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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28
    인랑-도시의 경계, 인간과 늑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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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28
    베를린 천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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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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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도시의 경계, 인간과 늑대 사이

인랑(人狼:1999)은 도시에 관한 영화다. 허나 화면은 도시의 양지를 비추지 않는다. 패전 후 고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그 부작용으로 버림받은 이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된 일본 사회의 단면이 정지된 사진과 나레이션으로 깔린다. 음지를 포착하며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는 가상의 역사지만, 여기서 한때 일본을 뒤흔들었던 전공투 세대를 떠올리는 건 무리가 아니다. 아마 이 작품이 70, 80년대에 상영되었다면 공전의 흥행을 기록했을 것이다. 음울한 색조를 띠는 영상과 함께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감에 깊게 빠져든다. 늑대의 삶을 강요하는 도시의 비인간성, 가려진 그림자를 비추는 잔혹한 동화다.

 

자치경의 능력으로는 저항세력을 제압할 수 없게 된 정부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준 군사집단 '특기대'를 창설한다.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의 것과 비슷한 철모나 MG42 중기관총, 정부의 개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특기대의 별명 '케르베로스'는 파시스트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저항세력의 힘이 시민들의 지원과 참여에 힘입어 치안 유지에 혼선을 일으켰을 때 '특기대'의 유용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위 조직이 온건한 조치로 해체되고 숙적인 소수의 정예 '섹트'만이 남자 그토록 필요했던 '특기대'의 존재의의도 의심받는다. 경제 발전의 국물에 안정을 찾은 시민들은 '섹트'와 '특기대'양쪽을 사라져야할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양쪽 모두 도시의 어둠으로 고립되어가는 시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데모대와 자치경의 무력 충돌이다. 화염병과 돌이 날아들고 곳곳에 부상자들이 속출한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한 소녀가 길을 재촉하고 있다. 선물이라며 동료인 듯한 남자에게 가방을 건네준다. 남자는 진압대 앞으로 가방을 던지고 가방은 강렬한 폭염을 일으키며 폭발한다. 진압대의 최루탄 발사와 동시에 본격적인 시위대 검거가 시작되고 소녀는 다시 누군가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는 어둠속을 걷는다. 우리는 예쁜 소녀가 '섹트'의 멤버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하수도를 통해 이동하는 섹트의 멤버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듯이 만난 특기대의 화력에 산산이 박살나고 만다. 하수도 저편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은 소녀는 불안감에 차 길을 달린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사이, 한 명의 특기대원이 기관총을 들이댄다. 놀란 소녀는 가방에 든 폭탄의 뇌관을 조금씩 당긴다.

 

 

'왜?' 특기대원이 묻는다. 전투복이 얼굴을 가려 인간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움에도 이 '왜?'라는 말이 주는 인간적인 진폭은 크다. '어째서? 나이 어린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세우려는 이유는 대체 뭐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조에도 떨리는 기색도 있는 듯이 느껴진다. 다른 대원들이 발포를 독촉함에도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소녀는 끝내 자폭한다. 도시는 정전되고 거리에서 한창이던 시위대와 진압대의 싸움도 멈춘다.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부르짖는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니다. 어디에도 이념적 선전성의 자취는 없다. 탄압을 받으며 동정심을 자아내는 시위대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후세 카즈키 경사. 소녀를 쏘지 못했던 특기대원의 이름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죽은 소녀의 이름은 아가와 나나미, 암호명 '단발 머리'. 초반부에 죽음을 맞이한  단발 머리 소녀의 환영은 이제 살아있는 '긴 머리' 케이의 모습과 겹치며 영화 곳곳에 비치게 될 것이다. 군사 재판에 회부된 후세는 신병양성소에서의 재훈련 처분을 받는다. 급히 엎드려 경미한 부상만 입은 그는 훈련을 거듭하는 나날을 보낸다. 죄책감에 소녀의 유골이 놓인 납골당을 찾는 후세, 그곳에는 소녀의 언니라 하는 케이가 와있다. 후세와 만난 케이는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며 한 권의 책을 선물한다. '빨간 두건 이야기',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이 동화가 새삼 낮설게 느껴진다. 이 동화는 이제 슬픈 사랑 이야기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자 이야기의 플롯으로 작용할 것이다. 점차 후세의 목소리는 늑대의 목소리, 케이의 목소리는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며 현실과 동화가 교차한다. 

 

 

'옛날 한 소녀가 있었는데 7년간 엄마와 떨어져 살았어요. 소녀는 쇠 옷을 입은 채 늘 이런 말을 들었더랬죠. 옷이 다 닳으면 엄마를 보러 갈 수 있단다. 소녀는 열심히 벽에 옷을 문질러 닳게 했어요.'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훈련. 감시 카메라가 주변을 탐색하는 모습이 잡힌다. 미셀 푸코의 말처럼 전근대적 사회에서 집행되던 직접적인 죽음의 권력은 거기에 수반되는 저항에 의해 사라졌지만 근대 국가는 이를 감시와 규제라는 수단으로 대체했다. 정해진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감시하고 규제한다. 이 무언의 폭력, 실체가 보이지 않는 압력 아래에서는 반항할 수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파놉티콘(원형 감옥)은 거미줄같이 촘촘히 짜여져 수감된 먹이감은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온다 해도 그 안에서의 역할을 잃음으로 인해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훈련 도중 벽을 부수고 상대를 제압할 기회를 잡은 후세의 눈에 케이의 얼굴이 비친다. 순간 당황스러움에 역으로 제압당한 후세. 훈련이 끝나고 교관들은 특수복 사용 수칙을 지킬 것을 강요하며 악을 쓴다.

 

멀리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다. 교관인 '한다'와 후세의 특기대 동기였지만 공안부로 전직한 '헨미'다. '총 맞는 것보다 쏘는게 낫다', '알때까지 훈련시켜야지'라는 말에서 근대 인간의 운명을 보는 듯한 착잡한 사념에 잡히게 된다. 조직의 일원이 된 이상, 개체의 존재 의의는 소속집단의 성격에 따라 규정되며 행동양식 역시 거기에 따라 결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기대에 들어온 이상 특기대의 훈련 방식을 몸에 박히도록 익혀야 한다. 약해진 짐승은 오래 살 수 없다. '인간과 인연을 맺은 짐승의 이야기는 반드시 불행한 결말로 끝나지, 짐승에겐 짐승만의 이야기가 있어.'

