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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출처 : 프랑스문화예술학회

 

프랑스 68운동과 영화예술의 변화 : 투쟁영화의 부상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10집 (2004) pp.1~21

 

안  영  현

김  지  혜


 

< 차  례 >

 

 

 

 

 

    1. 서론: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5. 결론 : 영화계의정치화와투쟁영화

             부상의문화적의미



1. 서론 :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


“엿먹어라 위계제, 권위, 차가운 엘리트주의적 논리를 가진 이 사회

 엿먹어라 꼭대기에 있는 비열한 우두머리들과 관료들

 엿먹어라 자신이 창출한 비참함, 가난, 불평등, 불의를 애써 못 본척하며 사람들을 출신과 숙련기술에 따라 나누는 이 꿈쩍도 하지 않는 사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내 마음속의 경찰서를 없애자”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자유로이 즐겨라”

“우리는 굶어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일지라도 권태로움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는 세계와는 바꾸지 않겠다”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한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나는 내 욕망의 현실성을 믿기 때문에 내 욕망을 현실이라 여긴다”


이 구호들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될 당시 학생운동 집단들로부터 나온 젊은이들의 열망과 거부의 외침들이다.

프랑스의 ‘68운동’은 학생시위로부터 촉발되어 짧은 시기에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변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위의 구호들이 상징적으로 암시하듯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열린 사회의 구현을 위해 기성의 체제와 질서에 항의하는 변혁의 시도였다. 어떠한 사전 준비도 계획도 없이 발발한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친 대대적인 변혁운동으로 전화된 데에는 대학당국의 안일한 태도와 정부당국의 강경 노선이 그 도화선이었다. 일례로 5월 운동의 시발점이 된 3월 22일 낭테르 Nanterre 대학에서의 학생시위는 학생과 공권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규모의 항의투쟁으로 전화된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니엘 콘베디트 D. Cohn-Bendit를 위시한 좌파 학생들이 체포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 참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 항의집회를 벌이면서 강의실과 총장실을 점거하고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인 학교운영방침에 대한 비판 또한 가하게 된다. 낭테르의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한 대학당국의 즉각적인 경찰지원 요청, 경찰의 학내진입,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학생대중집회, 경찰 재출동 등의 일련의 사건과 특히 3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 걸친 대학폐쇄조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국의 강경 대응책은 결국 다양한 분파의 학생조직들의 가세를 불러오면서 파리 지역으로 파급된다. 5월 소르본느대학으로 거점을 옮긴 학생들의 항의투쟁이 제국주의 전쟁과 교육제도를 넘어 보수적, 권위적, 관료적인 모든 기존의 사회 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본격화되자, 정부당국은 대학폐쇄 조치와 함께 낭테르의 경우에서보다 강경한 대응책으로 맞선다. 5월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특히 10일과 11일에 있었던 이른바 ‘바리게이트의 밤’에 벌어진 학생시위대와 진압경찰대간의 격렬한 유혈사태는, 학생운동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노동자들을 투쟁에 참여시키는 한편 ‘전국고등교육 교원노조 SNEsup’의 지지와 일반 대중의 호응까지 얻게 되면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전면적으로 이의제기하는 전국민적 변혁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초월하여 자발적으로 결집한 다양한 학생운동집단들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된 프랑스의 68운동은 이로부터 촉발된 다른 여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에 잠재해 있던 변혁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 변혁의 대상은 단지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하위 시스템 모두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60년대부터 서구사회의 변혁주체로 부상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기존의 국가, 정당, 가족, 교육제도와 같은 거대 시스템에 대한 비판작업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거대구조를 인간의 개인성을 말살하고 억압과 소외를 동반하는 전체주의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거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자율성과 자발성에 근거한 대안구조들의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이 모색한 새로운 대안적 질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비판적 공공성의 확립, 토론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문화의 정착, 자유로운 자기발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68운동의 참여자들 역시 경제발전과 냉전구도라는 제도와 틀에 구속되어 점차 보수화되어 가는 사회를 공격하면서 일체의 국가 권력기관과 그 하위조직을 시대착오적이고 완고한 폐쇄적 구조로 거부하였다. 예컨대 ‘가족제도’는 성적인 금욕과 물질적인 부, 미래의 사회적 성공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제도권 대학’은 비판의식을 차단하는 권위적 교육과 폐쇄적 학사행정구조, 경쟁위주의 시험제도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화와 예술’은 일반 대중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었다. 결국 이 모든 기존구조들은 평등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를 양산하고, 위계와 권위, 구속력과 관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과 증식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변혁의 대상이었다. 68운동이 지향한 세계는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와 같은 모든 형태의 금기와 억압, 소외로부터 해방된 세계였으며, 그것은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 유희를 기반으로 한 삶의 시스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래가 아닌 현재, 즉 ‘지금 여기에서’의 삶, 일상생활의 차원에서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68운동은 문화와 정치를 융합한 문화혁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68운동은 5월 말, 강력한 지지기반인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인상과 자유로운 노조활동을 보장받은 노조의 영향력에 의해 파업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드골 정권이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6월 말 총선에서 우파가 압도적 승리를 거둔 데 뒤이어 70년대에는 우파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이 운동은 분명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그러나 68운동은 다른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즉 68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를 당장 정치 세력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향후 프랑스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각 부문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제기되었던 대안적 제안들은 점진적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 시스템 변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은 이 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프랑스문화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성공한 문화혁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문화혁명으로서의 68운동을 이후의 프랑스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핵심적인 코드로 보고, 이 운동을 전후하여 영화예술 분야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과 그 문화적 의미를 5월 학생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첫째 68운동 직전 영화인들의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을 소개하고, 둘째 학생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의지를 실천하는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를 소개할 것이다. 세째 혁명 수단으로서 투쟁영화를 만드는 비상업적인 공동제작집단과 감독 개인들 그리고 상업적인 정치영화들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68운동에서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투쟁(정치)영화가 부상한 전모를 밝힐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2. 랑글루아 해임과 칸영화제 중단


