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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
Socio-political Themes in The Smurfs :: J. Marc Schmidt


1) 서론

다음은 80년대 대부분의 시기동안 방송되었던 Peyo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한 논설적인 분석이다. 즉, 내가 "개구쟁이 스머프-이하 스머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알아챈 사회-정치학적인 경향을 분석한 글이다.

"스머프"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만화이고 어린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만화나 티비 프로그램과는 달리 논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머프"는 몇몇 등장인물들의 모험보다는 한 사회집단과 사회 내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작용, 사회와 외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나는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가 기독교에 대한 우화이듯이 "스머프"는 정치적인 우화라고 믿는다.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그러나 나는 "스머프"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복적인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당시의 단지 플라스틱 완구류의 판매를 위해 제작되었었던 캐릭터 만화('toyetic' cartoons)의 범람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든, 이 에세이는 "스머프"에 대한 굉장한 찬양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냉전의 시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을 보여주었는가? "스머프"는 은유(metaphor)와 동화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정치적인 주제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을 짧게 분석한 후, 페미니즘과 동성애의 관점 또한 다뤄보려고 한다. 그러나 에세이의 주된 관심은 "스머프"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우화라는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토피아(Marxist Utopia)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하다'는 단어가 '사유하다'는 개념일 경우)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일체는 그 성분들의 집합보다 더 위대하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우리에게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imagine no possessions)' 요구한다. 스머프 마을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자본이 생산 수단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집단이 소유하고 조정하며 고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파파 스머프, 가가멜, 발타자르 등의 인물들이 실행하는 마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종교에서 그러하듯 초현실적인 기호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며,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시리즈 중에서 '대왕 스머프'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탐욕스런 왕들(그리고 자본가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착취하는 사악하고 압제적인 정부와 마르크스가 공식화한 선하고 인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 모형 간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충돌에 대한 예시이다. 이 이야기에서 파파 스머프가 없는 사이에 왕이 된 똘똘이 스머프를 전복시키기 위해 스머프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의 질서는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나타내는 파파 스머프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스머프는 작고 희귀하며 이를테면 사슴과 같이 먹기 좋은 음식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이러한 가가멜의 욕구는 비정상적이다. 그것은 실베스타(Sylvester)가 골프공 크기의 트위티(Tweety Bird)를 잡아먹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유사하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구 사회가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에게 포위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멸망을 획책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바로 가가멜이 스머프를 잡아서 하고자 했던 두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인 초자본가인 그는 평등이나 선 보다는 자신의 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아담 스미스식의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가가멜에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신랄하며 근본적으로 공허한 인간이다. 그의 삶은 부와 재산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리적인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에 대한 확증적인 실례이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가가멜은 자신의 집과 그 안의 연금술 도구라는 자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스머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한다. 가가멜의 집에 스머프들과 같은 정치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더 우수한 신체,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동등한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에 의하면 남성은 그의 직업에 의해 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반면 여성은 '여성'으로 규정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희생자 명단은 종종 "교사 한 명, 배관공 한 명, 여성 한 명" 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스머페트(Smurfette)는 스머프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성 또는 진짜 스머프들처럼 직업이나 개성에 의해서가 아닌 성(性)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性) 때문에 사회의 실재적인 구성원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화 속에서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접미사 'ette' 또한 스머페트가 남성들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두 번째 성(性)인 것이다.

앞서 나는 마을의 모든 스머프들은 평등하다고 단언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두 남성 뿐이었고, 스머페트의 개입으로 가부장적인 질서가 위협받지도 않았다. 따라서 스머페트는 정치적으로는 여타의 스머프들과 평등한 관계지만,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지 않으며, 물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스머페트는 제작자가 고맙게도 그녀를 머리가 텅 빈 허튼 계집애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은 예쁘게 보이며 주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실히 파파 스머프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는 다소 똑똑하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대상(object)'이다. 그녀는 대상이며, 남성들은 주체이다. 그들은 능동적이지만,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에게는 유방이 없다.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창조물로 삶을 시작했다. 자본가인 가가멜은 당연히 그녀를 만들고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으며 그에게 돈을 벌게 해줄 상품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출산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정한다. 스머페트에게 유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의 부정, 여성을 가부장적인 체제에 의해 부과된 사회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어 그들을 제어하려는 남성들의 시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스머페트는 남성 스머프들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창조물이다. 그녀는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이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짜' 스머프가 아니다. 곧 그녀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을 바라봐온 관점과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잘못된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보다 훌륭한 여성을 만들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해야 여성을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나는 그녀의 모든 투지를 빼앗는 것이다.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남성 지배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규칙에 따르게 만들어라. 이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사례로 그녀가 검은 머리라면 금발로 변화시켜라. 서구 사회는 관습적으로 짙은 모발의 여성은 머리가 좋은 반면, 금발 머리의 여성은 머리는 나쁘지만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더 훌륭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다른 방법은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파파 스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마법을 걸자,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워졌다. 그전에는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여성에게 적용될 때,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왜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가? 누가 그래? 그것은 가부장적 질서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99 : 1인 스머프 마을은 완전히 가부장제 사회이다. 이것은 여성은 상품이라는 사고에 더해진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춰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한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은 예전에 '여성은 역사상 최초의 드렉 퀸(drag queen; 여장한 게이를 일컬음)'이라고 했다. 즉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상은 전부 가부장제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여성이 성(性)들 간의 구별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거나, 남성들의 시선의 포착물, 단순한 대상인 여성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부장제 사회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머프 마을의 성비가 50 : 50이라면 어떨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방송에서 본 바와 같은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는 성(性)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등할 때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성인 스머프 마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깊이 내재하는 성차별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스머프들에게 여성이 '자연스러운' 성(性)이라면 왜 그들이 모두 스머페트처럼 생겨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름다움의 개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나 '금발의 귀여운' 같은 표현으로 등식화된 외연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4) 동성연애자 천국인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은 스머페트가 오기 전에는 항상 전부 남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절대다수가 여전히 남성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방법(여성에 의한 출산)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며, 그들 사회에서는 '이성애(heterosexuality)'가 규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사회보다도 순수한 민주주의에 가까웠다고 믿고 있는 아테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정부는 모든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란 남성만을 가리킨다. 여성은 공적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의 어린애 같은 연애 경쟁의 초점이 되기는 하지만, 마을 안 어디서도 진짜 이성애의 긴장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적인 덩치 스머프와 편리 스머프는 스머페트 보다는 서로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스머프 마을에 오랫동안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스머프들은 스머페트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자연은 스머프들에게 남녀간의 접촉의 경우를 보여줬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여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 또한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 스머페트가 다른 스머프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제작자들은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애의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언급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제작자들은 제외시키기로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그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덩치 스머프, 편리 스머프, 허영이 스머프가 남성동성연애자의 전형이라고 믿는다. 허영이 스머프는 영국의 시트콤인 "Are you being served?"와 같은 인습적인 연예 산업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지는 종류의 동성연애자이다. 반면 편리 스머프와 덩치 스머프는 "Village People"과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인습적인 남성성으로 과장된 동성연애자의 전형이다. 게다가 주책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는 동성연애자 커플의 전형을 보여 준다.


5) 결론

나는 Peyo가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믿는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written by J. Marc Schmidt 번역 이덕진
(출처 : '스머프와 공산주의와 비슷한 점은?'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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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매체 이론

아우라 개념을 중심으로 한 벤야민의 매체 이론

―문화정치와 매체 유토피아 사이에서―


윤   미  애



1. 들어가는 말

매체이론가로서의 벤야민의 면모는 30년대 이후의 논문들인 「생산자로서의 작가」, 「브레히트」, 「사진의 작은 역사」 및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하 ‘예술작품’ 논문으로 축약)에 드러난다. 당대의 문화 정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 의도에서 쓰여진 ‘예술작품’ 논문에서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매체를 통해 예술의 총체적 성격 뿐 아니라 인간의 지각양식 자체가 획기적으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은 기술매체에 의해 야기된 모든 문화적 변화를 신비주의 전통에 기원을 둔 아우라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벗겨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방식이 지닌 특징이다”(I, 479f).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I, 480)으로 나타나는 아우라와는 달리 현대의 지각 방식은 가까움, 동일성, 반복성, 촉각성의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아우라에 비해 현대의 지각방식은 경험의 빈곤으로 보일지 모르나 벤야민은 예술 및 문화 개념의 일대 변혁을 이러한 변화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의 매체이론은 1920년대 진보적 아방가르드 운동과 같은 선상에 있다. 벤야민은 기술적 생산조건의 변화로부터 해방적 예술실천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예술의 정치화라는 테제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테제는 서구 자본주의 영화 산업의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술매체 자체의 고유한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집중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기존 문화 매카니즘의 인식과 거기에 대항하는 실천에 더 역점을 두는 브레히트와 비교된다. 예술 혁명은 사회 혁명을 전제로 한다는 입장에서 영화 이론을 전개한 브레히트와는 달리 벤야민은 현재의 사용논리에 의해 왜곡된 기술의 비억압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 그의 논의는 자연, 인간, 기술의 관계에 대한 보편사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특기할 것은 ‘예술작품’ 논문은 기술 매체에 걸었던 모든 아방가르드적 희망이 파시즘의 문화정책에 의해 좌초된 뒤인 30년대 중반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담긴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테제들은 시대의 절박한 위기상황에 비추어 비현실적, 유포피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술 낙관주의, 기술 물신주의라는 비난은 벤야민의 서술의도를 간과한다. 벤야민의 매체이론에는 파시즘의 대중조작에서 보듯이 기술의 왜곡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벤야민은 시계 톱니바퀴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다가 갑자기 시계를 돌려 지금의 시각을 보여주는 시계공처럼 기술의 잠재적 기능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시간이 촉박함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70년대 독일의 벤야민 연구는 ‘예술작품’ 논문에서 제시된 벤야민의 테제들을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대안문화의 프로그램으로 환영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의 부정성을 과소평가한 기술유토피아로 비판했다. 국내의 수용은 여전히 이러한 연구 시각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예술작품’ 논문을 해방적 예술실천을 위한 문화정치 프로그램으로만 읽는 독서방식은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이 그의 다른 사상적 모티브와 관계에 대한 문제를 간과한다. 매체이론에서 벤야민은 전통적 경험양식으로서의 아우라의 붕괴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우라 비판적 태도는 벤야민의 독특한 경험이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예술작품’ 논문을 읽고난 브레히트의 다음과 같은 소감은 아우라 소멸 테제를 벤야민의 사상체계 전반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암시한다: “모든 것이 신비주의일 따름이다. 유물론이 그런 식으로 소화될 수 있다니 놀랍다”. 여기서 브레히트는 예술의 역사적 변화를 아우라처럼 모호한 개념을 빌어 설명하는 주된 동기는 잃어버린 것을 향한 상실감이 아니겠는냐는 의구심을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아우라에 대한 벤야민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매체이론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를 벤야민 사상의 본질적인 다른 계기들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 아우라 개념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에 그의 언어철학적, 역사이론적 모티브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우라 개념의 애매모호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애매모호성을 억지로 해소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벤야민의 사상적 특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우라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벤야민의 매체이론은 탈아우라 과정을 지지하는 문화정치 프로그램인가 아니면 변형된 새로운 아우라를 지향하는 매체 유토피아 구상인가? 다음에서는 우선 아우라 개념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을 중심으로 현대의 아우라 소멸을 벤야민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아우라와 탈 아우라


2. 1. 유일무이성


벤야민의 아우라 정의에 따르면 어떤 대상에서 독특한 시, 공간적 거리감을 느낄때 우리는 그 대상이 아우라를 지녔다고 말한다. 무언가 근접할 수 없게 만드는 신비적 분위기, 설명하기 어려운 지각현상, 유일무이한 경험,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해체되는 경험,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의 갑작스러움 등 아우라는 여러 각도로 규정될 수 있다. 예술작품 논문에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종교적 의식 가치(Kultwert)와 관련시키면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 이라고 정의한다. 이른바 종교 의식의 숭배 대상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현상은 예술작품에도 적용된다. 근대 이전의 종교적 예술과 근대 이후의 자율적 예술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벤야민은 예술의 종교적 기원을 강조한다. 종교의식에 기원을 둔 예술작품은 감히 근접할 수 없게 하는 어떤 분위기를 지니는데 이를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예술작품이 종교적 의식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일무이한 작품이어야 한다. 아우라는 “지금, 여기”로 표현되는 원본의 현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이 점차로 종교적 기원에서 벗어나 세속화되면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예술가 혹은 에술가적 업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뀐다. 근대의 세속적 예술은 중세의 종교적 권위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과거의 종교적 숭배는 미의 숭배로 대치된다.

예술의 이러한 아우라적 존재방식에 결정적으로 의문이 제기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사진과 같은 새로운 복제기술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완벽한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 공간에서 원본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즉 진품성이 결여된다. 원본의 유일무이성이 아우라를 경험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인 한에서 복제품과 아우라는 결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복제가능성이라는 예술생산의 조건은 수용 조건의 변화와 맞물린다. 즉 복제기술을 통해 대량생산된 복제품은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I, 477) 대중의 욕구에 부합한다. 유일무이한 존재이면서 시, 공간적 지속성을 지니는 원본에 대해서는 성찰과 침잠의 여유가 주어지는 반면, 관찰자에게 반복적, 일시적으로 다가오는 복제품(라디오 음악, 모나리자 사진판 등)에 대해서 관조적 거리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상의 설명에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원본성, 진품성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충족할 때 비로소 가능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벤야민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그동안 제기된 반박은 대중적 복제품에서도 아우라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벤야민이 기술매체에 의해 복제되는 영상의 아우라를 부인한 것은 사진이나 영화의 영상미학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아우라를 대상의 물질적 조건에 좌우되는 객관적 현상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1930년 하시시 체험에 대한 기록에서 벤야민은 ‘에술작품’ 논문에서와는 달리 아우라를 주관적 조건에 기인하는 미적 경험의 일종으로 아주 사소한 대상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 논문은 주로 에술작품의 수용을 중심으로 아우라가 소멸하게 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에술작품 논문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할 때 비로소 밝혀진다. 


