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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돌아왔습니다.

아무도 기대 안하는 영화 속편 광고하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거의 2년 넘게 내버려 둔 번역을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집에 워드 프로그램이 없군요.
메모장으로 작업해야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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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연말연시라고 해서 송년회니 뭐니, 바쁘신 분들 많겠습니다. 저야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기껏해야 달력 바뀌는 게 전부인데 뭐가 대단한가라고 생각해왔습니다만, 지금 얘기하려는 건 그게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내일이면 제야의 종이니 뭐니 해서 광장에 나온 시민들 인터뷰하고 난리겠습니다. 그놈의 시민이라는 개념은 이럴 때만 써먹으라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것도 이 글의 주제는 아닙니다. 과연 잔디는 밟게 해줄까라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제가 사는 동네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작년 겨울. 한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습니다. 올여름에 세상을 떠난 아나운서가 남긴 멘트 덕택에 조금쯤은 유명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멘트'만'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며칠 전 같은 회사에서 또 한 노동자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다른 큰 뉴스가 많아서 그런지 별로 관심을 못 끌고 넘어가버렸습니다. 이제 그 아나운서님도 안 계시니 멘트조차도 유명해지긴 글렀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방송국은 모레면 방송 종료랍니다. 뭔가 토론회도 하고 그러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은 노조가 설치다가 밥그릇까지 깨먹었다고 합니다. 그런 X들에게는 그냥 숟가락이나 하나씩 처넣어주고 싶습니다만, 숟가락이 아까워서 그냥 내버려둘랍니다. 좋은 분위기 깨지 말라고요? 가뜩이나 살기 힘들고 바쁜데 이것저것 어떻게 다 신경쓰고 살겠냐고요? 뭐, 맞는 말이죠. 그냥 한 귀로 흘려들으세요. 이런 얘기를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야 할까요? 라고 물어봤자 대답해줄 백마를 탄 초인 따위가 튀어나올 리도 없겠죠. 나와 준다고 해도 제가 사양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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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4)

'할례고백'의 데리다가 '진리', '가족', '고백'이라는 제은유를 동결시키는 이유를, 우리들은 여기서부터 간단하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리다의 은유=개념 계에서는 그 3자가 모두, 투명하고 이상적인 우편제도에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68년의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를 시작으로, 데리다는 많은 텍스트에서 진리의 문제 계와 가족의 문제 계를 결합한 논술을 진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항상, 정보가 매개(에크리튀르)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발신지의 상태와 같은 상태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진리'의 진리성은 일반적으로, 정보의 전달과정에 따르는 열화, 사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감소시킨 이상상태로서 이미지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가능성의 그 배제는 또한, 정보의 전달경로를 완전히 소행하는 것, 바로 경로 자체를 무화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지폐를 받을 때, 그것에 각인된 중앙은행의 인장이나 제조번호에 의해서 지폐의 진정성을 신빙하는 것이고, 그 내력(지폐가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가)에 유의하는 일은 없다. 인장이나 제조번호는 특정의 지폐를 발신지(조폐국)까지 한 번에 소행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이 거쳐 온 구체적 경로를 말소해버린다. 역으로 경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위조지폐의 경우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야말로 '진리'를 지탱한다.(6) 반면 '가족'이라는 용어 또한, 정보의 전달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와 당신이 같은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배우 관계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조부와 조모를 공유한다는, 혹은 내가 당신의 자식이나 부모라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피'의 계열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당신의 계열과 겹치고 있다. 즉 배우 관계 이외의, 바꿔 말하면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는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가족'은, 피의 소행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 계열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정보(유전자)의 전달 경로이다. 진리는 지(知)의 우편제도, 가족은 피의 우편제도의 완전성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리고 데리다의 비판은 바로 그 완전성으로 향하고 있다.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 강조된 '에크리튀르는 부모 살해자다.'라는 테제와(7), 철학적 사고의 '사생아 bâstard' 성은 여기서부터 유도된다. 이 논문은 '산종'이라고 이름 붙여진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지만, 그 용어부터가 데리다의 발상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종=정자(semen)를 흩뿌려, 진리와 가족이 의지한 전달경로의 순수성을 교란하는 것. 