68년 5월 사회 변혁을 위해 기성 체제와 질서에 도전하는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몇 달 전, 영화계 전체를 잇단 시위로 들끓게 하는 ‘랑글루아 사건’이 터진다. 문제의 발단은 2월 9일, ‘시네마테크 Cinémathèque Francaise’의 설립자이자 사무국장인 앙리 랑글루아 Henri Langlois를 전격 해임한다는 드골 정부측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영화인들에게 랑글루아 해임은 프랑스 영화 발전의 공로자인 한 개인에 대한 보수적인 관료들의 부당한 처사를 넘어 문화를 지배하려는 그들의 권위적인 방식이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네마테크와 랑글루아 수호위원회가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즉각적으로 결성되어, 장-뤽 고다르 J.-L.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 F. Truffaut, 로베르 브레송 R. Bresson, 찰리 채플린 C. Chapelin, 로베르토 로셀리니 R. Rossellini, 오슨 웰즈 O. Welles 등의 국내외 신․구세대 감독과 마를렌 디트리히 M. Dietrich, 잔 모로 J. Moreau, 시몬 시뇨레 S. Signoret 등의 배우를 비롯하여 롤랑 바르트 R. Barthes, 클로드 모리악 C. Mauriac과 같은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상상력의 자유”를 위한 가두 시위를 벌인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마침내 4월 중순 해임 취소 결정을 내리고 랑글루아가 복직됨으로써 이 사건은 권위적인 정부에 대한 영화계의 승리로 일단 마무리된다.

이미 점화가 된 학생운동이 라탱 지구에서 첫 ‘바리게이트의 밤’을 보내게 되는 5월 10일, 이날 개막된 제21회 칸영화제는 프랑스 영화계를 양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즉 영화제 속행 여부를 놓고 찬성과 반대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시위대 학생들에 의해 소르본느 대학이 점거되면서 학생운동이 전국적, 전국민적 규모로 확대되는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위원회는 5월 13일 24시간의 잠정적인 중단 후 예정대로의 진행을 결정한다. 이에 트뤼포와 고다르가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웰즈와 세 명의 영화제 심사위원(루이 말 L. Malle, 모니카 비티 M. Vitti와 로만 폴란스키 R. Polanski)이 이들에 가세한다. 첫 시사회가 열리는 18일 10시 30분, 고다르와 트뤼포가 영화인들과 비평가들에게 영화제 중단을 촉구하고, 정오에 이들의 지지자들이 시사회장을 점거한다. 그러나 암전과 함께 개막식 커튼이 오르려하자 루이 세갱 L. Séguin과 고다르를 비롯한 영화상영 반대자들이 커튼에 매달려 시사회를 저지함으로써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양 진영간의 열띤 토론 후, 다음날 아침 제작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결국 취소된다. 이 ‘커튼 사건’은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됨으로써 이후 68운동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프랑스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랑글루아 해임 사건과 칸영화제 중단 사건은 일화의 차원을 넘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의 영화예술의 위치에 관한 영화인들의 자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시대의 흐름과 생각을 같이 해야 한다는 영화인들의 자각은 68년 5월 학생․노동자 운동에 의해 더욱 촉발되어 영화 자체뿐 아니라 사회 제도의 개혁을 위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68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정치, 사회적 의식을 가진 영화인들은 혁명적 영화단체를 결성하여 영화를 통한 사회 변혁운동을 몸소 실천한다.



