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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라는 말 속에 숨겨진 무책임성

 

 오늘 저는 교회에서 한 모임을 가졌는데 사람들의 말 속에서 '은혜'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를 계속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나 저에게 언어폭력으로 다가오던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잘못한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연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성스러운 언어로 자신들의 무책임성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소위 개혁주의 적인 '은혜'는, 카톨릭의 비인간적 폭력성과 비성경적 구원론에 맞서 싸우며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자세(ad fontes)'라기 보다 차라리 자신의 오류와 불성실함을 합리화시키는 소위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합리화', '자기 방어'기제의 전형 같습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은혜와 심리적 방어기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은혜라고 간증하며 자신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을 반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가 당시 개신교를 향해 비판했던 '값싼 은혜'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값싼은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값싼은혜는 죄의 의인(義認)이요 죄인의 의인이 아니라 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본회퍼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지 그것을 은혜라는 거룩한 말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철저히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까?

 요즘들어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 시대를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포화 상태가 되어 질릴 대로 질려버린 삶 속에서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은 종교적 긴장감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호이징가의 말처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로 가득찼지만 종교적 긴장감은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순교자적 자세를 본받자고 입술로는 부르짖지만 그분들의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들만 억지로 가지고 왔지 그분들이 추구했던 신앙의 본질인 '순교자적 제자도'는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에 긴장감 없이 종교적인 껍데기로만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변해야 합니다. 더이상 값싼 은혜보다 귀중한 은혜를 종교적 개념들과 형식을 추구하기 보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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