아니 오히려, 순수한 전달경로 따위는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한 전달 경로라는 것은 어의모순이 될 뿐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 따라서 데리다의 '고백', 탄생의 순간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인생을 투명한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그 작업 또한, 기억의 순수성, 즉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정보전달의 순수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데리다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미 '그라마톨로지에 대해서'의 제2부에서 루소의 '고백'을 참조해 자세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은 일역도 나와 있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할애하자. 6) 이후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데리다는, 경로의 말소가능성과 진정성의 이 커플링이 낳는 모순을 철학적으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폐의 예에 관한 한, 그 모순은 전자 머니의 출현에 의해서, 이미 현실에서도 의문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되짚어 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완전히 현실통화를 모방한(즉 분산처리 결제가 가능한) 전자 머니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장 곤란한 과제는, 먼저 그 희소성과 진정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면에 그 익명성을 유지한다는 2중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다. 희소성과 진정성의 유지는 위조나 카피의 방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원리적으로 개개의 전자 머니(디지털 정보의 괴(塊))에 암호화한 시리얼 넘버를 부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대폭으로 침해한다. 어떤 전자 머니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건네졌는가, 그 정보가 발행은행에 집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순은 극히 데리다적이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라는 것은 정의상 그 소행가능성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경로를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즉 전자 머니의 진정성을 늘리고자 하면 할수록 경로의 현실적 존재가 확인되어, 개개의 전자 머니는 익명성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게 된다. 이상의 사태는 이론적으로는, 경로의 말소가능성이 진정성을 유지하는, 즉 '화폐는 그 내역과는 무관계하게 받아들여진다.'라는 이념이 처음부터 일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태는 소행적으로, 전자 머니 이전의 분산처리형 화폐, 예를 들어 지폐에 있어서의 이런 종류의 모순이 하고 있었던 역할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지폐가 이미 일종의 버추얼 머니라는 점은 자주 지적된 대로지만, 사실 그 가상(버추얼) 진정성은, 제조번호에 의한 경로의 말소=소행이, 이념적 가능성에 의해서 항상 유지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언제나 이념상으로 가능할 리 없다는 모순에 의해 지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데리다가 '대리의 이론'이라고 부른 것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7) La dissémination,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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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나는 참치...

번역은 최근 이것저것 하는 터라 잠시 뜸한 상태이고, 날림 포스트를 하나... 고객 만족도 어쩌고 하는, 해마다 나오는 무슨 상.. 참치 통조림 부문에서 동원이 탔더군요. 뭐..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하지만... 하종강 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www.hadream.com) 몇 년된 얘기긴 하지만 이쪽 환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 참치잡이 외항선원 아침나절,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사무실에 들어와 어색한 몸짓으로 여직원 책상 앞으로 가더니 멀거니 서 있었다. 여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저, 하종강 변호사님 좀 뵈러 왔는데요."라고 고개를 건들건들 옆으로 누이며 대답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좀 이상해 보였다. 여직원이 "하 변호사님, 손님 오셨어요."라고 일부러 '변호사'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가 반나절에 걸쳐서 나에게 해 준 이야기... --------------------------------------------------------------- 참치잡이 원양어선의 갑판원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갑판원이지 강제노동을 하는 죄수나 다름없었습니다. 생선 상자를 지고 뛰어가다가 살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습니다. '뛰지 않고 걸으며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치 '지옥'과 같은 갑판원의 처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망망 대해에 병원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이 찾아 왔지만 견디어내며 묵묵히 일했습니다. 차츰 통증이 너무 자주 찾아오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목 뒤까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목 바로 아랫부분부터 머리 뒤꼭지까지 '목뼈를 따라 쇠파이프를 꽂았다가 뽑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심했다 덜했다 하면서 아픈 게 아니라,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이틀 또는 사흘간 계속 그렇게 죽도록 아팠습니다. 