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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계간『 문학동네 』 2004년 봄호 발표
서둘고 싶지 않다
신동엽
내 고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새파란 풀을 씹는다. 큰가마 솥에 자운영, 독사풀, 말풀을 썰어 넣어 삶아가지고 거기다 소금, 기름을 쳐서 세 살짜리도, 칠순 할아버지도 콧물 흘리며 우그려 넣는다. 마침내 눈이 먼다. 그리고 홍수가 온다. 홍수는 장독, 상사발(품질이 낮은 사발), 짚신짝, 네 기둥, 그리고 너무나 훌륭했던 인생 체념으로 말미암아 저항하지 않았던 이 자연의 아들 딸을 실어 달아나 버린다. 이것이 인간들의 내질(內質)이다.
오늘 인류의 외피는 너무 극성을 부리고 있다. 키 겨룸, 속도 겨룸, 양 겨룸에 거의 모든 행복을 소모시키고 있다. 헛것을 본 것이다. 그런 속에 내 인생, 내 인생 설계의 전출(길게 벋어나가 너절하게 늘어진 줄기)을 뻗쳐 볼 순 없다. 내 거죽이며 발판은 이미 오래 전 찢기워져 버렸다. 남은 것은 영혼,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
노자 오천언(五千言) 속에 있는 말이다.
'대국을 다스림은 흡사 조그만 생선을 지짐과 같아야 한다.'
조그만 생선을 지지면서 젓가락, 수저 등을 총동원하여 이리 부치고 저리 부치고 뒤집고 젖히고 하다보면 부서져서 가뜩이나 작은 생선살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수선피지 말고 살짝 구우라는 것이다.
나도 내 인생만은 조용히 다스려 보고 싶다. 큰 소리 떠든다고 세상 정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삐 서둔다고 내 인생에 큰 덕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와서 이 옷을 벗을 때까지 산과 들을 바람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얼마 아니 지나면 가로수마다 윤기 짙은 새 잎이 화창하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신록의 푸짐한 경영 밑에 젊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먼 꿈을 싣고 사라져 갈 것이다. 그 사라져 가는 언덕 너머 내 소년시절의 인생의 꿈은 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무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중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서 있는 적이 있었다. 그 때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1. 혁명적 목적에 선거행위를 복속시킨다
2. 당 활동에 조합활동을 복속시킨다
파시즘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지의 산물이 아니다. 또한 봉건적 반동이 아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의 필수불가결한 보조물이다.
1) 맑스주의는 복잡한 상황을 통하여 풍부해진다
2) 당은 소규모 인자의 소수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3) 당은 다른 당과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이 시간의 임무는 배반하지 않는다. 고립의 미덕, 이 말을 만족해서가 아니라 비참한 심정으로 지킨다. 끔찍한 고립은 모든 혁명인자의 삶과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자 배우였던 이브몽땅.
이탈리아 농노출신의 공산주의자 지오반니 리비의 셋째 아이로 소련 헝가리 침공 이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며 공산당 탈당, 칠레 민주세력 지원과 폴란드 연대노조 지원 등 정치활동과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했던 배우...멋지다.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단둘이
늘 걸어가곤 했다
푸른 싹이
향긋한 버러지처럼
움터나오는 철에
벗은 오히려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멋있는 서막이
바로 눈앞에
다가 있는 성싶어
아카시아 새싹 같은 말이여
응?
아무도 나빠할 리 없는
꽃 피는 철이 되더니
벗은 또 멋지게 꽃잎을
코끝에 대면서
말한 것이다
아 참 삶은 멋있어
아카시아 꽃내음처럼
기막혀
이리하여
하늘이
저렇게 높아가는
이 무렵
벗은 이윽이
가지에 눈을 주며 말하는 거다
삶은 섬뜩한 것이야
이 아카시아 가지처럼
단단해
그래도 나는
아주 아무렇지 않은 낯빛으로
천천히 한 대 피워물면
그도 하릴없이
담배를 꺼내물고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또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중학생 아이 독후감 숙제를 내주다 다시 집어든 <광장>에서.
기억의 집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최승자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를 무의식적인 역사 과정의 의식적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적인' 과정이 그 의식적 표현과 일치하는 것은,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즉 대중이 순전히 자연 발생적인 압력에 의해 사회적 인습의 문을 때려 부수고 역사 발전의 가장 깊은 요구에 승리의 표현을 부여할 때 뿐이다. 이런 순간에는 시대의 최고의 이론적 의식이 이론과 가장 거리가 먼 최저변의 피억압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과 융합한다.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의 이런 창조적인 결합이 바로 보통 영감이라 불리는 것이다. 혁명은 영감을 받은 역사의 광란 상태이다.
