹고 자라는 저 뉴스메이커 13호는 굶어 죽을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ㅠㅠ



에휴 잡설이 길었네--;; 하여튼 두 번째 순서로 어떤 매체를 소개해드릴까 고민하다가 어젯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베네주엘라 볼리바르 혁명의 주력군 역할을 했던 매체를 소개해달라는 주문들도 있었고 세계의 진보매체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로동신문’을 빼놓을 수 있냐는 딴지 아닌 딴지도 있었습니다. 결국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는 뉴스메이커들의 의견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두루 들어 제 마음대로 결정했습니다 ㅋㅋ



첫 번째 순서로는 좀 대중적 일간지인 아카하타를 소개해드렸으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매체를 소개해드리는게 어떨까 싶네요. 오늘 소개드릴 매체는 해리 매그도프와 존 벨라미 포스터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는 미국의 월간지 Monthly Review(이하 먼쓸리 리뷰)되겠습니다.



모름지기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영웅적 개인을 기리기 보다는 계급의 힘을 믿는 편이고, 또 그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들도 하는 듯 합니다만 1818년 맑스가 태어난 이후 계급 운동이라는 은하수 속에는 수많은 붉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앗 그렇다고 제가 ‘한 별 을 우러러 봅니다’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던가 하는건 절대 아닙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그런 점에서 볼때 먼쓸리 리뷰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폴 스위지라는 붉은 별 하나를 빼먹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지난 해 10월 자끄 데리다가 사망했을때 미디어참세상을 보니 Peyo라는 기자가 오비츄어리를 썼더군요. 전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잠깐 인용해 볼께요. “에드워드 사이드, 피에르 부르디외, 폴 스위지 그리고 자끄 데리다의 죽음과 함께 이제 20세기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전 Peyo가 쓰는 기사가 못마땅할 때가 많은 편이지만 윗 문장 하나 만큼은 잘 뽑았다 싶더라구요^^ 여튼, Peyo가 말했듯이 1910년에 태어나 2004년에 영면한 폴 스위지는 20세기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한 사람이고 오늘 소개드리는 먼쓸리 리뷰를 창간한 사람입니다.



먼쓸리 리뷰는 1949년 폴 스위지에 의해 창간됐습니다. 사실 창간 당시나 지금이나 먼쓸리 리뷰의 발행부수는 만부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간지와 월간지의 차이라고 한다손 치더라도 첫 번째 순서에 소개드린 아카하타가 지금도 이백만부 가까이 발행하고 있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지요. 그러나 이 잡지의 권위, 영향력은 일만이라는 발행부수와는 무관합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자본주의 발달이론-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원리 라는 이 시대의 클래식을 혼자 써서 발간한 스위지는(흑 스위지는 서른두살에 이런 책을 썼는데 nesmaker13호는 지금 뭐하고있는지 ㅠㅠ 만 서른 두 살 되려면 아직 좀 남았다는 걸 상기하며 자위하겠습니다)



물론 스위지 혼자 먼쓸리 리뷰를 만든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땀과 헌신이 함께 했지만 먼쓸리 리뷰의 창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리오 휴버만입니다.



요즘은 이 책 잘 안 읽는 모양이지만 리오 휴버만의 미국사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은 정말 유명한 책이죠. 이차대전 중에는 (미국)전국해운노조의 대외협력, 교육국장직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던 리오 휴버만은 1968년 사망할때까지 스위지와 함께 공동 발행인으로 먼쓸리 리뷰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49년 매커시즘이 슬슬 몰아쳐오기 시작할 즈음에 세상에 나온 먼쓸리 리뷰 창간호에는 기념비적인 아티클이 실려있습니다.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쓴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이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죠. 여담이지만 올해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지 딱 백년이 되는 해라 여기저기서 아인슈타인 열풍이 불고 있는데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다시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새 민중언론에서 한 번 다뤄볼까요?



일단 이 기념비적 아티클의 몇 부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몇가지 번역본이 있지만 진보넷 블로거 marishin님의 신뢰할 만한 번역본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해도 되는 걸까?”라고 묻고 바로 답합니다. “나는 몇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겠죠?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밤, 철야하며 라인을 타고 있는 노동자들도,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의사들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단들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상의 절반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여성활동가들도 우리, 인민 모두는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당당히 표할 수 있을겝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 처럼.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지식의 관점과 윤리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어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우직했던 1949년의 자본주의사회를 ‘경제적 무정부상태’라니...만일 아인슈타인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약탈적금융경제를 본다면 허허 과연 뭐라 말할지 궁금하군요.



