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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2012)과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갈무리, 2011)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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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2012)과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갈무리, 2011)를 읽고
dolmin98@hanmail.net 돌민


1.

 

 이 글은 다중지성의 정원 성/자본주의/정치 세미나팀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갈무리, 2011)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 “캘리번과 마녀” 서평 공유용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조정환 엮음, 갈무리, 2012)과 “캘리번과 마녀”에 대한 노트를 하게 되었다. 양해를 부탁한다.

 

2.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을 읽고

 

 참고로, 2012년 4월 14일 토요일 오후에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린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출간 기념 강연회 원자력과 인지자본주의 강연 스케치로 시작해 보자. 이날 강연회 강연자로 나선 엮은이 조정환은 앞으로의 문제가 1 반핵운동과 노동운동, 2 후쿠시마현 주민들의 태도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1의 문제는 1′ 반핵운동과 고용안정의 문제이고 2의 문제는 2′ 반핵 운동이 방사능의 위험성을 계속 강조하는 반면에 주민들이 그렇게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냐며 오히려 방사능이 안 해롭다고 주장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강연을 시작한 조정환은 강연의 중간을 1 3·11 이후의 원자력 즉 사고로서의 후쿠시마, 2 무기로서의 원자력, 3 산업으로서의 원자력으로 그런데 이 3가지 측면을 하나로 해서 채웠다.
 먼저 원자력을 개관했는데, 그 개관에서 이른바 1954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웠다. 평화적이라는 말이 원자력의 비평화적 이용과 평화적 이용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비평화적 이용과 다른,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풍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날카로움은 3·11 이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사고 수습 과정에서 자위대의 위상을 재고하여 국민국가 재강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에서도 이어졌다. 이에 더하여 원자력 자체가 통제적임을 잊지 말자고 주장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그 자체가 군사시설에 준하는 보안 시설인 것은 물론 원자력 내부에서부터 외부에서까지 노동자가 자기 경험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감시 체제를 처음부터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지자본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라며 후쿠시마와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선보였다. 사용되든 사용되지 않았든 핵은 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라며 공포를 통한 지배의 문제를 제기했다. 발전소에 대한 감시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천연자원과 대비하며 인지자본주의 시대 유도에너지로서의 원자력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끝으로 순수에너지 차원에서 제기되는 주류 반핵 운동의 대안 에너지 논의 그것만으로는 에너지와 통제로서의 원자력의 의미를 놓칠 수가 있다는 비판으로 조정환은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후 이날 강연은 질의 응답으로 이어졌는데, 이 질의 응답도 내가 보기엔 크게 보아 원자력과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2011년 혁명, 후쿠시마, 그리고 인지자본주에 대한 질의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난 후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의 미덕이라고 생각된 점은 긴장이다. 책 표지의 제목 아래 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에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
 죽음의 바람인가 사랑의 바람인가
 재앙의 바람인가 혁명의 바람인가
 지역의 바람인가 지구의 바람인가”

 

3. “캘리번과 마녀”를 읽고

 

 끝으로, 캘리번과 마녀의 의미에 대해서 지은이인 실비아 페데리치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약 30년에 걸쳐 완성된 『캘리번과 마녀』는 원래 여성해방 운동에,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운동을 촉발시킨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에 저항하는 투쟁에 기여하려는 차원에서 착안되었습니다. 원래 이 책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을 근거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전근대적, 전자본주의적 세계의 유산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성차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재구성된 자본주의적 구성물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여성주의 정치의 맥락에서 이 같은 주장이 중요했던 이유는 가부장제가 ‘전통’의 산물이라는 주장의 논리적 대응쌍이 맑스레닌주의 이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적은 사회적 귄력을 갖는 것은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자본주의적 관계 외부에서 노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맑스레닌주의의 정치적 귀결은 임노동을 통한 해방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특히 1972년 내가 가담했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운동>Wages For Housework Movement에서 이런 주장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성해방 운동이 전략적으로 공장일자리 확보를 요구해야 한다는 가정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노동자들은 바로 이 공장일자리를 거부하며 맞서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우리는 유럽과 북미의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전쟁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전업주부의 상象을 재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노동조직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남성들에게 종속된 것은 정통맑스주의자들이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따라 주장하듯 ‘사회적 필요생산’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관점에 반대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논문, 소책자, 전단지 등을 통해,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가부장적 통치의 형태 및, 기교가 질적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여성들의 가내부불노동은 결코 전자본주의적 잔재가 아니며 역사적으로 노동력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다른 모든 형태의 생산의 기둥이었음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도한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된 것은 “여성노동”의 “비생산적인” 본성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며, 남성의 지배는 임금이 남성들에게 부여한 권력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에 대한 비판과, 노동력의 생산에서 가사노동이 수행하는 긴요한 기능에 대한 인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운동> 캠페인을 만들어 낸 이론적, 실천적 뼈대 속에 이미 완전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비롯하여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셀마 제임스, 레오폴디나 포루투나티 등 많은 이들이 1970년대 내내 이 지점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관계가 노동의 위계를 구조화하고, 권력을 노동계급의 특정 부문으로 위임하며, 재생산 노동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권력을 노동계급의 특정 부문으로 위임하며, 재생산 노동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착취의 영역을 감추고 자연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적 관계들, 그 중에서도 특히 새로운 성적 분업이 구축되는 물질적·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는 데 맑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본』 세 권 모두가 마치 삶의 재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일상적인 활동들일 자본주의적 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구입한 상품을 그저 소비함으로써 스스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듯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백’을 채우고 누락된 ‘여성’의 역사와 ‘이행기’의 재생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캘리번과 마녀』의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시초축적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부연하는 부록으로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등장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특수한 본성을 아주 독특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관점, 즉 생명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재고해 보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 때문에 『캘리번과 마녀』는 ‘대’大유럽 마녀사냥과 핵가족의 등장,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규제하기 위한 16세기와 17세기의 법안을 새롭게 조명하는 한편,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신체 및 노동에 대한 기계화와 복잡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기계론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정복 및 식민화, 최초의 국제분업의 등장, 가격혁명 이후 유럽 도농민 都農民들의 빈곤화를 고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및 여성의 역사에 대한 이 책의 기여는, 일반적으로 학제적 경계로 구분된 사회적·정치적·철학적 성과들을 모아서 지금까지 서술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가 보기에는 그 중요도가 자본주의 이행기로만 국한되지 않는 이론적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진보성 신화를 해체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노동력의 꾸준한 확장과 노동비용 절감에 몰두하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을 비롯해서 그 노동이 생산해낸 주체들과 그들의 노동을 천대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여성의 신체와 재생산능력을 통제함으로써 자궁의 노동력 생산의 기계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폭력과 야만적인 힘뿐만 아니라 임금관계의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된 새로운 위계질서와 불평들을 성, 인종, 연령을 따라 도입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에서 ‘임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노동축적과 노동파괴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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