아픈 동안은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까지 어지러워 먹은 것 없이 토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선장한테 사정사정해서 사고 난 지 8 개월만에 겨우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한 후 회사에서 치료비를 대주어 병원에 다녔습니다. '요추 및 경추 추간판 탈출증'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걸린 거라고 합니다. 2년쯤 지나도록 차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말이 잘 안 나오고 행동도 굼떠지고 말을 한 마디 하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먼저 옆으로 돌아가며 갸우뚱하게 눕기 시작했습니다.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곤 하는데, 거울을 보면 자신이 느끼기에도 좀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보니 '외상성 뇌증후군'이라고 써 있었고, 얼마 전부터는 정신과에서도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목과 허리의 디스크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에 대하여는 치료비 등 일체의 보상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의 치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던데... 담당의사는 배 위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결국 정신적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귀국한 후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한 푼의 임금도 못 받아서 지금은 거지보다 전혀 나을 것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그 동안의 치료비를 대 준 것만도 크게 봐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니 그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는 정신과 치료비를 회사로부터 타낼 방법이 없겠느냐는 거였다. 물론 방법이 있다고... 치료비뿐만 아니라 그 동안 못 받았던 임금도 받을 수 있도록 법에 다 나와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 몸에 장애가 남게 될 터이니 앞으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의 손해도 돈으로 계산해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청년을 옆에 앉힌 채 항만청에 제출할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대개는 다음의 적당한 날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그때까지 내가 틈틈이 서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청년의 거동이 불편해 보여서(사무실까지 혼자 찾아 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장애가 심해 보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일을 미루기로 했다.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한결같이 관료주의적 폐단에 물들어 있는 공무원들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서 서류를 보게 하려면, 불필요할 정도로 장황하게 서류를 꾸며야 한다는 것이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진리'이다. 간단한 말도 복잡하고 거창하게 설명하고, 한 페이지에 담을 수 있는 내용도 두서너 페이지에 나누어 담고, 가능한 한 붉은 색 도장과 푸른 색 고무인을 여기저기 많이 찍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작업이 되고 만다. 관공서에 찾아가 울며불며 말로 호소하거나 아무 종이에나 개발새발 적어서 진정서 한 장 달랑 내미는 것보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럴듯하게 수십 페이지의 서류를 갖추어 내미는 것이 훨씬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내키지 않는 노력들이 당사자에게 바늘 끝만큼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는 나한테 이미 없다. 오후 두 시쯤 되어 내용 작성을 모두 끝냈다. 내용 작성이 끝나면 일이 절반쯤 끝난 셈이다. 이제는 컴퓨터 프린터로 뽑아내어 필요한 만큼 복사하고, 참고 자료 역시 필요한 만큼 복사하여 번호를 매기고, 순서대로 철해서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빌어먹을 관공서 공문 서식은 복사지나 컴퓨터 용지 그 어느 것과도 규격이 맞지 않아서 자를 대고 일일이 같은 크기로 절단을 해야만 한다.(지금은 관공서 용지가 A4로 통일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B5보다는 조금 크고 A4보다는 조금 작은 16절지가 우리나라 관공서 문서 규격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받는 쪽에서 조금이라도 신중하게 서류를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컴퓨터 프린터에서 막 출력이 시작되었을 때, 그 청년이 이제는 일도 다 끝냈으니 여담이나 하겠다는 것처럼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씨였다. "사고 난 후 3년이나 되었지만 실제 치료기간은 10 개월도 안되었어요. 회사에서 '죽어도 치료를 안 해준다'고 해서요... 그동안 쫓아다닌 병원이 열 군데도 더 될 겁니다. 회사에는 백 번도 더 찾아갔었구요." "다치고 나서, 집에 보내 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선장이 허락을 해야 말이지요. 나중에는, 치료도 보상도 필요 없으니 그냥 귀국만 시켜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네 마음대로 귀국하면 선원법 위반으로 공항에 내리는 즉시 구속될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협박하더군요." "목이 아프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그랬더니 항해사가 나를 방에 가두라고 하데요. 거의 6개월 동안을 감금 상태에 있다가 포루투칼에 배가 닿았을 때 죽어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더니 겨우 나를 달래서 귀국시켜 준 거예요." 내가 그 청년의 말을 끊고 물었다. "잠깐만요. 그걸 왜 지금에야 말해요? 정신과 의사한테도 그런 얘기 모두 했습니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제일 중요한지도 모르는데..." 이역만리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철판으로 만들어진 선실에 감금되어 있었던 6개월 동안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도대체 어느 만큼이었을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인 후에 나는 프린터의 전원을 끄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그 중요한 걸 빠뜨릴 수는 없어요. 오늘 다른 약속은 없지요?" 그러자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여러 번 꼬면서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말했다. "저... 