3. ‘영화 삼부회’와 영화계의 정치화


영화인들의 현실 참여와 사회 변혁 의지는 68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5월부터 ‘영화 삼부회 les Etats Généraux du Cinéma francais(EGC)’라는 전문 영화인들의 결성단체를 통해 본격화된다. EGC는 5월 17일 약 1000여명의 영화 배우, 감독, 비평가와 기술자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 학생․노동자 운동과의 연대감을 표명하는 한편, 프랑스 영화의 변화와 쇄신의 일환으로 기존의 국가제도와 구조들의 혁명적 개혁을 목적으로 탄생된다. 영화 노동자들의 파업과 칸영화제 중단 지지 결정을 내리면서 EGC가 결성 당일 천명한 다음의 입장표명은 그들의 설립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첫째 농성 중인 학생과 근로자들과의 연대감을 보여주고, 둘째 경찰 탄압에 항의하고, 셋째 이를 통해 드골 정권과 영화산업의 현행 구조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함이 그 골자였다.

이 때부터 EGC를 중심으로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혁명적 운동이 전문, 비전문 영화인들의 공동 활동을 통해 전개된다. EGC는 기술자 노조와 프랑스 국영라디오․TV방송국 ORTF의 감독들, 고등영화학원 IDHEC과 영화․사진학교 EPC의 학생들로 각각 구성된 ‘노동위원회’들과, 파업 중에도 영화 촬영을 허용하는 ‘특례 위원회 la Commission de Dérogation’를 창설한다. 각각의 노동위원회들은 의장을 두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 각자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운용방식을 취하였으며, 파업을 주도하고 “부문별 세분화로 영화를 억압해온 관료제와 직업구획, 단편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한” 제도 마련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한편 영화인들의 혁명적 역할과 혁명을 위한 영화의 활용을 강조하는 특례 위원회는 학생, 노동자 운동이나 베트남 협상 등과 같은 진행중인 시대적 사건들의 촬영과 보급을 담당하였다. 그 목적은 파업이나 농성 현장에 모인 노동자나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동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통한 혁명의 대중적 확산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상영은 상업적 구역과 무관한 각 운동 분파들의 지엽적인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두 위원회를 기반으로 1968년-1969년 동안 EGC는 무엇보다 정치영화 제작의 활성화에 주력한다. 즉 진행중인 사건들의 즉각적인 촬영을 위해 제한된 제작 수단을 갖춘 소규모의 팀들을 파리를 비롯한 지방 곳곳의 운동 현장에 급파하고, 뒤이어 그 필름들을 때로는 강제적으로 상업 구역의 영화관에 보급케 함으로써 68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박차를 가한다. 이 기간 동안 EGC의 후원을 통해 제작된 영화는 약 60편 정도로, 대부분은 개인이 아닌 공동 제작과 익명 발표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길이는 ‘전단영화 Ciné-tracts’와 같은 2분에서부터 2시간 30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영화의 유형은 16밀리나 슈퍼 8 super-8 또는 비디오로 촬영된 작은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영화들의 진정한 보급은 68사태가 진정된 이후에야 제작자와 감독, 배급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EGC의 중재로 시작되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외국으로도 보급된다. 그런데 이 영화들 중 어떤 것도 국가 산하 기관인 검열 위원회에 회부되지 않았기 때문에 EGC의 모든 영화는 드골 체제에 몰려 ‘금지영화’로 지정된다. 따라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정치 영화에 대한 검열제도가 폐지되는 1974년 이전까지 일반 대중은 이 영화들을 접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영화를 통한 대중적 혁명의식의 고취라는 EGC의 명목은 사실상 큰 성과 없이 유토피아적인 희망으로만 머물게 된다.