자 좀 더 들여다 보죠.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중략-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아티클은 아주 멋진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첫 번째 순서에서 소개해드렸던 아카하타의 창간하의 한구절 “아카하타는 여러분들 자신의 기관지이다”에 맞먹을 만합니다.



“왜 사회주의인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문장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뭉클하면서 newsmaker13호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 옵니다. 우리가 만드는 새 민중언론도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넘어 정말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간된 먼쓸리 리뷰는 아카하타가 그랬던 것 처럼 파시즘적 정권에 탄압 받았습니다. 공동 발행인 리오 휴버만은 1952년 매카시와 FBI의 에드가 후버가 함께 이끈 미국의회의 ‘비미국적 활동에 관한 하원 청문회’에 소환되 사상검증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폴 스위지는 1953년 뉴햄프셔 검찰에 소환되 투옥당할 뻔 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이 들은 자신들의 활동과 발언, 잡지 출간에 대한 추궁에 답변을 전면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당시 먼쓸리 리뷰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고 하니, 겉표지가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발송하고 기고자들도 실명을 사용하지 못했을 정도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는 것은 세상이 좋아져서라기 보다는 우리가 ‘저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해서 일까요?



이후 리오 휴버만 외에 폴 바란, 해리 매그도프등이 스위지와 함께 먼쓸리 리뷰를 발행하고 편집했습니다. 이 중에 해리 매그도프는 91세의 나이에도 현재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이 잡지의 발행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또 있으니 그는 바로 해리 브레이브만이죠. ‘노동과 독점자본’의 저자 말입니다. 철강 노동자로 일하며 노조조직책을 맡기도 했었던 해리 브레이브만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책임지며 로자 룩셈부르크, 부하린, 콜쉬등의 사회주의 고전 뿐 아니라 혁명 쿠바에 관한 책들, 사미르 아민의 책들을 발굴해 출간했습니다.



1999년 5월 크리스토퍼 펠프스는 자신들의 50년 역사를 자축하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더군요. “자본주의와 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이 여전히 깊이 있는 사회 재건설의 절박한 필요성을 야기하기 때문에, 먼쓸리 리뷰가 지난 5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다가오는 새 천년에도 전세계 해방투쟁과 연대하는 미국 맑스주의의 깃대로 계속 봉사할 것이라고 기대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가 있다”

이 글에서 펠프스는 유료 정기구독 부수가 “작년에는(1998년)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인 5795부에 달했다”고 자랑하면서--;; “이런 변화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잡지는 1998년 표지와 판형, 글꼴을 모두 키움으로써 역사상 첫 편집개편을 시도했다”라과 말하기도 했습니다.(허걱...49년 만에 첫 편집 개편이라니 ㅠㅠ) 여튼 먼쓸리 리뷰는 요즘도 여전합니다. 94살 먹은 해리 매그도프는 존 벨라미 포스터와 함께 “먼쓸리 리뷰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 이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우익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직면해 사회안정망위기의 본질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대응해왔다”로 자신있게 시작되는 권두언을 이 달에도 내놓았더군요.



먼쓸리 리뷰는 2000년에는 네그리와 하트가 지은 ‘제국’을 두고 특집판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발리바르, 아리기, 지젝, 캘리니코스의 현란한 논쟁들이 이 특집판을 장식했더랬죠.



