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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산업

누가 거대 논술산업을 움직이나? [조인스]
논술? 386 운동권에 물어보라! `해직교수·노동운동가…논술산업 파워그룹 형성`
월간중앙대치동 학원가, 한 집 건너 한 집이 논술학원 간판이다. 박학천논술아카데미·초암C&C·유레카논술아카데미 조동기국어논술학원…. 논술시장을 휩쓸고 있는 주인공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논술학원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부상하고 있다. 웬만한 학원가 골목에서 ‘논술학원’ 간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류에 민감한 언론사들도 뛰어들었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의 언론매체에서 아예 논술아카데미를 차린 데 이어 기자 출신이 차린 논술학원도 대치동에서 성업 중이다. 2007학년도 수시전형에서 수리논술·언어논술 등이 등장한 이후에는 수학학원·사회탐구학원도 ‘논술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논술시장에 뛰어드는 추세다.

지난 4월 대우증권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 시장규모는 16조8,000억 원. 전문가들은 이 중 절반 정도가 논술시장으로 몰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형 논술학원의 매출은 연간 100억 원이 넘는다.

전국 학원가에 논술 열풍이 불어닥친 것은 지난해다. 교육부가 지난해 초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등급제로 바뀌는 대신 내신과 논술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08년도 대학입시 전형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을 지망하는 상위 3~5% 학생만 준비하던 논술시장은 입시생의 30~50%가, 더 넓게는 초등학생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대시장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내신에 대한 불신이 큰 주요 대학이 교육부 발표에 대한 후속타로 2008학년도부터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자 논술시장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01 논술산업에 왜 엘리트 강사 몰리나?
상위 3~5% 시장에서 30~50% 시장으로 급팽창

논술 강좌에 대한 수요는 1994년 주요 대학에서 본고사가 부활한 이래 꾸준히 있어 왔다. 1997년 입시부터 대학별 영어·수학 본고사는 금지됐지만 논술고사는 허용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치동 일대에서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논술학원 붐이 일었다. 주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논술이 관건이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대치동 아줌마’들 덕분이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논술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한 사람은 고(故) 조진만 전 메가스터디 부사장이다. 1996년 대학입시에서 연세대·서강대·한양대·이화여대 등 4개 대학 논술 문제 6개를 맞힌 그는 일약 ‘족집게’ 강사로 등극했다. 폐렴에 걸린 후에도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강의에 쫓기던 그는 2001년 9월 32세의 나이에 과로사했다.

논술강사 1세대는 조진만 강사 외에 이석록(메가스터디 평가소장)·이만기(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조동기(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원장) 등을 꼽는다. 이들은 대부분 국어 강의를 맡았던 강사들이 논술까지 영역을 넓힌 경우다.

당시에는 일부 대학에서만 논술고사를 치렀기 때문에 언어영역 강사들이 수능 직전까지 언어영역 위주로 가르치다 수능이 끝나면 논술 강의에 매달렸다.

학원 강사들이 본격적으로 논술시장에 뛰어든 것은 수시전형이 본격화한 2000년 이후다. 이 즈음부터 논술 강의만으로도 1년간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조진만·이석록·이만기 등으로 대표되는 1세대 논술 강사에 뒤이어 현재 논술 학원가를 움직이는 2세대 강사는 박학천·윤성진(박학천논술학원), 이윤호·송재희(초암C&C), 장민성·박수림·박홍순(유레카논술아카데미), 김재인(유웨이중앙교육 오케이로직 논술 대표강사) 등이다.

이들 역시 1세대 강사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지만, 과거 10년간 논술이라는 한 우물을 판 결과 최근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1세대 강자들이 스타 강사 개인의 역량으로 승부를 겨뤘던 것과 달리 2세대 강자들은 시스템을 갖춘 팀 혹은 학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두고 압구정 조동기국어논술학원 안인숙 부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통 스타 강사라고 하면 지금까지는 ‘족집게’ 강사를 의미했습니다. 1996년 입시에서 4개 대학 문제를 맞힌 조진만 선생이 대표적 예죠. 그러나 지금의 논술 경향에서 ‘족집게’는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습니다. 특히 통합형 논술이 출제되면서 이는 더욱 불가능해졌죠. 결국 한 명의 강사가 전부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어떤 학원이 시스템을 잘 갖췄느냐가 관건이 됐죠.”