한편 영화 개혁을 위한 새로운 제도 마련은 EGC 총회 Assemblée Générale에 의해 추진된다. 총회의 운영 방침은 “구성원 모두가 대표자이며 각자는 다른 이와 동등한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각의 개혁안은 참여자 각 개인의 이름으로 제출되었고 안건 채택은 총회의 토론을 거쳐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업) 영화의 새로운 구조를 위한 19개의 계획안에는 각 항목별로 1300명의 참가자들 각 개인의 이름이 수록된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사실 각기 다른 이념을 지닌 구성원들간에 잦은 의견대립을 초래함으로써 전체 의견을 수렴한 종합 개혁안 구성에 많은 어려움을 유발한다. 결국 하나의 종합 개혁안을 만들려는 총회의 취지는 무산되고, 6월 5일 EGC에 제출된 총 19개의 개혁안 중 4개의 안만을 채택한 간단한 동의안이 나온다. 그 동의안은 다음의 6가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1. 공공 영화 구역의 설립, 2. 언론 배급사와 같은 진정한 영화 배급사 설립(사설 배급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감독 자신에게 영화상영 보장을 해주기 위한 목적), 3. 영화인의 자주관리, 4. 아동보호를 위한 통제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검열 폐지, 5. 초, 중, 고, 대학에서의 시청각 매체 교육의 통합, 6. 자주 관리되는 TV와 영화의 통합. 이 개혁안 중 ‘자주 제작’,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은 정치색이 짙은 ‘투쟁영화’를 만드는 그룹들에 의해 실천되며, 검열제도는 68운동 이후 국가정보국이 폐지되고(1969) 문화부로 이양됨으로써 상당부분 완화되다 1974년 정치 검열 완전 폐지라는 성과를 올린다.

새로운 영화제도의 마련은 무엇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현실과 단절된 프랑스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환으로 EGC는 영화가 갇혀 있고 영화에 구속력을 행사하는 국가 기구, 특히 국립영화소 Centre National de Cinémathèque의 구조를 “반동적인”인 것으로 규정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평가인 장-루이 코몰리 J.-L. Commoli와 감독인 자크 리베트 J. Rivette, 루이 말, 알랭 레네 A. Resnais 등의 이름으로 EGC에 제출된 “일반 노선 La ligne générale”이라는 제목의 개혁안은 이러한 국가 기구를 해체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준다. 즉 이들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인 이윤 추구로 인해 상품의 차원으로만 축소된 영화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국립영화소나 위니프랑스 Unifrance같은 기관을 통해 그 천박한 공모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드골 정부를 공격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익 산업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경제와, 영화 종사자 모두가 동등한 급여를 받는 완전 평등주의 급여원칙을 제안함으로써 분명한 혁명적 노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좌파 학생들의 노동자 집단과의 협력 실패로 68의 급진적 변혁운동이 그 통일성을 상실하면서 ‘미시정치’로 대체되듯이, 정부의 5월 사태 수습이후 EGC의 활동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즉, EGC는 구체적인 대책을 원하는 조합소속 전문 영화인들과 대개는 영화 지망생들인 ‘과격파’들로 양분되어 결국은 반쯤 실패하여 분산되고 만다. 아주 다른 경향들의 결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일시적일 뿐이었음을 EGC 역시 한계로서 드러낸다. 따라서 68년 9월에 EGC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150명에 불과했고 영화 보급 그룹들의 운영을 맡은 집단은 1970년 초 자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68운동의 좌절 이후에도 EGC의 많은 구성원들은 “다른 영화의 구축을 통해 국가 제도의 밖에서 그리고 그 제도에 대항해 지속적인 투쟁을 한다”는 혁명적 노선을 고수해 나간다. 이들은 각자의 이념에 따라 소규모의 독립 제작 집단을 형성하고, 국가 제도나 사회에 가장 급진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투쟁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68정신을 계승해 나간다.

68운동 동안의 EGC의 활동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새로운 정치, 사회적 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더욱 현실 참여적인 영화로 향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 영화는 상업적이든 비상업적이든 동시대의 문제를 반영하면서 이전보다 강한 비판 의식을 보여주는 이른바 정치 영화를 급부상시킨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 약 10년 동안 혁명적 노선의 집단이나 이의제기적인 감독 개인이 제작한 투쟁영화들의 현저한 증가는 낭만적 혹은 비현실적인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상업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 프랑스 영화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는다.