2. 2. 시선의 미메시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시각적 경험으로 정의한다.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되돌려주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이다”(I, 646). 이 정의에 따르면 아우라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선의 경험으로 규정되는 아우라는 예술작품 뿐 아니라 자연, 인간, 심지어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대상이 우리의 시선에 응답하리라는 “기대가 충족되는 곳에서 우리의 시선에는 아우라의 경험이 풍요롭게 주어진다”. 시선의 교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30년대 초에 구상된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미메시스는 “비감각적 유사성을 인식하거나 생산하는”(II, 211) 능력을 말한다. 미메시스 논문에 관련된 메모집에서 벤야민은 “먼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별”이 “아우라의 원초현상”이라면, 시선이야말로 인류가 미메시스 능력을 배운 최초의 지각작용이라고 적고 있다. 시선의 미메시스는 순간적으로 발휘된다. 이렇게 보면 “순간”과 “시선”의 이중적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Augenblick”는 미메시스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아우라 시선은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꿈꾸듯 먼 곳으로 빠져드는 듯한” 시선 (가까우면서도 멀어짐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나와 너의 경계가 해체되는 상호주관성, 즉 미메시스적 유사성이 성립하는 시선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류의 미메시스 능력은 상당히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옛날 사람들의 지각세계를 채웠던 유사성 혹은 마술적 교감은 현대인의 지각작용에서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벤야민의 미메시스 이론에 따르면 퇴화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은 실은 퇴화된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언어라는 매체로 외화된다. 언어는 “비감각적 유사성이 결집된 완벽한 서고”(II, 213)가 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언어의 도구적 기능이 표현적 기능보다 우세해짐에 따라 언어의 미메시스적 능력은 회의에 부딪힌다. 벤야민을 비롯한 언어비판적 학자들이 제스처와 같은 비언어적 미메시스 능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어 위기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벤야민이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도 미메시스의 매체 변화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자본주의적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경험 및 지각양식의 획기적 변화를 겪은 현대인에게 “먼 곳을 바라보는 능력”은 점차로 사라진다. 벤야민은 “먼 곳의 매력이 꺼져버린 눈”(V, 396)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현대인의 눈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충격적 영상에 대한 방어적 기능에 익숙해 있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직화된 이러한 눈들은 상대방의 시선에 응답하는 대신 상대방의 상을 단지 거울처럼 반영한다. 이러한 시선은 더이상  미메시스적 유사성의 매체가 되지 못하고 자기동일성을 고수한다.


2. 3. 아우라와 기억


벤야민의 아우라 이론은 그의 미메시스 이론 뿐 아니라 기억이론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우라에 대한 제반 정의들은 기억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근거한다. “한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현상에 눈을 뜨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경험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과 일치한다. 또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일회적인데, 다시 말해 이러한 자료들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는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따라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기억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는 아우라의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다”(I, 647). 여기서 시각적 경험으로서의 아우라는 시각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의 이미지와 관계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이라는 정의에서 먼 곳이라는 공간적 개념은 시간적 차원을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시간과 공간이 교묘하게 얽혀있는 거미줄”(II, 378)이라고 정의한다. 아우라 개념의 본질적 규정은 복합적 시간성, 기억에 있다. 아우라 경험에서 기억은 기억하는 주체의 의식적 노력과 무관하게 우연한 계기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즉 무의지적 기억과 동일하다.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의 개념을 통해 아우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표상들을 그 대상의 아우라라고 부른다”(I, 644) 우리에 의해 눈을 뜨게된 현상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로 충만해 있는 시선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프루스트는 아우라 경험에 정통한 작가로서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우라 경험의 거의 완벽한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현대 기술 문명의 시대에서도 아우라 경험이 가능함을 보여준 증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을 걷어올리려는 이루 말할 수없는 엄청난 노력”(II, 324)을 기울이는 프루스트에게 감탄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이 전적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에 국한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이라는 양식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무의도성, 우연성, 감각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기존의 문자 매체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적 체험과 분리된 개인적 기억은 진정한 기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벤야민은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의 분리는 근대 이후 경험구조의 변화로 보면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는 과제를 역사인식에 설정한다. 따라서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를 위한 메모집에서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의 모델을 역사인식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인식의 순간에 휙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이미지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기억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 이미지는 위험의 순간에 처한 사람들에게 떠오른 그들 자신의 고유한 과거의 이미지들과 유사하다. 알다시피 이 이미지들은 무의지적으로 나타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역사 또한 무의지적 회상에서 출현한 이미지이다”(I, 1243). 역사의식에 무의지적 회상의 범주를 적용하는 것은 모든 역사가 전적으로 의식적으로 수행될 수도, 의식적으로 체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에게 귀속되지 않는 무의식적 차원을 포함한다. 어떠한 역사의 논리에 의해서도 수렴되지 않는 무의식적 차원이 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지각양식은 무의지적 회상이다. 벤야민이 󰡔빠싸쥐 작품 Passagenwerk󰡕에서 사용한 “집단적 무의식”(V, 47)이라는 개념도 그와 연관된다.

기억에 있어 의도성과 무의도성의 구분은 정보가 지배적인 의사소통형식이 된 현대사회에 대두된 문제이다. 역설적으로 문화적 기억의 위기는 뛰어난 저장능력을 발휘하고 동시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정보를 유통시키는 새로운 매체의 압력을 받으면서 더욱 첨예해졌다고 볼 수 있다. 통신제도에 의해 단순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되는 사건은 센세이션에 대한 대중의 욕구에 부합할 뿐 경험의 내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경험이란 “기억 속에 엄격히 고정되어 기록된 개개의 사실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의식조차 하지 않은 자료들로 이루어진 종합적 기억의 산물”(I, 608)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정보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상품 또는 대중적 소비품이 될수록 그것은 무의지적 기억의 내용이 될 수 없고 단지 의식적 체험의 자료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 안전하게 저장되고 확실하게 해독가능한 자료가 된다.

벤야민은 엄청난 이미지 홍수를 쉴새없이 내보내는 TV나 어마어마한 저장능력과 통신기술을 지닌 컴퓨터를 알지 못했지만 기술매체로 인해 야기된 문화적 기억의 문제를 이미 사진에서 간파했다. 벤야민은 사진을 의도적 기억의 매체로 사진을 평가하면서 ”아우라 붕괴 현상에 결정적 몫” (I, 646)을 사진에서 찾는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문자 매체를 대체할 새로운 영상매체에 대한 기대감 뿐 아니라 사라진 것, 즉 아우라를 향한 상실감이 엿보인다. 이러한 이율배반성에서 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낡은 것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3. 매체 유토피아와 아우라


앞장에서 드러났듯이 아우라에 대한 규정들이 벤야민 사상의 중요한 계기들을 함축한다는 사실은 아우라에 대한 벤야민 태도의 이율배반성을 암시한다. 아우라 경험을 극복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본 것인지 아니면 다시 회복해야 할 인류학적 경험포텐셜로 본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기능에 대한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에서 다시 한번 제기된다. ‘예술작품’ 논문에서 기술복제 매체와 대중의 기능적 유사성에서 출발한 벤야민은 영화를 대중운동의 가장 강력한 매체로 파악했다. 영화는 개개인의 고독한 관조가 아니라 수용태도의 집단적 조직화가 가능한 곳이다. “영화관에서 관객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일치한다. 영화관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 개개인의 반응이 (...) 그 어느 곳에서보다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I, 497). 벤야민은 대중이 이처럼 스스로를 조직하고 통제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은 예술사에서 처음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상적인 영화관객에게 비판적 태도만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벤야민은 수용자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를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매체로 영화를 파악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합리성과 합리성, 도취과 명철함, 상상력과 이성이라는 추상적 대립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메라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공간과 관걕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벤야민이 사용한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통해 주어진다.

벤야민은 일반적으로 육안으로는 포착되지 않고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의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술매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공간에 프로이트의 용어인 무의식 범주를 적용한다. 전통적인 화가의 시각과는 다른 카메라의 반(反)물리적 시각에 의해 열린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는 일상적인 것과 비밀스러운 것의 이율배반성을 지닌다. 지금까지 은폐되어있고 의식되지 못했던 영역이 기술의 영역으로 전환하게 된다는 점에서 사진은 “마법의 청산”(II, 213)이라는 미메시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메시스의 궁극적 목표는 세속적 기능에 의한 마법적 기능의 소멸이 아니라 이 양자의 구분 자체의 소멸에 있다. 따라서 고도의 학문적, 정보적 가치를 지닌 사진의 영상이 동시에 신비 체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언급은 이상적 미메시스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미지의 환상적 성격을 인위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이미지의 매체성을 은폐하는 기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는 영화라는 기술매체에 내재한 형식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매체이론이란 “기술적 도구로부터 그 자연적 결과를 도출하도록 하는 지침”(II, 1506)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은 매체의 현실적 발전상황보다는 기술에 내재한 자연적 형식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닌다. 사회비판적이기 보다는 유토피아적 경향을 띤 벤야민의 매체이론에서 영화는 ”새로운 집단의 제 2의 기술“로 파악된다. 또한 미메시스의 관점에서 영화는 더이상 자연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의 유희적 관계에 있는 기술, 즉 “제 2의 기술”에 속한다. 여기서 영화 혹은 사진의 이미지 공간은 현실의 가상 공간이 아니라 유희 공간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실과 닮으면서 동시에(확대, 축소, 저속,고속 촬영 등을 통해) 현실을 변형시키는 유희 공간을 창출한다. 새로운 기술매체는 종교적 가상이나 미학적 가상이 물러난 자리에 엄청난 유희공간을 확보해준다.

영화에서 창출된 유희공간에 부합하는 수용태도는 관조적 침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브레히트가 서사극의 관객에게 요구하는 비판적 태도와도 다르다. 그것은 산만함 속에서의 충격체험이다. 충격이란 자본주의적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로 일어난 현대인의 대표적 경험방식으로서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심리적 기관의 평형이 깨어질때 일어난다. 충격체험의 특징인 불연속성, 순간성은 바로 영화의 몽타주 기법에 상응한다. 충격체험은 아무런 의미 연관을 세울 수 없는 불연속적 순간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경험 빈곤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충격은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요 모멘트로 작용한다. 벤야민의 역사 인식 방법론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은 브레히트 연극의 제스처에 대한 분석에서 충격과 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변증법을 도출하고 이를 역사 경험의 방법론으로 확대했다. 연속성 보다는 불연속성, 운동보다는 정지에 더 비중을 두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사고에서 충격은 인식에 도달하는 중요한 계기에 해당된다. 이렇게 보면 벤야민이 영화를 충격체험과 관련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가 제공하는 영상의 충격효과를 강조한다. 충격적으로 밀려오는 영상은 마치 관찰자의 눈 표면에 직접 부딪히는 것과도 같은 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충격체험에 익숙해진 눈은 촉각과도 같은 기능을 지니게 된다. 사진의 영상은 전통적 미술작품처럼 총체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단편화된 상으로 그 상은 마치 탄알처럼 관객을 습격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영상적 충격에 대해 관객은 더이상 관조적 태도로 임할 수 없다. 영화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심화시키는데 기여한다면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충격적 이미지를 재빠르게 정복하는 자발성이다. 관객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갑작스러운 현상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번개처럼 빠른 솜씨로 현을 골라 잡는 순간처럼 사진사는 대상과, 관찰자는 사진의 영상을 마주 대하고 있다.

영화의 혁명적 포텐셜은 단지 충격효과의 형식적 복구가 아니라 충격효과를 일으키는 요소들의 미메시스적 능력에 달려있다. 사진과 영화의 이미지 공간을 구성하는 이 요소들은 현실의 단편적 이미지들이다. 이는 문자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는 자취, 아직 코드화되지 않은 삶의 흔적들에 해당된다. “건축이나 일시적 유행에 이르기까지 삶의 수많은 형태들”(V, 47)에서 지난 시대의 자취를 찾는 거리 산보자 혹은 문화사가처럼 영화의 관객에게도 시대의 무의지적 자취를 찾아나서는 역할이 주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코드화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착될 수 없었던 것, 즉 어떤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사소한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집중적 현실접촉의 이 순간은 무의지적 기억이 활성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에서 무의지적 기억을 촉발하는 계기가 사소하고 우연한 대상이듯이 영화의 한 장면, 사진 한 장에서 영화의 관객은 지나간 집단적 삶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미메시스와 무의지적 기억, 다시 말해 변형된 아우라 경험이 영화의 잠재적 포텐셜로 인정된다.  

변형된 아우라가 귀환하는 곳에서 영화는 문화정치적 맥락을 떠나 매체유토피아적 기능을 담당한다. 물론 벤야민은 영화수용에서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영화의 정치적 기능과 유토피아적 기능도 서로 매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매개가 성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영화에 대해 변형된 아우라 경험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국 벤야민의 이율배반적 사상에 관한 질문으로 귀착된다.



