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레시안>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부터이다. 그때는 이명박 정부가 막 시작할 때이었고 나는 일본 어느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경남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첫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김대중 정부 때부터 기조로 삼아온 '햇볕정책'에서 탈피해 '실용'과 '실리'를 중심으로 한 정책을 펼칠 것을 천명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 '실용'과 '실리' 외교의 핵심은 한미관계의 복원에 기초해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대북정책을 세우고,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 오기 바로 직전 '한국과 같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강소국이 되었는가? 또 이것을 어떻게 한국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를 하고 '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책을 쓰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자각 중 하나는 외교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것이라 할 때,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외교에서 어느 한 쪽에 편입되어 그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해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천명한 외교정책이 한국의 국익에 반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하였고 이것을 알리기 위해 <프레시안>에 기고했다.
이후 <프레시안>에서 나를 '한반도 브리핑'의 필자 진에 넣어주는 덕분에 8년 동안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글을 실을 수 있었다. 8년간 작지 않은 양의 글을 썼다. 그냥 의무적으로 순서가 다가와서 글을 쓴 적도 있지만, 새롭게 정립되고 있는 세계질서에서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지경학적으로도 중심에 있는 한반도가 세계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나의 글이 이것을 이루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록 한편에 원고지 30장 정도의 작은 글이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이제 이와 같은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의 얄팍한 지식과 식견이 고갈된 것도 현실적인 이유이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인 사드(THAAD)를 한국에 배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 외교에서 새로운 외교 전략이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는 루비콘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동북아시아라는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라는 방정식에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또는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이기를 포기하고 상수, 그것도 종속 상수로 전락해 버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사드(THAAD) 한국 배치는 단순히 북한의 핵탄두를 막기 위해 추진 된 것이 아니다. THAAD의 한국 배치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이제 그동안 길러온 실력을 바탕으로 '제 할 일을 주동적으로 하자'라는 주동작위(主動作爲)로 바뀌고 있는 중국을 미국이 일본, 한국과 더불어 물리적으로 견제하여 중국으로의 세력전이(power transition)를 저지하겠다는 미국 전략의 실질적 그리고 핵심적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변수로서 한국이 자국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외교를 하였더라면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며 나아가 동북아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중계하며 협력을 촉진하는 촉매적 역할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속 상수로서 한국은 동맹국의 의지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 견제의 전초기지로 그 역할과 임무가 결정지어 짐으로써 동북아 세력 각축장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혹자는 말한다. "중국이 한국의 가장 큰 무역국이지만 중국은 그들의 개혁개방에서 보여 주었듯이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여 다루기 때문에 한국에 THAAD가 배치되어도 경제적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무지를 들어내고 몽매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추진되지 않았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지도부는 문화혁명을 비판 정리하고 다시 정통 맑스주의 시각에서 중국의 역사적 발전단계를 재정립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역사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력이 사회주의 단계에 이를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회주의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생산력 향상을 이루어야 하며 시장도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자신들이 당시 처한 시기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했다. 중국에서 생산력 제고, 즉 시장을 활용한 생산력 향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표명되는 중국의 유일 정당인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개혁개방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보는 맑스주의 시각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각국이 자국의 이익에 기초하여 외교정책을 펴는 것이 주권국가의 기본적 행태이고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이라면 자국을 견제하고 견양하고 있는 THAAD가 배치되어 있는 한국에게 아무런 보복과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자의적이고 몰상식한 발상이다.
또 혹자는 말한다. "우리는 국가수립단계부터 미국과 동맹관계이고 미국 덕분에 북한의 침략도 막아내고 경제성장도 이루었으니 미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외교의 본질과 현실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고 국민을 호도하여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주장이다.
미국이 한국을 가엾게 여기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되어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참여 하였고 한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국의 시장을 열었을까?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은 현실이며 상식이다. 그리고 위의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바탕으로 타국과 관계를 맺고 행동한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야 들여야 한다.
'미국이 왜 한국전쟁에 참가했고 자국의 시장을 한국에게 열어주었을까?'에 대한 정답은 '왜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가 하고 일본에게 자국의 시장을 열어 주었을까?' 를 따져보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아니 세계 대부분의 주권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극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미국편에 서는 것이 무엇이 문제야!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미국의 패권이 지속될 터인데!" 미국은 제2차 대전 이후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정치학자 로버트 길핀의 패권안정론에 따르면 패권(hegemony)이 존재하는 시기동안 공공재(public goods)의 공급이 증가하여 자유무역 제도 등이 발전한다고 한다. 반면 패권의 쇠퇴시기에는 공공재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보호무역적 특성 등을 보인다고 한다. 길핀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의 패권은 분명히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현실과 바로 맞닿은 사례들에서 간단히 확인된다. 미국이 여전히 명실상부한 패권국이라면 왜 굳이 일본과 한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할까? 왜 중국이 배제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일본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을까?
또한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왜 노골적으로 미국이 맺은 모든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을 재검토하고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협정은 폐기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을까? 이렇듯 모델스키의 패권 100년 주기(週期)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미국의 패권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THAAD의 한국배치에 대한 결정은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한국은 내년 12월 달에 대통령선거를 하는데 여기서 당선된 새로운 대통령이 THAAD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배치된 THAAD를 철폐할 수는 없을 것이다) THAAD 한국 배치를 지지하거나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는 입장에 대한 비판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가까운 미래에도 변화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또 여기에 대한 한국 외교에 관하여 글을 쓰기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한국은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더 이상 변수가 아니며 그 정체와 가치가 확실히 들어난 종속 상수일 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누가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해 주고 시원한 대안을 말해 주길 간절히 염원한다. 그동안 '한반도 브리핑'에 게재된 나의 졸필을 읽어 주신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김대중 정부 때부터 기조로 삼아온 '햇볕정책'에서 탈피해 '실용'과 '실리'를 중심으로 한 정책을 펼칠 것을 천명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 '실용'과 '실리' 외교의 핵심은 한미관계의 복원에 기초해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대북정책을 세우고,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 오기 바로 직전 '한국과 같이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강소국이 되었는가? 또 이것을 어떻게 한국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를 하고 '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책을 쓰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자각 중 하나는 외교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것이라 할 때,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외교에서 어느 한 쪽에 편입되어 그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해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천명한 외교정책이 한국의 국익에 반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하였고 이것을 알리기 위해 <프레시안>에 기고했다.