 

 

거리를 돌아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후세와 케이. 철거되는 건물과 바뀐 주변 풍경에서 케이는 자신의 위태로운 삶을 예감한다. 도시에서 필요를 잃은, 가치를 잃은 건 폐기된다. 유원지에서 케이는 철조망 저편의 풍경을 응시하며 말한다. '꽤 멀리까지 보이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면, 나도 언젠가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는 거죠.' 그리고 후세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특기대가 됐어요?' 후세는 답한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내가 있을 곳을 찾은 것 같아.' 뛰놀던 아이가 손에 든 풍선을 놓치자 풍선은 하늘 높이 떠오른다. 후세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서 갈 풍선을 바라본다. 케이는 무언가의 안에서 속박받는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에 반해 후세는 자기 무리의 늑대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케이를 따라 인간의 편으로 갈 것인가를 두고 딜레마에 빠진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인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집단을 떠나 어디로?

 

 

순간 보이는 환상. '단발 머리' 소녀는 후세에게 '당신은 올 수 없어요'라 내밷으며 달아난다. 소녀를 따라가는 후세. 뒤에 한 두 마리씩 늑대들이 따른다.'기다려! 묻고 싶은게 있어!' 하수도 길을 달려 이른 막다른 곳엔 창살로 된 문이 경계를 이룬다.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는 바로 경계다. 경계는 철조망과 벽, 철문의 형태로 나타나 변주를 거듭한다. 비정상의 경계를 넘어 '정상'의 양지로 나갈 수 없었던 이들의 외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경계를 사이에 두는 추격전의 양상을 이룬다. 나가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 사이의 경계. 문의 저편에서 멈추고 돌아보는 소녀는 어느새 케이로 바뀌어 있다. '당신은 올 수 없어요. 오면 안돼요' 문이 열리고 케이에게 달려드는 늑대들. 영화 전체를 통해 차마 보기 괴로운 장면이 이어愎? '멈춰!'라는 후세의 말에도 늑대들은 케이의 살을 뜯고 피를 핧는다. 자신의 총에 난자당하는 또 다른 케이의 모습이 여기에 겹치고, 달리던 하수도는 눈 보라치는 설원으로 변한다. 늑대 무리 한 가운데 앉은 후세. 그는 늑대 무리의 일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편으로, 양지로 나갈 수 없다. 짐승이 된 이상 무리를 떠날 수 없다.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의 쓰레기 처리장. 도시에서 양산되는 쓰레기들은 중심부에서 효용성을 잃고 축출된다. 페기물들을 처리하는 인적없는 장소에서 특기대 제거를 노리는 모종의 음모가 꾸며진다. 공안부의 무로토와 헨미를 비롯한 이들의 계략은 특기대 대원을 표적으로 한 스캔들을 일으켜 특기대 해체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단발 머리'의 언니라 믿어졌던 케이도 사실은 공안부의 각본에 따라 계획적으로 후세에게 접근한 일종의 첩자였다. '섹트의 멤버와 내통한 특기대 대원'을 구속하기 위한 행동이 전개되고 케이의 전화에 후세가 달려온다. 동물들의 박제를 전시해놓은 박물관에서 매복조를 먼저 처리한 후세는 차를 탈취해 케이와 어디론가를 향한다.

 

'이젠 어디에 가나요?', '어두운 숲', '어두운 숲을 지나면 어디로 가죠?',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으로', '누가 기다려요?', '엄마, 할머니 아니면...' 어두운 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깔려진 레일을 따라가는 전차, 길거리의 취객과 단속하는 경관들, 좁은 골목에 드러누운 노숙자들. 도시의 뒷편, 쓸쓸한 풍경이다. 로고스적 분류표에 의해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분류된 것들은 규제와 소외의 대상이다. 전에 왔었던 유원지에서 케이는 후세에게 사실과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자신이 '빨간 두건' 섹트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공안부에 가담한 일과 함께, 위태로운 자신의 삶에 보이는 희미한 희망을 말한다. 도시에서,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서, 그것들이 주는 억압에서 빠져나가는 것. 유원지에서 말했던 그 얘기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속박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일 특기대를 그만 둔다면 특기대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기에 후세는 주저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입을 맞춘다. 억압를 뿌리치려는 몸부림과 망설이는 몸부림의 결합.

 

 

결말을 향해가는 극의 무대는 다시 하수도로 옮겨간다. 후세와 케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한 둘씩 누군가가 모여든다. 훈련교관인 '한다'를 중심으로 한 비밀 속의 반첩보기구 '인랑'의 조직원들이다. 후세는 신병 시절부터 '인랑'의 조직원이었고 이미 공안부의 계략을 눈치채고 있던 '한다'는 케이를 역이용해 공안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첩보전은 먼저 내다보는 놈이 이긴다. 주저앉는 케이는 싸우러 가는 후세의 뒤에서 울부짖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었어요'라고... 케이의 가방 속에 단 추적장치를 따라 '헨미'가 이끄는 공안부 요원들이 돌입해온다. 철저히 대비해 두었던 반첩보부대 '인랑'. 암흑 속에서 한 바탕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총격전의 사실적인 묘사는 극의 잔인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케 해준다. 공안부의 요원들은 후세의 총에 살코기처럼 난자당한다. 도망치다 막다른 곳에 이른 '헨미'는 친구인 후세에게 '너도 인간이잖아!'라는 말과 함께 유탄을 겨누지만 불발로 그치고 사살된다.

 

도심 외곽의 페허. 날이 밝아오고 '인랑'의 조직원들은 상황을 수습해 돌아갈 채비를 한다. 리더인 '한다'는 후세의 손에 모젤 C96 권총(2차 대전 당시 구 독일군의 권총)을 쥐어주며 케이를 죽일 것을 명한다. 케이는 공안부를 누를 비장의 카드지만 그들이 케이가 우리 편에 있다고 믿게 하는게 중요할 뿐 그녀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빼앗길 위험을 없애려면 남은 방법은 이 뿐이다. '인간과 인연을 맺은 짐승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라, 네가 늑대로 남아있을 동안에...' 후세의 뒤에서 케이는 동화의 마지막 구절을 담담한 어조로 읊는다. '소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 다가가 보니 엄마는 두건을 얼굴까지 내려쓰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죠.' 후세의 품에 안기는 케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뒷 구절을 잇는다.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후세의 얼굴.