4. 나오는 말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벤야민의 매체이론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이론이 더 설득력을 지닐지 모른다. 벤야민이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적 매체 발전은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기대를 반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매체에 걸었던 기대는 다분히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의 매체이론은 오늘날 상당한 수준으로 세분화, 전문화된 매체이론적 논의에 비추어 투박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의 매체이론적 성찰의 현실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벤야민의 심오한 매체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벤야민은 기술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에 있다는 근본적 입장에서 매체의 혁명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여기에 따르면 매체는 단순히 오락의 도구나 정치적 계몽의 수단이 아니라 자연과의 미메시스적 유사성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인류학적 경험 포텐셜의 관점에서 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은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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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년 7월)

 

 

 

   19세기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문학가였던 체르니셰프스키의 대표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학을 알기 위해 모든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고골리를 읽으면 된다.'  물론 이는 훗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 러시아의 문학을 대표하기 이전의 말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40여권이 넘는 맑스나 레닌의 진집을 죄다 읽어야만 맑스나 레닌을 이해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칼 폴라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형 The Great Transformation》에는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라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 폴라니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여기 홍기빈 님이 간편한 시추공을 하나 뚫어 놓았습니다. 아쉽지만 이를 통해서나마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몇년 전에 재판이 발간된 《사람의 살림살이 Ⅰ, Ⅱ》(칼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풀빛/ 1983)나 간접적인 통로이긴 하지만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J.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7)으로 나아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은 크게 6개의 장과 옮긴이의 해제로 되어 있습니다. 1장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은 폴라니가 1947년 《Commentary》에 기고한 논문으로, 시장 신화를 비판하는 그의 연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2장은 《거대한 변형》의 6장과 11장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이중적 운동과 자기 조정 시장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는 폴라니의 강연 개요나 개인 노트 가운데 뽑은 글들로,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면 출간된 적이 없는 글들이라고 합니다.

 

   4장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은  폴라니가 1925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기관지에 발표한 글입니다. 여기서 그는 중앙 계획에 의존하는 국가 사회주의 혹은 '관치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경제 모델의 단초를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외부적 조망'과 대비되는 '내면적 조망'에 착목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곳에서 옮긴이가 산별노조를 '산업 결사체'로 번역한 것은 조그만 티로 보입니다.

 

   5장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는 1945년 영국에 머물고 있던 폴라니가 전후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체제의 복구를 추진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이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을 환기하려고 쓴 글입니다. 이를테면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질서의 보편주의에 맞서 지역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실천적인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만으로는 오늘날의 쟁점과 관련해 더 구체적인 고민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한편, 글 가운데 소련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다소간의 옹호는 현재 시점에서는 다소 거슬리는 부분입니다.

 

   6장 <칼 폴라니 약전>은 폴라니의 딸 등이 그의 삶과 사상을 개관하고 있는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홍기빈 님이 쓴 <해제 - 칼 폴라니의 시장 자본주의 비판>은 폴라니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어서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의 3장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 비판>은 193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목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처럼 통렬한 비판은 현재에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여러번 곱씹어 볼만한 글입니다.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

       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의 욕구 가운데 호흡 중추보다 위에 있는 부분의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p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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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목: 미야자키 최초의 러브 스토리

전문: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11월 20일 일본 현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야자키의 새로운 판타지 로맨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운 거대한 기록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지 전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쿄 시사회에 다녀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아기자기한 소품도 아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집대성도 아니고, <붉은 돼지>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해 빚어진 작품도 아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그것도 올해 63세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으로 내놓은 한 편의 판타지이자 유쾌한 러브 스토리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5년 전 영국의 아동 문학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명 판타지 동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 동화에서 상식적으로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성이 움직인다는 것과 소녀가 할머니가 된다는 두 가지 설정은 특히 미야자키를 매료시켰다. "이걸로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겠어!"라고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에게 외쳤다니 거의 '심봤다'는 심정이었던 듯하다. 그 자신부터가 만만찮은 노인네인 미야자키는 90세 노파의 사랑을 무척 건강하고 밝게 그린다. 젊음이 세상의 중심인 요즘 시대의 흐름과 달리 '나이 듦'이라는 인생의 경로 속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내고 있다. 원작의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이야기 자체를 대폭 수정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할머니를 여주인공 삼는다는 전례 없는 시도와 더불어 한번쯤 '전쟁 속에서 꽃피는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미야자키의 소망이 반영돼 있다.

중제: 청소부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의 동거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모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18세의 소피는 사는 게 별로 재미없다. 앞으로도 모자 가게를 계속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소피는 골목길을 걷다가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궁지에 빠진 소피를 안고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다. 그가 바로 뭇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만 여자들은 보는 순간 빠져든다는 마법사 하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 도입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두근거린다. 황무지 마녀의 부하들에게 쫓기고 있던 하울이 마침 군인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소피를 안고 훌쩍 하늘로 날아올라 함께 공중을 걷는 장면은 특히 1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여성 관객들의 가슴에 강력히 꽂힐 만하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소개하며 관객들을 일상에서 판타지의 세계로 단숨에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날의 아찔한 경험에 마음을 빼앗긴 소피에게 곧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하울을 짝사랑하는 황야의 마녀가 소피를 질투해 저주를 건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주름투성이의 90세 할머니로 변해버린 소피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스스로 가출하고, 황야를 헤매다 하울의 성에 들어간다. 그렇게 할머니 소피와 '꽃미남' 마법사 하울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동안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꽤 달라 보이는 것은 이 두 주인공 캐릭터의 힘이 크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법사 하울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늘 모범적이었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남자 주인공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일본의 막강 아이돌 그룹 'SMAP'의 멤버 기무라 타쿠야가 목소리를 맡아 화제가 된 하울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캐릭터다. 평상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놀고먹는 귀차니스트에 소심남이지만 그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꽃미남의 전형이랄까. 기무라 타쿠야가 "하울 캐릭터의 원화를 받았을 때 그걸 떨어뜨릴 뻔했다. 너무 좋아서"라고 했을 정도니, 외모는 확실히 수준급이다. 여러 왕국의 왕들이 러브 콜을 보내는 능력 있는 마법사면서도 치솟는 인기가 부담스러운 그는 성을 움직여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하울에게 반한 우울 소녀 소피는 할머니가 된 뒤로 무진장 건강해진다. 무미건조하던 일상에서 자신이 할머니가 된 일대 사건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울의 성에서 청소부로 살게 된 후부터는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울과 그의 견습생 마이클, 하울과 계약을 맺고 움직이는 성의 화덕에 살고 있는 불의 악마 캘시퍼를 보살피며 살림을 도맡는다. 나이 드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리 나쁜 것도 아니라는 삶의 통찰은 명랑 할머니 소피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야자키의 연출력은 90세 할머니와 꽃미남 마법사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감정의 교류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규모나 스케일, 전체 완성도를 떠나서 소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한 컷만으로도 마음의 두근거림과 기발한 유머가 느껴지게 하는 것, 그건 역시 아무나 지닐 수 있는 재능은 아니다.
그리하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전해주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은 장대함과 박력과는 종류가 다른 감동이 존재한다. 소피가 하울의 과거와 비밀을 알게 되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가슴을 먹먹하게 할 만큼 슬프기도 하다.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소피에게서 흘러나오는 감동은 이 특별한 주인공들을 둘러싼 중세의 풍경과 이어진다.

중제 : 일본인이 동경하는 이상의 세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은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19세기 말이다. 마을에 흐르는 강 옆으로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동물의 날개가 달린 비행선들이 떠다닌다. 사람들은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다니며, 바다에는 증기 여객선이 떠 있다. 왕국과 왕국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폭탄을 실은 함선 모양의 비행기들이 하늘에서 격전을 벌인다. 근미래 화가들이 '20세기는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공상했을 만한 풍경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비행 물체가 등장하는데, 거리에 자동차는 없고, 집안에 TV는 보이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기계와 인간의 사이가 좋았던 시대는 그러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렸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시대적 배경이야말로 병기광이자 비행 마니아로서의 미야자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온갖 고철들을 모아놓은 덩어리 같은 기괴한 하울의 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증기를 내뿜으며 쿵쿵 안개 속을 가로질러가는 하울의 성을 집 안에서 보며 마법사 하울에 대한 공상을 키워간다. 마법과 과학이 한데 뭉쳐 있는 하울의 성은 미야자키의 상상력으로 닭다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네 개의 다리(원작에는 없는 것으로 원작자 윈 존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 설정이다)를 얻게 됐다. 미야자키의 독특한 비주얼 스케치로 탄생한 성은 3D 기술력에 의해 입체감이 있는 회화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비주얼의 메카닉은 분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 병정만큼 오래 사랑받을 만하다.
미야자키의 상상력이 총동원된 마법과 과학의 시대는 정확히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는 유럽의 한 마을 안에 담겨 있다. 아늑하게 펼쳐진 초록색 초원과 언덕, 투명하게 푸른 하늘과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바다, 그리고 그림 같은 골목길과 항구, 시장통의 풍경은 지브리 애니메이터들이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배경 조사를 다녀온 뒤 만들어진 것이며 미야자키가 오랜 시간 동경하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소피의 아늑한 모자 가게나 왕실 마법사 술리만이 기거하는 왕궁 거리 등의 배경은 지브리만의 고급스런 색채 감각이 반영돼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과거 시대의 유럽 풍경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서양, 일상의 유토피아에 대한 총체적인 반영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루팡 3세> <붉은 돼지>에서 유럽의 도시와 마을, 거리를 그려냈던 미야자키의 내면 풍경이 또다시 화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미야자키와 나를 비롯, 60대 이상의 일본인들에겐 서양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현실의 서양이 아닌 동경하는 서양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쇄국 정책에서 해방된 후 100년간 급속하게 서구 문명을 흡수해온 일본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유럽 문화가 미야자키와 지브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다시 유럽과 아시아에 수출됐고 유럽의 이삼십대 애니메이션 팬들이 이를 자국의 애니메이션으로만 알고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처럼 아이로니컬한 일도 없지 않나 싶다. 평화보다는 전쟁을, 자연보다는 문명을 추구한 탓에 지금은 이상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서구 문명을 바라보는 거장 미야자키의 안타까운 시선은 화면 곳곳에 입혀져 있다.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늘은 더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초원은 더 푸르다. 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도맡아온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테마 음악은 왈츠풍의 리듬으로 소피와 하울이 겪어야 하는 전쟁의 와중에 스며들어 슬픔과 기쁨을 대변하듯 울린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선이 불의 전투를 일으키고 그 사이를 매처럼 날아다니며 싸우는 마법사 하울, 그리고 상처 입은 하울을 감싸안는 소피의 사랑은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미야자키의 복합적인 세계관 위에 안착한다.

중제 : 새로운 신화에의 도전

지난 11월 8일 도쿄 유락조의 스카라좌극장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VIP 시사회가 열렸다. 기무라 타쿠야 등 출연진이 무대 인사를 가졌고, 일본 내 무수한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현재 일본 언론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일본영화로서는 사상 최다인 전국 450여 개 스크린을 확보하고 있다. 온갖 잡지들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TV를 통해 예고편은 숱하게 방영 중이다. 그만큼 개봉을 앞둔 현지의 분위기는 뜨겁다. 이건 마치 일본에서만 2천4백만 명 이상을 동원한 미야자키의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3년 만에 다시 신화에 도전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언론과 관객이 전국민적으로 성원하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기존의 미야자키 애니메이션과 달리 화제가 됐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목소리 캐스팅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꽤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야자키의 광팬인 아내와 아이를 위해 먼저 지브리 쪽에 출연 의사를 밝힌 기무라 타쿠야는 더빙을 하며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지만 그의 목소리는 우려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하울의 역할에 썩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장수 시리즈 드라마 <남자는 괴로워>로 사랑받아온 중년 여배우 바에쇼 치에코가 무뚝뚝한 소녀 소피와 사랑스런 할머니 소피의 목소리를 동시에 연기하고, 황무지 마녀 역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늑대신 '모로'를 연기했던 일본의 유명한 여장 남자 배우 미와 아키히로가 맡아 독특한 음색을 들려준다. 배우들의 호흡은 안심해도 좋을 수준이지만 문제는 홍보다.
미야자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성공 신화를 이끈 배후 인물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는 6개월간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와는 달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프로모션을 개봉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 지난 10월 말부터 일본 내 언론에 슬슬 실체를 공개하기 시작했고 스폰서인 니혼 TV와 더불어 전국적인 이벤트도 마련했다. 물론 이 한 달 새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도쿄 시오도매 니혼TV 플라자 1층에서는 11월 3일부터 28까지 열리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관련 전시회도 이 일환이다. 하울의 성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불의 악마 캘시파가 기거하는 화덕, 거실, 소피가 음식을 하는 부엌과 하울의 목욕탕, 그리고 성이 공간 이동을 할 때 사용하는 문 손잡이까지 세세하게 재현돼 있다. 소피, 하울, 마이클 등의 모습을 한 캐릭터 인형들과의 기념 촬영도 가능하다. 모든 물건들의 재질이 스티로폼류와 가죽, 천으로 되어 아이들이 아무리 만져도 부숴지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고안돼 있는 이 전시장에는 개장 5일 만에 이미 3만4천 명이 다녀갔다. 과연 파죽지세의 홍보 열기 속에 개봉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일본 관객은 물론 전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얼마나 매료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수상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2월 말 국내에도 개봉 예정이다. 이번엔 거의 시차 없이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접할 수 있는 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까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기존의 성향이 적절히 혼합돼 있는 작품이다. 자연친화주의와 판타지, 기계에 대한 반성과 희망은 지난 30년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미야자키의 마음속에서 자라났고, 또다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진작부터 사는 게 지루했던 18세 소녀 소피는 90세 할머니가 되어서 자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방법은 다르지만 가는 길은 같다. 스즈키 프로듀서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사실상 조금 큰 아이들의 꿈을 자극할 로맨틱한 판타지다. 올해 63세인 "흰머리 소년" 미야자키는 여전히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참, 보너스로 미야자키 애니메이션 최초의 키스 신도 등장하니 끝까지 눈을 떼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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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다 이사오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특집 3 |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리얼리즘

제목: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을 그린다

전문: 미야자키 하야오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큰어른으로 존경받는 다카하다 이사오는 애니메이션계의 전무후무한 다큐멘터리스트다. 국내 개봉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추구해온 극사실주의를 만날 수 있다.