아이고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포스팅을 하려니 newsmaker13호의 좀이 막 쑤시는군요. 슬슬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늘 역시 가쉽 아닌 가쉽을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까 해리 브레이브만 이야기를 하면서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잠깐 언급했는데요. 먼쓸리 리뷰 출판부, 즉 먼쓸리 리뷰 프레스는 어쩌면 먼쓸리 리뷰 자체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릅니다. (돈을 더 버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까 몇몇 저작들을 언급했지만 좀 더 자세히 소개해드릴께요. 고전들 외에도 체 게바라의 저서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만델의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 알뛰세의 ‘레닌과 철학’ 사미르 아민의 ‘세계 수준의 자본축적’ E P 톰슨의 ‘이론의 빈곤’ 등(아이고 많기도 하다)등이 모두 먼쓸리 리뷰 프레스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해리 브레이브만의 ‘노동과 독점자본’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우리에게 더 긴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아리랑’을 출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아니구요--;; 김산의 아리랑, 님 웨일즈가 쓴 바로 그 책, 우리나라에선 1984년인가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바로 그 ‘아리랑’ 말입니다. 사실 ‘아리랑’을 초간 한 곳은 먼쓸리 리뷰 프레스가 아니지만 50년이 넘게 꾸준하게 발간하고 있는 곳은 바로 먼쓸리 리뷰 프레스입니다. 일본의 나름대로 진보적인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 에서는 먼쓸리 리뷰 프레스 판 아리랑을 번역해 참회의 필독서로 ‘세계의 명작 100선’에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아 참, 역시 진보넷 블로거이신 홍실이 님께서 얼마전 보스턴에서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에 다녀오신 소식을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홍실이 님이 전해주신 스위지 1주기 추모 모임의 한 장면을 들여다 볼까요? “고인이 93세에 돌아가셨다 하니 그 친구, 동지들이라는 양반들이 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 할배들.... 한 할배 나와서 말씀하시길 ‘내가 그를 를 처음 만난 건 1943년...어쩌구....’  이크... 거의 내가 제일 젊은이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갔는고....  지난번 하워드 진 강연 때도 젊은이들은 안 뵈고 나이 지긋한 양반들만 줄줄이 앉아 있었는데....”



에휴 미국 꼴이 요새 요 모양 요 꼬라지인 갑네요. 스위지도 저 세상으로 가고 이제 미국에는 할배 둘만(하워드 진, 놈  촘스키 -이들도 먼쓸리 리뷰의 단골 필진들이죠) 남아 있나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아 참, 홍실이님은 곧 새 민중언론의 해외통신원으로 맹활약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계시니 많이들 기대하세요^^ 절찬 개봉박두입니다요.



휴~ 이것으로 ‘세계의 민중언론’ 2회- 먼쓸리 리뷰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꼬부랑 글씨로 된 사람 이름들 많이 나와서 헷갈리지는 않으셨나요? 혹 “야 neswmaker13호 너는 니 글에 언급한 사람들 책들은 다 읽고 야부리 푸는 거냐?”고 질문하신다면 전 당당하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도 영어로 말이죠. “No Comment!" ㅋㅋㅋ



자꾸 말씀드려서 지겨우시겠지만 저는 여러분의 리플, 트랙백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발 일용을 넘어 이용, 삼용 할 수 있도록 뜨거운 관심 기다릴께요.



---- 새 민중언론 준비 블로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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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운동을 복싱처럼 할 수 있을까?

 

 

프로복싱의 진화 혹은 멸종

[스포츠2.0 2006-09-01 17:31]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 아직 세계챔피언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사진 한상무)

“세계챔피언이요.” 1986년 한국갤럽이 전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장래의 꿈을 조사했을 때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은 서슴지 않고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닮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는 아이들의 입에서 ‘박종팔’ ‘유명우’ ‘장정구’ 등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내아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뿌듯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아이들과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청소년들도 꽤 많았다. 그들 중에 김종성(38,회사원)씨도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가족의 미래에 관해서는 대학교 4학년생만큼이나 고민이 많았던 김씨는 세계챔피언이 돼 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좌판에서 생선을 팔던 어머니께 큰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 “당시 프로복싱은 지금의 로또와 같았다. 한 방에 인생역전이 가능했으니까.” 김씨의 말대로 당시 프로복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부를 쌓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이 지름길에 들어서고자 많은 청년들이 복싱에 입문했고 복싱체육관은 그들이 토해내는 열기로 뜨거웠다. 결과도 좋았다.

1966년 김기수가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15회 판정으로 이기며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이후 한국은 유제두, 홍수환, 김태식, 박찬희 등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다. 비단 세계챔피언만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은 세계챔피언보다 훨씬 더 많았다.

1986년 세계복싱평의회(WBC)산하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챔피언은 모두 15명. 그 가운데 한국인챔피언이 무려 10명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태국, 필리핀에서는 웬만한 세계챔피언에 비해 더 후한 대접을 받곤 했다. 슈퍼웰터급 동양챔피언 백인철같은 선수는 WBA밴텀급 챔피언 박찬영 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액수의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복싱의 맹주였으며 세계복싱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호였다. 다른 나라 복서들에게 존경을 요구하고 두려움을 주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6년.