진짜 저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보다 강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인도하는 듯한 창조의 순간을 알고 있다. 또한 진짜 웅변가라면 누구나 평소의 자기 자신보다 강한 뭔가가 자신의 입을 이용해 말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것이 '영감'이다. 그것은 온 힘이 다 기울여진 최고의 창조적인 노력에서 태어난다. 무의식적인 것이 깊은 우물 속에서 솟아올라 의식적인 정신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그것을 어떤 보다 큰 종합 속에서 자신과 융합시킨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정신력이 이따금 대중 운동과 결합된 모든 개인적인 활동에 주입된다. 10월 혁명 기간 동안에 '지도자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유기체의 잠재적인 힘, 더없이 깊은 뿌리내린 그 본능, 동물이었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직감 - 이 모든 것이 솟아올라 심리적인 인습의 문을 때려 부수고, 혁명에 봉사하며 보다 높은 역사 철학적인 추상 개념들과 힘을 합친다. 개인과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이 두 가지 과정은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즉 의지의 원동력을 이루는 본능과 보다 높은 사고의 이론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나의 생애(하)>(트로츠키, 박광순 옮김, 범우사, 2001), p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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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면 설령 저명한 학자나 훌륭한 현자 혹은 뛰어난 시인이 되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코 진정으로 완성된 위대한 인간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역사는 이 세상 전체를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높여가는 사람을 위인으로 인정한다. 최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기린다. 종교도 가르쳐준다.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런 생각을 섬멸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우리가 많은 사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기로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면,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시련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잠시 동안의 희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소하고 한정적이며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삶의 자취는 조용히,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며, 타고 남은 재는 고귀한 인간들의 반짝이는 눈물로 젹셔질 것이다."
- K. Marx,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 중에서
1835년 8월 12일, 독일 모젤(Mosel) 강변 트리어(Trier)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반 학생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 날은 서른 두 명의 학생들이 졸업시험 과목 중 논문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이자 법률 고문관인 하인리히 맑스의 아들 칼 맑스도 그 서른 두 명의 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막 17세가 된 젊은 청년이었던 그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es)>이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논문을 작성했다. 이 논문 가운데 묻어나는 결기는 그의 평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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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왼쪽)이 고리끼(오른쪽)와 함께 체스를 두고 있다. 레닌은 망명지에서 종종 동지들과 함께 체스를 즐겼다. 러시아 사람들은 체스를 즐긴다. 체스세계챔피언도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다. 러시아어로 "샤흐마띠"로 불리는 체스. 언제 한 번 배워보고 싶다. 레닌은 체스를 두며 무념에 빠졌었을까? 아니면 체스판을 혁명의 지도로 생각했을까?
빛의 영과 암흑의 영의 갈등, 선한 영과 악한 영,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벌이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 적대적인 힘이 서로 겨루고 있는 싸움터로서의 현실세계를 뜻한다. 현현顯現과 비현현非顯現으로의 회귀이다. 흑색과 백색이나, 홍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체크 무늬 판은 현현 세계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이원 요소나 상보적 요소 - 음과 양, 밤과 낮, 태양과 달, 남자와 여자, 모호함과 명확함, 달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 시간과 공간 등 - 가 서로 밀어냄을 상징한다. 흑백, 홍백의 체크 무늬 판은 또한 선과 악, 행운과 불운이 뒤바뀌며 펼쳐지는 인생의 교착 상태를 뜻한다. 만다라(MANDALA)이며, 사원이나 도시의 기본적인 형태인 8*8 이라는 4배수의 상징에 근거를 둔것으로 우주의 모든 가능성과 우주와 인간을 움직이는 지배력을 나타낸다. 그래서 체크 무늬 판에는 우주의 완전함이라는 의미도 있다. 인도의 둥근 체스판은 <무한 無限>과 <생사生死의 순환>을 상징한다. 체스의 한번의 승부는 한 시대를 뜻하고, 말을 치우는 것은 비현현의 시기를 상징한다. 말의 움직임은 현현의 세계와 그 속에서 개인이 가지는 모든 가능성의 실현을 상징한다. 어떤 말을 움직일 것인지 선택은 자유이지만, 말을 움직임으로써 생기는 일련의 피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 즉 여기에서는 자유의지와 운명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영혼만의 진리이며, 인간은 영혼 안에서만 자유롭고, 영혼 밖에서는 운명의 노예가 된다." - 출처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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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이 별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나가겠다.
정이현 연재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中
최원 씨의 실명 요구, 노동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현종혁 | 시론/사설 | 2005.03.06 23: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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