1989년. 스튜디오 지브리가 한창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드느라 분주하던 시기였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은 문득 '왜 너구리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간 지브리 작품 대다수의 프로듀서로 일해온 스즈키 도시오는 다카하다의 생각을 듣고는 영 감이 오질 않아 대답을 꾸물댔다. "좋기는 한데..." 며칠 뒤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소 만화가 스기야마 시게루의 작품 <팔백팔 너구리>를 좋아했던 터라 '토토로와 팔백팔 너구리'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1992년 너구리 얘기가 다시 불거졌지만 미야자키는 한창 <붉은 돼지>를 진행하고 있었고 누군가 대신 할 사람이 필요했다. 생각난 사람은 뻔했다. "너구리에게 경의를 표하고, 관객을 박장대소하게 해줄 것"이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 미야자키가 프로젝트를 넘긴 석 달 후 다카하다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시나리오를 써왔다. '너구리'라는 한마디에 자극받고 일로매진, 2년 후인 1994년엔 제작까지 마쳤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카하다는 "왜 하필 이 시대에 너구리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고 매번 이렇게 대답해 왔다. "너구리도 지금 이 땅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중제: 가장 일본적인 애니메이터

1935년 생인 다카하다 이사오는 특이하게도 도쿄대 불문학과를 나왔다. 중학생 시절 폴 그리모의 애니메이션 <왕과 새>를 보고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에 매료됐던 이 전후 세대의 모범생은 대학 졸업 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였던 도에이동화에 입사했다. 5년간의 조수 생활을 거친 후 맡은 첫 연출작은 <늑대 소년 켄>이라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후 다카하다는 야심 차게 준비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태양의 검을 지닌 소년 호루스가 아버지 유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마의 재앙을 물리친다는 내용은 그때까지 유아적 성향의 애니메이션이 지배적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열악한 제작 과정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아쉽게도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다루는 다소 무거운 줄거리 때문인지 무참하게 흥행 실패했다. 다행히 이 작품을 통해 평생 친구이자 동료가 된 후배 애니메이터를 건졌으니 그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 후 도에이에서 퇴사해 A 프로덕션, 즈이요 영상, 니폰 애니메이션사를 돌아다닌 9년간 다카하다는 지금까지 감동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다수 연출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 지금껏 한국의 중년들에게 유년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된 작품들이 바로 다카하다의 대표적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다카하다는 수더분한 외모에서 연상하기 어렵게 꽤 현실 참여적이고 정치적인 면이 있다. 미야자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 당시 프로듀서로 참여한 다카하다는 이런 성향을 숨기지 않았다. 미야자키와 함께 제작사인 도쿠마 서점 측에 "애니메이터를 일회용 취급하지 않는 책임 있는 제작 시스템"을 제안했고 그로 인해 스튜디오 지브리가 탄생됐다. 다카하다는 미야자키와 지브리를 꾸려가는 한편, 80년대에 본격적으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키 에츠미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자린코 치에>(1981)는 오사카가 배경으로, 순정파 야쿠자인 아버지와 그의 불행한 어린 딸 치에의 이야기다. 일본의 국민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유명한 동화가 원작인 <첼리스트 고슈>(1982)는 지방 교향악단에 소속된 어느 첼리스트의 음악 세계를 다룬다. 클래식광이기도 한 다카하다의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이 작품과 전작 <자린코 치에> 모두 결국은 일본과 일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이후에 만들어진 <반딧불의 묘>(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이웃의 야마다군>(1999)에 이르기까지 다카하다 리얼리즘이 보여 준 격조는 상당했다. 일본의 현재와 과거를 다루면서도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팬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안겨줬다. 서양적인 소재를 주로 다루던 여타의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다카하다의 작품 속엔 탁월한 현실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카하다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국내 정식 개봉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이런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의 요소들과 다양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종합판이다.

중제: 변신 너구리가 대변하는 인간사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1994년 일본 개봉 당시 디즈니 <라이온 킹> 흥행을 누르고 그해 일본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한 다카하다 이사오 최고의 흥행작이다. 제작 당시 일본 곳곳에서 너구리들의 시체가 증가하고 그 가운데 80%가 먹이를 찾으러 도로변에 나왔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갔던 실제 상황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도쿄 근교의 타마 구릉 지대. 인간들이 인구 분산을 위해 주택을 늘리려고 '뉴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이 지역 너구리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살아야겠기에 너구리들이 일어선다. 그간 인간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금지돼 왔던 변신술을 부활시키고 '인간 연구 5개년 계획'을 추진해 인간이라는 위험한 동물을 제대로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너구리 원로들은 우선 외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전설의 세 장로를 찾는 사자를 급파하고 나머지 너구리들은 변신술을 익힌 후 나름의 게릴라 작전으로 인간들의 공사장을 급습한다. 하지만 투쟁은 그리 쉽게 먹혀들지 않고 공사는 중지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멀리 시코쿠 지방에서 전철을 타고 도착한 전설의 너구리 장로 세 명이 나타나 변신술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요괴 대작전'을 주도한다. 변신 너구리들이 갖은 기를 모아모아 도심 주택가에서 벌이는 '요괴 대작전'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백미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담긴 기발함의 원천은 결국 너구리 사회에 대한 세밀한 설정과 묘사에서 비롯된다. 너구리 공동체는 사실 인간 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위기 시에 원로 너구리들이 무리의 미래를 위해 회의를 거듭한다. 인간과의 투쟁을 외치는 강경파와 인간들에 대한 자세한 공부가 선결 조건이라는 온건파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들의 동정을 살핀다는 취지로 숲 속 산사에 TV를 구해놓곤 하루종일 TV를 보며 놀기 바쁜 낙천적인 성격의 너구리들이 변신술을 감행한다니 어딘가 아슬아슬하다. 과연, 그들의 변신은 거의 장난 수준이다. 변신하는 대상이 어처구니없게도 고양이나 여우, 돌부처상 아니면 밥솥, 냄비 같은 단순한 것들이고 어쩌다 인간으로 변신해 도시 적응 훈련을 나가면 금세 기운이 딸려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생길 지경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변신술 유지를 위한 건강 드링크제를 마시는 너구리들을 보고 있으면 귀엽다 못해 안쓰럽다. "인간들을 전부 다 쫓아버려야 해요? 그럼 튀김은 누가 줘요? 꽁치 조림은?"이라며 반문하는 천진난만한 너구리들을 보고 있으면 이래서야 어찌 험난한 세상을 버텨내겠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이런 요절복통 너구리들의 일상 속에 생태계 파괴라는 심각한 메시지를 슬쩍 끼워 넣는다. 지나치게 강압적이거나 교훈적이지 않게 교묘한 선을 유지하는 다카하다의 연출은 대가다운 공력이 느껴진다. 다카하다는 위기에 몰린 너구리들이야말로 사실상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 일본인들임을 어렵지 않게 은유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중제: 날카롭고 풍성한 현실 감각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보여지듯 "무엇을 하든 현실을 반영한다"는 다카하다의 강한 신념은 물론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TV 시리즈를 만들던 시절부터 내면 깊숙이 자리한 현실 감각이 날카로우면서도 풍성하게 커나가도록 스스로 애써온 것이다. 그 때문에 다카하다 이사오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판타지에 집중해온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표현하는 이미지와 내용은 모두 현실을 아우르는 리얼리즘에 기반한다. 공상과학, 미소년과 미소녀 이야기, 로봇, 마법의 세계 등 수많은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지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그가 걷는 외길은 특별하다. '일본' 그 자체를 애니메이션의 중심에 두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를 애니메이션 속에 반영하는 세밀한 현실 감각 때문에 다카하다는 세계 애니메이션계에서 일가를 이룬 리얼리스트로 통한다. 1985년 연출한 그의 실사 다큐멘터리 <야나가와의 운하 이야기>에도 다카하다 세계의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미야자키와 함께 현장 취재에 나선 이 다큐멘터리는 한 사람의 행정 직원이 오염된 야나가와 강을 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그 지역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킨다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은 실제 환경 오염이 극심하던 당시 일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카하다 애니메이션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애니메이션으로선 보기 드물게 태평양 전쟁을 다룬 <반딧불의 묘> 또한 다카하다가 노사카 아키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구현한 작품이다. 전쟁 고아가 된 어린 남매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다카하다의 시선이 드러난다. 1985년 일본 개봉 당시 평단에선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이런 전후의 이미지를 봐야 하느냐"는 혹평과 "가슴 아프게 리얼한 반전 영화"라는 평가가 오갔다. 하지만 다카하다의 연출 속엔 단순히 참혹함이 불러온 슬픔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참혹함에 묻혀버린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스며 있다. <반딧불의 묘>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의 토토로>와 동시에 개봉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두 감독이 자신들이 속한 세계를 다루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결국 일본의 과거를 돌아보며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려는 의도는 같은 것이다.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 다에코가 자아를 찾아 시골로 떠나는 여행을 다룬 <추억은 방울방울>도 다카하다의 비상한 현실 감각이 녹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과거를 떠올리며 미래를 고민하는 20대 여성의 진심을 끌어내는 드라마인 동시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격려하는 애니메이션이다.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다에코가 찾아간 시골 풍경 속엔 사실상 80년대 초기 방황하는 일본 젊은 세대들의 모습, 당시 농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 붐이 일었던 유기 농업에 대한 이야기 등 현대 일본의 여러 단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중제: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냉정한 리얼리스트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이 지닌 독보적인 일상성의 바탕은 매번 작품을 만들 때마다 현지 취재를 반영하는 부지런함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TV 시리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제작할 땐 알프스의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 스위스 현지 로케이션 헌팅을 감행했을 정도다. 이뿐 아니라 <엄마 찾아 삼만리>의 아르헨티나, <빨강머리 앤>의 무대가 되는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자린코 치에>의 오사카 등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을 지역에 무조건 사전 로케이션을 강행해 치밀한 취재를 하는 다카하다의 작업 방식은 대단히 도전적인 것이었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도 이런 작업 방식은 지속됐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실제 존재하는 야마가타 현의 잇꽃 재배 농가가 배경이다. 다카하다는 그곳에 사는 가정을 직접 방문해 비디오 촬영하고 그림으로 재현한 덕에 <추억은 방울방울>에 등장하는 농촌의 싱그러운 햇살과 푸근한 정취, 산등성이의 붉은 노을 빛은 예사롭지 않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만이 아니라 생활감 넘치는 풍경"을 원했던 다카하다는 너구리가 출몰하고 있는 도쿄 근교의 타마 구릉지를 방문해 너구리 보호와 자연 환경 보전을 실천하는 단체를 취재했다. 미야자키의 작품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도 거대한 오무를 피하기 위한 탑 등 공동체 생활을 반영하는 여러 공간이 묘사돼 있다. 이것 역시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다카하다의 조언과 작업 방식의 영향이다.
현지 로케이션 취재를 통한 사실적인 배경과 철저한 일상 묘사에 관한 한 다카하다는 거의 타협을 모른다. 그로 인해 생겨난 다카하다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포토 리얼리즘에 가까운 화면이다. 다카하다는 "어떤 하나의 세계를 믿게 하려면 아무리 가상 세계라도 강한 현실감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실사 영화를 만들라고 했지만 나는 애니메이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렵다"고 말한다. 무의식을 설명할 순 없을지라도 다카하다 이사오가 다큐멘터리스트이자 애니메이터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갖추고 꾸준히 작업해온 사실주의자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카하다의 최신작인 <이웃의 야마다군>(1999)은 제목이 말해주듯 이웃처럼 친근한 일본인 가족의 일상을 그린다.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던 이시이 히사이치의 동명 네 컷 만화가 원작이다. ""네 칸 만화는 갑자기 끝난다.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용도 그림도 단순함을 지향한다"고 말한 다카하다는 그동안 수작업을 해온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 부문에 컴퓨터 작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카하다의 이전 작품이 그렇듯 <이웃의 야마다군>의 모든 것은 잔잔한 일상에서부터 출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의해 발견된다. 삶을 표현하는 방법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다져진 다카하다의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 막 결혼해 인생의 항해를 시작한 신혼부부가 봅슬레이를 타고 세상을 질주하고 그들이 질주하는 장소가 5단짜리 웨딩 케이크 위임을 발견하게 될 때 다카하다가 만든 소우주는 유쾌하고 현명한 일상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

산이 뭉텅뭉텅 파이고 아름다운 위성 도시 '뉴타운'이 건설된다. 이 풍경을 보던 너구리가 한마디 한다. "야, 인간은 대단한 것이군요. 여태 우리 같은 동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인간과의 한판 승부에서 너구리들이 승리를 거뒀으면 좋으련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그런 통쾌함은 없다. 모처럼 작정하고 벌인 요괴 대작전은 인간들에게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너구리들은 마지막 남은 기를 모아 환상적인 옛 도쿄의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그건 곧 아스라한 기운 속에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너구리와 인간은 결국 대화할 수 없지만 두 존재 모두 어쩔 수 없이 골치 아픈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동등하게 묘사된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말한다. "나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적 질환을 겪는 사람들이 때때로 많다는 사실에 넌더리가 난다. 기분 전환을 위해 술에 취하듯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안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계뿐 아니라 세계 애니메이션계를 통틀어 다카하다 이사오 같은 리얼리스트의 존재는 희귀하다. 진정 아낌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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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Paradise

(You Are) More Than Paradise 

 

Port of Notes-



I heard it at midnight

난 이것을 자정에 들었어


It's a song that I used to love and dream

이 노래는 지나간 사랑과 꿈에 관한거였어


Don't go away ..Don't leave me ..alone,

tender lullaby I can feel my heart's beat

멀리가지마.. 날떠나지마 ..혼자서 감미롭게 내 심장 박동을 느낄수가 있어


 

The sky above me turns into a sand hill

내 위의 태양이 모래언덕으로 잠기네


And a river passes through me

그리고 강은 나를 통과해 흘러


Life goes on like a passing car's head lights

인생은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 처럼 지나가

I saw a dream of a southern paradise

나는 남쪽 낙원의 꿈을 본적이 있어

Over the mountains and in the sunshine

산 위와 태양빛 안으로

Red flower sunset wrapped around me

빨간 꽃같은 노을빛이 내 주위를 감싸


I felt so free

나는 자유를 느껴

 

But there was no one to hold my hand I was alone..