 

'엄마, 왜 귀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눈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손톱가 이렇게 커요?'

'엄마, 왜 이가 이렇게 커요?'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케이는 쓰러진다. 허탈해 하는 후세의 표정. 무언가 자신이 기댈 곳, 의지하고 싶은 것, 소중한 것을 상실한 자의 그것일까. 아니,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짐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인간과 짐승사이에 있는 자의 그 것일까? 조직의 논리에 따라 개인의 것을, 스스로의 것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한 소시민의 모습인가. 친구도 연인도 배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무리의 일원인 한 마리의 늑대이고 무리 전체의 뜻을 따른다. 그러지 않으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무리에서 쫓겨나면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이 전체주의의 논리다. '한다'는 마지막 구절을 책 읽듯이 말한다. '그리고 늑대는 빨간 두건을 잡아먹었다.' 물 웅덩이에 버려진 빨간 두건 이야기의 독일어 판본.

 

 

인랑을 보고 나서는 한동안 망연히 앉아있게 된다. 나는 자유로운가.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지금 있는 이 장소를 벗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인랑이 주는 여운의 바탕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영화가 보여주는 배경인 1960년대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 아니다. 잊혀진 가상의 과거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며 머잖아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기반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관객 자신이 인간 아닌,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근대 국가의 성립이래 인간은 도시라는 구조의 정형속을 흐르는 모나드(단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더 이상 개인은 독자적 개체로 존재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국가, 사회, 단체 등의 집단을 통해 번호,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런 통과 의례를 거쳐 '정상'으로 선별되면 한 덩어리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존재 의의를 갖는다. 규정 이외의 행위는 현상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반드시 제재를 받게 된다.

 

니부어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국가'에서 말했듯 개인의 선한 노력은 전체의 비도덕성에 의해 와해되기 쉽다. 사회라는 것은 한 사람의 미약한 힘만으로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개인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구조라는 것이 있다. 전체의 질서,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고, 설령 명시된 질서가 인간성을 말살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도 따를 수 밖에 없다. '비정상'을 도시의 음지로 축출하는 메커니즘은 무리에서의 추방에 대한 공포로 작동한다. 순진한, 천진난만한 빨간 두건이 엄마를 만나기 위해 쇠옷을 문지르는 행위는 도시 시스템을 탈출하려는 개체의 몸부림이자 이단이며 늑대(인랑 - 후세)는 시스템의 이단을 처리하기 위한 직,간접적 권력의 작동이다. 본질적으론 엄연히 파시즘에 속한다.

 

흔한 말로 '세상이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선한 기질이 얼마든지 있는데, 사회가 이를 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않으면 승진하지 못하거나, 사기치지 않으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다는 풍조가 널리 퍼진 상태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결국 그러한 믿음을 사회에서 삶 속에서 실천하려면, 자신을 찾고 싶으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도시라는 구조의 본질이 바뀌어야 하며 여기엔 모순을 해결하자는 뜻에 공감대가 형성된 새로운 대안 집단이 필수적이다. 케이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나 이탈을 위한 동료를 만들지 못했기에 실패했고, 후세는 소속된 곳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인간 늑대(人狼)가 되어야 했다. 우리는 인간인가, 늑대인가? 도시에서 인간의 얼굴을 되찾기 위한 회의, 이 괴로운 문제의 해답을 찾는 여정은 이제 막을 올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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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천사의 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인간을 사랑한 한 천사의 여정

  지구 위에 서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걸 느낄 수 없듯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만 진리를 구한다는 건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진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곤 했다.
  오래 전 성현들이 ‘고행(苦行)’ 그 자체가 진리를 얻는 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구원을 얻고자 길을 떠났다. 아마도 출발과 다다름 그 사이의 모든 것이 답이고 진리이고, 여행은 존재에 대한 회피라기보단 ‘도전’일 것이다.

  영화인들에게도 ‘존재 속에 숨쉬는 갈망’을 ‘길’과 ‘길을 따라 가는 여행’ 속에서 풀어 보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고대 신화 속의 숨가쁜 여정들은 1940~50년대 흔했던 모험활극 영화에서 펼쳐지고 이후 ‘길’과 ‘여행’은 작품의 보조적인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야기되는 ‘길’의 시대가 도래하여 ‘로드 무비(Road Movie)’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가 형성된다.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꾸준히 ‘길 위에서’ 인간의 문제를 탐구해온 로드 무비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길 위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로드 무비
  1987년 작 ‘베를린 천사의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던 빔 벤더스의 대표작이다. 한 천사의 천상에서 인간 세계로의 여정을 담아낸 이 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며, 그 ‘하늘’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베를린의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기록하는 임무가 있었다. 다미엘은 그렇게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때론 그들의 마음도 어루만지며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가짜 날개를 달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인을 발견하곤 깊은 연민과 사랑을 시작한다. 이 여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천사’같은 인간 마리온이었다. 천사 다미엘은 천사였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나게 되고, 결국 다미엘은 천사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한 인간으로서 마리온을 찾아간다.
  이 영화는 독일의 수도이자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감독 빔 벤더스가 바로 머리 위 베를린 하늘에 구원을 바라는 침묵의 기도를 보내듯 천사 다미엘 역시 그 하늘에서 이 음습한 잿빛 도시를 사랑했다.
  영화 속의 그 우울함과 그늘은 빔 벤더스 감독에게도, 천사 다미엘에게도 헤어나기 힘든 굴레인 것만 같다. 신은 베를린 하늘의 천사들이 수 차례의 사악한 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로 그들을 불신한다. 독일인들은 신이 그들의 조국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두렵다. 베를린 하늘을 배경으로 다미엘이 올라서 있던 ‘승리의 여신상’은 독일의 많은 전쟁을 기리는 ‘전승기념탑’이었다.
  수차례의 전쟁과 2차 대전의 패배가 개개인에게 준 현실적인 고통은 심각했다. ‘천사’인 다미엘이 고통 받는 베를린 시민을 어루만질 때 그것은 그저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되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심을 드러내고 진정한 위로를 주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천사가 불멸도 버리는데 인간이 인간을 해치고 죽이는 것에는 과연 어떤 명분이 있겠는가.
  천사이기를 저버리고 인간이 된 다미엘이 패전의 상흔 같은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는 것은 그가 앞으로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불멸을 포기하게 한 인간애
  ‘베를린 천사의 시’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를 드라마로 느껴지게 한다. 젊은 시절 빔 벤더스 감독은 로드 무비만 찍는 감독으로 알려질 만큼 그는 여행자와 길, 여정, 도착지와 출발지 그 자체를 영화 속에 담아냈다.
  이 영화에선 천사의 발걸음(?)을 따라 베를린이란 도시와 그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베를린 시민들을 그렸다. 통일 전의 베를린은 독일국민에게 그리 편한 장소가 아니었고, 감독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담겨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군국주의, 나치, 전쟁, 분단, 이념대립 등등.
  감독은 시공을 초월한 천사가 그 초월성을 포기하고 인간 세계에 구속되면서 베를린을 해방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안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과정으로서의 ‘여행’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베를린은 영화 속과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브란데부르크 문’은 프러시아 군국주의 시대의 개선문이었고, 독일 통일 후 지금은 동서 화합의 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좀 억지스럽긴 해도 말이다.