 

복싱을 모르는 세대

“세계챔피언? 이탈리아요.” 김씨의 큰 아들 재연(11)은 세계챔피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탈리아’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현재 세계챔피언이 누군지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이번 월드컵 우승국이 어딘지 아느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세계챔피언이라는 단어는 복싱이 아니라 축구에 쓰여야 제격이었다. 게다가 복싱이 어떤 스포츠인지 조차도 모르는 눈치였다.

“요즘 아이들은 복싱이 뭔지도 몰라요. 20년 전과는 천지차이죠.” 김씨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20년 전과 비교해 천지차이로 바뀐 건 복싱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아니다. 바로 복싱 자체가 천지차이로 변했다.

한때 세계챔피언을 동시에 5명까지 보유했던 한국프로복싱은 단 한명의 세계챔피언도 보유하지 못한 무관의 제왕이 된 지 오래다. 김씨가 가족들의 미래를 책임져 줄 유일한 희망으로 믿었던 복싱은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의 지름길로 작용하지 않는다. 복싱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에서도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챔피언 한명 없으니 당연한 일이죠.” 복싱마니아라고 자처하는 김씨가 아쉬운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김씨의 진단은 옳았다. 가뜩이나 인기 없는 복싱에 챔피언 한명 없으니 그 인기가 회복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김씨가 모르는 게 있었다. 아직 한국에는 챔피언이 있다는 사실을. 비록 세계챔피언은 아니지만 벌써 3차 방어전까지 치른 동양챔피언이 있었던 것이다.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정범(류명우 범진체육관)이 그 주인공이다.

 

유일한 동양챔피언, 김정범

8월 20일 김정범을 만나기 위해 서울 구로구에 있는 ‘류명우 범진체육관’을 찾았다. 그러나 체육관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양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는 체육관 정도라면, 게다가 22년째 같은 건물에 있다면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그 위치가 꽤 알려졌을 법도 한데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체육관으로 몇번이나 전화를 건 후에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체육관은 얼핏 보기에도 지은 지 30년은 더 돼 보이는 4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에 설치된 전등은 숨이 끊길 듯 작은 빛만을 토해 내고 있어 조심스레 발을 내딛지 않으면 복도를 가득 적시고 있는 물 때문에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럽게 4층까지 올라가 체육관 문을 열었지만 요란한 줄넘기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예상했던 기대와 달리 안은 매우 조용했다. 게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청소기가 그 모든 소리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때 두 사내가 다가왔다. 한 사내는 40대 후반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이었고 그 옆에 있는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사내는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김정범을 찾아온 사람들인가?”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의 사내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류명우 범진체육관의 관장 김정표(48)씨였다. 김관장은 옆에 있는 청년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선수가 김정범이다.” 김관장의 소개를 받은 청년이 예의를 갖추려는 듯 선글라스를 벗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눈두덩이 상처에 꿰맨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기 끝난 지 얼마 안돼서….” 김정범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김정범은 8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동양타이틀 3차 방어전에서 도전자 야마모토 다이고로(29)를 7회 1분49초에 TKO로 이겼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니 멍이 남아 있을 만도 했다.

“정범이는 일본킬러다.” 김관장이 전적표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범이는 2004년에 당시 챔피언이었던 사다케 마사가즈(일본)를 오사카에서 2회 KO로 이기면서 동양챔피언이 됐다. 그 후로 일본 시즈오카에서 가시와기를 상대로 1차 방어에 성공했고 이번 3차 방어전에서 다시 일본에서 일본선수를 때려눕혔다. 역대 챔피언들을 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김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복싱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홈어드벤티지가 승부를 크게 좌우하는 스포츠다. 복싱인들은 ‘안방에서 경기하면 잽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정경기는 그 반대다. 1975년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치전 이후 일본 원정경기는 39전 13승1무25패를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듯 완벽한 열세다. 하지만 김정범에게 이같은 기록은 낡은 표어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걸 보라. 거기다 지금까지 모두 KO로 이겼다.” 김관장이 다시 한번 전적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김정범의 통산전적은 29전 25승 1무 3패. 25승 가운데 KO승이 21차례다. 사다케를 KO로 꺾고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3차 방어전까지 모두 KO승을 거뒀다. 역대 동양챔피언과 비교해 볼 때 최상의 기록이다. 이상호 MBC 복싱 해설가는 “김정범은 화려한 테크닉과 가공할 펀치력도 돋보이지만 프로복서로서 쇼맨십도 갖춘 선수다. 상품성이 충분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품성이 좋은 동양챔피언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과거 동양챔피언이라면 웬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어째서 복싱인들 조차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일까?