흥미로운 점은 강남 논술시장이 386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만든 학원에 의해 평정됐다는 점이다.


02 고려대 운동권 집합소 ‘조동기국어논술학원’
후배들 먹고살게 만들려다 28개 직영점 갖춘 기업형으로…

▶조동기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원장

1세대 국어 강사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하게 논술시장에서 자리 잡고 있는 강사는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 조동기 원장이다. 85학번인 조동기 원장은 고려대 총학생회에서 집행위원장을 지낸 이른바 386 운동권 출신이다.

연극에도 심취해 고려대 연극 동아리 ‘극회’ 멤버로도 활동했다.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도 대학 졸업 후 독립영화를 만들기 위해 합류한 ‘서울영상집단’ 사무실 이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한때 영화배우를 꿈꿨을 만큼 준수한 외모와 목소리를 갖춘 그는 금세 인기 강사로 떠올랐다. 아시아선수촌 내 작은 보습학원 아르바이트 강사였던 그는 불과 5년 만인 1994년 강남 대일학원 대표강사가 됐다.
조 원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기본적으로 수능 언어영역이나 논술 과목이 운동권 출신들과 잘 맞습니다. 특히 운동권 출신들은 대학생활 동안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을 하며 고전과 인문사회과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죠. 저의 경우 여기에 극회 활동을 하며 예술의 흐름까지 익혔죠. 수능 언어영역에 나오는 웬만한 지문을 다 원전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쉬울 수밖에 없었죠. 대학 동기들 중에서 대학 때 공부한 내용을 아마 제일 잘 써먹는 사람이 저일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사회탐구 과목의 손주은, 과학탐구 과목의 이범 등과 함께 강남 최고 스타 강사 반열에 오른 그는 1998년 자신이 만들다시피 한 강남 대일학원을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에게 넘긴 뒤 ‘바보 과대표’로 알려진 이창기(필명 홍치산)와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을 차려 독립했다. 조 원장으로부터 강남 대일학원을 인수한 손주은 대표는 이를 오늘의 메가스터디로 키워냈다.

조 원장은 “원장이 고려대 운동권 출신이어서 조동기국어논술학원에는 고려대 운동권 출신 강사들이 많다”는 소문에 대해 “어디까지를 운동권으로 보느냐의 문제”라며 “1980년대는 누구나 싸우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고 말한다.

▶방학 중에도 학원에 나와 논술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 내신과 논술시험으로 합격이 결정되는 2008년도 대입전형 발표 이후, 논술시장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대학 시절 제적됐거나 감방 경험이 있는 운동권 출신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배들이 제가 나름대로 학원가에서 유명하니까 아는 학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많이 찾아왔죠. 그중에서 괜찮은 후배는 다른 학원에 보낼 것 없이 우리 학원에서 같이 일하자고 붙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려대 ‘극회’ 출신 강사가 많은 것은 사실이죠.”(웃음)

그는 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이 28개 직영점을 갖춘 기업형 학원이 된 것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업이 확대됐다”고 덧붙였다.

“영화판 가려던 꿈 결국 접었다”

“40세가 되면 학원을 그만두고 영화판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5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없어도 학원이 굴러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시스템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과정에서 후배들을 많이 끌어들였고요. 그런데 막상 시스템이 갖춰지고 나자 유휴 인력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남는 인력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2002년 문을 연 분당점과 2004년 문을 연 목동점입니다. 우리 학원은 3년 이상씩 계신 강사 선생님들께는 학원 지분을 드립니다.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이 저 개인 것이 아니라 강사 선생님들이 공동으로 지분을 소유한 구조인 것이죠. 지분을 가진 선생님 중 독립을 원하는 분께는 직영점을 내드리고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만약 저 혼자 잘살겠다고 했으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끝에 “네 달 전 영화배우의 길을 접었다”고 했다.