그러나 내가 혼자있었을때 내 손 잡아주는이없었네..

And after I woke up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깨고난 후..


Still that dream expands with my body

아직도 꿈은 나의 몸에 영향을 미쳐.


I was thinking so long

나는 꽤 오래 생각하고 있었어


On this land, is there something more than love for me?

이땅위에, 사랑보다 더한게 나에게 있을까?


I know that you are more than paradise..

난 알어 니가 낙원보다 더 좋다는것을..

When your arms are around me

너의 팔이 나를 감쌀때


I realize everything is beautiful, just like a storm..

폭풍처럼 나는 모든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


Though I take a plane to go somewhere far away

비록 나는 어딘가 멀리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But I can't fly away my hert..

그러나 나는 나의 심장으로부터 도망갈수가 없어..

I saw a dream of a southern paradise

나는 남쪽 낙원의 꿈을 보았네


Over the mountains and in the sunshine

산위그리고 태양빛안에


Red flower sunset wrapped around me

붉은 꽃의 저녁놀이 내 주위를 감싸네


I felt so free

나는 자유를 느꼈어 

 

But I know that you are more than paradise..

그러나 나는 알아 니가 낙원보다 좋다는걸..


When your arms are around me

너의 팔이 나를 감쌀때


I realize everything is beautiful, just like a storm..

폭풍처럼 모든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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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출처 : 프랑스문화예술학회

 

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10집 (2004) pp.1~21

 

안  영  현

김  지  혜


 

< 차  례 >

 

 

 

 

 

    1. 서론: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5. 결론 : 영화계의정치화와투쟁영화

             부상의문화적의미



1. 서론 :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엿먹어라 위계제, 권위, 차가운 엘리트주의적 논리를 가진 이 사회

 엿먹어라 꼭대기에 있는 비열한 우두머리들과 관료들

 엿먹어라 자신이 창출한 비참함, 가난, 불평등, 불의를 애써 못 본척하며 사람들을 출신과 숙련기술에 따라 나누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내 마음속의 경찰서를 없애자”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자유로이 즐겨라”

“우리는 굶어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일지라도 권태로움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와는 바꾸지 않겠다”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한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나는 내 욕망의 현실성을 믿기 때문에 내 욕망을 현실이라 여긴다”


이 구호들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될 당시 학생운동 집단들로부터 나온 젊은이들의 열망과 거부의 외침들이다.

프랑스의 ‘68운동’은 학생시위로부터 촉발되어 짧은 시기에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변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위의 구호들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열린 사회의 구현을 위해 기성의 체제와 질서에 항의하는 변혁의 시도였다. 어떠한 사전 준비도 계획도 없이 발발한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대대적인 변혁운동으로 전화된 데에는 대학당국의 안일한 태도와 정부당국의 강경 노선이 그 도화선이었다. 일례로 5월 운동의 시발점이 된 3월 22일 낭테르 Nanterre 대학에서의 학생시위는 학생과 공권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규모의 항의투쟁으로 전화된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니엘 콘베디트 D. Cohn-Bendit를 위시한 좌파 학생들이 체포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 참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 항의집회를 벌이면서 강의실과 총장실을 점거하고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인 학교운영방침에 대한 비판 또한 가하게 된다. 낭테르의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한 대학당국의 즉각적인 경찰지원 요청, 경찰의 학내진입,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학생대중집회, 경찰 재출동 등의 일련의 사건과 특히 3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 걸친 대학폐쇄조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국의 강경 대응책은 결국 다양한 분파의 학생조직들의 가세를 불러오면서 파리 지역으로 파급된다. 5월 소르본느대학으로 거점을 옮긴 학생들의 항의투쟁이 제국주의 전쟁과 교육제도를 넘어 보수적, 권위적, 관료적인 모든 기존의 사회 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본격화되자, 정부당국은 대학폐쇄 조치와 함께 낭테르의 경우에서보다 강경한 대응책으로 맞선다. 5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특히 10일과 11일에 있었던 이른바 ‘바리게이트의 밤’에 벌어진 학생시위대와 진압경찰대간의 격렬한 유혈사태는, 학생운동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노동자들을 투쟁에 참여시키는 한편 ‘전국고등교육 교원노조 SNEsup’의 지지와 일반 대중의 호응까지 얻게 되면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전면적으로 이의제기하는 전국민적 변혁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결집한 다양한 학생운동집단들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된 프랑스의 68운동은 이로부터 촉발된 다른 여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에 잠재해 있던 변혁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 변혁의 대상은 단지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하위 시스템 모두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60년대부터 서구사회의 변혁주체로 부상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기존의 국가, 정당, 가족, 교육제도와 같은 거대 시스템에 대한 비판작업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거대구조를 인간의 개인성을 말살하고 억압과 소외를 동반하는 전체주의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거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자율성과 자발성에 근거한 대안구조들의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이 모색한 새로운 대안적 질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비판적 공공성의 확립,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문화의 정착, 자유로운 자기발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68운동의 참여자들 역시 경제발전과 냉전구도라는 제도와 틀에 구속되어 점차 보수화되어 가는 사회를 공격하면서 일체의 국가 권력기관과 그 하위조직을 시대착오적이고 완고한 폐쇄적 구조로 거부하였다. 예컨대 ‘가족제도’는 성적인 금욕과 물질적인 부, 미래의 사회적 성공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제도권 대학’은 비판의식을 차단하는 권위적 교육과 폐쇄적 학사행정구조, 경쟁위주의 시험제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화와 예술’은 일반 대중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었다. 결국 이 모든 기존구조들은 평등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를 양산하고, 위계와 권위, 구속력과 관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과 증식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변혁의 대상이었다. 68운동이 지향한 세계는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와 같은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세계였으며, 그것은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 유희를 기반으로 한 삶의 시스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래가 아닌 현재, 즉 ‘지금 여기에서’의 삶, 일상생활의 차원에서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68운동은 문화와 정치를 융합한 문화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68운동은 5월 말, 강력한 지지기반인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인상과 자유로운 노조활동을 보장받은 노조의 영향력에 의해 파업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드골 정권이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6월 말 총선에서 우파가 압도적 승리를 거둔 데 뒤이어 70년대에는 우파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이 운동은 분명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그러나 68운동은 다른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즉 68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를 당장 정치 세력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향후 프랑스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각 부문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제기되었던 대안적 제안들은 점진적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시스템 변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은 이 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프랑스문화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성공한 문화혁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을 이후의 프랑스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핵심적인 코드로 보고, 이 운동을 전후하여 영화예술 분야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과 그 문화적 의미를 5월 학생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첫째 68운동 직전 영화인들의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을 소개하고, 둘째 학생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의지를 실천하는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를 소개할 것이다. 세째 혁명 수단으로서 투쟁영화를 만드는 비상업적인 공동제작집단과 감독 개인들 그리고 상업적인 정치영화들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68운동에서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투쟁(정치)영화가 부상한 전모를 밝힐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68년 5월 사회 변혁을 위해 기성 체제와 질서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몇 달 전, 영화계 전체를 잇단 시위로 들끓게 하는 ‘랑글루아 사건’이 터진다. 문제의 발단은 2월 9일, ‘시네마테크 Cinémathèque Francaise’의 설립자이자 사무국장인 앙리 랑글루아 Henri Langlois를 전격 해임한다는 드골 정부측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영화인들에게 랑글루아 해임은 프랑스 영화 발전의 공로자인 한 개인에 대한 보수적인 관료들의 부당한 처사를 넘어 문화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권위적인 방식이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네마테크와 랑글루아 수호위원회가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즉각적으로 결성되어, 장-뤽 고다르 J.-L.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 F. Truffaut, 로베르 브레송 R. Bresson, 찰리 채플린 C. Chapelin, 로베르토 로셀리니 R. Rossellini, 오슨 웰즈 O. Welles 등의 국내외 신․구세대 감독과 마를렌 디트리히 M. Dietrich, 잔 모로 J. Moreau, 시몬 시뇨레 S. Signoret 등의 배우를 비롯하여 롤랑 바르트 R. Barthes, 클로드 모리악 C. Mauriac과 같은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상상력의 자유”를 위한 가두 시위를 벌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마침내 4월 중순 해임 취소 결정을 내리고 랑글루아가 복직됨으로써 이 사건은 권위적인 정부에 대한 영화계의 승리로 일단 마무리된다.

이미 점화가 된 학생운동이 라탱 지구에서 첫 ‘바리게이트의 밤’을 보내게 되는 5월 10일, 이날 개막된 제21회 칸영화제는 프랑스 영화계를 양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즉 영화제 속행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시위대 학생들에 의해 소르본느 대학이 점거되면서 학생운동이 전국적, 전국민적 규모로 확대되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위원회는 5월 13일 24시간의 잠정적인 중단 후 예정대로의 진행을 결정한다. 이에 트뤼포와 고다르가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웰즈와 세 명의 영화제 심사위원(루이 말 L. Malle, 모니카 비티 M. Vitti와 로만 폴란스키 R. Polanski)이 이들에 가세한다. 첫 시사회가 열리는 18일 10시 30분, 고다르와 트뤼포가 영화인들과 비평가들에게 영화제 중단을 촉구하고, 정오에 이들의 지지자들이 시사회장을 점거한다. 그러나 암전과 함께 개막식 커튼이 오르려하자 루이 세갱 L. Séguin과 고다르를 비롯한 영화상영 반대자들이 커튼에 매달려 시사회를 저지함으로써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양 진영간의 열띤 토론 후, 다음날 아침 제작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결국 취소된다. 이 ‘커튼 사건’은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됨으로써 이후 68운동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프랑스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랑글루아 해임 사건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은 일화의 차원을 넘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의 영화예술의 위치에 관한 영화인들의 자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생각을 같이 해야 한다는 영화인들의 자각은 68년 5월 학생․노동자 운동에 의해 더욱 촉발되어 영화 자체뿐 아니라 사회 제도의 개혁을 위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68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정치, 사회적 의식을 가진 영화인들은 혁명적 영화단체를 결성하여 영화를 통한 사회 변혁운동을 몸소 실천한다.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영화인들의 현실 참여와 사회 변혁 의지는 68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5월부터 ‘영화 삼부회 les Etats Généraux du Cinéma francais(EGC)’라는 전문 영화인들의 결성단체를 통해 본격화된다. EGC는 5월 17일 약 1000여명의 영화 배우, 감독, 비평가와 기술자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 학생․노동자 운동과의 연대감을 표명하는 한편, 프랑스 영화의 변화와 쇄신의 일환으로 기존의 국가제도와 구조들의 혁명적 개혁을 목적으로 탄생된다. 영화 노동자들의 파업과 칸영화제 중단 지지 결정을 내리면서 EGC가 결성 당일 천명한 다음의 입장표명은 그들의 설립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첫째 농성 중인 학생과 근로자들과의 연대감을 보여주고, 둘째 경찰 탄압에 항의하고, 셋째 이를 통해 드골 정권과 영화산업의 현행 구조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함이 그 골자였다.