4. 투쟁영화와 상업적인 정치영화


허구가 아닌 현실을 즉 시대의 문제와 관심사를 영화에 반영하는 참여 혹은 정치 영화는 물론 68년 이전부터 존재해 온 장르이다. 그러나 68년경부터 혁명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행동파들이나 그 지지자들에게 단순히 관조적이고 기록적인 측면이 돋보이는 이러한 아방가르드 영화는 혁명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억압받는 인간들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들이 지향하는 영화는 당연히, “허구와 우화들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유혹하고 기만하는 부르주아 대중영화”(수평영화 le cinéma parallèle)가 아니라 직접적, 적극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억압과 저항을 보여줄 수 있는 투쟁영화(수직영화 le cinéma perpendiculaire)가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투쟁영화는 68운동 이후 변화하는 사회의 요청(여성 조건의 자유화 및 성의 평등, 성적 일탈과 일탈적 행동의 자유, 노동의 자유 선택 등)과 조화를 이루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투쟁영화들은 68년 5월 이후부터 상업적인 경로 밖에서 구축된 공동 제작이나 배급 단체들의 지속적인 증가로 팽창한다. “디나디아 Dynadia”(공산주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주의 영화인 CRP”, 고다르를 중심으로 한 “지가베르토프 Dziga-Vertov”(마오이스트), “슬롱 SLON” (개방주의), “붉은 영화 Cinéma rouge”(트로츠키스트), “아프리카 혁명 Révolution- Afique”(국제주의) 등과 같이 EGC를 계승한 다양한 이념의 소집단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한다. 이 집단들은 68운동이 그랬듯이 전문 영화인들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비전문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형성되었으며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개량주의’, ‘반수정자본주의’를 표방하였다. 1970년부터 지역성 옹호(“시네 옥시탕 Ciné Oc” 1970, “시네마 브르타뉴 Cinéma-Bretagne” 1972 등)나 사회 그룹(“농민 전선 Front Paysan” 1972), 페미니즘(“국제여성영화 Ciné-Femme International”) 옹호 등과 같이 분명한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 설정된 새로운 조직들이 가세하면서 이 장르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집단들은 모두 자본주의 상업망을 거부하고 개인이 아닌 공동이 참여하는 ‘자주 제작’과 ‘자주 보급’의 원칙을 실천하였다.