“학원이 확장되면서 조동기라는 이름이 많이 부담스러워졌어요. 우리 학원에 오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조동기라는 이름을 보고 옵니다. 그런데 정작 조동기는 학원에 없고 영화배우를 하고 있다고 하면 아무래도 시장에서 형성됐던 학원의 신뢰도가 떨어지겠죠.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를 개설하며 사이트 이름에서 조동기를 빼고 ‘1교시’라고 했어요. 한동안 두 개 브랜드를 함께 끌고 가 보자는 전략이었죠.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여전히 ‘1교시’보다 ‘조동기’가 더 먹힙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혼자 꿈을 이루겠다고 저를 믿고 따라온 300명의 선생님과 직원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눈물을 흘리며 꿈을 접었죠.”

그는 배우의 꿈을 접은 대신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을 더욱 튼실하게 키우기로 했다. 지난 4월 베이징(北京)에 직영점을 낸 데 이어 올해 안에 중국에 2개 점, 영국과 캐나다에 각각 1개 점의 문을 연다는 계획이다. 영국·캐나다에서는 현지에 유학 가 있는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하지만, 중국에서는 중국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반도 개설할 계획이다.


03 문화·대안교육운동가들이 차린 ‘초암’
현실참여 한 방법으로 논술학원 구상… 문화공동체 성격 강하다

▶이윤호 초암C&C 대표

2세대 강사 중에서 가장 먼저 논술시장에 뛰어든 사람은 이윤호 초암C&C 대표다. 81학번인 그는 대학을 3군데나 옮겨다닐 정도로 뜨거운 대학 시절을 보낸 학생운동가이자 문화운동가였다. 이 대표가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도 문화 비평지 <리뷰>를 만들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표가 서울노동자연합 등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 송재희 씨와 함께 시흥에서 초암논술학원의 모태가 된 세림보습학원을 차린 것은 1994년. 학원 주위에 학교라고는 3개밖에 없는 재래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동네 보습학원이었다.

“시흥은 서울에서도 가장 변두리 동네입니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곳이죠. 재래시장 골목에 학원을 열었는데, 첫해에는 초등부·중등부 통틀어 학생이 딱 3명이었어요. 다음해인 1995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들 87명이 등록하며 비로소 학원으로서 틀을 갖췄죠.”

이 대표의 말이다. 시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그는 1999년 방배동으로 학원을 옮긴다. 이때 초암논술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며 본격적으로 논술전문학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 대표는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학원이 딱히 글쓰기 학원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한번 제대로 된 청소년교육을 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문화 비평지를 만들며 일종의 현실참여의 방법으로 학원을 생각했던 것이죠. 청소년들에게도 제대로 된 문화를 누리는 법을 가르쳐 주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초기 멤버인 송재희 선생님도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님과 함께 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를 만든 분이죠. 때문에 시흥에서 방배동으로 옮겨올 무렵인 1997~98년도에 학원을 낼 것인지, 아니면 대안학교를 세울 것인지를 둘러싸고 우리끼리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론은 자칫하면 우리들만의 해방구가 될 수 있는 대안학교보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학원이 낫다는 것이었죠.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들이 하는 노동, 즉 공부로부터 소외된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 보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이 대표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방배동 시절 초암은 학원이라기보다 일종의 공동체 같은 조직이었다.

따뜻했던 방배동 공동체 시절이 모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자기들끼리 ‘아름아리’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말이면 학원으로 놀러 왔어요. 학원 후배들에게 무료 과외도 해 주고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수업이 없는 날에도 학원에 나와 머물렀죠. 시험 때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밤을 새워 자기들끼리 토론하다 가고…. 학부모들도 ‘모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험 때면 학원으로 떡을 해 오셨죠.”

이 대표는 “참 따뜻했던 시절”이라며 “방배동 시절에 오늘의 초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당시 강사들이 초암의 초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송재희·이재륜·성민기·한사영·한경록 등이다. 음악평론가 강현,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한신대 서영채 교수, 숙명여대 권성우 교수 등 이 대표와 함께 문화운동을 하던 이들도 단골 논술 강사로 참여했다.

그러나 초암의 방배동 시절은 채 1년이 못 갔다. 학원 건물이 피라미드 조직에 넘어가는 바람에 쫓겨났던 것이다. 이후 초암은 약 1년간 강사만 있고 학원 건물은 없는 ‘학원 없는 학원’ 형태를 유지했다. 초암 강사들이 ‘초암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강사 네트워크를 만들어 학림학원·청산학원·대치A+학원 등 다른 학원에서 초암의 이름을 건 강의를 개설하는 형식이었다.