이 때부터 EGC를 중심으로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혁명적 운동이 전문, 비전문 영화인들의 공동 활동을 통해 전개된다. EGC는 기술자 노조와 프랑스 국영라디오․TV방송국 ORTF의 감독들, 고등영화학원 IDHEC과 영화․사진학교 EPC의 학생들로 각각 구성된 ‘노동위원회’들과, 파업 중에도 영화 촬영을 허용하는 ‘특례 위원회 la Commission de Dérogation’를 창설한다. 각각의 노동위원회들은 의장을 두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 각자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운용방식을 취하였으며, 파업을 주도하고 “부문별 세분화로 영화를 억압해온 관료제와 직업구획, 단편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한” 제도 마련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한편 영화인들의 혁명적 역할과 혁명을 위한 영화의 활용을 강조하는 특례 위원회는 학생, 노동자 운동이나 베트남 협상 등과 같은 진행중인 시대적 사건들의 촬영과 보급을 담당하였다. 그 목적은 파업이나 농성 현장에 모인 노동자나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동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통한 혁명의 대중적 확산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상영은 상업적 구역과 무관한 각 운동 분파들의 지엽적인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두 위원회를 기반으로 1968년-1969년 동안 EGC는 무엇보다 정치영화 제작의 활성화에 주력한다. 즉 진행중인 사건들의 즉각적인 촬영을 위해 제한된 제작 수단을 갖춘 소규모의 팀들을 파리를 비롯한 지방 곳곳의 운동 현장에 급파하고, 뒤이어 그 필름들을 때로는 강제적으로 상업 구역의 영화관에 보급케 함으로써 68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 기간 동안 EGC의 후원을 통해 제작된 영화는 약 60편 정도로, 대부분은 개인이 아닌 공동 제작과 익명 발표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길이는 ‘전단영화 Ciné-tracts’와 같은 2분에서부터 2시간 30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영화의 유형은 16밀리나 슈퍼 8 super-8 또는 비디오로 촬영된 작은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영화들의 진정한 보급은 68사태가 진정된 이후에야 제작자와 감독, 배급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EGC의 중재로 시작되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외국으로도 보급된다. 그런데 이 영화들 중 어떤 것도 국가 산하 기관인 검열 위원회에 회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EGC의 모든 영화는 드골 체제에 몰려 ‘금지영화’로 지정된다. 따라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정치 영화에 대한 검열제도가 폐지되는 1974년 이전까지 일반 대중은 이 영화들을 접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영화를 통한 대중적 혁명의식의 고취라는 EGC의 명목은 사실상 큰 성과 없이 유토피아적인 희망으로만 머물게 된다.

한편 영화 개혁을 위한 새로운 제도 마련은 EGC 총회 Assemblée Générale에 의해 추진된다. 총회의 운영 방침은 “구성원 모두가 대표자이며 각자는 다른 이와 동등한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각의 개혁안은 참여자 각 개인의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안건 채택은 총회의 토론을 거쳐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업) 영화의 새로운 구조를 위한 19개의 계획안에는 각 항목별로 1300명의 참가자들 각 개인의 이름이 수록된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사실 각기 다른 이념을 지닌 구성원들간에 잦은 의견대립을 초래함으로써 전체 의견을 수렴한 종합 개혁안 구성에 많은 어려움을 유발한다. 결국 하나의 종합 개혁안을 만들려는 총회의 취지는 무산되고, 6월 5일 EGC에 제출된 총 19개의 개혁안 중 4개의 안만을 채택한 간단한 동의안이 나온다. 그 동의안은 다음의 6가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1. 공공 영화 구역의 설립, 2. 언론 배급사와 같은 진정한 영화 배급사 설립(사설 배급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감독 자신에게 영화상영 보장을 해주기 위한 목적), 3. 영화인의 자주관리, 4. 아동보호를 위한 통제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검열 폐지, 5. 초, 중, 고, 대학에서의 시청각 매체 교육의 통합, 6. 자주 관리되는 TV와 영화의 통합. 이 개혁안 중 ‘자주 제작’,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은 정치색이 짙은 ‘투쟁영화’를 만드는 그룹들에 의해 실천되며, 검열제도는 68운동 이후 국가정보국이 폐지되고(1969) 문화부로 이양됨으로써 상당부분 완화되다 1974년 정치 검열 완전 폐지라는 성과를 올린다.

새로운 영화제도의 마련은 무엇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현실과 단절된 프랑스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환으로 EGC는 영화가 갇혀 있고 영화에 구속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 특히 국립영화소 Centre National de Cinémathèque의 구조를 “반동적인”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평가인 장-루이 코몰리 J.-L. Commoli와 감독인 자크 리베트 J. Rivette, 루이 말, 알랭 레네 A. Resnais 등의 이름으로 EGC에 제출된 “일반 노선 La ligne générale”이라는 제목의 개혁안은 이러한 국가 기구를 해체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준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인 이윤 추구로 인해 상품의 차원으로만 축소된 영화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국립영화소나 위니프랑스 Unifrance같은 기관을 통해 그 천박한 공모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드골 정부를 공격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익 산업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경제와, 영화 종사자 모두가 동등한 급여를 받는 완전 평등주의 급여원칙을 제안함으로써 분명한 혁명적 노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좌파 학생들의 노동자 집단과의 협력 실패로 68의 급진적 변혁운동이 그 통일성을 상실하면서 ‘미시정치’로 대체되듯이, 정부의 5월 사태 수습이후 EGC의 활동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즉, EGC는 구체적인 대책을 원하는 조합소속 전문 영화인들과 대개는 영화 지망생들인 ‘과격파’들로 양분되어 결국은 반쯤 실패하여 분산되고 만다. 아주 다른 경향들의 결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일시적일 뿐이었음을 EGC 역시 한계로서 드러낸다. 따라서 68년 9월에 EGC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150명에 불과했고 영화 보급 그룹들의 운영을 맡은 집단은 1970년 초 자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68운동의 좌절 이후에도 EGC의 많은 구성원들은 “다른 영화의 구축을 통해 국가 제도의 밖에서 그리고 그 제도에 대항해 지속적인 투쟁을 한다”는 혁명적 노선을 고수해 나간다. 이들은 각자의 이념에 따라 소규모의 독립 제작 집단을 형성하고, 국가 제도나 사회에 가장 급진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투쟁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68정신을 계승해 나간다.

68운동 동안의 EGC의 활동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새로운 정치, 사회적 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더욱 현실 참여적인 영화로 향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 영화는 상업적이든 비상업적이든 동시대의 문제를 반영하면서 이전보다 강한 비판 의식을 보여주는 이른바 정치 영화를 급부상시킨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약 10년 동안 혁명적 노선의 집단이나 이의제기적인 감독 개인이 제작한 투쟁영화들의 현저한 증가는 낭만적 혹은 비현실적인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상업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프랑스 영화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는다.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허구가 아닌 현실을 즉 시대의 문제와 관심사를 영화에 반영하는 참여 혹은 정치 영화는 물론 68년 이전부터 존재해 온 장르이다. 그러나 68년경부터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행동파들이나 그 지지자들에게 단순히 관조적이고 기록적인 측면이 돋보이는 이러한 아방가르드 영화는 혁명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억압받는 인간들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들이 지향하는 영화는 당연히, “허구와 우화들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부르주아 대중영화”(수평영화 le cinéma parallèle)가 아니라 직접적, 적극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억압과 저항을 보여줄 수 있는 투쟁영화(수직영화 le cinéma perpendiculaire)가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투쟁영화는 68운동 이후 변화하는 사회의 요청(여성 조건의 자유화 및 성의 평등, 성적 일탈과 일탈적 행동의 자유, 노동의 자유 선택 등)과 조화를 이루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투쟁영화들은 68년 5월 이후부터 상업적인 경로 밖에서 구축된 공동 제작이나 배급 단체들의 지속적인 증가로 팽창한다. “디나디아 Dynadia”(공산주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주의 영화인 CRP”, 고다르를 중심으로 한 “지가베르토프 Dziga-Vertov”(마오이스트), “슬롱 SLON” (개방주의), “붉은 영화 Cinéma rouge”(트로츠키스트), “아프리카 혁명 Révolution- Afique”(국제주의) 등과 같이 EGC를 계승한 다양한 이념의 소집단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한다. 이 집단들은 68운동이 그랬듯이 전문 영화인들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비전문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형성되었으며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개량주의’, ‘반수정자본주의’를 표방하였다. 1970년부터 지역성 옹호(“시네 옥시탕 Ciné Oc” 1970, “시네마 브르타뉴 Cinéma-Bretagne” 1972 등)나 사회 그룹(“농민 전선 Front Paysan” 1972), 페미니즘(“국제여성영화 Ciné-Femme International”) 옹호 등과 같이 분명한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 설정된 새로운 조직들이 가세하면서 이 장르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집단들은 모두 자본주의 상업망을 거부하고 개인이 아닌 공동이 참여하는 ‘자주 제작’과 ‘자주 보급’의 원칙을 실천하였다.

투쟁영화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분류된다. 모택동의 문화 혁명론에서 권장하는 바와 같이 “민중을 각성, 고양시키고, [...] 그들에게 단결과 투쟁을 촉구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그 하나이다. 이들의 영화는 메시지의 효율적인 민중적 침투를 위해 스펙터클 영화들의 허구적 장식을 배제한, 전통적인 서술-재현 방식을 취하며 다큐멘터리 방식을 선호하였다.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을 제외한 위에 제시된 나머지 모든 그룹이 이 경향에 속한다. 이 영화들은 선전적이고 교훈적인 측면에 치중한 반면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나 구성에 소홀함으로써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때때로 대중 침투력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장 점거를 주제로 한 투쟁영화들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특히 68년 5월에 촬영된 몇몇의 영화들만이 전투적인 영화의 전형이면서도 무미건조함을 벗어난 영화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68년 5-6월 르노-플랭 Renault-Flins공장에서 벌어진 한 달간의 노동자 파업에 관한 내용을 담은 «투쟁과 정복 감행 Oser Lutter, oser vaincre»은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표현기법을 차용함으로써, 그리고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인 공장에 항의하는 한 여성 노동자와 그녀에게 작업 재개를 권고하는 노동총동맹 CGT의 두 조합원에 관한 이야기 «원더 공장에서의 작업 재개 La reprise du travail chez Wonder»는 강한 현장감과 사실성에 의해 같은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투쟁영화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주 보급’ 방식에 있었다. 영화 보급은 종종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때때로 방치됨으로써 많은 영화들이 사장되거나 일회성 상영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배급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영화들은 상업적 경로의 예술․실험관 상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이 방법은 잠재적인 대중의 수를 직접적으로 늘리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미디어의 파급효과를 통해 주변부 배급망에 그들 영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장 성공한 영화가 바로 비밀 낙태의 위험과 추문을 고발하는 «A의 이야기 Histoire d’A»(1973)이다. 완전 금지 판정을 받은 이 영화는 매스컴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따라서 프랑스 전역에 분산되어 있는 약 100 개의 ‘낙태피임자유운동 MLAC’ 그룹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상연됨으로써 약 20만 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투쟁영화의 또 하나의 경향으로는 메시지(내용) 자체만큼 메시지의 형식을 탐구하는 지가베르토프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혁신적인 양식과 형식을 좌파적 정치성과 결합시키는 급진적인 미학 창조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이 그룹의 지도자인 고다르는 할리우드 영화의 잘 짜인 내러티브 구조를 미국 제국주의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현실을 마치 있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들의 모든 영화를 부르주아적 가치에 부합하는 영화로서 비판하였다. 고다르 집단은 전통적인 기법의 상업영화나 수평영화, 재현-서술적인 수직영화 모두를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켜 현실을 잊게 하는 부르주아 영화로 단정하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부르주아 영화의 문제점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에 있었다. 즉 관객이 영화를 보며 마치 현실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을 틈타 감독 혹은 제작자의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을 의도적이건 무의도적이건 관객에게 주입한다는 데 있었다. 관객의 이러한 무의식적 몰입을 막기 위해 고다르는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리 두기 효과 effets à distance’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점프 컷 Jump cut’,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하기’, ‘평면적 몽타주’, ‘평면적 미장센’ 등의 형식과 다큐멘터리적인 양식인 핸드 핼드 카메라의 사용, 거리 로케이션 촬영, 르포르타주적인 성격의 인터뷰 장면 삽입 등을 접목시킨다. 그 목적은 이러한 반부르주아적 카메라 스타일을 통해 영화가 주는 현실감의 환상을 파괴하고 관객이 영화(이야기의 줄거리나 주인공들)에 동화됨이 없이 능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작품의 의미작용에 함께 참여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다르의 이러한 미학을 바탕으로 지가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정치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방법” 즉 ‘영화의 정치학’에 치중한다. 따라서 이 그룹의 영화들은 미학적인 질문들에 경도된 나머지 정치적 현실들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혁명적 영화의 중요한 측면인 현실을 결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의 지나치게 난해한 점과 정치영화인들을 겨냥한 제작 방법론의 제시는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접근조차 어렵게 만듦으로써 소수의 지적 관객만을 위한 영화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지가베르토프 영화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만사쾌조 Tout va bien»(1972)는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 의해 사주와 함께 감금된 미국의 한 여자 특파원(Jane Fonda)과 한 광고영화 감독(Yves Montand)의 의식의 변화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학생들로부터 노동자들, 여성해방에 이르기까지 전투적인 정치 활동에 몰입하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파노라마적으로(컨텍스트와 무관하게 군데군데 삽입되는 콜라주 기법을 통해) 조사함으로써 동의와 갈등의 다양한 영역들을 지적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토론을 자극하고 관객을 생산적인 분석으로 이끌기 위한 브레히트적 효과의 사용은 사실 전체 줄거리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에 관한 긴 정치적 담론과 실험적 영상들로 가득 채워진 이 영화 역시 고다르 추종자들과 일반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공동 제작의 세력권 내에 감독 개인의 비판의식을 담은 영화들도 투쟁 영화의 한 지류로서 존재한다. 예컨대 메드 옹도 Med Hondo의 «오 태양이여 Soleil Õ» (1970)와 «비코 흑인 가족 les Bicots-nègres nos voisins»(1974), 그리고 알리 갈렘 Ali Ghalem의 «멕투 Mektoub»(1969)와 «또 다른 프랑스 l’Autre France»(1976), 롤 뤼즈 Raul Ruiz의 «추방자들의 대화 Dialogues d’exilés»(1974)는 프랑스 거주 외국인들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영화들에서는 불법노동자 혹은 정치 망명자로서의 이방인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과 정부 정책의 실책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장 슈미트 Jean Schmidt 역시 «타락한 천사들 les Anges déchus de la planète Saint-Michel»(1978)에서 파리를 방황하는 변두리 지역 주민과 마약 중독자, 극빈자들의 절망적 삶을 통해 하층 계급의 소외의 문제에 천착한다.

