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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요구

최원 씨의 실명 요구, 노동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현종혁 | 시론/사설 2005.03.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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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씨의 실명 요구, 노동자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 종혁


  최원 씨는 “논의를 위한 조건”으로 필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로 인해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 「사노신」) 홈페이지에 본인의 실명과 신상 공개 문제에 대한 논쟁이 조금은 거칠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당사자인 필자의 태도 표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번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원 씨의 실명 요구에 대해 조금은 긴 답변을 보낸다.


1. 인터넷 실명제 논란

  얼마 전, 한 시사지에 「중국, 인터넷이 ‘죽(竹)의 장막’을 걷는가」라는 기사가 실린 적 있다. 중국은 통제와 감시 체계가 강하다. 그런데 인터넷의 도입으로 중국 사회의 통제 시스템이 약화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사지는 그 징후로서 사스라는 전세계적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중국 정부로 하여금 전염병의 진원지가 중국이라는 진실을 말하게 했던 주인공이 인터넷이었다는 사실과 지난해 도시 유랑민에 대한 단속법을 폐지하게 만든 ‘쑨즈강(孫志剛) 사건’(쑨즈강이라는 청년이 불심 검문으로 잡혔다가 임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은 사건) 등을 예시한다.


  또한 시사지는 여기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 방식 역시 고발한다. 중국 정부는 인터넷으로 인해 감춰져왔던 진실이 폭로되고 정부 정책에 대한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개입이 강화되자, 인터넷 여론에 대한 탄압으로 들어갔다. 최근 쑨자정(孫家正) 중국 문화부장이 인터넷 콘텐츠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중국은 전국의 PC방을 집중 단속하고 있으며 베이징 시의 경우 ‘건전한 인터넷 문화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베이징 전역의 PC방을 두 달 넘게 폐쇄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6만 명가량의 인터넷 감시단을 운영하고 인터넷 활동을 빌미로 지금까지 54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PC방 이용자들에게 의무적으로 개인 신상을 기록하라는 등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 국제 인권 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인터내셔널)는 중국 정부의 과도한 인터넷 감시를 비판하고 구속자들을 ‘양심수’로 간주하고 무조건 ·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1998년부터 한국 정부는 ‘온라인 실명제’를 추진해왔으며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2월 9일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를 도입했다. 실명제를 옹호하는 자들은 익명성으로 인해 흑색 비방과 허위 날조가 난무하고 있으며 이것은 심각한 피해라고 말한다. 또한 실명제의 도입은 무책임한 발언이나 명예훼손 · 모욕, 혹은 유언비어 등의 폐해뿐만 아니라 자살 · 원조교제 · 음란 등 사회적 이탈행위에 대한 규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론은 정치가들이 실명제를 도입한 이유를 그것(올바른 인터넷 문화 조성)보다는 ‘정치인이 인터넷상에서의 낙선운동을 의식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과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비판 여론을 억압하는 데 실명제 도입의 주된 목적이 있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과 실명제 논란을 어떻게 볼까

 

  ‘인터넷 실명제’ 문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어떻게 바라볼까? 앞서 국제사면위원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부정적으로 본다. 동일한 사례가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도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는 컴퓨터 사기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 명의에 의한 데이터 전송을 금지하는 ‘컴퓨터시스템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대한 논란은 미국연방지방법원으로 넘어갔으며 연방지방법원은 이 법의 적용을 정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연방지방법원은 그와 같은 결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실명제법이 범죄적 목적을 가지고 허위 명의를 사용하는 자와 자기 보호의 필요로 허위 명의를 사용하는 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광범위한 규정으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한상희, 「사이버공간에서의 익명성과 책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을 표현의 자유로 보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이며 이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한에서만 제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익명성은 참주선동이나 유언비어와 같은 형태로 (실명일 경우에 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높인다. 익명성이 갖는 이러한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순기능이 더 강하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믿는다.
 

  1960년 미국연방대법원은 “익명의 팜플렛이나 전단, 브로슈어 또는 책자는 인류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각종의 언론보도에서 정보원을 익명으로 인용하는 관행이 있음을 감안할 때, 익명성이 표현의 자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거스르기는 어렵다고 덧붙인다. 이것이 익명성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하는 이유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책과 혁명』이라는 저작 전체를 통해 혁명 직전 파리의 치안총감이 했던 말을 증명한다. “파리인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허가받은 출판물보다는 은밀히 떠돌아다니는 금서들을 더 많이 믿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루소와 볼테르, 디드로와 달랑베르 같은 계몽주의 서적으로부터도 자양분을 공급받았지만 오히려 ‘외투 밑에서 은밀히 팔리던 비합법적 책들’, 즉 금서(禁書)야말로 앙시앵 레짐(구제도)의 정통 가치체계를 아래로부터 잘라버렸다고 말한다.
 