투쟁영화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분류된다. 모택동의 문화 혁명론에서 권장하는 바와 같이 “민중을 각성, 고양시키고, [...] 그들에게 단결과 투쟁을 촉구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 그 하나이다. 이들의 영화는 메시지의 효율적인 민중적 침투를 위해 스펙터클 영화들의 허구적 장식을 배제한, 전통적인 서술-재현 방식을 취하며 다큐멘터리 방식을 선호하였다.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을 제외한 위에 제시된 나머지 모든 그룹이 이 경향에 속한다. 이 영화들은 선전적이고 교훈적인 측면에 치중한 반면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나 구성에 소홀함으로써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때때로 대중 침투력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장 점거를 주제로 한 투쟁영화들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특히 68년 5월에 촬영된 몇몇의 영화들만이 전투적인 영화의 전형이면서도 무미건조함을 벗어난 영화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어 68년 5-6월 르노-플랭 Renault-Flins공장에서 벌어진 한 달간의 노동자 파업에 관한 내용을 담은 «투쟁과 정복 감행 Oser Lutter, oser vaincre»은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표현기법을 차용함으로써, 그리고 가혹한 노동 착취의 현장인 공장에 항의하는 한 여성 노동자와 그녀에게 작업 재개를 권고하는 노동총동맹 CGT의 두 조합원에 관한 이야기 «원더 공장에서의 작업 재개 La reprise du travail chez Wonder»는 강한 현장감과 사실성에 의해 같은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투쟁영화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주 보급’ 방식에 있었다. 영화 보급은 종종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때때로 방치됨으로써 많은 영화들이 사장되거나 일회성 상영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배급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영화들은 상업적 경로의 예술․실험관 상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이 방법은 잠재적인 대중의 수를 직접적으로 늘리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미디어의 파급효과를 통해 주변부 배급망에 그들 영화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가장 성공한 영화가 바로 비밀 낙태의 위험과 추문을 고발하는 «A의 이야기 Histoire d’A»(1973)이다. 완전 금지 판정을 받은 이 영화는 매스컴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따라서 프랑스 전역에 분산되어 있는 약 100 개의 ‘낙태피임자유운동 MLAC’ 그룹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상연됨으로써 약 20만 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투쟁영화의 또 하나의 경향으로는 메시지(내용) 자체만큼 메시지의 형식을 탐구하는 지가베르토프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혁신적인 양식과 형식을 좌파적 정치성과 결합시키는 급진적인 미학 창조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이 그룹의 지도자인 고다르는 할리우드 영화의 잘 짜인 내러티브 구조를 미국 제국주의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현실을 마치 있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들의 모든 영화를 부르주아적 가치에 부합하는 영화로서 비판하였다. 고다르 집단은 전통적인 기법의 상업영화나 수평영화, 재현-서술적인 수직영화 모두를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켜 현실을 잊게 하는 부르주아 영화로 단정하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부르주아 영화의 문제점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주입에 있었다. 즉 관객이 영화를 보며 마치 현실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을 틈타 감독 혹은 제작자의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을 의도적이건 무의도적이건 관객에게 주입한다는 데 있었다. 관객의 이러한 무의식적 몰입을 막기 위해 고다르는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리 두기 효과 effets à distance’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점프 컷 Jump cut’,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하기’, ‘평면적 몽타주’, ‘평면적 미장센’ 등의 형식과 다큐멘터리적인 양식인 핸드 핼드 카메라의 사용, 거리 로케이션 촬영, 르포르타주적인 성격의 인터뷰 장면 삽입 등을 접목시킨다. 그 목적은 이러한 반부르주아적 카메라 스타일을 통해 영화가 주는 현실감의 환상을 파괴하고 관객이 영화(이야기의 줄거리나 주인공들)에 동화됨이 없이 능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작품의 의미작용에 함께 참여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다르의 이러한 미학을 바탕으로 지가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정치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방법” 즉 ‘영화의 정치학’에 치중한다. 따라서 이 그룹의 영화들은 미학적인 질문들에 경도된 나머지 정치적 현실들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혁명적 영화의 중요한 측면인 현실을 결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의 지나치게 난해한 점과 정치영화인들을 겨냥한 제작 방법론의 제시는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접근조차 어렵게 만듦으로써 소수의 지적 관객만을 위한 영화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지가베르토프 영화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만사쾌조 Tout va bien»(1972)는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 의해 사주와 함께 감금된 미국의 한 여자 특파원(Jane Fonda)과 한 광고영화 감독(Yves Montand)의 의식의 변화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학생들로부터 노동자들, 여성해방에 이르기까지 전투적인 정치 활동에 몰입하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을 파노라마적으로(컨텍스트와 무관하게 군데군데 삽입되는 콜라주 기법을 통해) 조사함으로써 동의와 갈등의 다양한 영역들을 지적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토론을 자극하고 관객을 생산적인 분석으로 이끌기 위한 브레히트적 효과의 사용은 사실 전체 줄거리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에 관한 긴 정치적 담론과 실험적 영상들로 가득 채워진 이 영화 역시 고다르 추종자들과 일반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공동 제작의 세력권 내에 감독 개인의 비판의식을 담은 영화들도 투쟁 영화의 한 지류로서 존재한다. 예컨대 메드 옹도 Med Hondo의 «오 태양이여 Soleil Õ» (1970)와 «비코 흑인 가족 les Bicots-nègres nos voisins»(1974), 그리고 알리 갈렘 Ali Ghalem의 «멕투 Mektoub»(1969)와 «또 다른 프랑스 l’Autre France»(1976), 롤 뤼즈 Raul Ruiz의 «추방자들의 대화 Dialogues d’exilés»(1974)는 프랑스 거주 외국인들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영화들에서는 불법노동자 혹은 정치 망명자로서의 이방인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과 정부 정책의 실책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장 슈미트 Jean Schmidt 역시 «타락한 천사들 les Anges déchus de la planète Saint-Michel»(1978)에서 파리를 방황하는 변두리 지역 주민과 마약 중독자, 극빈자들의 절망적 삶을 통해 하층 계급의 소외의 문제에 천착한다.