투쟁 영화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68년 5월부터 70년대 중반까지만 보더라도 이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의 수는 대략 500편 가량에 이른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파적인 실천이 자본주의 체제 밖의 주변부 영화 집단들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례로 1978년 표준 영화(film)를 활용하는 전문적인 사회운동그룹이 약 30개 그리고 비디오를 사용하는 약 6개 정도의 그룹이 68운동 이후의 사회변혁 활동을 계승해 나간다.


68이후 영화의 정치화 현상은 상업영화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업영화는 새롭게 등장한 ‘정치적 문화’에 영향받으면서 점점 더 사회에 대한 이의제기에 참여하는 정치적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실천을 전위에서 담당함으로써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진정으로 사회 변화의 동인이자 선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상업적인 정치영화는 그 후위에서 수동적인 행위자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해 상업영화의 정치화는 68이후 변화한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접근할 수 없는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상업적인 투쟁영화의 감독 코스타-가브라 Costa-Gavra가 강조하는 바 “확고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정치를 극적 제재로 다루고 분명한 방식으로 시사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펼치는 정치영화는 70년대에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러나 그들을 구속하는 경제적, 법적 장치 안에서 상당수는 허용 가능한 이의제기의 입장을 취하며, 확립된 이념적 해석들에 의거해 작용하며, 진정한 사회적 단절의 태도는 자제한다.

상업적인 정치영화 역시 대부분의 투쟁영화들처럼 메시지 전달을 중요시하나 표현 방법상에 차이를 보인다. 일반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많은 관객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위한 방법으로 상업영화는 고전적인 허구를 매개로 스펙터클의 모든 요소들과 고전적인 재현-서술 기법을 활용하며 형식적으로는 영화 장르들의 원칙을 준수한다. 같은 기법을 채택하는 68이전의 주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정치, 사회적 이의제기를 암시가 아니라 영화 전면에 공공연하게 내세운다는 데 있었다. 비판적 관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소위 ‘문제 à thèse’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검토 대상은 주로 사회와 사회의 불의, 제도적 폭력, 모든 범주의 제국주의 등이었다.

코스타-가브라는 상업영화를 지향하면서도 행동파적인 비판의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영화들은 자주 투쟁영화의 범주로 분류되었다. 예컨대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Z»(1968)는 관객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현상이 된다. 이 영화는 잠재적인 파시즘, 대중들 속으로의 경찰 잠입, 사법 기관과 정부의 유착, 극우파와 공모하는 권력 등을 허구의 방식을 통해 가차없이 분석하면서 1967년 그리스에 정착한 장군들의 독재를 설명한다. 이 감독은 뒤이은 영화들에서 그의 주제를 확장하여 정의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1951년의 프라하 숙청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억압을 고발하면서(«고백 l’Aveu», 1969) 좌파를, 남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계엄령 Etat de siège», 1972) 우파를, 비시체제 동안의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회상시키면서(«특수징계부대 Section spéciale», 1974) 과거를 단죄한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모든 전체주의를 고발하면서 코스타-가브라는 섬세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교육적인 기능에 주력한다. 그의 영화들은 오락적, 대중적, 상업적일 뿐만 아니라 시민 정보와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내는 영화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들은 상업 영화 감독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 그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정치 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한다.

그 한 예로 이브 부와세 Yves Boisset를 볼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정치 영화들은 금지와 압박과 협박을 촉발시킨다. 사람을 죽인 파렴치하고 잔인한 한 경찰서장이 상사들의 보호를 받고 악당들과 음모를 꾸미고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경찰 서장 Un condé»(1970)은 다섯 달 가량의 금지 후 3분 삭제와 한 장면 완전 재촬영으로 상영 허가를 받는다. 고문의 제도와 방법, 기능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부와세는 많은 영화적 터부를 일소하고 돌파구를 연다. 예컨대 파란 많은 마르세이유 지방의 선거에 관한 «천사의 추락 le Saut de l’ange»(1971)이 약간의 소요를 일으킨다면, 벤 바르카 Ben Barka 사건에 관한 «테러 l’Attentat»(1972)는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한다. 부와세는 실제 사건에 허구적 요소를 상당 부분 덧칠함으로써 촬영을 재개한다. 즉 벤 바르카의 시체는 파리가 아닌 모로코로 옮겨져 사막 어느 모퉁이에 매장된다. 또한 갑작스런 정부 지원 중단으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던 «우두머리 Ras»(1973)에서 부와세는 인간적인 평화주의를 가미해 여전히 금기시 되는 주제인 알제리 전쟁을 다루며 탈영을 옹호한다. «뒤퐁 Dupont Lajoie»(1975)에서는 강간당한 아랍 여인과 경찰 당국의 은폐 명령, 편파적인 사법 기관의 이야기를 통해 70년대의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고발하는데, 보수파들로부터 아주 신랄한 공격을 받는다.

이처럼 비상업적인 투쟁영화와 나란히 정치적 색채를 띤 상업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함으로써 68년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화계는 정치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영화의 정치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5. 결론: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


68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던 영화 삼부회는 영화 내적으로는 영화를 허구로부터 현실로 복귀시켜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려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감독/기술인, 전문인/비전문인과 같은 직업구획의 경계, 위계질서를 허물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국가 기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한편, 영화인들 자신이 만드는 자율적인 영화기구와 제도마련을 통해 창작의 자유를 그들 자신에게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혁명적인 사회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영화제작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68운동의 좌절은 이후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진행시켰다. 예컨대 알튀세르 L. Althusser는 그 좌절원인을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탄압 이전에 대중문화와 교육,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위력 때문으로 보았다. 극좌파 경향의 진보주의 영화인들 역시 이 기구들이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지니면서 하나의 억압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하였다. 68년을 전후로 마오이즘과 같은 극좌파 계열의 분명한 정치적 노선을 취한 영화전문잡지 «카이에 Cahiers du Cinéma» 또한 같은 맥락에서 ‘혁명’이 좌절된 원인을 영화 자체가 표상하는 허위의식 때문으로 보았다. 즉, 호르크하이머 M. Horkheimer와 아도르노 Adorno가 대중문화들의 문제점으로 문화산업을 통한 ‘허위의식’의 유포를 지적했듯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실제적인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거짓현실과 허위욕구로 인해 변화와 저항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통찰은 무엇보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영화를 문제로 지적하게 한다. 그것은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환상을 조작하기 때문이고(보니체 Pascal Bonitzer), 지배 이데올로기와 이윤동기가 결합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코몰리)이라는 것이다. «카이에»의 이러한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은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70년대에는 프랑스와 세계가 처한 현실의 문제, 즉 영화가 담아내는 세계 자체의 문제에 더욱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68년 이후 프랑스 영화계에 나타난 투쟁영화의 부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이제 확실히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가 중요해진다. 우선,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창조하는, 다시 말해 허위의식을 유포,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비판적 시각에서, 이의제기의 차원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영화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러한 영화 제작의 효율적인 한 방법은 동시대의 문제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되 그것을 표상, 즉 표현이나 상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설명적인 차원에서 지적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이 투쟁영화가 추구한 것이었고, 그것은 사회변혁을 도모하기 위한 대중적 각성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졌다.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비판적 의식을 갖게 하려는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이든, 용이한 메시지 전달을 통해 대중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그룹이나 감독 개인들이든 이들 모두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변화와 혁명의 한 수단이었다. 즉 이들 영화의 목적은 착취-피착취, 억압-복종과 그것이 은폐되는 사회적 모순들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68운동이 실현하려 했던 바이며, 따라서 투쟁영화와 더 포괄적으로는 상업적인 정치영화가 그 미완의 실현을 계승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투쟁영화에는 또한 68정신이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들이 취한 ‘공동 제작’과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의 방식은 68년 5월 운동 중 노동자평의회가 공장 관료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공동체의 자율성을 실천했던 바이며, 비상업적인 제작집단들은 사회 계층들간의 격차와 소외를 동반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와 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68이념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 집단들 역시 학생․노동자 운동 집단들처럼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영화가 주제로 삼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또한 68이념의 내용에 다름 아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금기시 된 알제리 전쟁과 고문의 문제 그리고 검열의 제재를 받는, 관료와 정치인, 경찰들의 비리에 대한 강도 높은 폭로는 “금지된 것을 금지한다”는 68구호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투쟁영화는 이런 점에서 68운동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영화를 통한 제2의 68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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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인간해방, 노예들의 드라마!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혁명가1 - 스파르타쿠스]
 

로마 지배계급을 공포에 떨게 한 검투 노예들의 무장봉기… 그 정점에서 빛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전설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더러운 로마놈들아, 너희들은 인간의 모든 꿈과, 인간의 손에 의한 모든 노동과, 인간의 이마에 맺힌 모든 땀을 조롱하고 있다. …너희들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취미라곤 유혈의 검투를 관람하는 것뿐이다. …너희들의 화려한 그 생활은 전세계에서 강도질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장이다. 전세계의 노예들에게 우리는 외칠 것이다. 일어나라! 쇠사슬을 풀어버려라!” (하워드 파스트, <스파르타쿠스>에서)

검투 노예 봉기, 70여명으로 시작하다

기원전 73년 여름,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부와 영광으로 흥청대고 있을 때 검투 노예들이 카푸아에서 탈출해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70여명으로 시작한 검투 노예의 이 봉기는 곧 수많은 노예들이 가세하면서 수만명 규모로 커진다. 그들은 중부에서 북부의 알프스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남부의 땅끝 항구 레기움까지 전진하는 등 2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그들의 분노 앞에 로마는 연전연패하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고대 세계를 뒤흔든 이 검투 노예들의 투쟁은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렇게 기록됐다. ‘스파르타쿠스 노예전쟁’ (The Spartacus Slave War).

노예제를 운용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영원히 죄악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일하는 가축처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소유물처럼,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의 재산처럼 간주하고 취급하던 죽음과 죄악의 시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번영을 누린 나라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본격적인 노예무역을 대대적으로 벌인 네덜란드와 영국,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간을 살육하고 노예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흑인 노예를 19세기 후반까지 활용했던 미국…. 이런 압제 앞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궐기하곤 했다. 그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마의 지배계급을 겨냥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노예들이다. 그 가장 빛나는 정점에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이 있다.


△ 영화 <스팔타쿠스>의 전투장면. 노예들은 위대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죽어간다. (사진/ Rex Features)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전쟁은 로마 시대에 벌어진 대규모 노예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자 세 번째의 것이다. 그에 앞서 두 노예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시칠리아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에서 132년까지 계속됐고, 두 번째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부터 102년까지 이어졌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 전쟁은 에우누스와 클레온이라는 이름의 시리아(또는 중동) 출신 노예들이, 두 번째 전쟁은 아테니온과 살비우스라는 시칠리아 출신 노예들이 지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약 70년 동안 30여년 주기로 세 번씩이나 노예전쟁이 잇따라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당시 광범한 농업노예제도가 정착하면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억압·수탈 체계를 노예들에게 종신토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노예들의 반발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이런 가혹한 체제와 달리 노예가 되는 사람들은 한때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새로운 정복지에서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로마 지배 지역에서 정치적 혼란이나 범법에 따라 갑자기 노예로 전락한 사람이 많았다.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 마침내 떨쳐일어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셋째, 시칠리아 등 변경에 새로운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반농·반목축 형태의 독특한 노예들이 크게 늘어났다. 환금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라티푼티움 지대에서는 농업노예를 엄격한 감시 아래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쇠사슬을 채워 재우는 데 반해, 변경의 노예들은 상대적으로 이동도 자유롭고 상황에 따라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무장도 해야 했다. 기동성과 무장 가능성이 뛰어났던 셈이다. 시칠리아에서 두 차례 노예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런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았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선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크와 <로마내전사>를 쓴 그리스 출신의 아피안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 19세기 지오바뇰리의 소설 <스파르타코>의 삽화에 나타난 스파르타쿠스. 영화와 달리 스파르타쿠스가 동료 크릭수스를 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로마 검투 노예의 중심지인 중부 카푸아의 한 검투 노예 양성소에서 주로 골인(Gauls·오늘날 프랑스 지역 사람들)과 트라키아인(그리스 북동부 변경지대 출신 사람들)으로 이뤄진 검투 노예 70여명이 탈주한다. 다른 검투 노예 양성소로 무기를 싣고 가던 마차 행렬을 털고 무장한 노예들은 산속에 거점을 마련한다. 그들의 지도자 세명 가운데에는 트라키아 목부 출신으로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다. 로마에서 행정관인 클로디우스가 병력 3천명과 함께 진압군으로 파견된다. 클로디우스는 노예들이 진을 친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길목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스파르타쿠스는 산에 자생하는 식물의 넝쿨을 이어 튼튼한 밧줄 사다리를 만들어 병력을 비밀리에 내려보낸 다음 로마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둔다. 이 승리를 계기로 주변에 있던 목축 노예들과 농업 노예들이 대거 노예군에 합류한다. 두 번째로 다시 행정관인 프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바리니우스의 부관으로 2천 병력을 이끄는 푸리우스와 격돌해 그들을 물리치고 여세를 몰아 로마 진압군의 진지를 유린해버린다. 이 전투에서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코시니우스를 죽이고 그의 말도 빼앗는 것을 계기로, 로마 전역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퍼짐에 따라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자신들이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알프스 돌파를 목표로 삼는다. 알프스를 넘어 각각 골과 트라키아, 게르마니아 등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다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돌파를 저지하려는 로마 키살핀 골 총독 카시우스의 1만 병력을 패퇴시켰는데도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노예군 진영에 가담한 엄청난 머릿수에 도취한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져 약탈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 로마 검투경기를 묘사한 2세기 무렵의 모자이크. 리비아 트리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로마 원로원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집정관을 두명이나 파견한다. 그 가운데 한명인 겔리우스 프블리콜라는 스파르타쿠스 주력군에서 이탈한 게르만 노예군을 기습한다. 게르만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스파르타쿠스의 통제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게르만군은 대패하고 노예군은 살육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건재했다. 또 다른 집정관인 렌툴루스가 대규모 야전군으로 포위하자 스파르타쿠스는 반격에 나서 렌툴루스를 향해 돌진했다.