  발리바르주의자들이 의존하고 탐구하는 스피노자 역시 1673년 『신학정치론』이라는 책을 익명으로 출판했었다. (아마 최원 씨가 당시에 살았다면, 최원 씨는 스피노자와의 논의를 거부했을 것이다. 익명성이란 이유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이 표현의 자유에서 갖는 투쟁의 전통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가 가져올 수 있는 역기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이성의 힘’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나 증오 혹은 편견, 습관, 전통 따위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막고 개인의 자유가 자신과 사회의 선(善: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는 인간 본래적인 능력이 있다. -- 그것이 ‘이성의 힘’이다.
  이 ‘이성의 힘’에 의해 익명성의 역기능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제어될 수 있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리를 현실에서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실명제’, 집시법의 개악, 비자 문제 등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질서의 보호라는 명분 하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침해하고 있다. ‘컴퓨터시스템보호법’ 논란과 같이 것처럼 민주주의가 원리대로 수호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해방을 위해 봉건제도와 투쟁하던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리가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이 표현의 자유가 갖는 긍정적 역할이 부정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진보하는 계급, 억압과 착취를 폐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들은 이제 노동자들의 해방투쟁을 억압해야 할 위치에 올랐으며 노쇠한 자본주의의 위기가 그들의 독재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독실하고 양심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노명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20세기의 서양 세계에서도 권위주의적 경향이 커져 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유주의적 정치균형이 깨진 경우도 있었고, 또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이 정치적 자유라는 <사치품>을 언제까지나 허용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근자에 자유주의 경제학이 다시 대두하고 있으나 거기에 비등하는 자유주의 정치학은 뒤따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 <자유> 경제는 오히려 거꾸로 <강한> 국가와 연합하고 있다.”(노명식,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

  이제 역사적 진리는 우리 노동계급 편에 있다. 일관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는 부르주아지들을 폭로하고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시킬 것이다.


3. 노동운동에서 익명성과 민주주의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익명성과 표현의 자유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1987년 대투쟁이후 등장한 민주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익명성에 대한 억압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굴절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활기와 능동성으로 출현한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어떠한 제도적 틀 없이도 실현하고 있었다. 워렌 비티와 다이안 키튼 주연의 <레즈>라는 영화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국적과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발언과 참여를 보장하는 것처럼, 우리 노동자 운동 역시 시장통처럼 시끄럽고 정신없지만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인정한다면 모두의 참여와 발언을 보장했었다.
  합법 · 반합 · 비합 가릴 것 없이, 개인이냐 집단이냐, 직책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상관없이, 모든 세력과 개인들은 노동자 운동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투쟁의 현장과 집회장에서 선동하고 유인물을 뿌렸다. 1988년에 이미 외국에서 파란 눈의 뜨로츠키주의자들이 국내로 들어와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등록되지 않은 익명성이었다. 무슨 무슨 노동자 일동이거나 사회주의자들이거나 또는 그들이 비합법적으로 발간하는 잡지의 기관지명 이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노동자 민주주의는 1992·3년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 정권 시기 대학교에서는 정권을 비판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곧잘 붙었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전두환 군사독재정부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 대자보를 떼어다 국립과학수사대에 요청하여 필체로 범인을 잡겠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태가 노동자운동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92·3년 전노협 집회에서 이미 당시 사노맹이나 여타 비합 운동조직들의 유인물을 수거하여 불태우고 플랭카드는 주최 측의 허락을 받은 것만 걸 수 있다며 갈기갈기 찢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분은 합법적인 집회에 전경이 침탈할 명분을 준다는 것이었다. 1, 2년 전까지 특정 정파의 견해에 부정적일지라도 자본가 정권에 맞서 그들의 표현물을 방어하던 민주노조운동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전투적 비판세력에 대한 방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97년 총파업 투쟁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파업 집회 기간동안 정체가 불분명한 단체나 개인의 유인물은 배포가 제한됐었고 탄압받았다. 명분은 정보 경찰의 공작에 당할 위험이었다. <다함께(당시 IS)>마저 주최 측과의 협의 없이 신문을 판매하고 있다는 이유로 70년대 유명한 노동운동가이자 민주노총 지도위원이었던 000 씨로부터 신문을 빼앗기고 머리채가 잡혔었다.
  2001년 화섬 3사 투쟁 때는 총파업 투쟁을 기각한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현자의 몇몇 활동가들이 익명의 신문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으러 쫓아다니고 쫓기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그들은 집회장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로 신문을 쥐어들고 “할 말 있으면 신분을 밝히고 직접 나와서 말해!”라고 외쳤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단위 사업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은 5~10명의 대의원 연서명을 받지 못하면 유인물 배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명분 역시 정보 경찰의 정치공작 가능성과 무질서와 혼란의 극복이었다. 대의원 연서명 제도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노동운동을 제도화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대의원 연서명은 대의원 5~10명의 연서명을 받아낼 수 있을 만큼의 제도적 세력으로 등장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만 언로(言路)를 열겠다는 것이었으며 그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개별 조합원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이 연서명 제도로 인해 현재 하청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자신들의 유인물을 뿌릴 기회를 얻기 위해 정규직 대의원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의원들이 지시하는 만큼 문안 수정에 동의해야 하기도 한다.
 

