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나는 발코니에 앉아...

나는 발코니에 앉아...
Ich sitze auf einem Balkon...



나는 소피아의 어느 발코니에 앉아 아내를 기다린다, 맞은 편에는 어느 죽은 자의 이름을 딴 공장의 네온사인. 사회주의 혁명 조국은, 그는 그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으나, 그에게 그의 이름을 되돌려 주었다. 그 공장은 화력발전소, 그것이 도시를 덥힌다. 트라이쵸 코스토프의 경우와 관련해 문장들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경우들도 알고 있다, 이름들은 교체 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 조국이 제 자식을 잡아먹는다. 민중은 나와 사회주의 혁명이 잠자길 원치 않았으므로, 그것이 자본주의와 음탕한 짓거릴 한 이후로, 그것은 까다로운 입맛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그래도 알고 있었지 / 저질에 대한 증오가 또한 /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만들고 / 부당함에 대한 분노 또한 / 목이 쉬게 만든다”. 낡아 버린 브레히트의 비장하게 긴장된 시구는 오늘 날 얼마나 억지처럼 들리는가. 아침나절 억지로 태반을 삼킬 때 나무에 대한 대화가 끊긴다. 테러의 기능으로서의 변증법, 계모의 철신발을 신고 화산 위에서의 춤. 목소리는 울부짖음이 되어 버렸고 얼굴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등등. 네 시간 전부터 기다렸던 아내에 대해선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도 없다. 나에겐 사랑을 위한 언어가 없다. 능욕 당한 자의 언어는 폭력, 마치 도둑질이 빈곤한 자의 언어이고 살인이 죽은 자의 언어이듯. 나는 식민화된 존재, 회백색 광대분장 아래 (내 피부는) 검게.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빚이 있다, 새해 안부편지를. 나는 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두 결혼 사이에서, 어느 새해 아침, 베를린의 어느 발코니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희망이자 실망이었던 그 국가를 떠난 지 3, 4, 5년 간.
3년 동안 나는 새해편지 쓰기를 시작하고 그만두길 계속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만두고 싶다, 내 목소리를 거두어들이고, 나의 맨 얼굴을 (닫혀진) 울타리 뒤로, 문학의 면갑 뒤로, 드라마의 기계 속으로 되가져 가고 싶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난 알고 싶지 않다, 밖에서는 현실이 일어난다. 편지가 쓰여지든, 쓰여지지 않든, 그것은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수취인은 주소불명으로 이사를 가 버렸다 : 죽음 속으로. 아내가 오더라도, 난 내가 아내를 기다렸노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가 버렸다 시계들이 / 내 심장을 친다 너는 / 언제 올 것인가”
다른 기다림의 시간을 기억하며, 베를린 소소폴 소피아에서, 다른 도시에서 내가 기다렸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생각, A에서 욕정으로 몸을 떨며, G에서는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운율에 도달하지 못하는 너의 가슴. 드라마의 기계, 그것의 언어는 내게 가해졌던, 그리고 가해질, 그리고 내가 가할, 그리고 내게 속하지 않는 내 언어로 다시금 가할 수 있는 테러.
자기연민에 울부짖으며 “어제 / 난 나의 심장 너를 죽이기 / 시작했다 / 지금 난 / 너의 시체를 사랑한다 / 내가 죽으면 / 나의 먼지는 너를 향해 소리지르리”
(1977)

하이너 뮐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