이후 <프레시안>에서 나를 '한반도 브리핑'의 필자 진에 넣어주는 덕분에 8년 동안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글을 실을 수 있었다. 8년간 작지 않은 양의 글을 썼다. 그냥 의무적으로 순서가 다가와서 글을 쓴 적도 있지만, 새롭게 정립되고 있는 세계질서에서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지경학적으로도 중심에 있는 한반도가 세계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나의 글이 이것을 이루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록 한편에 원고지 30장 정도의 작은 글이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이제 이와 같은 글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의 얄팍한 지식과 식견이 고갈된 것도 현실적인 이유이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인 사드(THAAD)를 한국에 배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 외교에서 새로운 외교 전략이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는 루비콘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동북아시아라는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라는 방정식에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또는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이기를 포기하고 상수, 그것도 종속 상수로 전락해 버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사드(THAAD) 한국 배치는 단순히 북한의 핵탄두를 막기 위해 추진 된 것이 아니다. THAAD의 한국 배치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이제 그동안 길러온 실력을 바탕으로 '제 할 일을 주동적으로 하자'라는 주동작위(主動作爲)로 바뀌고 있는 중국을 미국이 일본, 한국과 더불어 물리적으로 견제하여 중국으로의 세력전이(power transition)를 저지하겠다는 미국 전략의 실질적 그리고 핵심적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변수로서 한국이 자국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외교를 하였더라면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며 나아가 동북아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중계하며 협력을 촉진하는 촉매적 역할을 담당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속 상수로서 한국은 동맹국의 의지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 견제의 전초기지로 그 역할과 임무가 결정지어 짐으로써 동북아 세력 각축장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혹자는 말한다. "중국이 한국의 가장 큰 무역국이지만 중국은 그들의 개혁개방에서 보여 주었듯이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여 다루기 때문에 한국에 THAAD가 배치되어도 경제적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무지를 들어내고 몽매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추진되지 않았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지도부는 문화혁명을 비판 정리하고 다시 정통 맑스주의 시각에서 중국의 역사적 발전단계를 재정립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역사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력이 사회주의 단계에 이를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회주의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생산력 향상을 이루어야 하며 시장도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자신들이 당시 처한 시기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했다. 중국에서 생산력 제고, 즉 시장을 활용한 생산력 향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표명되는 중국의 유일 정당인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개혁개방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보는 맑스주의 시각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각국이 자국의 이익에 기초하여 외교정책을 펴는 것이 주권국가의 기본적 행태이고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이라면 자국을 견제하고 견양하고 있는 THAAD가 배치되어 있는 한국에게 아무런 보복과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자의적이고 몰상식한 발상이다.
또 혹자는 말한다. "우리는 국가수립단계부터 미국과 동맹관계이고 미국 덕분에 북한의 침략도 막아내고 경제성장도 이루었으니 미국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외교의 본질과 현실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고 국민을 호도하여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주장이다.
미국이 한국을 가엾게 여기고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되어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참여 하였고 한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국의 시장을 열었을까?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은 현실이며 상식이다. 그리고 위의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바탕으로 타국과 관계를 맺고 행동한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야 들여야 한다.
'미국이 왜 한국전쟁에 참가했고 자국의 시장을 한국에게 열어주었을까?'에 대한 정답은 '왜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가 하고 일본에게 자국의 시장을 열어 주었을까?' 를 따져보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아니 세계 대부분의 주권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극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미국편에 서는 것이 무엇이 문제야!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미국의 패권이 지속될 터인데!" 미국은 제2차 대전 이후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정치학자 로버트 길핀의 패권안정론에 따르면 패권(hegemony)이 존재하는 시기동안 공공재(public goods)의 공급이 증가하여 자유무역 제도 등이 발전한다고 한다. 반면 패권의 쇠퇴시기에는 공공재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보호무역적 특성 등을 보인다고 한다. 길핀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의 패권은 분명히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현실과 바로 맞닿은 사례들에서 간단히 확인된다. 미국이 여전히 명실상부한 패권국이라면 왜 굳이 일본과 한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할까? 왜 중국이 배제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일본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을까?
또한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왜 노골적으로 미국이 맺은 모든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을 재검토하고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협정은 폐기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을까? 이렇듯 모델스키의 패권 100년 주기(週期)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미국의 패권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THAAD의 한국배치에 대한 결정은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한국은 내년 12월 달에 대통령선거를 하는데 여기서 당선된 새로운 대통령이 THAAD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배치된 THAAD를 철폐할 수는 없을 것이다) THAAD 한국 배치를 지지하거나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는 입장에 대한 비판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가까운 미래에도 변화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또 여기에 대한 한국 외교에 관하여 글을 쓰기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한국은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더 이상 변수가 아니며 그 정체와 가치가 확실히 들어난 종속 상수일 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누가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해 주고 시원한 대안을 말해 주길 간절히 염원한다. 그동안 '한반도 브리핑'에 게재된 나의 졸필을 읽어 주신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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