  민주노총과 민노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탁금을 거는 제도를 공탁금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갖추지 못한 소수자들의 선거권을 억압하는 제도라고 목소리 높여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위 사업장에서 대의원 연서명 제도가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국민파와 중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주류 세력들은 노동자 집회와 공장 안에서 익명성을 억압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전투적 비판세력이 노동조합의 체제 내로의 제도화에 저항하는 것을 탄압했다. 남한 민주노조 역사에서 익명성을 억압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과정은 민주노조 운동의 변질과 타락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4. 익명성과 관련된 혁명운동의 전통

  혁명운동에서 익명성, 또는 가명(필명)의 사용은 일반적이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혁명가들은 다양한 가명과 필명을 사용해왔다. 레닌은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 그 자체가 가(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이며 그가 일생 사용해왔던 가명은 십여 개가 넘을 것이다. 이것은 뜨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운동의 전통은 익명성의 사용을 이상한 것 또는 무책임한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는다. 레닌이 제1차 제국주의 전쟁기에 ‘유니우스’의 팜플렛을 로자의 것인지 모르고 비판했지만 향후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게거품을 물었다는 얘기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현사회의 타도를 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부르주아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무리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최원 씨는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글에서 ‘진정한’ 공산주의적 이행을 위해 “‘갈등’의 제도화를 추구하는 것, 또 차이들의 삭제나 융합(fusion)이 아니라 차이들의 묶음(binding)으로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을 제기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았을 때,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관 중 하나인 ‘관용’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홍세화 씨가 즐겨 얘기하는 주제이다. 관용의 정신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라는 인식 위에서, 그 차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건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건 간에 그 차이는 없앨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역사 속에서 ‘관용’의 실제는 어떠했는가? 아주 고약한 의견이라도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경우에는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그 의견이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이 큰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즉 “차이들의 삭제나 융합(fusion)이 아니라 차이들의 묶음(binding)으로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에도 특정 계급계층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이라는 계급주권의 문제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계급이 존재하고 국가가 존재하는 한, 힘있는 계급이 관용의 행사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모두에서 투쟁했던 무정부주의 경향의 혁명가 토마스 페인은 1791년 이렇게 말했다.

  “관용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불관용의 위조품이다. 둘 다 전제주의다. 한 놈은 제가 양심의 자유를 주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한 놈은 그것을 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토마스 페인,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에서 재인용)

  현재 남한 부르주아 사회는 사회주의 운동에 관용을 베풀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언젠가 곧 자본가들의 관용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도 공장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 자본가들의 불관용의 태도는 엄격하다. 이러한 이유로 생산의 현장으로부터 노동계급과 결합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익명성을 생활화하고 있다.