식사...하셔...야...지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대책 없이 착해 빠지기만한 것에 오히려 분통이 터졌다. "댁이 지금 남 식사 걱정이나 하고 있을 형편이요?" 마치 그가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큰 소리가 튀어나왔는데, 말 끄트머리에서 그의 우람한 손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수 억 원을 들인다 해도 그는 결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결혼도 하기 전의 젊은 나이에 거의 완벽하게 망쳐버린 그의 인생은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도 완전하게 보상받지는 못할 거였다. 남달리 커 보이는 그의 손이 오히려 서러웠다. 일을 다 마치고 그가 간 후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내가 동원참치를 먹으면, 개다.' 며칠 후 수퍼마켓에서 무심코 참치 깡통을 집어드는 나에게 안해가 말했다. "그거 '동원' 꺼야."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깡통을 내려놓았다. -------------------------------- 여러가지 사족 붙여봤자 역효과만 날 것 같네요. 저도 참치 안 먹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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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3)

이제, 이 '할례고백'과 같이 전형적인 후기 스타일로 쓰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먼저 이러한 말=어휘가 가진 통상적인 함의를 괄호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치부터 검토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먼저 인용한 여러 곳에서, ‘고백 confession’, ‘할례 circoncision’의 양자와 '할례고백 circonfession'과의 대치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오리지널적인 이야기=자기사(史)를 날조하고 강화하는 고백 및 할례의 제도는, '가족'적이며 '진실'을 보증한다고 데리다는 이야기한다. 그 제도에서는 나=데리다는 탄생의 순간부터 어떤 동일성을 각인되어, 아무리 여러 가지 인격상의 변천을 이뤘다하더라도 그 본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고유명의 문제에 직결되고 있다. 성질이 아무리 변했더라도 '나는 나다'라는 점, 그것은 확정기술의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단독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할례고백'을 시작한 것은, 그 단독성을 교란하는 '過巻き', 소위 유령의 목소리가 있는가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서는, 할례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써의 매킨토시, 즉 컴퓨터=정보기계에 대한 언급이 행해지고 있다. 인용부분만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실은 이 '할례고백' 전체를 통해서, 펜과 매킨토시의 대치는 고백=할례와 할례고백과의 대치에 병행하고 있다. 컴퓨터로 쓰지 않는 사람들은, 할례고백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기서는 말하자면, 기억(상기, 아르시브)의 펜적 형태와 매킨토시적 형태가 대치하게 된다. 한편으로 '고백', '할례', '진리', '가족', '펜'이라는 용어. 그리고 다른편으로 '할례고백', '반복가능 itérable', '매킨토시 셋 le bloe Macintosh'라는 은유군……. 그렇다면, 은유의 이 계열과 대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할례고백' 이외의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되풀이 해 온 것처럼,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는 상호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해독하는 축의 하나로써, 이하 우리들은 '우편 poste'의 은유를 선택하도록 하자. 그 선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편적 은유는 극히 초기부터 최근까지, 데리다의 많은 텍스트에서 일관되게 나타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최초 저작, "'기하학의 기원' 서설"에서 이미 그 은유는 나타나고 있다.(4) 후설은 기하학적 이념이 역사적 전승(탈레스가 발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전하고, 또 누군가가 전하고...) 위에서 성립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원격 커뮤니케이션으로의 우편과 서간'이 지(知)의 구성에 대해서 하는 역할의 고찰, 이후 데리다가 사용하는 술어로 말하면, '그라마톨로지'의 고찰에 일보 전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면 후설은 전승의 불확정성을 없애버렸다. 데리다가 후설의 '초월론적 역사'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이미 검토한 것처럼 바로 그 양의성에 있어서다. 또, 같이 앞 장에서 다룬 논문 '서명 사건 콘텍스트'를 봐도 좋다. 어떤 발화가 문자 그대로인가 수사적인 것인가, 콘스터티브한 것인가 퍼포머티브한 것인가, 즉 '정상'인 것인가 '기생적'인 것인가, 그 구별을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데리다는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그 때 들고 나온 것은 수취인이 죽인 편지의 예였다.(5) 그리고 또 데리다는 80년의 '엽서'를 필두로, 문자 그대로 우편이나 텔레미디어를 테마로 한 텍스트를 다수 발표하고 있다. 우리들이 본 장에서 이후 읽게 되는 논문 '真理の配達人(진리의 배달인)'은, 이 저작에 포함되어 있다. 우편적 은유에 갖다 붙여서 정리하면, ‘에크리튀르’는 결국, 정보의 불가변적인 동시에 불완전한 매개로 생각될 것이다. 정보의 전달이 반드시 무엇인가의 매개(미디어)를 필요로 하는 이상,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자신이 발신했던 정보가 잘못된 곳에 전해진다든지, 그 일부 혹은 전부가 도착하지 않는다든지, 거꾸로 자신이 받고 있는 정보가 실은 기록된 발신인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내진 것이었다든지, 그런 사고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데리다가 강하게 비판하는 ‘현전의 사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사고를 최종적으로 제어가능하다고 보는 사고법을 의미하고 있다. 역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데리다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그런 종류의 사고 가능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믿을 수 없는 우편제도’라고 말해도 좋다. 4) L'origine de géométrie, pp.36-37. 일역 47-49항 5) Marges, p.375. 논문 일역 2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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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6)