과거를 극복하고 진보하는 베를린
  이런 독일 역사의 상징인 베를린은 문명화된 문화 도시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국립박물관, 독일역사 박물관, 페르가본 박물관, 보데미술관 등, 그 다종다양한 독일 역사의 ‘실재(實在)’를 품고 있다.
  또 현대의 역동성 역시 같은 곳에서 숨쉰다. 포츠담 광장을 중심으로 우람한 소니 센터를 비롯해 시네마 쿠프, 비즈니스 센터, 그리고 메르세데스 센터 등의 현대적 문명이 함께 어울린다. 빔 벤더스 감독이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표현한 베를린을 어떻게 받아들이던 현재는 또 다른 진보와 발전의 그림을 확실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나오던 기차역과 다리 등 많은 장소가 사라지고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걸 가지고 ‘옛날이 좋았다’고 운운하는 건 감상이다. 이 곳의 현대화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이긴 하지만 그걸 마땅치 않게 보는 건 ‘보는 이’의 더 못난 욕심이 아닐까. 어쨌든 천사 다미엘이 안타까이 바라보던 그 때에 비해 발전된 희망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의 성지(聖地)가 된 베를린의 하늘 아래에서 인간 다미엘은 또 어떤 구원을 꿈꾸며 기나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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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時

 

 

권력                             

옛날에는
호박꽃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패랭이꽃이나 민들레꽃도
진짜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갑자기 장미나 백합을 들먹이며
나머지 꽃들은 뽑아
없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워커와 방패에 기름을 먹이며
자신이 끌려갔던 닭장차와
오랫동안 증오했던
최루탄발사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 참 단맛이구나
아 참 꿀맛이구나
적어도 5년은 그렇게
입맛을 쩝쩝일 것이었습니다.

 

 

 

동 해                                


서태지에게

꿈을 위해선
사랑을 버려도 좋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싱싱해지는 거친 파도들이지

반역을 위해선
이 세상 제일 치밀한 함정도
두려워하지 않지

그래
두려움은 세상의 끝이지
보이지 않는 안개의 속살보다는
보다 명징한 삶의 목소리를 원하지

꿈을 위해선
청춘을 불태워도 좋지

그래
꿈을 위해서
청춘을 불태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지

보리순 파랗게 돋은
갓 스무살

우리에겐 반역의 꿈이 있지
우리에겐 불타는 청춘의 칼날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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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 金洙暎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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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uble Life of Veronique

베로니카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없이 한없이 슬퍼질 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이 영화는 전개됩니다.
같은날 같은때에 서로 다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사람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서로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둘은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또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회에서의 뜻하지 않게 베로니카는 죽게되고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근원 모를 빛이 자신의 주위에서 멤돌고 있다는 것을 본 후에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베로니카의 영혼을 느끼게 되고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됩니다.하나 둘씩 자신에게 배달되는 베로니카의 유품을 통해 베로니카는 다시 현실로 다가와 베로니크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인형극을 하는 알렉상드르를 통해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실존을 알 게 됩니다만...






누구나 한번쯤은 가벼봤음직한 단순한 질문을 통해 크쥐쉬도프 키에슬롭스키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갈색톤의 무채색 화면, 유리구슬을 통해 왜곡되어진 아름다운 주위풍경, 자연스런 영상을
일으키는 단조의 음악과 영상의 완벽한 조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한편의 아름다운 영상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글:주하의 영화이야기중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동구와 서구의 베로니카란 이름을 지닌 두 여성의 삶을 평행으로 이어붙여 개인의 정체성과 동구와 유럽의 현실, 그리고 삶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표현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으 이중생활>의 섬세하고 화려한 형식미에 매혹당했던 사람들은 <세가지 색>연작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운명론적인 도식이 너무 지루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운명론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인 이상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은 인간의 본성이 그런 이상들과 충돌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울한 진단으로 가득 차 있다. <세가지 색> 연작의 첫 번째 편인 <블루 Blue>(1993)는 자유를 상징하는 블루를 화면의 기조로 깔고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이며 <화이트 White(1994)는 평등을 상징하는 흰색의 의미대로 사랑하기 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는 동구와 서구의 남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많은 소유를 전제로 한 터에 평등에 기초한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을 오히려 의심쩍게 묻는다. 박애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의 완결편 <레드 Red>(1994)는 더 많은 소유가 답이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탐색하지만 우연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조건을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출처:영화연대



키에슬로프스키의 신비스럽고 시적인 새로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러나 곧 좌절을 맛보게 된다. 모든 부분들은 완전히 딱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쨋는 이는 모아서 맞추어야 하는 퍼즐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스이다. 우리 모두가 언제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순간에 관한; 또 다른 내가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만나적은 있을까... 왜 나는 나-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초상화를 전시회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을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시카고 선 타임즈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에로티시즘과 멜랑콜리 사이의 어딘가를 떠도는 연약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헨리 제임스의 무시무시하고 결론이 없는 괴기 소설 같은 혹은 Borges의 시적인 미궁같은 분위기를 가진 고요하고 우울한 퍼즐같은 영화이다. 당신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무언가 부족한 존재처럼, 혹은 뿌연 유리를 통해 일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붕괴되어 심장이 한번 뛰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당신의 눈 앞에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코 그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음악은 으시으시한 단조 음계로 작곡된 매혹적이며 시적인 작품이다.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미묘하나 매우 현실적이다. 음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를 완전히 그들의 세계로 끌어 당기며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 자신의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놀라운 작품이다.