페텔리아 산속에서 최후를 맞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막대한 병참 물자를 노획한다. 로마 원로원은 이 패전 소식에 분격해 두 집정관에게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크라수스를 노예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많은 로마의 귀족들이 전쟁 수칙에 따라 크라수스의 진압군에 가담한다. 크라수스는 일단 로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스파르타쿠스 후방에 있는 무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둥글게 배치해 스파르타쿠스를 지속적으로 포위하는 진형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미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 돌입해 대패하고 만다. 많은 로마군들이 죽고, 전장에서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난다. 크라수스는 이 패전 뒤 오랫동안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는 고대 로마의 무시무시한 의식을 재현한다. 전장에서 맨 먼저 도망친 군인 500명을 10명씩 50개 그룹으로 나눈 뒤 징벌로써 각 그룹에서 한명씩 제비를 뽑아 죽이게 한 것이다. ‘데시마시용’(10분의 1씩 죽이는 것)이 벌어진 것이다. 이 참혹한 처벌을 모든 병사들이 똑똑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 서기 1세기 무렵 로마 폼페이에 있던 검투 노예 양성소 막사. 마당은 훈련장이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는 남쪽을 향해 전진하면서 바다를 통해 해외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남쪽 땅끝 레기움까지 가서 배로 시칠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해적들과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해적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다로 달아나버린다. 그사이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남쪽까지 쫓아내려와 노예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장벽 구축 작업에 돌입한다. 폭 4.5m, 깊이 4.5m 되는 도랑을 동쪽 바다 끝에서 서쪽 바다 끝까지 약 50km 거리에 걸쳐 판 뒤 다시 그 뒤에 높은 장벽을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처음에 이 장벽을 대수롭게 보지 않던 스파르타쿠스는 보급물자가 바닥나면서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이 바다와 장벽에 섬처럼 갇힌 채 겨울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병력의 3분의 1만 장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결국 크라수스 군대의 공세에 맞서 노예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패배한다. 스파르타쿠스와 분리된 노예주력군은 모두 1만2300명이 살육당하는 패배를 겪는다. 크라수스는 전투 뒤 노예군 가운데 단 2명만이 등쪽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지 않고 정면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것이다.

한편 동쪽 항구 브린디시움을 향해 가던 스파르타쿠스는 외국에 주둔하던 로마군이 이 항구를 통해 이미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크라수스의 주력군과 대혈전을 벌인다. 이 전투 뒤 스파르타쿠스는 페텔리아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추격해온 로마군과 싸우다 숨진다.

스파르타쿠스는 죽었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위해 무장봉기한 그의 이름은 2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


△ 마르크스. 그를 시작으로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는 모두 스파르타쿠스를 열렬하게 존경했다. (사진/ GAMMA)

1865년 칼 마르크스는 숙제를 하는 딸 제니로부터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스파르타쿠스’와 ‘케플러’라고 대답한다. 스파르타쿠스를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당시 벌어지고 있는 2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외국의 간섭 아래 있던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는 낭만적 애국주의자 주세페 가리발디의 투쟁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소식이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아피안의 <로마 내전사>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었네. 매우 가치 있는 저술이야.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인물로 꼽힐 만하네. 위대한 장군(가리발디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이자 고결한 인물이며, 고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야.”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스파르타쿠스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편지에서 보인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작은 힌트를 계급투쟁론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은 바로 레닌이다. 그는 이런 논지에 따라 로마 세계를 노예와 지배자 사이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계급투쟁으로 정의한다. 레닌은 <국가>에 이렇게 쓴다.

“역사는 압제를 벗어던지려는 피압박 계급의 지속적인 시도로 채워져왔다. 노예제의 역사는 수십년 동안 지속된 노예해방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멍에에 대해 진정으로 투쟁하는 유일한 독일의 정당인 공산당이 ‘스파르타쿠스주의자’의 이름을 채용하고 있다. 독일 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노예봉기(slave insurrections) 가운데 하나인 2천여년 전의 그 봉기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가장 걸출한 영웅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 이름을 채용한 것이다. 전적으로 노예제에 기반한 채 오랜 세월 절대전능한 것만 같던 로마 제국은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무장하고 단합해 거대한 군대로 변신한 노예들의 전국적인 봉기로 충격 상태에 빠지고 치명상을 입었다.”

그 뒤 소련 시대에 이르러 스탈린이 승인한 ‘단계이론’(stage theory)에 따라 로마의 노예 반란은 당대 계급 시스템의 지배를 전복시킨 러시아혁명이나 프랑스혁명과 같은 범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국가 주도의 공산주의 이론작업에 따라 스파르타쿠스는 본래의 인간주의적 활력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본 측면도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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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Momento

 



♪ 환한 음악 ♪

El Momento ....Yuriko Nakamura 멋진 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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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비디오의 발전

계급 투쟁이 미국 노동

비디오 사용을 강화한다.

Steve Zeltzer

Producer, Labor Video Project, Labornet Steering Committee

Recording Secretary UPPNET

미국 노동 계급과 미국 법인 사이의 대립 증가는 더 많은 노동 비디오와 라디오 제작업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비록 매체를 통제하는 회사들에게서는 이런 투쟁의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UPS 국내 트럭 운전수사들의 파업에서 GM의 파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싸움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유화에 반대하는 싸움을 포함하여 이런 교전들은 지방 단위에서 노동 비디오의 사용이 증가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칼 브라이언트는 UPPNET 준비위원회의 회원이자 'TV214'라 불리는 지방 214 텔레비전에서 매달 방영되는 "국내 집배원 연합" 텔레비젼 쇼의 창시자이다. 그의 공로 덕택에 오늘날 코네티컷주와 코롤라도주에서 두 가지 다른 집배원 쇼가 생겨났고 더 많은 쇼들이 추진중이다. 그의 쇼중 많은 것들이 우편 서비스에 대한 사유화 및 하도급계약에 반대하는 투쟁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디오와 오디오를 확대하기 위한 인터넷 사용은 늘어나는 노동 TV쇼들이 지역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웹상에서 사용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카고에 있는 레이버비트는 그들의 쇼를 웹상에 띄우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노동 비디오 프로젝트는 최근 웹상에(http://brighpathvideo.com/html/default_KPFA_protests.htm) 노동, 파시피아, 매체 등에 대한 발언대를 구축했다.

올해 노동 비디오 및 교육에 대한 가장 역사적인 공헌 가운데 하나는 캘리포니아 교사 연합의 통신 부장 프레드 글래스에 의해 제작된 캘리포니아의 노동 계급의 역사에 대한 "황금의 땅, 일하는 손"이다.

지방과 지역의 성장 및 노동 비디오 사용에도 불구하고 국내 AFL-CIO와 대부분의 국제 노동자 동맹은 지방 노동 비디오 훈련과 제작 지원에 대한 자금지원을 거절했다. 최근 로스앤젤러스에서 열린 AFL-CIO 회의에서 오레곤주 AFL-CIO, 매디슨 및 위스콘신 노동 협의회, 그리고 기타 기관들의 결의문은 집행위원회에서 중재되었고 회의에서 의결되지 않았다. 이렇게 UPPNET가 발의한 결의문들은 AFL-CIO에게 더 많은 노동 프로그램이 제공될 때까지 PBS/NPR 뿐 아니라 모든 상업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인가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요구했다.

노동 비디오 그래퍼 및 프로그래머, 라디오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정기적 노동 매체 교육은 꼭 필요하다. 노동 및 환경,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검열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필요는 다양한 지지를 구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매체의 독점은 독점의 증가와 민주적 의사소통에 대한 공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이런 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받아야만 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정기적인 노동 프로그램을 차단하는 것이 지역 레벨에서의 독립적인 노동 비디오 프로그램의 성장을 막지는 못했다. 포트랜드, 보스턴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노동관련 텔레비전 쇼들이 개설되고 있다.

Pacifia 라디오 네트워크의 대기업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단위 노조들 내부에서 독립적인 노동 매체의 필요성에 대한 토론을 증폭시켰다. Pacifia는 버클리, 로스 앤젤러스, 뉴욕에서 유일하게 정규 노동 라디오 쇼를 방송한다.

인구 20%에게 해당되는 이런 네트워크에 대한 잠재적 파괴는 그들의 목소리를 밖으로 외치려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큰 위협으로 비쳐졌다. 많은 경우, Pacifia 라디오 네트워크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유일한 정규 라디오 방송이다. UPPNET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Pacifia 투쟁을 파악하는데 쏟는 것도 이런 위협의 결과이다.

고로 방송국이 닫히고 노동자들이 내몰렸을 때 항만 지역의 노동운동은 통합되었다.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항의 시위에 가담했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CWA9415와 함께 항만 지역 노동 협의회는 이 시위를 지지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독립 매체를 보호하기 위한 첫 번째 대규모 투쟁이었고 또한 많은 노조들이 노동 비디오, 라디오, 또 다른 신기술 사용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로운 토론을 벌이는 장이 되었다.

이런 투쟁에 대한 최고의 비디오중 하나는 존 파울라와 동업자, Brightpath 비디오의 비디오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www.brightpathvideo.com에 위치한 그의 사이트는 비디오, 오디오, 다른 웹 페이지와의 링크를 이용한 투쟁에 대한 여러 매체의 흥미진진한 접근을 담고 있다.

웹에서 이동하는 비디오/오디오의 멀티미디어 사용은 미국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노동비디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마이크로 라디오의 사용은 KPFA 및 Pacifica 네트워크에 대한 기업의 양도를 반대하는데 있어 가치 있는 자산이었다.

연합 제작자들과 프로그래머들의 네트워크(UPPNET)는 또한 반 WTO 투쟁에 대한 합동 제작 뿐 아니라 나라 전역의 지역사회 (접근) 센터에서 테잎들을 교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 백 수 천명의 노동자들에게 비디오를 어떻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노동 시위현장과 파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비디오를 찍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런 노동자 비디오 그래퍼들을 찾아내서 어떻게 편집하고 텔레비전에 방영하는지 훈련하는 것은 증가하는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의 책임이다. 노동 미디어 센터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원들이 편집, 웹 사이트 등록, 노동 통신 기술을 향상에 대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동시에 사유화, 규제완화, WTO, 주거, 보건, 노동법 등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어야 한다. 이런 형태의 노동 비디오 다큐멘터리는 PBS/NPR과 상업 네트워크에서 제작되지 않는다. 이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수 있는 독립적인 노동 비디오/라디오 제작자를 필요로 한다.

비디오는 또한 미국 노동 운동에 내재한 문제들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 천명의 항만 지역 목수들이 면허 계약에 대해 파업을 감행했을 때, 노동 비디오 기획은 그들의 파업과 조합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연장을 내려놓아라"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전국의 목수들에게 방영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보기 드문 행사에 대한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이런 무모한 파업이 일어난 것은 1974년도였다.

또한 미국의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은 전세계의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과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미국 비디오 그래퍼들의 노력을 통해 터키 노동 비디오 네트워크가 발전하고 있다.

사실 노동 비디오의 발전은 국제적인 임무이다. 세계의 다국적 기업들에 대항하는 전지구적 투쟁에서 노동 비디오 및 전달자들의 전세계적인 협동은 매우 필요하다.

노동 비디오 및 라디오를 노동 문화 및 예술과 결합시키고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노동 비디오 프로젝트는 이제 웹 상에서 노동 문화 및 노동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LabotFest와 함께 매년 7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는 노동문화제를 추진중이다. 감동적인 노동 벽화 뿐 아니라 노동 시, 음악, 그리고 노래를 웹 상에 올리기 위해 그들의 사이트(www.laborfest.net)를 사용하려는 계획이 구상중이다. 예술과 노동 비디오 및 오디오의 통합은 관점을 정립하는 것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동 비디오 그래퍼들과 노동 전달자들은 이런 투쟁들을 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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