노벨 게임에서 ‘울게 만들다’라는 의미 노벨 게임은, 이처럼,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지배된 현재의 오타쿠계 문화 중에서도, 특히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 장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일부의 게임은, 이제 갸루 게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포르노그래피적인 표현보다도 모에 요소의 조합에 중점을 둔 독자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전형이, Key가 제작한 99년의 'Kanon'과 2000년의 ‘Air'라는 2개의 작품이다.(그림16) 이 두 작품은, 판매상으로는 성인 지향 게임으로 되어있지만, 더 이상 포르노그래피적인 일러스트를 거의 포함하지 않는다. Key의 게임은, 소비자들에게 에로틱한 만족을 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오타쿠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에 요소를 철저하게 조합해서, 그들이 효율적으로 우는, 반하기(萌える) 위한 일종의 모범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어, ‘Air’에서는, 갸루 게의 목적이 에로틱한 만족이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모든 포르노그래피적인 일러스트는 모두 전반부에 채워져 있다. 10시간 이상을 차지하는 플레이 시간의 후반은, 실질적인 선택기도 없이, 히로인의 멜로드라마가 진행되어 가는 것을 담담하게 읽을 뿐이다. 그리고 그 멜로드라마도, ‘불치의 병’, ‘전세로부터의 숙명’, ‘친구들을 만들지 못하는 고독한 소녀’, 라는 모에 요소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극히 유형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다. 이야기의 무대가 어디인지, 히로인의 병은 어떤 것인지, 전세라고 함은 어떤 시대인지, 그런 중요한 부분이 모두 애매한 채로, ‘Air’의 이야기는 단지 설정만을 조합시킨 골조만으로써 진행해 간다.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게임이, 높은 단가에도 불구하고 10만부 이상을 팔아,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데 지 캐럿’의 성공과 같이, 이야기의 유형으로부터 디자인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모에의 기준이 빈틈없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세이료인 류스이의 소설을 아울러 이야기한 것처럼, 9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소비자들에게 있어서는, 현실 세계의 모방보다도, 서브컬처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추출된 모에 요소 쪽이 훨씬 리얼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그들이 ‘깊다’ 라든지 ‘울게 만들다’ 라든지 등을 말할 때에도, 대개의 경우, 그런 모에 요소들을 조합하는 묘가 판단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90년대에 있어서 드라마에 대한 관심의 고양은, 이 점에서 고양이 귀나 메이드 복에 대한 관심의 고양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은, 종래의 이야기적인 박력이 아니라, 세계관도 메시지도 없는, 단지 효율적으로 감정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방정식이다. 보다 철저한 시뮬라크르의 제작이 가능하게 그러나 노벨 게임의 소비에는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이 있다. 소설이나 코믹과는 많이 다르게, 컴퓨터 게임의 본체는, 플레이어가 스크린 위에 눈을 두는 드라마(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생성하는 시스템 쪽이 요구된다. 액션 게임도 롤플레잉 게임도, 스크린 위에 표시되는 화면과 이야기 전개는,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서 생성된 하나의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조작이 바뀌면, 같은 게임은 다른 화면이나 이야기 전개를 표시한다. 그리고 게임의 소비자는,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의 이야기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다른 버전의 있을 법한 이야기 총체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의 분석에 있어서, 이 소비의 2층 구조에 주의하지 않으면, 문학비평이나 영화비평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서 실패하게 된다. 이런 게임의 구조는, 지금까지 검토해 온 포스트모던의 세계상(데이터베이스 모델)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컴퓨터 게임의 발전과 포스트모던화의 진전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고, 실제로 그것은 시기적인 부합에도 맞지만, 그 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또 다른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벨게임도 또한 컴퓨터 게임인 이상, 그 작품으로 향하는 소비자들의 의식이 2층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술한 것처럼, 노벨게임의 표층적인 소비는 모에 요소의 조합으로 채워지고, 오타쿠들은 거기에 울고, 모에의 유희를 충분히 향수(享受)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그렇지만, 그러나, 보다 상세하게 관찰하면,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노벨게임의 시스템 자체에 침입해서, 플레이 화면에 구성되기 전의 정보를 날 것으로 빼내어, 그 재료를 사용해 다른 작품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노벨게임의 많은 화면은, 실제로는 복수의 데이터를 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17의 우측에 놓은 3개의 도판은 ‘키즈아토’의 플레이화면이지만, 이것들 모두, 각각 좌측에 가리키는 이런저런 파일로 분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제일 오른쪽 위에 있는 화면은, 화실(和室)의 배경화상(시스템에서는 S10.LFG라는 파일명으로 지정되어 있다)에 캐릭터의 화상(동일하게 C31.LFG)을 겹치고, 그 위에 시나리오의 텍스트(016.SCN로서 지정된 파일의 일부)를 겹쳐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같은 