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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53호> 현대차 전주공장의 아름다운 연대투쟁을 전국으로

현대차 전주공장의 아름다운 연대투쟁을 전국으로

 

 

현대차 자본은 8월 31부터 전주공장 14명의 비정규직 해고자들에게 공장출입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8월 31일, 관리자 5백여 명이 동원되어 전주공장 정문 앞에 진을 쳤고, 구호를 외쳤다. 관리자들은 이전보다 한층 거칠어져 있었다. 자본은 지난 6월의 비정규직 해고자 출입봉쇄를 둘러싼 투쟁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려는 듯, 관리자들을 확실히 정신무장 시켰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라

 

아산공장에서 전주공장으로 부임한 양동걸 지원실장은, “내가 책임질 테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라”라고 했다 한다. 아산공장에서 비정규직지회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탄압했던 것처럼, 전주공장에서도 비정규직지회를 박살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더구나 비정규직 지회의 투쟁에 언제나 함께 해왔던 전주공장위원회 정규직 집행부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정규직 위원회와 비정규직 지회 모두를 양수겸장으로 밀어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월 31일 수요일, 오전에 출입시도가 있었다. 몸싸움이 이어졌고, 전주공장 비정규직지회 왕종근 동지가 눈 밑 연골이 함몰당해 수술대에 올랐고, 이환범, 이종근, 서인호 동지가 병원으로 실려갔다. 연대해 싸웠던 사노위 전북지역위원회 정원현 동지 역시 병원으로 실려갔고, 필자 역시 집단으로 폭행당했다. 관리자들은 전에 없이 폭력적이었다. 자본이 작정한 것은 명확했다. 당일 정규직 동지들과 비정규직 동지들의 중식집회가 있었고, 300여명의 원하청 노동자들이 모였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많은 수가 조직되지 않았다. 비정규직 동지들 역시 징계가 확대될 수 있다는 생각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번 싸움, 못이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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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금속노조)

 

그러나 원하청 연대는 굳건했다

 

그러나 목요일이 되고 금요일이 되자, 전주공장의 저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목요일 중식집회에 500명이, 금요일엔 원하청 700여 명이 모였다. 2년여 동안 쌓아왔던 원하청 연대의 성과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금요일 중식집회는 격렬했다. 공장 안에서 쏟아져 나온 700여 명의 원하청 노동자들이 관리자들의 등을 정문에 닿을 정도로 밀어붙였고, 관리자은 거듭되는 투쟁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날 밤에 만난 정규직 활동가들은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지만, 다시 승기를 잡았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9월 5일 월요일 중식집회 역시 700명이 넘는 원하청 노동자들이 모여서 기세를 이어갔다. 다음날인 9월 6일에는 전북지역 노동자 결의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정문을 막은 컨테이너와 버스

 

9월 6일 아침, 출근투쟁에서 사람들을 기다린 것은 정문을 가로막은 4대의 육중한 컨테이너였다. 중식 시간이 되자, 자본은 컨테이너로도 모자라 버스 두 대까지 늘어놓았고, 공장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이 정문을 돌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문 안쪽에도 버스를 늘어놓았다. 많은 수가 결집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자본 역시 이번만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수가 나올 것인가? 결의대회에는 정규직 노동자들만 1천5백 명 이상 쏟아져 나왔다! 공장안에서 원하청 도합 1천800여 명이 결집했고, 공장 밖에는 울산, 아산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전북버스, 택시노동자들을 포함한 연대대오 300여명이 결집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숫자였다. 투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지만, 집결한 숫자 자체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싸움이 승리를 향해가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비정규직 간부들의 일부를 공장으로 진입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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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참소리)

 

결국 컨테이너는 무너졌다

 

그렇게 진입투쟁은 계속되었다. 흉물스런 컨테이너가 추석이 지나도록 정문을 가로막고 있었고, 19일 전주공장위원회 정규직 동지들은 운영위원회 결정을 통해 전주공장 사측과의 모든 협의를 중단했고, 10월 특근협의 역시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1일, 2천여 명의 전주공장 원하청 노동자, 현대차 지부의 전 확대 간부 및 울산, 아산 비정규직지회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결국 사측은 전주공장 비정규직 해고자 14인의 현장출입을 보장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전주공장위원회 이동기 의장은 “저 컨테이너는 비정규직 동지들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저 컨테이너는 자본이 쌓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마음의 벽이다. 원하청 노동자가 연대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정규직이다”라고 발언했다. 2010년 3월, 비정규직 해고자 18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아름다운 연대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임기의 첫 투쟁을 시작한 전주공장 이동기 집행부는 자신의 임기를 또 한 번의 아름다운 연대투쟁으로 마무리해가고 있었다.

 

전주공장 연대를 울산과 아산으로

 

전주공장의 해고자 출입문제를 둘러싼 원하청 연대의 승리는, 단지 전주공장만의 승리가 아니다. 9월 28일, 울산공장에서도 해고자 출입을 위한 진입투쟁이 시작됐다. ‘전주공장에서 비정규직 해고자의 공장출입이 보장되었다, 울산 공장도 쟁취하자!’는 자신감과 의지가 확산됐다. 울산공장 점거파업이 패배로 돌아가고, 2차 파업이 불발된 이후 다시 비정규직 투쟁의 불씨가 점화된 것이다.

 

울산공장의 정규직 활동가들은 전주공장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을 엄호해야 한다. 울산 비정규직 동지들의 진입투쟁 역시 원하청의 연대를 통해 승리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비정규직 철폐의 깃발을 올려야 한다.

 

많은 활동가들은 탓한다. 비정규직 투쟁을 탐탁지 않게 보는 ‘정규직 정서’ 때문에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그러나 그 ‘정규직 정서’라는 것은 다른 누구의 정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정서일 것이다. 주야간으로 일하는 3500명의 현대차 전주공장 정규직 노동자 중 1500여명이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 했다. 임단협 투쟁 집회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전주공장의 연대투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자. 전주공장은 활성화된 연대는, 전주공장이 원래 그런 공장이어서가 아니다. 바로 그렇게 싸우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간에서 싸움을 조직하자.●

 

- 백종성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위)

 

(2011년 10월 4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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