워싱턴 포스트



. 첫장면 - 베로니카의 노래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페이드인 되면 한 아름다운 여성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녀는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입니다. 노래를 공부하는 학생인 그녀는 길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베로니카는 비를 맞으며 혼자서 끝까지 노래를 하는데 베로니카의 목소리(실제로는 Elzbieta Towarnicka라는 여성이 부릅니다.)는 얇은 미성이라기보다는 다소 굵은 목소리로 영혼을 울리는 듯한 깊은 음색


이 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스코어 중 유일하게 단조가 아닌 장조로 다른 곡에 비해 밝은 느낌을 줍니다. 이 곡은 그녀가 다른 장소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공통점을 지닌,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베로니끄를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대는 오리라(Tu viendras)는 제목처럼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이어주는 끈 친구를 따라갔다 우연히 지휘자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된 베로니카는 공연에서 폴란드 작곡가 반 덴 부덴마이어의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을 노래하게 됩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던 베로니카는 이 노래를 부르다 무대에서 숨을 거둡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죽음 어느날, 베로니끄는 인형극 공연을 보게됩니다. 이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이 바로 인형(Les Marionnettes)입니다.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역시 단조인 이 곡은

어둡고 슬픈 곡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인형이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숨을 거두는데 이것은 바로 노래공연을 하다 숨을 거두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며 이 때 흘러나오는 인형이라는 피아노곡은 줄에 매달려 조정이 되는 인형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분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부활 발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던 인형은 날개를 달고 천사로 부활합니다. 이 때 피아노곡이 멈추고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옵니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연결해 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인형이 부활하는 장면은 죽었던 베로니카가 베로니끄로 환생하는 동시에 이 인형극을 바라보는 베로니끄가 또 다른 자아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아에 눈을 뜨는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Zbignew Preisner


촘촘하게 짜여진 상징으로 이루어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감독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영화의 표현방식과 주제에 완전히 녹아들어 기능하고 있습니다. 복화술사란 말처럼 프라이즈너는 음악으로 키에슬롭스키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앞서 살펴보았던 <파워 오브 원>에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파워풀한 느낌으로 영화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주로 떠맡고 있었던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풀롯과 표현방식,주제의 구현에서 음악과 영화가 거의 하나라 할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위 3번에서 살펴본 인형극 장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음악과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85년부터 서로 친구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긴밀한 그 둘이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단순히 많은 영화에서 같이 작업한다기보다 음악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표현수단을 가지고 같은 것을 표현한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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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

Krzysztof Kieslowski







68년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사진 From the City of Ludz>(1969)이란 기록영화는 데뷔한 후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68년 3월의 학생봉기, 70년 12월의 자유화 운동, 76년 노동자 시위사태, 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 운동, 그리고 81년 야루젤루스키 정권의 계엄령 선포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폴란드사회가 그렇게 혼란을 겪는 동안 폴란드영화는 부흥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 아그네츠카 홀란드, 안토니 크라우즈, 리자드 부가예스키, 마르셀 로진스키등의 감독이 이른바 도덕적 불안의 영화로 정의되는 폴란드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안제이 바이다 감독 등이 이끌었던 폴란드 유파가 폴란드영화의 현대적인 어법을 발굴해냈다면, 도덕적 불안의 영화 세대는 긍적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폴란드 현실을 불안하게 짚어냈다. 케에슬로프스키는 물론 도덕적 불안의 영화 경향을 띤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은 <노동자들 71>로 71년 슈체친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사태를 찍은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첫 극영화는 <어느 당원의 이력서 Personel>(1975). 50분짜리 중편이며 원래 텔레비젼 방영용으로 만든 작품인데, 독일 만하임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지하 폴란드 공산당원이 징계문제로 당 조사위원회에 호출되어 심문받는 과정을 기록영화 형식으로 담았고 50분 동안 심문관과 피심문자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계속 이어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놀라운 작품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 데뷔작 <상처 Spokoj>(1976)는 모스크바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도덕적 불안의 영화세대의 리더로 국내외에서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현실을 혼란한 마음으로 통찰하던 이 폴란드 감독은 곧 유럽영화계의 자본과 줄이 닿았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바르샤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십계>연작이다. 84년에 <결말없음 Dlugi Dzien>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각본을 쓴 변호사 출신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든 <십계> 연작은 큰 성공을 거뒀다. <십계>가 극장판으로 개봉되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자본이 들어 왓고, 이런 공동작업 시스템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피시비츠의 조력을 받으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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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느야곱과 키에슬롭스키

이렌느 야곱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를 만났을 때

2004.05.22 / 최은영(영화 칼럼리스트)