“방배동에서 쫓겨날 무렵 ‘우리가 만든 교육기관이 학원이 되는 순간 열정이 떨어지고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고민이 많았죠. 아이들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학원을 안 세우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암이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문을 연 것은 2001년 서울 목동에서였다. 역시 처음에는 강의실 4개의 작은 학원이었다.

“대박이 난 것은 다음해인 2002년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말 입시철에 1,200명의 학생이 몰려왔죠. 갑자기 폭발한 거예요.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죠. 다 돌려보내고 600명 정도를 끌고 입시를 치렀죠.”

초암의 수강생 대부분이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강생이 폭발적으로 몰려든 것이었다. 2002년 목동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다음해 대치동 학원가로 진출한 초암은 대치동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오늘의 명성을 쌓는다. 현재 초암은 목동·대치·반포·노원에서 4개 직영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만 160명에 달한다. 초암 콘텐츠를 공급하는 협력학원도 56곳에 이른다.


04 노동운동가들의 모임 ‘유레카’
연말 논술 시즌 팀 이뤄 논술 강의… 고전 읽기 수업 먹혀 명성

▶장민성 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인 장민성(서울대 84학번)·박홍순(성균관대 82학번) 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되는 386 운동권 출신이다. 초기 멤버인 이해웅(한국외국어대 85학번) 이사 역시 1988년 총학생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2년 자유민주통일(자민통) 사건으로 수배돼 3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이해웅 이사는 “학원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였다”고 말한다. 유레카의 대표강사인 장민성 강사가 논술 강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6년. 강동의 대표적 대형 학원인 청산학원에서였다. 처음에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강의였다.

“논술 강의는 첨삭을 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갑니다. 그래서 알음알음으로 알고 지내던 동료와 후배들을 하나 둘 끌어들이게 됐고, 이렇게 모인 팀이 오늘의 유레카를 만든 박홍순·임승철(82학번)·박규환(강의명 박수림, 86학번)·채기석(89학번) 씨 등입니다.”

이들이 대치동으로 진출한 것은 1998년. 장민성팀의 명성을 듣고 강북까지 넘어오는 학생들이 늘자 아예 대치동으로 진출하기로 했던 것이다. 대치동 진출 이후에도 한동안은 직접 학원을 낸 것이 아니라 다른 학원에 출강하는 형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논술 수업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수능시험이 끝난 후 잠깐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연말에만 반짝 성행하는 시장인 탓에 1년 내내 학원 문을 열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던 것이다.

이처럼 유레카 멤버들은 평소에는 지역 노조·시민단체 등 ‘본업’에 종사하다 연말이면 팀을 이뤄 논술 강의를 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논술시장에 뛰어들어 오늘날의 외형적 조직을 갖춘 것은 1998~2000년이다. 매년 입시 형태가 바뀌면서 논술이 점차 중요한 전형 요소로 부각됐던 것이다.

유레카가 대치동에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데는 서울대가 주최하는 논리·논술경시대회에서 유레카 출신 학생들이 발군의 성적을 올린 것이 주효했다. 2000년대 초반 서울대 주최 경시대회 입상은 곧 서울대 수시전형 합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는 유레카에 가야 한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해웅 이사는 유레카의 성공 비결에 대해 “고전 읽기 중심의 수업이 먹혔다”고 설명한다.

“유레카는 애초부터 고전 원전을 읽히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보통 30~50권의 고전을 중심으로 수업하죠. 학생들이 따라 하기에 재미도 없고 힘든 프로그램이죠. 3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러나 논술시험의 본질을 가르치기 때문에 유레카 출신 학생들은 논술 유형이 바뀌어도 적응력이 강합니다.”