텍스트나 화상은, 조합에 의해서 또 다른 여러 가지 화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파일을 반복 사용하는 것은, 제작과정의 생략화만이 아니라, 90년대 중반의 하드웨어 조건(기록매체의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화상의 이런 반복 사용 자체는, 코믹이나 애니메이션에서도 빈번하게 보이는 것이며, 결코 드문 일은 아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대부분의 동화가 복수 셀화의 중첩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노벨 게임도 발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벨게임이 애니메이션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거기에서, 화면의 단편이 제작자에 의해 이용될 뿐만 아니라, 소비자에 의해서도 손쉽게 분해되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림에서 가리키는 텍스트나 화상의 파일은, 실은, 구입 시의 상태에서는 압축되고 암호화되어 읽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갸루 게의 소비자 중에서는, 기술적인 지식이 풍부하고, 해커적인 기질을 가진 컴퓨터 이용자가 많다. 인터넷 상에서는, 여기서 채택한 ‘키즈아토’를 시작으로 해서, 유력한 게임의 데이터를 분해하고, 시나리오나 화상, 음성을 ‘빼내는’ 소프트 웨어가 몇 개쯤인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필자 자신이 이용한 것도, 그런 프리 소프트의 하나이다.(주45) 그리고 그런 환경은, 노벨 게임에 있어서의 2차 창작을, 종래의 2차 창작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2차 창작이라는 것은, 원작의 설정을 데이터베이스로 까지 환원해서, 거기서부터 임의로 추출된 단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로서 게시된 작품이다. 그러나 종래의 2차 창작에서는, 거기에 이용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자가 자주적으로 재구성한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점에서 작자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길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반게리온’의 동인작가가, 몇 개의 원작을 단편화해서 조합시킨다고 해도, 출판된 동인지의 페이지 그 자체는 자신의 손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는 어떻게 해도 작가성이 깃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TV시리즈로부터 샘플링을 통해 2차 창작을 만드는 시도(‘매드 비디오’라고 불리고 있다.)도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기술적인 한계도 있고 해서, 역시 그리 큰 움직임은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노벨게임의 융성과, 이상과 같은 분해의 일반화, 그리고 바로, 데이터를 재구성하기 위한 멀티미디어 환경의 충실은, 이제, 그런 2차 창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보다 철저한 시뮬라크르의 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 하나의 예로서는, ‘매드 무비’라고 불리는 여상작품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동화를 골라서, 적당한 음악에 맞춰 가공하고 편집해서 만들어지는 단시간의 비디오 클립이며, 대체로 인터넷 상에서 유통되고 있다. 80년대의 ‘매드 비디오’와 다른 것은, 그 편집 작업이 거의 완전하게 디지털화되고, 결과로서 제작자의 지향이나 동기가 크게 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노벨게임의 2차 창작으로서 만들어진 작품은 유난히 특이한 발달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Air’의 매드 무비 중에서는, ‘Air’로부터 뽑아낸 화상을, 거의 그대로, 같은 ‘Air’에서 뽑아낸 음악에 맞춰 편집해 만들어진 작품이 보인다. 즉 여기서는, 종래의 동인지적인 2차 창작과는 다른, 완전히 원작과 같은 데이터를 사용해서, 단지 그 배열과 표현 방법만을 바꿔 만든 새로운 타입의 2차 창작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향의 움직임으로, 그 밖에도 최근에는, Windows용으로 만들어진 노벨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자주적으로 이식하는 시도와 같은, 여러 개의 흥미로운 예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새로운 타입의 2차 창작은, 원작의 데이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동인지 같은 종래의 2차 창작보다 훨씬 저작권법 상의 문제를 불러오기 쉽다. 실제로 그것을 제작자도 자각하고 있는 듯, 이상과 같은 시도 중에는, 익명으로 기간을 정해 인터넷 상에서만 교환되는 작품도 많다. 필자는 그 현상에 대해 의견을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단 하나, 그런 욕망이, 결코 개인의 일탈이 아닌, 노벨게임의 본질이(더 나아가서는 포스트모던의 본질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욕망이라는 점에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되풀이 하지만, 노벨게임의 한 장면은, 오리지널에 있어서도, 원래 복수의 데이터를 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표층에서 하나의 것으로 보이는 화면이나 이야기 전개도, 심층에서는 무의미한 단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같은 텍스트나 화상이,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여러 개의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역으로, 그런 단편들을 다른 방법으로 조합하는 것으로서, 원작과 같은 가치를 지닌 다른 버전의 노벨 게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진행일 것이다. 매드 무비의 제작자들은, 원작에서 만날 때와 같은 감동을 다르게 조합해서 또다시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시스템을 분해하고, 데이터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최소한 그들의 의식으로는, 도작이나 패러디, 샘플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식에 이끌린 활동인 것이다. 주45) 참고를 위해서 기록해두면, 이용한 것은 Susie32 ver0.45a에, Leaf PAK AX ver0.27과 Leaf CG to DIB ver0.27의 플러그인을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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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2)