성경의 십계명을 토대로 만든 연작 <십계>의 한 에피소드를 장편으로 옮긴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1988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을 때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20세기 후반 가장 주목할 만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폴란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진 1989년,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키에슬롭스키는 프랑스에서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제작하기로 했다. 같은 외모와 재능을 지녔으며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각각 살아가는 여성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라는 신비스러운 캐릭터는 이 영화의 모두를 좌우할 핵심 배역이었다. 신선한 얼굴을 찾던 키에슬롭스키의 눈에 띈 사람은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에서 피아노 선생으로 출연한 이렌느 야곱이었다. 스물다섯의 이렌느 야곱은 영화 출연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배우인데다 데뷔작 <굿바이 칠드런>에서도 단역에 불과했지만 신비스러운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끌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이렌느 야곱의 첫 번째 주연작이 되었고 키에슬롭스키는 촬영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지닌 이 영화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명민한 배우였다. “이 영화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분신과도 같은 두 여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키에슬롭스키는 그 두 사람이 지닌 공통적인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 재능과 열정을 지녔지만 삶에서 뭔가 빠진 게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느끼는 공허함이 아닐까.”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렌느 야곱은 첫 번째 주연작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키에슬롭스키는 삶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었다. 이별이나 고독감, 감정적 충돌은 그의 영화에서 단골 소재였다. 키에슬롭스키는 개별 캐릭터보다는 캐릭터 사이에서 생성되는 관계를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주력하면서 관계의 한계 또한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주인공들은 결코 온전한 만남을 갖지 못한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서로 닮은꼴인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는 결코 직접 대면하지 않으며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은 우연하게 찍힌 사진 한 장일 뿐이다. 삼색 연작에서도 키에슬롭스키는 감정적 평행선을 달리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삼색 연작의 토대를 이루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테마를 통해 이 세 단어가 지닌 이상적인 뉘앙스와 복잡한 감정적 현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혼란과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삼색 연작의 마지막 영화 <레드>에서 키에슬롭스키는 이렌느 야곱을 다시 캐스팅했다. 그녀가 연기한 발렌틴이라는 패션 모델은 전작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베로니카와 거의 흡사한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지만 고독감에 시달리는 아름다운 여성 발렌틴은 상대역을 맡은 퇴역 판사 장 루이 트랭티냥의 비관적인 시선에 대항하며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발견해간다. “키에슬롭스키는 인생이 가져다 주는 놀라움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종류의 경험을 겪으며 조금씩 변화한다. 연기란 어떤 면에서 인생과도 같다. 연기를 하면서 배우는 변화를 꿈꾼다.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 혹은 감독, 상대역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하는 작업의 본질이며 <레드>의 주제이기도 하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레드>를 만든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52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마음은 매우 염세적으로 기울었다. 그는 삼색 연작을 한꺼번에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새로운 영화의 각본은 쓰고 있었다. 천국, 지옥, 연옥이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삼부작을 구상하던 그는 1996년 심장 절개 수술을 받은 후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다. 키에슬롭스키의 죽음 이후에도 이렌느 야곱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빔 벤더스의 합작 영화 <구름 저편에>에 출연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며 더러는 함량 미달의 미국영화에서 재능을 낭비하기도 했다. 수많은 그녀의 출연작 중에서도 키에슬롭스키와 함께한 두 편의 영화만큼 그녀의 존재를 각인시킨 영화는 없었다.

TIP: 키에슬롭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의 주인공으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점찍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가 두 번째로 염두에 둔 배우는 줄리엣 비노시였지만 그녀 역시 레오 카락스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 운명처럼 다가온 배우가 신성 이렌느 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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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늘 취해 있어야 한다.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핵심이다.
어깨를 억눌러 당신을 땅으로 짓누르는
시간이라는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너희는 어김없이 취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술로 또는 시로, 또는 당신의 미덕으로,
그건 당신 뜻대로. 다만 취하기만 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나,
당신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취기가
이미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울부짖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몇시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주겠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구박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노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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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의 노래

각성의 노래

- 노래공장

찢겨진 깃발 아래서 생각하라
단결투쟁 승리의 약속 지키고 있는가
적들이 몰아칠수록 침착하라
더이상 물러설수도 없는 우리가 아닌가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폭풍으로 몰아치는데
우리는 자욱한 안개 속에 사분 오열 흩어질 순 없다
동지여 이제 조그만 자리 투쟁으로 날려버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동지여 노동 해방 투쟁의 전선에서
기필코 넘어야 할 또하나의 벽이 있다
우리 내부에 도사린 동지에 대한 불신 분열의 싹
아집과 관념의 몽상
동지여 과학 속에 철저한  반성과 각성을 딛고
뜨거운 사랑으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 단결하라

적들은 세월이 갈 수록 온누리에 몰아치는데
우리는 관념의 의문 속에 동상이몽 갈라질 순 없다
*파업에 당찬 머리를 모아 빈틈없는 전투 속에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단결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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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운동

사회주의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Socialist Feminism?)
바버라 에런리치 (Barbara Ehrenreich)

이 글은 1976년 잡지 윈에 처음 실렸으며 저자의 동의를 얻어 다시 싣는다. 이 글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사상의 고전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수십년동안 토론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이 글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 먼슬리 리뷰 편집진


어떤 수준에서, 아마도 너무나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오랫동안 많은 걸 겪었다. 당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이다. 당신은 화난다. 일에 대해, 월급봉투에 대해, 남편(또는 전 남편)에 대해, 아이들의 학교, 집안일에 대해, 예쁜 것에 대해,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해, 남들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떤 쪽이든, 남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등등.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를 생각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할지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생각들을 축약된 형태에 담는 어떤 단어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의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제안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상당수는 바로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우린 우리의 관심사 전체와 원칙 모두를 '사회주의적'이지도 '여성주의적'이지도 않은 듯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할 단어/용어/문구를 찾았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말에 아주 만족하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용어가 너무 길고(나는 하이픈으로 이어 표현되는 대중운동엔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그것이 진짜 지칭하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다. 이것이 지칭하는 건 결국 진정으로 사회주의 국제주의 반인종차별적, 반이성애적 여성주의다.