투쟁 영화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68년 5월부터 70년대 중반까지만 보더라도 이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의 수는 대략 500편 가량에 이른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사회 변화를 위한 행동파적인 실천이 자본주의 체제 밖의 주변부 영화 집단들에서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례로 1978년 표준 영화(film)를 활용하는 전문적인 사회운동그룹이 약 30개 그리고 비디오를 사용하는 약 6개 정도의 그룹이 68운동 이후의 사회변혁 활동을 계승해 나간다.


68이후 영화의 정치화 현상은 상업영화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업영화는 새롭게 등장한 ‘정치적 문화’에 영향받으면서 점점 더 사회에 대한 이의제기에 참여하는 정치적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실천을 전위에서 담당함으로써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진정으로 사회 변화의 동인이자 선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상업적인 정치영화는 그 후위에서 수동적인 행위자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해 상업영화의 정치화는 68이후 변화한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비상업적인 투쟁영화가 접근할 수 없는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상업적인 투쟁영화의 감독 코스타-가브라 Costa-Gavra가 강조하는 바 “확고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정치를 극적 제재로 다루고 분명한 방식으로 시사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펼치는 정치영화는 70년대에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러나 그들을 구속하는 경제적, 법적 장치 안에서 상당수는 허용 가능한 이의제기의 입장을 취하며, 확립된 이념적 해석들에 의거해 작용하며, 진정한 사회적 단절의 태도는 자제한다.

상업적인 정치영화 역시 대부분의 투쟁영화들처럼 메시지 전달을 중요시하나 표현 방법상에 차이를 보인다. 일반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고, 따라서 많은 관객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위한 방법으로 상업영화는 고전적인 허구를 매개로 스펙터클의 모든 요소들과 고전적인 재현-서술 기법을 활용하며 형식적으로는 영화 장르들의 원칙을 준수한다. 같은 기법을 채택하는 68이전의 주류 영화들과 다른 점은 정치, 사회적 이의제기를 암시가 아니라 영화 전면에 공공연하게 내세운다는 데 있었다. 비판적 관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소위 ‘문제 à thèse’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검토 대상은 주로 사회와 사회의 불의, 제도적 폭력, 모든 범주의 제국주의 등이었다.

코스타-가브라는 상업영화를 지향하면서도 행동파적인 비판의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영화들은 자주 투쟁영화의 범주로 분류되었다. 예컨대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Z»(1968)는 관객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현상이 된다. 이 영화는 잠재적인 파시즘, 대중들 속으로의 경찰 잠입, 사법 기관과 정부의 유착, 극우파와 공모하는 권력 등을 허구의 방식을 통해 가차없이 분석하면서 1967년 그리스에 정착한 장군들의 독재를 설명한다. 이 감독은 뒤이은 영화들에서 그의 주제를 확장하여 정의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1951년의 프라하 숙청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억압을 고발하면서(«고백 l’Aveu», 1969) 좌파를, 남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계엄령 Etat de siège», 1972) 우파를, 비시체제 동안의 프랑스의 대독협력을 회상시키면서(«특수징계부대 Section spéciale», 1974) 과거를 단죄한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모든 전체주의를 고발하면서 코스타-가브라는 섬세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교육적인 기능에 주력한다. 그의 영화들은 오락적, 대중적, 상업적일 뿐만 아니라 시민 정보와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내는 영화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들은 상업 영화 감독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 그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정치 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한다.

그 한 예로 이브 부와세 Yves Boisset를 볼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정치 영화들은 금지와 압박과 협박을 촉발시킨다. 사람을 죽인 파렴치하고 잔인한 한 경찰서장이 상사들의 보호를 받고 악당들과 음모를 꾸미고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경찰 서장 Un condé»(1970)은 다섯 달 가량의 금지 후 3분 삭제와 한 장면 완전 재촬영으로 상영 허가를 받는다. 고문의 제도와 방법, 기능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부와세는 많은 영화적 터부를 일소하고 돌파구를 연다. 예컨대 파란 많은 마르세이유 지방의 선거에 관한 «천사의 추락 le Saut de l’ange»(1971)이 약간의 소요를 일으킨다면, 벤 바르카 Ben Barka 사건에 관한 «테러 l’Attentat»(1972)는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한다. 부와세는 실제 사건에 허구적 요소를 상당 부분 덧칠함으로써 촬영을 재개한다. 즉 벤 바르카의 시체는 파리가 아닌 모로코로 옮겨져 사막 어느 모퉁이에 매장된다. 또한 갑작스런 정부 지원 중단으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던 «우두머리 Ras»(1973)에서 부와세는 인간적인 평화주의를 가미해 여전히 금기시 되는 주제인 알제리 전쟁을 다루며 탈영을 옹호한다. «뒤퐁 Dupont Lajoie»(1975)에서는 강간당한 아랍 여인과 경찰 당국의 은폐 명령, 편파적인 사법 기관의 이야기를 통해 70년대의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고발하는데, 보수파들로부터 아주 신랄한 공격을 받는다.