1-a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89년부터 90년에 걸쳐 기록된 텍스트 ‘할례고백(割禮告白 Circonfession)에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만약 이제 와서 하나의 할례(Circonfession) [......]가 내 입술의 경계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만약 내 고백(Confession)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하게 하는 진리를 핥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속죄함 없이, 자신의 이 망연자실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에, [......] 그렇다면 나는 이 過巻き를 벗어날 것이기에, 過巻き, 그것은 진실이라는 것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는 한 고백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모든 형상과 모든 묘선(描線)이 부과하는 할례의 경험인 것이다, 고명(古名) 또는 남유(濫喩), 그러나 고백 혹은 할례라는 의식은 서로 닮았음이 분명하다, 가족에 속함으로써, 즉 장르=종에 속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나의 할례고백은 시작한다, 매킨토시 셋 안에서 층화된 장소에서, 상기(想起)적으로 반복=복제 가능한 동시에 상처 입기 쉬운 구조, double-sided/double density, 양면 트랙의 플로피 디스크, [......] 그 어리석은 자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는 에크리튀르를 쓸모없게 한다, ‘상사(원문은 曹長) 펜’ 을 가진 선량한 할머니를, 친적(親的)인 에크리튀르를, 내 아버지의 펜, 내 어머니의 펜을 쓸모없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분신 혹은 아르시브(archive)의 문제를 규제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이브함, 그것은 그들이 컴퓨터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 이 텍스트는 91년, 제프리 베닝턴의 텍스트 ‘데리다베이스’와 같이, Seuil사의 ‘동시대인’ 시리즈 중 한권 ‘자끄 데리다’로서 출판된다. 동 시리즈는, 그 밖에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피에르 크로소우스키(Pierre Klossowski)’ 등을 담은 사상가, 작가의 해설서 시리즈이고, 본래는 그 책에서도 데리다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손쉬운 해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데리다와 베닝턴은, 다음과 같은 복잡한 전략을 세운다. 먼저 베닝턴의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교육적으로, 데리다의 작업을 가능한 만큼 도식화한다. 이것은 그의 전기적 정보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기호', '증여', '무의식'이라는 31개의 키워드를 제시한 장부터 무시간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데리다베이스'라는 타이틀은 '데이터베이스'와의 주락(酒落)이 되고 있다). 반면 데리다는 바로 그 도식을 해체하기 위해, 병행해서 기묘한 자전적 텍스트를 집필한다. 그 텍스트는 59개의 단장(斷章)으로 구성되고, 하나의 단장 안에서는 마침표 없이 문장이 이어진다. 베닝턴에 의한 키워드화에 저항하기 위해 여기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유가 빈번하게 나오고, 복잡한 구문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들 두 텍스트는 같은 쪽에서, 위 3분의 2를 '데리다베이스'가, 아래 나머지를 '할례고백'이 차지하는 형태로 인쇄된다. 도식적인 사고와 은유적인 연상관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병렬되고 있는 이 텍스트는, 이후 말하는 '탈구축'의 2가지 면의 관계를 응축하고 있다. 가운데 인용 부분은 번역이 좀 어색하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 듯..-_-; 그리고 過巻き는 적당한 말을 모르겠음.. 누가 알려줘~~ 3)“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pp.12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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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5)

8. 해리적(解離的) 인간 웰 메이드적인 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고양 그러나 오오사와도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더 이상 ‘허구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시니시즘=스노비즘의 정신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일본적으로도 유효성을 잃고, 이제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모델이 태두하고 있다. 이런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보면, 전절까지 검토해 왔던 이야기 소비로부터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가는 이동 또한, 단순히 서브 컬처 내부에서의 모드 변경이 아니라, 보다 큰 움직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배후에, 도대체 어떤 모델을 짐작할 수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는 위에 주목해야할 것은, 최근 10년간, 오타쿠계 문화에서는, 큰 이야기의 조락과 반비례하는 것처럼, 작품 내의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왔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제 오타쿠계 문화에 있어서 큰 이야기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논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에반게리온’ 이후, 노벨즈의 붐이나 코믹의 이야기 회귀로 보이는 것처럼, 독자나 시청자를 일정시간 질리지 않고, 적당히 감동시키며, 적당히 생각하게 하는 웰 메이드적인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높아져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필자의 생각으로는,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담당하는 주체의 성질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읽는' 게임이 오타쿠계 문화의 중심으로 구체적인 예를 따라 검토해 가자. 1990년대 오타쿠계 문화에서는, ‘갸루 게(girl game)’ 혹은 ‘미소녀 게임’라고 불리는 컴퓨터 게임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 장르는 82년에 태어나, 90년대 전반에 다양화하고, 9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았다고 한다.