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23] 나의 교육 신조 등 발제문입니다.

[20120223_나의 교육 신조 등 발제문.hwp (12.42 KB) 다운받기]

 

------

 

20120203 다중 교육학 세미나 - 부록 나의 교육 신조, 존 듀이 생애와 사상 3부 존 듀이 사상 발제문

dolmin98@hanmail.net - 돌민

 

1.

 

"1. 탐구의 이론으로서의 논리학에 대한 논의의 서론은 (우리가 지금까지 종종 보았듯이) 맑스의 「서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듀이의 『탐구의 이론으로서의 논리학』John Dewey, Logica, teoria dell'indagine, tr. it. Einaudi, Torino 1949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앨런 라이언의 책 『존 듀이』Alan Ryan, John Dewey, Harvard University Press, Harvard 2001는 미국 경험주의 논리학의 선들이 맑스주의 논리학의 선들과 얼마나 교차할 수 있는지를 해명합니다. 로돌포 몬돌로Rodolfo Mondolfo의 사유 및 씨드니 훅Sidney Hook의 사유가 다시 현재성을 띠게 됩니다. 여기서는 실제로 실천의 중심성이 인식론적·정치적 요소로 간주됩니다. 나아가 이 강의에서 우리는 또 언어·수사학·대화·발명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는데, 그것들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두 가지 차원 - 한편에서는 공통된 이름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리와 다른 한편에서는 탈근대적 논리에서의 공통된 이름의 재발견 - 에서 다시 교직되는 방식을 강조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된 『카이로스, 알마, 비너스, 다중』을 보십시오.)

2. 논리적 장치로서의 탐구.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우리가 여기 연구의 논리를 구성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줄곧 객체의 구성(이것이 탐구입니다)에서 출발하여 객체의 구성에 대한 대화적 해명(이것이 공동연구입니다)을 거쳐 구성적 주체의 정의에 이르는 사유 과정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일종의 객체로서부터 주체로의 회귀가 있는 것입니다. 혁명적 논리의 진행은 - 라이언이 (그의 『존 듀이』에서) 단순화하자면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혁명적 자유주의로부터 뉴딜로의 이행을 잘 설명했듯이 - 언제나 그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변경을 가하면, 이 ‘객체로부터 주체로의 회귀’는 모든 혁명적 경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앞선 강의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체의 논리가 발전의 인과성과 불연속성 사이에서 살아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건의 논리를 짚어내는 것이 우리 논의의 핵심적 지점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공통된 이름’(개념)이 언제나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서 요동하지만 특이성과 공통적인 것 사이에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로부터 주체가 주체성의 생산 과정에서 특정한 시간성과 공간성의 산물로 주어진다는 귀결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서 (즉 협동을 통해서) 주체의 형성을 봄과 동시에, 순전한 논리적 차원은 탐구를 완성하기에 불충분함을 강조합니다. 협동은 그 자체로 적대를 설명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적대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안또니오 네그리, 『다중과 제국』, 갈무리, 2011, 245~246쪽)

 

발제자의 존 듀이(John Dewey)에 대한 고민은 위에 인용한 글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존 듀이의 『탐구의 이론으로서의 논리학』이라는 책은 어떤 내용일까? 앨런 라이언(Alan Ryan)이 그의 책 『존 듀이』에서 미국 경험주의 논리학의 선들이 맑스주의 논리학의 선들과 얼마나 교차할 수 있는지를 해명했다는데 그 내용은 무엇일까? 발제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지는 발제 내용도 인용한 글의 언저리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2.

 

“그런데 실용주의 사상사에 있어 존 듀이는 남북전쟁, 산업혁명, 제1차 세계대전, 세계 경제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의 1세기에 걸친 긴 생애를 살아가며 그 시기를 이른바 바삐 움직인 진보적 문화인이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넓고 다양한 정치문제, 사회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깊이 관여하였다. 제임스가 교육을 개인 능력을 충분히 개발하는 것을 목적이라 생각한 것에 더욱 한 반 앞서, 듀이는 교육을 인간 사회 최고의 기능, 인간 제도의 문제로서 고찰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교육상의 실험을 행하여, 교육조합·PAT·대학교수연합 등을 직접 이끌며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실질화를 의도하였다. 실용주의라는 미국 정신의 자각형태는 퍼스의 논리주의에서 제임스의 도덕주의를 거쳐 듀이의 교육주의로 발전, 이행한 것이다.”(「존 듀이 생애와 사상」,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철학의 개조』, 동서문화사, 2008, 602쪽)

 

바로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존 듀이는 민주주의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자인 존 듀이는 다음과 같이 학교를 정의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학교는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회적 기관이다. 교육이 사회적 과정인만큼, 학교는 당연히 사회생활의 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학교는 아동으로 하여금 인류가 물려받은 자원을 공유하고 자기 자신의 힘을 사회적 목적에 사용하도록 양육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모든 사회기관들이 집결된 곳이다.”(존 듀이, 「나의 교육 신조」, 『민주주의와 교육』, 교육과학사, 2007, 514쪽)

 

민주주의와 학교는 어떤 관계일까? 또는 민주주의자와 교육은 어떤 관계일까라고 해도 될까? 민주주의자는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학교를 아동으로 하여금 사회화하게 하는 데 효율적인 사회기관이라고 할까?

발제자의 민주주의와 학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존 듀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가 고민된다. 다만 여기서는 또 하나의 단서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다.

 

3.

 

“듀이는 1930년에 존 애덤스와 윌리엄 P. 몬터규에 의해 뉴욕에서 출판된 <<현대 미국의 철학>>이라는 책에 ‘절대주의에서 실험주의로’라는 글을 실었다. 이것은 듀이가 70세에 컬럼비아 대학 현역 교수를 그만두는 즈음해서 버몬트 대학 입학 이래 자신의 사상적 발전과 성장의 흔적을 회상한 것으로, 그의 정신 발전에 영향을 미친 여러 인물과 그 사상에 대한 전부이다. 그것은 듀이라는 한 천재적인 철학자의 생애로 구체화되었다. 미국 철학사의 소묘라고 해도 좋다.”(「존 듀이 생애와 사상」,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철학의 개조』, 동서문화사, 2008, 581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