“이유야 간단하다. TV에 나온 적이 거의 없으니까.” 김관장은 여기서부터 한국프로복싱의 암담한 현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명의 동양챔피언

과거 프로복싱 중계는 스포츠 종목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효자 프로그램이었다. 광고도 많이 붙었다. 세계타이틀전뿐만 아니라 동양타이틀전만 열려도 방송국들은 중계권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이곤 했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70~80년대에도 타이틀전만으로 흥행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정작 수익을 안겨준 건 방송이었다. 당시 중계권료가 1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한보영 MBC-ESPN 해설위원의 회고다.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른바 ‘김현치 시절(트레이너였던 김현치가 프로모터로 나서 활동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사들도 타이틀전을 중계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지만 경기를 유치하려는 지방간 경쟁도 치열했다. 각 지방에서는 서로 타이틀전을 끌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였고 경기를 주관하는 프로모터들은 지역안배까지 고려해야 했다. 타이틀전만 열리면 스폰서는 쉽게 붙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하는 시대다” 한위원의 설명이다. 방송국에 돈을 줘야 한다니?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복싱을 누가 방송해 주겠는가. 세상은 변했다. 세계챔피언이 많은 태국에서조차 방송국에 돈을 주고 방송을 부탁하는 실정이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복싱에서 공격하다 지치면 1분 안에 회복한다. 그러나 맞다 지치면 10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범의 훈련은 실전보다 치열하다.(사진 한상무)

사실 지상파 방송사에서 프로복싱을 중계하지 않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세계타이틀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프로복싱경기는 스포츠 케이블방송을 통해 중계되든지 아니면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세계타이틀전 역시 공중파 방송사로서는 달가운 프로그램이 아니다. “2000년 들어 세계타이틀전의 시청률은 거의 바닥이다. 이를 방송하느니 차라리 주말연속극을 재방송하는 게 시청률 면에서 낫다.” 한 지상파 방송편성자는 예전의 프로복싱 열기는 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실제로 세계타이틀 매치를 심야에 녹화방송 하려고 한 적이 있다. 열렬 복싱팬들의 항의가 빗발쳐 계획을 철회했지만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지인진(34,대원체육관)이 지난 1월 29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도전자 고시모토 다게시와(일본)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 자연스럽게 프로복싱 중계를 하지 않게 됐다.

세계타이틀전도 중계를 마다하는 상황에 동양타이틀전을 중계하겠다는 방송사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한국 유일의 동양챔피언 김정범을 복싱팬들 조차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방송중계의 문제는 팬들이 김종범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 중계가 되지 않는 마당에 어느 지역에서 타이틀전을 유치하겠다고 나서고 누가 스폰서가 돼주겠다고 손을 들겠는가. 이런 상황에 어디서 대전료를 만들 수 있겠나. 그러니까 국내선수들이 질 각오를 하고 해외로 나가 타이틀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위원은 덧붙여 “지인진이 일본에서 경기에 이기고도 판정패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파링 파트너가 없다

김정범은 1979년생이다. 1996년에 프로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복싱경력 11년 째다. 과거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김정범은 백전노장이다. 대개의 선배 복서들은 15전 안에 동양챔피언에 오르고 20전 안에 세계챔피언이 됐다. 2004년 26전 만에 동양챔피언에 오른 김정범은 선배 챔피언들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은 경우다. 게다가 현재 WBC 세계랭킹 14위라 언제 세계타이틀전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가장 다급한 사람은 김관장이다. “나이도 있으니까 2년 안에 세계타이틀에 도전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시급한 문제는 세계타이틀전이 아니다. 세계타이틀에 도전하려면 그 만큼 많은 스파링을 벌이며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

“선수가 없다. 정범이의 경우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가 번번이 신세를 지고 있다. 거기 가서도 2~3명씩 묶어서 스파링을 해야 한다. 4회전 이상 뛰어 본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3분 3회전씩 3명의 선수를 상대로 스파링을 하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과거 같으면 체육관 안에서 스파링파트너 조달이 가능했고 다양한 선수들을 상대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군체육부대가 유일하다. 아마추어복서들이 있는 대학은 스파링파트너로 응해 주지 않는다. 그나마 국내 최고의 복싱체육관으로 불리는 ‘유명우 범진체육관’에서조차 실제 선수로 뛰는 복서는 5명에 불과하다.

