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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의 맛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돼지 이야기-_-ㅋ)

http://www.transs.pe.kr/cgi-bin/ez2000/ezboard.cgi?db=life&action=read&dbf=5292&page=0&depth=1

 

육식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건강하게 자라난 고기라도 미안한 마음을 좀 가져야 하는데,

하물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고생하며 자람 당해야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참 우울하다.

(헉 친구라는 단어를 쓰니까 더 미안해 진다)

 

하지만...

중이 들여 버린 고기맛을 잊기가 참 ... - ㅠ -

 

육식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글을 보면서 문득 생각난 예전에 썼던 글을 하나 긁어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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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의 맛

 

녹차 아이스크림, 녹차 케잌, 녹차 라떼, 녹차 과자, 녹차 다이어트, 녹차 화장품. 옅은 녹색의 알싸한 녹차 향기는 그렇게 우리 삶에 스며들어 왔다. 요 몇년 녹차 맛을 곁들인 각종 식품이며 생활용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버린 것이다. 전통적인 고급 품질의 녹차는 싸구려 녹차 티백에 길들여진 내 영혼에 영 맞질 않았다. 그건 너무 느끼해!! 고급스런 '다도'의 영역이던 녹차는 이제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몸을 바꾸어 나가며 전방위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잊었다. 나는 '녹차먹인 삼겹살'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흥분들 하지 마시길. 당신들이 가장 먼저 의심하는 바 대로, 삼겹살이 녹차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릇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녹차먹인 (돼지) 삼겹살인 것이다. 내가 돼지였을 무렵 -생후 3개월째부터인가- 나는 녹차 가루를 섞은 사료를 먹으면서 키워져 왔다. 그러니까 나를 키운 것은 3할이 녹차인 셈이다.

그런데  그사실이 참 묘한 것이다. 몸에 좋은 녹차를 먹는 고급 돼지로서 이웃 돼지우리의 부러움을 사 온 우리지만 사람들이 한번 쪽쪽 우려 빼먹은 녹차 찌꺼기는 우리에게 정작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이지도, 또한 성에 차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만큼의 밥을 좀 더 먹었으면... 하는 녹차돼지답지 못한 천한 마음이 종종 들었던 것이 사실이였다. 가끔은 녹차찌끄레기가 들어간 퍼센트 만큼 주인이 우리를 속여 착취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으나 옆칸의 돼지는 그거야 말로 무식한 소리라며 일축해 버릴 따름이였다. 이것이야 말로 요사이 한창 유행하는 '웰빙'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 같이 마른 웰빙 돼지들은 다시 웰빙형인간들에게 살찐 돼지 이상의 값을 받고 잡아 먹히기 때문에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요새는 마른게 좋은 것이다. 누가 누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한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게 좋은 것이라니까. 좋은것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꾸역꾸역 사료를 먹고 살쪄 봤자 그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짓인가?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열심히 쫄깃한 고깃살을 만들고 있는 토종돼지들 또한 바보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1.5평이 채 되지 않는 돼지 우리가 답답한 밤이면 달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까만 돼지 그림자를 따라가며 한숨을 흘린 적이 있다.

아침저녁 시도때도 없이 축사 안을 찢어 놓는 날카로운 클래식 음악은 나를 더욱 옥죄어 오곤 했다. 누가 클래식이 싫다고 했냐? 다만 저질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징징거리는 잡음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닮아서일까.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세상에는 자유로운 '의지만을' 가진 많은 돼지들이 살고 있다. 그중의 상당수는 자신의 의지대로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쫒는 씩씩한 멧돼지가 되지 못하고, 퍼러둥둥한 살을 흔들며 운동이라고는 좁은 우리에서 팔굽혀펴기정도를 할 수 있는 자유만이 존재할 뿐인 가련한 돼지가 되는 것이다. 다리굽혀펴기라고 딴지걸지 마라. 우리를 욕하지 마라.

그렇게 나는 녹차의 맛을 보며 혼자 살아 왔다.

그런데 이런 돼지같은 놈들. 마지막 가는 길인데 가지런히 담은 삼겹살접시에 그저 녹차 잎 한두장 정도 장식해 주면 안되냐? 누군가 녹차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다가 문득 내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다. 녹차 만큼의 거짓말을, 녹차만큼의 배고픔을 품에 안고 외로움을 이겨야 했던 가련한 돼지로.


*'이시히 카츠히토'의 동명의 영화에서 제목만 따왔습니다.

 

(2004년 8월, 각종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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