05 해직교수가 만든 ‘박학천논술학원’
문학평론가 출신으로 교육출판사업에 주력하다 논술로 선회

가맹 학원 1,600개를 보유한 ‘박학천논술학원’의 박학천 대표는 학원가에서도 특이한 이력으로 꼽히는 교수 출신이다. 서울대 사대 출신으로 무학여중·서울사대부중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문학평론가로도 등단했다. <문학사상> <실천문학> <한길문학> <문학과 사회> <문학과 비평> 등에 30여 편의 평론을 발표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1990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1호 박사학위를 딴 그는 전주대 국어교육과 전임교수로 임용됐으나 1992년 교수협의회를 구성하려다 해직된다. 그는 한샘출판사로 자리를 옮겨 <독서와 논리> 편집주간 등을 역임하며 교육출판업자로 변신한다. 이 시기 그는 <한샘 수능 골드 시리즈>를 개발해 50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박학천 박학천논술학원 대표

교육출판업자로 성공한 박 대표가 학원시장에 뛰어든 것은 1998년. 책을 집필하기 위해 동료 교수·교사·문인 등 60여 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박학천논술연구소’ 개소가 계기가 됐다.

박학천논술교실은 최근 초암·유레카 등이 학원에서 시작해 교육출판업계로 진출하려고 하는 것과 반대로 교육출판업계에서 시작해 학원사업으로 뛰어든 경우다. 이 학원 윤성진 대표강사는 “역삼동에 사무실을 냈을 때만 해도 학원시장에 뛰어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집필을 위한 연구소였습니다. 사무실에 강의실조차 없었죠. 그런데 ‘논술연구소’라는 간판을 보고 논술학원인 줄 알고 찾아오는 분이 많았어요. 우리 생각에도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보면 아무래도 집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찾아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남과 서초동에 강의실 2개를 빌려 수업을 시작했죠.”

그는 “지금까지는 학원보다는 교육출판산업에 주력을 쏟았다”며 “학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구원들이 연구에 방해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운영했다. 지금도 직영 학원은 4개뿐이다. 학원시장에서는 오히려 초암이나 유레카보다 후발주자”라고 말한다.


06 왜 386 운동권인가?
고액과외와 다르다… 사교육 아닌 대중교육에 종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 정글보다 더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남 논술시장을 386 운동권이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압구정 조동기논술학원 최규윤 강사는 “386세대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세대”라며 “아무래도 대학 시절 밤을 새워 토론하고 고민하며 거대담론을 접했던 사람들인 만큼 다른 과목보다 논술, 특히 통합논술에 강점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또 “90년대 학번 강사들도 대학 시절 사회과학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무래도 논술에 강하다”고 덧붙였다.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이해웅 이사 역시 “논술 수업은 선배 한 명이 후배들과 팀을 이뤄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 형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논술시장에 뛰어든 운동권 강사들은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다.

▶논술학원들이 입시논술에서 벗어나 ‘안정적 선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뛰어든 시장이 초등학교 독서·논술 시장이다. 학원 관계자들은 전체적으로 고등 입시 시장보다 초·중등시장이 훨씬 크다고 분석했다.


논술을 비즈니스 모델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논술 수업 자체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비즈니스 모델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동기 원장 역시 “운동권 사람들의 미덕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신뢰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들을 돈으로 본 적이 없다. 그 부분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한다.

초암 이윤호 대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 욕구와 강사들의 공동체 의식이 성공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고 분석한다. 한 예가 일요일마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열리는 밤샘 세미나다.

초암은 시흥 시절부터 지난 13년간 일요 밤샘 세미나의 전통을 지켜 오고 있다. 강사 전원이 예외없이 참석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토론한다. 초암은 여기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수업 모델을 개발하고, 학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 대표는 “강사를 뽑을 때 밤샘 세미나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다. 할 수 없다면 뽑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만큼 밤샘 세미나는 초암의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세미나가 끝나면 뒤풀이가 이어진다.

그런 만큼 이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 사람들이 학원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윤호 대표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또 “교육은 어떤 교육이든 공적 성격을 갖는다. 차이는 제도권이냐, 아니냐다. 정작 입시 위주의 단편적 교육을 하는 것은 학원이 아니라 학교”라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이 대표의 주장.

“초암이 논술시장에 뛰어든 것도 주입식 제도권 교육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논술은 기본적으로 주입식 교육이 안 되거든요. 스스로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논술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우리가 대안교육, 교육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교육시장에 진출하며 고민이 많았지만, 대안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고민을 해결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고민의 산물이 지난해 4월 홍세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소장파 교수 등과 함께 문을 연 교사 아카데미 ‘풀로 엮은 집’이다. 이 대표는 학원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매달 2,000만 원을 ‘풀로 엮은 집’에 지원한다.