이 중 복싱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는 고등학생을 제외하고 김관장의 말대로 4회전 이상을 뛴 선수를 꼽으라면 김정범을 제외하고 2명뿐이다. 하지만 이들도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 김정범이 유일한 프로복서다. 국군체육부대가 아니었으면 김정범의 유일한 스파링 파트너는 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 프로 복서가 있는 체육관은 전국에서 5개 가량이다. 그런데 그 체육관에서도 선수가 없다고 걱정이다.” 김관장의 한숨이 짙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프로복싱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개점휴업 중이다. 12회전 경기는 고사하고 4회전 경기도 전무한 실정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게 한국프로복싱의 현실이다. 초보선수들은 4회전부터 착실히 경험을 쌓고 올라와야 한다. 그러나 경기가 없으니 좋은 선수들이 나올 리 없다.”

그러나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취재 전 조사해 본 결과 김관장의 말과는 달리 현재 복싱계는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복싱체육관은 밀려드는 수강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제 1986년 3,543명이던 아마추어 등록선수가 한때 1,824명으로 떨어졌다가 최근 들어 2,500명대로 증가한 것을 봐도 복싱의 침체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한국권투위원회(KBC) 등록선수 가운데 10회 이상 경기를 할 수 있는 A급 선수가 2005년 26명으로 줄었다가 올해 다시 31명으로 증가한 것도 김관장의 말과는 다르다. 지나친 우려가 아닌가?

“현재 복싱은 헝그리스포츠에서 생활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김관장의 평가다.

 

생활스포츠로 변신중인 복싱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변정일 복싱클럽(관장 변정일)’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복싱체육관이다. 300평의 체육관 규모도 입이 벌어질 정도지만 회원수가 400명이 넘는다. 체계적인 훈련법과 세계챔피언 출신의 관장이 운영한다는 소문 때문에 요즘에도 신입회원이 끊이지 않는다.

‘변정일 복싱클럽’의 박진환 코치에 따르면 유사 체육관이 하루에도 두 세개씩 증가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 복싱클럽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의 복싱체육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피트니스클럽에 가깝다.

“회원수 400여명 가운데 여자회원이 40%에 이른다. 운동 목적도 다이어트와 건강 증진에 쏠려 있다. 남자회원들도 마찬가지다. 프로복서는 한 사람도 없다.”

출산 후 살을 빼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는 김관(26,주부)씨는 “8㎏정도 다이어트를 했다”며 “진짜 복서들처럼 원투스트레이트 뻗으면서 신나게 땀을 흘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는 ‘유명우 범진체육관’도 다르지 않다. 김관장은 하루에 30~40명 가량의 관원들이 나오지만 복싱을 단순 취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고 밝혔다.

박코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복싱다이어트 열풍은 앞으로도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며 “대신 프로복싱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살아있는 스포츠 ‘복싱’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김정범은 자신이 처한 외부환경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희망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며 자비로 만든 50만 원짜리 챔피언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세계챔피언의 꿈만을 이야기했다.

한국권투위원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 한위원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파벌 싸움으로 일관하던 한국권투위원회도 새로운 회장단이 구성되면서 점차 변해가고 있다. 한국프로복싱이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확실하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노력한다면 예전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유일한 스포츠인 복싱의 명맥은 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며 “장래성이 있는 선수들을 집중 육성하고 이들을 슈퍼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김종범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종범에게 물었다. 일년에 한,두번 벌어지는 동양타이틀전으로 손에 쥐는 돈은 2천만 원에 불과한데 어째서 복싱을 고집하느냐고. 먹고 싶은 것 억누르고 가고 싶은 곳 참으면서 하루 종일 복싱에 전념해도 미래가 불투명한데 무엇 때문에 글러브를 손에서 놓지 않느냐고. 과거의 헝그리스포츠 복싱이 21세기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남들처럼 차라리 인기도 좋고 대우도 좋은 ‘K-1’이나 ‘프라이드FC’와 같은 이종격투기로 진출하지 그러느냐고.

김정범은 링 위에 오르기 전 붕대로 손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년에 한,두번 정도 하는 이종격투기 뛰어 봤자 얼마 벌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복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세계챔피언만 돼도 몇 십억 원을 벌 수 있다.”

고작 그것 때문인가? 김정범은 잠시 침묵하다 링 위에 오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링 위에 오르면 심장이 뛴다. 이 기분을 돈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마도 김정범의 심장이 왼쪽에서 뛰는 한 그가 링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처럼.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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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 임진강 ♪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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