 

  1980년에서 90년대 초반 남한 운동의 역사만 본다고 할지라도, 익명성은 일반적이었으며 거의 모든 논쟁은 필명이라는 익명성 하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익명성에 기반한 논쟁은 무책임한 논쟁 방식이라고 말한 적 없으며 책임있는 논쟁을 위해 실명을 대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꽁무니주의 등등의 “딱지”가 무수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후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남한을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고 주장했던 ‘조진경’ 씨는 좌파와의 논쟁에서 패배할 때마다 필명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 누구도, 논쟁 주체들까지 포함해서, 그에게 실명 공개를 요구한 적 없다. 오히려 ‘조진경’ 씨의 필명을 자주 바꾸는 태도와 무관하게 논쟁은 이어졌고 이것 자체가 대중에게 평가됐다.
 

  최원 씨의 요구는 필자에게는 낯설다. 정치적 논쟁은 대중을 향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논쟁의 책임은 올바른 논쟁 자세와 정치적 내용성을 의미한다. 또한 무책임성 역시 논쟁에 대한 책임성이다. 비논리적인 감정적 언사, 정치를 개인의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사생활 연결짓는 흠집잡기는 그 자체로써 대중에게 논쟁을 판단케 한다.  

  최원 씨는 “소부르주아”라는 비판이 미국 유학 중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건 마타도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맑스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엥겔스는 공장주 즉 자본가였다. 레닌 역시 소규모였지만 지주로서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출신성분을 갖고 그들을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는 말은 최원 씨의 학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지칭하는 것이다. 현 사회의 모순을 노동자 혁명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반대하고 체제 개선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정치가 소부르주아지의 계급 존재적 성격과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지칭한다. 최원 씨는 「더 많은 민주주의」에서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글에서 맑스가 루이 블랑을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부른 것을 알 것이다. 맑스가 루이 블랑을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은 루이 블랑의 출신성분에 대한 “딱지”인가? 혹시 최원 씨는 그렇게 읽었는가?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논쟁에서 상대방의 정치를 평가, 비판함에 있어서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맑스주의는 논쟁에서 각 입장의 실천적 귀결이 어느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가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탄핵 논쟁에서 많은 좌파가 민노당을 열린우리당의 이중대라고 부른 것과 동일하다. 맑스주의 역사에서 소부르주아라는 비판과 규정이 출신성분을 말한다는 얘기는 코미디이다. 최원 씨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주의 운동의 모든 혁명가들은 참주선동가들이었다.

 

  최원 씨는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나에게 그런 (소부르주아) 딱지를 붙인 것에 대해서 최소한의 책임을” 지기 위해 필자가 “누군지를 밝혀야 된다”고 말한다. 최원 씨에게 있어서 필자의 실명은 왜 요구되는가? 논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 실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딱지”를 붙인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위해 실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두 경우 다인가?
  
  첫째, 필자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필명이 “제대로” 된 논쟁을 저해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실명이 책임 있는 논쟁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몇몇 좌파 게시판에만 가보더라도 서로의 실체를 알고 벌어지는 개싸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논쟁의 책임은 대중에게 지는 것이다. 필자의 글이 논지 없는 마타도어라면 그것을 대중에게 증명하면 된다. 이것이 논쟁의 책임성이다.
  둘째, “소부르주아”라는 평가는 ‘노동계급 독재 사상’을 폐기하고 민주주의적 제도 개선에 한정하는 최원 씨의 정치에 대한 규정이지 마타도어가 아니다. 필자의 실명 공개가 “딱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식은 어떠한 방식인가? 여기에 대해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5. 최원 씨의 요구에 대한 필자의 답변

  최원 씨는 공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최원 씨의 실명과 신상 공개 요구는 개인의 강한 바램일 뿐, 한국이나 중국 정부가 하는 것과 같은 그런 탄압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우려는 최원 씨의 주장이 익명성을 탄압해왔던 권력의 논리와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실명이 익명성보다 논의에 책임감을 더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익명성이 곧 무책임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공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자신을 공개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진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50여 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은 익명(필명)으로 토론하고 대화해왔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익명성을 무책임성과 등치시키고 익명성을 공격하는 행동은 우리 운동에 있어 활동의 폭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최원 씨의 주장은 신원을 공개할 수 있는 사람들만 공개적인 논의에 끼어들라는 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본인의 실명을 개인 메일을 통해 최원 씨에게 알리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 신원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비합법적 활동을 펼쳐 나가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국가와 주류 운동이 끊임없이 억압해왔던 흐름이 좌파 운동 내에서까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무책임성이며 “제대로”된 논의를 위해서는 개인의 신원 공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혁명운동의 전통에 대한 탄압이다.

  덧붙여, 필자는 최원 씨가 공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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