조동기 원장 역시 “핵심은 사교육이 아니라 사교육비”라고 지적한다.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자체를 나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비싼 사교육을 통해 부가 세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원 수업이 아니라 고액과외를 문제 삼아야죠. 한 달에 15만 원 남짓 하는 학원 수업은 오히려 대중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7 유명 논술 강사 얼마나 버나?
억대 연봉은 10명 내외… 4~5년차 연봉 6,000만~7,000만 원 선

흔히 ‘논술 강사=억대 연봉’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른바 잘나간다는 논술 강사 중에도 억대 연봉을 많지 않다는 것이 논술학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억대 연봉을 받는 강사는 논술시장 전체를 통틀어 10명 내외라는 것. ‘브랜드’ 강사쯤 돼야 억대 연봉을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나 수학 과목과 달리 논술은 대형 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 스타 강사라고 하면 한 번에 적게는 100명, 많게는 300명씩 모아 놓고 대형 강의를 하는데, 논술은 과목의 특성상 한 번에 10명 내외의 수업을 해야 합니다. 많아야 20명을 넘길 수 없어요. 산업으로 치면 저부가가치 산업이죠. 때문에 스타 강사 혹은 억대 연봉이 나오기 힘든 과목입니다.”

유레카 이해웅 이사의 설명이다. 그는 “최근 다른 과목 강사 중에서 논술 강사로 전업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학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4~5년차 논술 강사의 평균연봉은 6,000만~7,000만 원 정도라는 것이 이 바닥의 통설이다.

예외적으로 초암논술아카데미는 4,500만 원 선에서 일종의 임금피크제를 정해 놓고 있다.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학원답게 강사 간 연봉 차이가 너무 크게 날 경우 위화감이 조성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논술 강사의 연봉이 다른 과목에 비해 적은 또 다른 이유는 다른 과목과 달리 논술학원은 입시철에만 반짝 성업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윤호 대표는 “8주간 일해서 1년치를 벌어야 하는 곳이 논술시장이다. 이는 유명 학원, 유명 강사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논술이 중요해졌다고는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 논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 수시전형을 전후해서 혹은 수능시험이 끝나고 8주간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 논술시장에 유독 ‘묻지마 고액과외’가 성행하는 이유다.

이 같은 상황 아래서 학원들이 ‘안정적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눈을 돌린 것이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장이다. 특히 논술학원 입장에서는 초등학생은 ‘방학’(각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내신학원을 제외한 나머지 학원은 거의 한 달씩 수업을 쉰다. 학원 강사들은 이 기간을 ‘방학’이라고 부른다) 없이 연중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학원 관계자들은 전체적으로 고등 입시시장보다 초·중등시장이 훨씬 크다고 분석한다.

초등학교 시장에 가장 먼저 뛰어든 학원은 박학천논술교실이다. 박학천논술연구소는 자체 개발한 초등학생용 교재 및 교육 프로그램을 가맹점 학원에 공급하는 형식으로 이미 2002년에 초등학교 논술시장에 뛰어들었다.

첫해 10개 가맹점으로 시작한 초등부사업은 지난해 불어닥친 논술 붐에 힘입어 지난 한 해에만 가맹점이 1,000개 이상 늘어나 현재 전국적으로 1,600개 가맹점이 성업 중이다. 조동기국어논술전문학원은 중등부에서 강세를 보인다. 초암도 조만간 초등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논술시장은 이제 걸음마 단계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더 커질 가능성이 농후하는 것이다. 박학천논술학원 윤성진 강사는 “앞으로 3~5년 안에 각 과목에서 주관식 비율이 늘어나면서 결국 모든 과목이 논술 식으로 변화할 것”이라며 “오늘날 교육의 큰 흐름이 논술교육 강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유레카 이해웅 이사도 “수능시험이 처음 실시됐을 때는 모두 어리벙벙했다. 학원들도 수능 체제에 정착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논술시장도 비슷할 것 같다”고 말한다.

대학입시가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며 학원가에 일대 변화가 밀어닥쳤듯, 대학입시가 수능에서 논술 위주로 바뀌면서 학원가에도 3~4년 내 빅뱅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오효림 월간중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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