어떤 종류건 새로운 딱지를 취하는 것의 문제는, 이것이 즉각적인 분파주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도전이 되고, 신비가 되고, 쟁점이 된다.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는 분별있는 연설, 회의, 글 등의 주제가 되기에는 너무 넓고 포괄적이라는 걸 우리가 완벽하리만치 잘 알지만, '사회주의 여성주의'를 논하는 연설가들, 회의들, 글들이 있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뭐지?”라고 불안하게 자문한다. 이것이 세계사적 규모의 놀라운 종합, 곧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월스톤크래프트를 넘어서는 진화론적 도약이기를 (또는 어떤 순간에, 아마도 다음번 연설, 회의, 글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확인되기를, 소수의 불만있는 여성주의자들과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집착한 변덕, 일시적인 기분전환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주변에서 자라난 어떤 신비를 지나 나아가려 시도하고 싶다. 논리적인 출발 방법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를 나눠서 각각 따져보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더 정확하게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여성주의자는 또 어떻게 보는가? 우선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는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둘 모두 대중적 신화와 '상식' 지혜를 뜯어내고 경험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둘 모두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하는데, (전통적인 사회 과학이 하듯) 정적인 균형과 대칭 측면에서가 아니라 적대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한다. 둘은 또 자신들이 해방시킨다는 거슬리는 동시에 불편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여성주의자의 전망을 지니면서 관찰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이 둘의 분석으로 발가벗겨진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현실을 바꾸려는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역학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사회 과학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혹한 체계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한다는 걸 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불평등이 경제 체제로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과정들로부터 유발된다고 이해한다. 소수의 사람들(자본가 계급)이, 나머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의존하는 공장/에너지원/자원 등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대다수(노동자 계급)는 자본가들이 설정한 조건 아래서 자본가들이 주는 임금을 받아야 할 전적인 필요성에서 일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실제래 생산하는 것의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이 두 계급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다. 자본가 계급의 존재 근거는 노동계급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에 있다. 이 계급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힘(force)이다. 자본가 계급은 경찰이나 감옥 등등의 국가로 표현되는 조직적 폭력 수단을 (직접 또는 간접) 통제한다. 국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혁명적 투쟁을 벌임으로써만,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킨다.

여성주의는 또 하나의 익숙한 불평등에 대해 발언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성별간의 일정한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인간 사회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여러 대륙의 인간 사회를 훑어보면, 공통적으로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족 내부에서와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남성 권위에 대한 예속, 여성을 자산의 형태로 대상화하는 것, 여성의 일을 아이 키우기, 성인 남성을 위한 개인적 서비스 제공, 특정한 (보통은 지위가 낮은) 생산 노동 형태에 한정함으로써 노동의 성별 구분 등이 그 특징이다.

이런 것들의 거의 보편적인 성향에 충격을 받은 여성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생물학적 '주어진 것들'에서 설명을 찾으려 해왔다. 남성은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특히 임신한 여성 또는 아이를 젖 먹여 키우는 여성과 비교할 때 그렇다. 게다가 남성은 여성을 임신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성별 불평등이 취하는 형식들은, 그것이 문화에 따라 아무리 다를지언정, 결국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지니는 분명한 육체적 장점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성 우위의 고대, 생물학적 뿌리 곧 남성 폭력은,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특정 문화에서 남녀의 성별 관계를 규제하는 법과 관습으로 인해 모호해진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분석을 따르면 이는 존재한다. 남성의 공격 가능성은 '나쁜'(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를 뜻하고, '착한' 여성들을 남성 우위에 공모하도록 유도한다. '착한'('예쁜', 순종적인) 태도의 대가는 무작위적인 남성 폭력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경제적 안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강제적인 착취에 의존하는 계급지배 체제를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다원론'에 관한 신화들을 폭로한다.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를 힘의 지배로 드러내기 위해 '본능'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를 뚫고 지나간다. 이 두가지 분석 모두 우리에게 근본적인 불공평(부정)을 볼 것을 강요한다. 선택할 것은, 신화들이 주는 위안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탱을 위해 신화를 필요하지 않는 사회 질서를 위해 일할 것인가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더해서 그 값을 '사회주의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게 가능하다. 사실, 사회주의자인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보통 보는 방식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그러니까, 우리의 여성주의를 사회주의자 범위안으로 그리고 우리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범위안으로 밀어넣는 일종의 잡종으로 말이다. 사물들을 이렇게 두는 데서 생기는 문제 하나는, “그럼, 그이는 진짜로는 뭐야?”라고 의문을 품거나 아니면 “주요 모순이 뭐야?”라고 묻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제하기 어렵고 정당한 것처럼 들리는 이런 질문들은 종종 우리를 멈춰서게 한다. “선택하라!”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되라!”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정치적 일관성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잡종도 아니고 형세 관망자(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이 정치적 일관성을 얻으려면, 우리를 다른 부류의 여성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여성주의자로, 다른 부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차별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여성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류의 사회주의를 구획지어야 한다. (이 용어를 양해해 주시길) 이럴 때만, 사물들이 불편한 병치 이상의 어떤 것으로 '더해질' 것이다.