이처럼 비상업적인 투쟁영화와 나란히 정치적 색채를 띤 상업영화들이 70년대에 대거 등장함으로써 68년부터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화계는 정치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영화의 정치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5. 결론: 영화계의 정치화와 투쟁영화 부상의 문화적 의미


68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던 영화 삼부회는 영화 내적으로는 영화를 허구로부터 현실로 복귀시켜 영화의 폐쇄성을 허물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려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감독/기술인, 전문인/비전문인과 같은 직업구획의 경계, 위계질서를 허물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국가 기구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한편, 영화인들 자신이 만드는 자율적인 영화기구와 제도마련을 통해 창작의 자유를 그들 자신에게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혁명적인 사회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영화제작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68운동의 좌절은 이후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진행시켰다. 예컨대 알튀세르 L. Althusser는 그 좌절원인을 억압적인 국가기구의 탄압 이전에 대중문화와 교육,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위력 때문으로 보았다. 극좌파 경향의 진보주의 영화인들 역시 이 기구들이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지니면서 하나의 억압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자각하였다. 68년을 전후로 마오이즘과 같은 극좌파 계열의 분명한 정치적 노선을 취한 영화전문잡지 «카이에 Cahiers du Cinéma» 또한 같은 맥락에서 ‘혁명’이 좌절된 원인을 영화 자체가 표상하는 허위의식 때문으로 보았다. 즉, 호르크하이머 M. Horkheimer와 아도르노 Adorno가 대중문화들의 문제점으로 문화산업을 통한 ‘허위의식’의 유포를 지적했듯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실제적인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거짓현실과 허위욕구로 인해 변화와 저항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통찰은 무엇보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영화를 문제로 지적하게 한다. 그것은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환상을 조작하기 때문이고(보니체 Pascal Bonitzer), 지배 이데올로기와 이윤동기가 결합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코몰리)이라는 것이다. «카이에»의 이러한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은 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비판을 거쳐 70년대에는 프랑스와 세계가 처한 현실의 문제, 즉 영화가 담아내는 세계 자체의 문제에 더욱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68년 이후 프랑스 영화계에 나타난 투쟁영화의 부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이제 확실히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가 중요해진다. 우선,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창조하는, 다시 말해 허위의식을 유포,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비판적 시각에서, 이의제기의 차원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영화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러한 영화 제작의 효율적인 한 방법은 동시대의 문제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되 그것을 표상, 즉 표현이나 상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설명적인 차원에서 지적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이 투쟁영화가 추구한 것이었고, 그것은 사회변혁을 도모하기 위한 대중적 각성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졌다.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비판적 의식을 갖게 하려는 고다르의 지가베르토프 그룹이든, 용이한 메시지 전달을 통해 대중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그룹이나 감독 개인들이든 이들 모두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변화와 혁명의 한 수단이었다. 즉 이들 영화의 목적은 착취-피착취, 억압-복종과 그것이 은폐되는 사회적 모순들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68운동이 실현하려 했던 바이며, 따라서 투쟁영화와 더 포괄적으로는 상업적인 정치영화가 그 미완의 실현을 계승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투쟁영화에는 또한 68정신이 다양하게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들이 취한 ‘공동 제작’과 ‘자주 관리’, ‘자주 보급’의 방식은 68년 5월 운동 중 노동자평의회가 공장 관료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공동체의 자율성을 실천했던 바이며, 비상업적인 제작집단들은 사회 계층들간의 격차와 소외를 동반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와 그로부터의 독립이라는 68이념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 집단들 역시 학생․노동자 운동 집단들처럼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영화가 주제로 삼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또한 68이념의 내용에 다름 아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금기시 된 알제리 전쟁과 고문의 문제 그리고 검열의 제재를 받는, 관료와 정치인, 경찰들의 비리에 대한 강도 높은 폭로는 “금지된 것을 금지한다”는 68구호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투쟁영화는 이런 점에서 68운동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따라서 영화를 통한 제2의 68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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