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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년 7월)

 

 

 

   19세기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문학가였던 체르니셰프스키의 대표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학을 알기 위해 모든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문학을 알기 위해서는 고골리를 읽으면 된다.'  물론 이는 훗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 러시아의 문학을 대표하기 이전의 말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40여권이 넘는 맑스나 레닌의 진집을 죄다 읽어야만 맑스나 레닌을 이해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칼 폴라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형 The Great Transformation》에는 그의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절판된 지 오래라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만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 폴라니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여기 홍기빈 님이 간편한 시추공을 하나 뚫어 놓았습니다. 아쉽지만 이를 통해서나마 그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몇년 전에 재판이 발간된 《사람의 살림살이 Ⅰ, Ⅱ》(칼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풀빛/ 1983)나 간접적인 통로이긴 하지만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J. R. 스탠필드 지음/ 원용찬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7)으로 나아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 책은 크게 6개의 장과 옮긴이의 해제로 되어 있습니다. 1장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은 폴라니가 1947년 《Commentary》에 기고한 논문으로, 시장 신화를 비판하는 그의 연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2장은 《거대한 변형》의 6장과 11장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이중적 운동과 자기 조정 시장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는 폴라니의 강연 개요나 개인 노트 가운데 뽑은 글들로, '다시 쓰는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면 출간된 적이 없는 글들이라고 합니다.

 

   4장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은  폴라니가 1925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기관지에 발표한 글입니다. 여기서 그는 중앙 계획에 의존하는 국가 사회주의 혹은 '관치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경제 모델의 단초를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외부적 조망'과 대비되는 '내면적 조망'에 착목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곳에서 옮긴이가 산별노조를 '산업 결사체'로 번역한 것은 조그만 티로 보입니다.

 

   5장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는 1945년 영국에 머물고 있던 폴라니가 전후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체제의 복구를 추진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영국이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을 환기하려고 쓴 글입니다. 이를테면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세계 시장 질서의 보편주의에 맞서 지역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실천적인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만으로는 오늘날의 쟁점과 관련해 더 구체적인 고민으로 나아가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한편, 글 가운데 소련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다소간의 옹호는 현재 시점에서는 다소 거슬리는 부분입니다.

 

   6장 <칼 폴라니 약전>은 폴라니의 딸 등이 그의 삶과 사상을 개관하고 있는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홍기빈 님이 쓴 <해제 - 칼 폴라니의 시장 자본주의 비판>은 폴라니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어서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의 3장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 비판>은 193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목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처럼 통렬한 비판은 현재에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여러번 곱씹어 볼만한 글입니다.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

       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의 욕구 가운데 호흡 중추보다 위에 있는 부분의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p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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