대부분의 급진 여성주의가들과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한 한 나의 이런 간단한 특징화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시각에서 볼 때, 급진 여성주의의 문제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급진 여성주의는 남성 지배의 보편성에 묶여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사물은 결코 진정으로 변하지 않았다, 모든 사회 체제는 가부장제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단지 타고난 남성 공격성의 표현일 뿐이다 등등의 생각에 말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태도의 문제는 남성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평등한 기반에서 그들과 화해할 가능성) 뿐 아니라 여성에 관한 많은 것들까지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급진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국 같은 사회주의 나라를 '가부장제 사회'로 얕보는 것은, 수백만의 여성들이 벌인 진정한 투쟁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 억압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을 띠며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차별이 여아 살해로 표현되는 사회와 중앙위원회의 불균등한 대표 구성으로 나타나는 사회는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우려하는 게 마땅한 성 차별이라는 주제의 역사적 변주 가운데 하나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한 묶음의 변화다. 이는 학문적 쟁점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대체한 사회 체제는 사실 가부장적인 것이었다. 이 가부장적이라는 용어를 나는 본래 뜻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이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이 지배하는 체제를 뜻한다. 사실, 산업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로부터 나와서 그것을 망치면서 앞질렀다. 생산은 공장으로 옮겨갔고 개인들은 '자유' 임금 근로자가 되기 위해 가정에서 뛰쳐나왔다. 자본주의가 생산과 가족 생활의 가부장적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가 남성 우위를 폐지시켰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특정 성 억압 형태는 상당 부분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다. 거대한 역사적 불연속성이 우리와 진짜 가부장제 사이에 놓여있다. 오늘날 여성인 우리가 겪는 경험을 이해하려고 하면,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이외에 여러가지가 있다. 단지, 여성주의자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 제3세계 여성 등 가장 억압받는 여성들에 가장 주목하며 그 때문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에 맞설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말 수도 있었다. 단지 여성도 계급의 일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급 체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성주의자인 우리의 전망에 대한 어떤 또 다른 것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 삶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 차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맥락 안에 위치짓지 않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는 점이 바로 내가 명백히 하려는 그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한 내가 간단한 요약한 것에 역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다시, 더 나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유일하게 '진짜'이며 중요한 것들은 생산 과정 또는 전통적인 정치 영역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경험과 사회적 존재의 다른 부분들 곧 교육, 성, 여가, 가족, 예술, 음악, 가정 일 등과 관련된 것들은 사회 변화의 중심 동력의 주변부일 뿐이다. '상부구조' 또는 '문화'의 부분인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아주 다른 진영에 있다. (여성주의자가 아닌 많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총체성으로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적 존재의 모든 구석구석을 침투하도록 이끌린다고 이해한다. 특히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소비 영역이 경제적 관점에서 생산 영역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계급 투쟁을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쟁점에 한정된 것 또는 일터 관련 쟁점들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들의 이해가 충돌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며, 이런 영역에는 교육, 건강, 예술, 음악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단지 생산 수단의 소유권뿐 아니라 사회적 존재의 총체를 변혁하는 게 목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출발해 여성주의에 도달했다. 우리가 독점 자본주의를 정치적, 경계적, 문화적 총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생산 또는 '정치'와 표면상 아무 관계가 없는 여성주의 쟁점들, 가족과 건강관리와 '사적'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을 위한 공간을 우리의 마르크스주의 구조 안에서 확보한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우리의 표지(브랜드)에는 '여성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맨먼저 여성들을 '상부구조' 또는 다른 어떤 영역에 구획지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적 성향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주부)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곰곰 생각한다. 진짜 노동계급의 일원인가? 말하자면, 진정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가? 물론 우리는 주부들이 노동계급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 잉영 가치를 생산하다는 사실을 정교하게 증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민으로 이뤄진 계급이며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상당히 떨어진 사회적 존재를 지닌 계급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계급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가장 주변부에 있는 듯한 여성들 곧 주부들이 사실은 계급의 심장부에 위치함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문화적,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두가지의 관심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함께 흐르는 일종의 여성주의와 일종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가 그동안 그렇게 신비화됐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가 진정 내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뜻하고 여성주의가 비역사적인 성격의 급진 여성주의를 뜻하는 것인 한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이념은 거대한 신비 또는 역설이다. 이런 것들은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내가 규정하려고 시도했던 바대로 다른 종류의 사회주의와 다른 종류의 여성주의를 합친다면, 공통의 기반을 갖게 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주의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공간은 꼭데기 잘린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제약에서 자유롭고, 독점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총체성을 말하는 정치론을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존 여성주의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는, 세계관에서 제약이 없으며 불완전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깨고 나가야 했다. 우리의 경험 전체를 이해하고 이 이해의 총체성을 반영하는 정치론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론을 하나의 '공간' 또는 공통의 바탕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이 '바탕'에서 사물들이자라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성, 계급, 자본주의, 남성 지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종합에 몇년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선 이런 사고의 노선을 아주 간략하게만 제시하겠다.

1. 계급과 성 지배는 궁극적으로 힘에 의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여성주의적 이해는 옳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성 차별적/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가장 타격이 큰 비판이다. 그러나 이 '궁극적으로'라는 것에는 많은 게 있다. 매일 매일 생활이라는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폭력의 위협에 억제당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고 종종 심지어는 물질적 박탈의 위협이 없는 가운데 성과 계급의 지배에 순응한다.

2. 그렇다면 사물들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게 힘의 직접적인 사용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계급의 경우, 이미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이 전투적인 계급의식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많이 논의됐다. 분명 민족적 분리, 특히 흑백의 분리가 해답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계급이 나뉜 데 더해서 사회적으로 원자화하기도 했음을 주장하려 한다. 노동계급의 이웃관계는 파괴됐으며 이제 부패했음이 인정된다. 생활은 날로 사적이 되어가고 내향적이 됐다. 한 때 노동계급이 지녔던 숙련기술은 자본계급에게 강탈당했다. 그리고 자본가가 통제하는 '대중 문화'은 거의 모든 고유 노동계급 문화와 관습을 시나브로 몰아냈다. 계급으로서의 집단성과 자립 대신 상호 고립과 자본가 계급에 대한 집단적 의존이 존재한다.

3. 여성들의 예속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 계급 원자화 과정의 열쇠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노동계급의 삶을 원자화하고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문화적/물질적 종속을 촉진한 힘들은, 여성들의 예속을 영구화하는 데 복무한 바로 그 힘들이다. 점점 더 사적인 가족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집단에서 가장 고립된 이들이 바로 여성이다.(심지어 집밖에서 일할 때도 그렇다.) 많은 핵심 사례들에서 다름 아니라 여성의 숙련기술이 (생산 기술, 치유, 태아 받아내기 등등) 상품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금지되거나 불신당해왔다.사생활에 대한 광범한 자본주의적 침투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고 의존적인 (곧 '여성적인') 태도가 되도록 부추김당한 이들이 누구보다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생활에 대한 후기 자본주의적 침투는 제압/'여성화'의 주된 목표로 여성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여성이 노동계급의 문화-담지자이기 때문이다.

4. 당연히 여성들의 투쟁과 전통적으로 계급투쟁으로 인식된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이어진다. 여성들의 모든 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특정 여성집단의 권력과 부를 신장시키는 것만 추구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에서 집단성과 집단적 확신을 형성하는 모든 투쟁은 계급의식 형성에 아주 중요하다. 거꾸로, 모든 계급투쟁이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 공세인 것은 아니지만 (특히 산업사회 이전의 가부장적 가치에 집착하는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자율성을 형성하려고 하는 모든 투쟁은 불가피하게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연결된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 이것이,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분석이 취하는 한가지 방향이다.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의 투쟁이 무너져내려 같은 것이 되게 할 종합이 등장하기를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간략한 요약들은 그 나름의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인종적 억압처럼) 순수히 여성주의적인 전망으로는 기괴한 왜곡 없인 설명하거나 다룰 수 없는 자본주의 지배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가정내 남성 폭력처럼) 상당한 확대 해석과 왜곡 없인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거의 간파할 수 없는 성 억압의 중요한 측면들이 있다. 그러므로, 계속 사회주의자들이자 여성주의자들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라는 자신확신에 찬 정체성을 우리가 지니기 시작하는 종합이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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