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모시리

from 잡기장 2010/01/05 19:56

       

    재작년 홋카이도 여행을 통해 아이누 공동체. 아이누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는 키타가와 시마코 (아이누 민족운동가)여사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간 기간이 방학 기간이여서 학생들이 없었는데 일본 전역에서 활동가들이 와서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비인가 대안학교이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에게 아인누 문화와 글, 언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현재 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왔다.

 

 삿뽀로에서도 차로 4시간 정도 들어가야 마을이 나오기에 외지인들의 방문이 낯설게 보였지만 시마코 여사님은 이미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아이누 실상에 대해 강연도 한 적이 있는 분이다. 그 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좋은 감정이 대단해서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아이누 관련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이누 학교

 

    제대로 전부 이해 하기는 힘들었지만 아이누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아이누인들에게 일본인들이 ‘너희 조상은 한국인이니 한국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는데 시마코 님은 아마 자기 조상이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며 그렇기에 우리를 더욱 반기셨다고 한다. 떠나는 우리들에게 손수 만든 손가방, 수제품들과 아이누 동화책 등을 주시면서 꼭 다시 한 번 또 오라고 하시던 그 모습이 잊혀 지지 않고 있다.  한 번은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아이누관련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짧은 만남 속에 전해오는 절절함을 표현할 수 없어서인지 모른다. 

 

작년 아프리카 여행 중에도 그 곳의 선주민들을 만나면서 아이누 선주민들이 생각났었다.

다른 비유겠지만 제주도의 경우 그곳에서 자신들의 터전에서 삶을 살고 있는 선주민들의 경우 현재 대다수가 관광산업 (호텔 종업원, 골프장 케디, 택시기사, 기념품 판매, 식당 등) 종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광으로 땅 값이 올라가더라도 정작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곳에 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짓는 거대 자본이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하와이 선주민들의 삶도 역시 처음부터 관광객을 상대로 ‘알로 하와이’나 추는 민족은 아니지 않은가?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가난으로 몰린,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대륙이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로 변해버린 작금의 현실은 그 곳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기부와 원조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문제가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게이츠도 아프리카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자기 재단의 돈을 다 써도 좋다는 말을 했을 정도니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해야 컴퓨터도 팔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간 고도의 경제적인 핵심의 속성을 내 뺍고 있다.

 

 식민지 아니면 제국주의 중 둘 중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험한 역사는 현실 속에서도  빼앗긴 자들과 뺏긴 자들의 관계로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는 진행형이다. 그 안에서도 자본의 감쳐진 야수성은 여지없이 들어난다.  그 야수성에 대한 투쟁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고 계속 될 수밖에 없다.  

   

< 아이누에 대해 >

 아이누는 원래 아이누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의 땅, ‘아이누모시리(아이누어로 인간의 대지를 의미)’에서 아이누가 소수자의 위치로 밀려나면서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과정은 수 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 이래 몇 백년간 일본인은 아이누 민족, 아이누 모시리 전지역, 즉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카라후토)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가를 보면 일본의 침략성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은 무기를 가지고 아이누 모시리를 대상으로 아이누 민족 박멸작전을 몇 번이나 실행해 왔다. 거기에 대항하여 아이누 민족은 1457년 쿠샤마인 전투, 1669년의 샤구샤인 전투, 1789년의 쿠나시라와 매나시리 봉기를 통해 무장하여 싸웠다.

 

  본격적인 정벌의 역사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국가가 수립된 뒤 시작되었다.  1869년 개척사(開拓使)를 설립하고 에조치라는 명칭을 홋카이도[北海道]로 바꾸었다. 1899년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만들었다.  본토 인구 증대로 인한 영세 농어민을 홋카이도로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누인들의 토지의 수탈, 강제이주를 시켰으며 여기에 반항하는 이들은 학살당했으며. 개척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이누인들을 구토인(舊土人)이라고 부르며 민족 말살의 동화 정책을 펼쳤다. 근대 국가 ‘일본’과 아이누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상정한 진화론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인 ‘구토인’ 아이누는 동화교육을 통해 일본인과의 차이를 분쇄시켜야만 ‘문명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었다.

 

 아이누를 개명(開明)시킨다는 명목으로 풍습의 개변(改變)을 강요하였고, 아이누의 언어와 전통적 생활양식은 금지되었다. 아이누가 가지고 있었던 어획권과 어로방식도 무시되었고, 아이누는 농업과 목축을 강요당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어로와 수렵, 채집 등을 위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적인 문화는 급속히 파괴되었으며,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과 침략과정에 유행성 질병(천연두, 콜레라, 매독 등)과 감염으로 저항력인 약한 아이누인들의 인구는 격감되었고 특히 성 침략으로 인한 매독의 만연을 수반했다.

 

아이누 민족의 종교적 의식, 조상들의 묘지와 주거지들이 파괴, 수렵과 연어 포획을 자유롭게 하던 것이 일본인의 손에 관리하게 하였다. 대다수 선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더 깊숙이 들어가거나 침략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략된 삶을 타자들에 의해 강제 받게 되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래의 일본은 아인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동시에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었으며, 일본의 국가에 이용된 뒤 버려졌다.

 

 최근 일본정부는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했지만, 결코 선주(先住)민족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아이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함께, 가혹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토라리 현의 원자력 발전소, 핵폐기물 처리, 저장, 연구시설 호로노 비쵸,  골프장 건설, 산림벌채, 리조트 개발 등이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신대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자국 내 문제인 아이누 대한 공식적인 사과의 부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이누인들에게 대해 전향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1/05 19:56 2010/01/05 19:56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karaAn/trackback/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