(주44) 갸루 게는 기본적으로 성인 지향의 게임이고, 컨슈머기(패미콤이나 플레이스테이션)가 아닌, 주로 Windows기에서 플레이된다. 그 기본적인 형식은, 플레이어가 복수로 준비된 여성 캐릭터를 이런저런 시스템을 통해서 ‘공략’하고, 보수로서 주어지는 포르노 그래픽적인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오히려 몇 개쯤인가의 흥미로운 시도를 낳아 왔다. 그 중에서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90년대 후반의 갸루 게의 융성을 유지하고, 대량의 2차창작과 관련상품을 만들어 낸, ‘에반게리온’ 이후 오타쿠계 문화의 중심을 담당했다고 일컬어지는 ‘노벨 게임’이라고 불리는 서브 컬쳐이다. 노벨 게임이라고 함은 일반적으로는, 일찍이 게임 북 따위에서 시도되었던 멀티 스토리· 멀티 엔딩의 소설을, 컴퓨터 스크린 상에 화상이나 음악과 함께 ‘읽는’ 게임을 의미한다. 그 기본적인 화면은, 두루마리 그림이나 그림 연극을 상상하면 알기 쉽다. 이 시스템은 90년대 초에 슈퍼 패미콤용 게임 ‘제절초(弟切草)’에서 확립되었지만, 96년에 만들어진 ‘雫(시즈쿠)’를 계기로 갸루 게의 세계에 도입된다. ‘시즈쿠’는, 제2세대의 오타쿠들이 중심이 된 제작회사 Leaf의 손에 만들어져, 계속 제작된 ‘痕(키즈아토)’, ‘To Heart’와 더불어 지금까지도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노벨 게임의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준비된 선택기를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 자유도는 액션 게임이나 롤플레잉 게임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낮고, 또한 동화나 리얼타임 3D화상이 사용될 여지도 거의 없다. 따라서 컨슈머기의 기술적인 진보는 노벨게임에서는 역풍이 되었지만,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성인 지향 컴퓨터 게임 세계에서는, 거꾸로 그 빈약함이 이점이 되었다. 이하에서 ‘노벨 게임’이라는 것은, 특히 언급하지 않는한, 이 후자 세계에서의 노벨 게임(갸루 게 중에서의 노벨 게임)을 의미한다. 어차피, 최근에, 컨슈머기에서 발매되는 노벨게임의 다수는 갸루 게로부터의 이식작이다. 노벨 게임의 플레이어는, 다른 많은 게임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수동적이다. 플레이 시간의 대부분에서, 플레이어는 단지 텍스트를 읽고, 일러스트를 볼 뿐이다. 확실히 최근에는, BGM을 충실하게 하고, 대사에 유명한 성우를 넣고, 동화를 삽입하고 있는 게임도 많으며, 그중에서는 흥미로운 시도도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이 텍스트와 일러스트라는 점은 역시 변하지 않는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데이터량이 많은 음성이나 동화를 가정용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제한 때문에, 노벨 게임의 진보는, 반은 필연적으로, 효율적으로 감동할 수 있는(울게 만드는) 텍스트와 효율적으로 감정 이입이 가능한(반하게 되는[萌えられる]) 일러스트의 추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멀티 스토리· 멀티 엔딩의 구조도 이 경향을 뒷받침했다. 스토리가 복수이고, 엔딩이 복수(공략할 수 있는 여성이 복수 준비되어 있는)라는 것은, 가능한 많은 이야기와 가능한 많은 캐릭터를, 필요한 모듈의 조합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하드웨어를 이용하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으며, 성인 지향이므로 불필요한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노벨 게임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오타쿠들의 모에 요소에 대한 정열을 가장 효율적으로 반영한 독특한 장르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최근 수년의 오타쿠계 문화에서 노벨 게임이 하고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에반게리온’ 이후, 남성 오타쿠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캐릭터는, 코믹이나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 아닌, 아마도 ‘To Heart'의 멀티(マルチ)일 것이다(그림 15). 주44) 갸루 게의 역사를 대충 파악하기 위해서는, ‘パソコン美少女ゲーム歷史大全(퍼스컴 미소녀 게임 역사대전)’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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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1)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의해 둔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그 변화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데리다는 형식화의 끝에서 ‘텍스트의 장난’을 보았다고, 그리고 철학의 초월론적 프로그램을 해체해서 그것을 ‘실천’으로 해소시켜 버렸다고 생각되고 있다.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폭로 이후에, ‘철학’에는 이제 텍스트 공간을 헤엄쳐 나가는 것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만약 이 이해가 올바르다고 하면, 우리들은 더 이상 데리다를 읽을 필요는 없다. 보다 정확하게는 읽어야할만한 것이 없다. 텍스트 공간 그 자체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間 텍스트성’이나 ‘저자성(著者性)의 탈구축’이라고 하는 술어에 따른 그 신비화는,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세속적 욕망이나 이데올로기를 감추는 것으로써밖에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그런 역할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70년대에 시작한 그의 ‘기묘한’ 텍스트 실천은, 이미 앞 장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많은 독자가 꺼리도록 만들었고, 다른 편으로는 데리다 특유의 스타일과 어휘에 매료된 연구자집단, 소위 ‘데리다 파’를 강력히 조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데리다 파의 제도적 영야(領野)에 있어서 ‘탈구축적인’ 작업 자체는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고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지 않는, 그 선택에 깃든 욕망을 문제로 삼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은, 데리다가 유럽의 전통적 텍스트만을 읽는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굳이 소박하게 물었던 사이드가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이 이하에서 읽으려고 시도하는 데리다는, 그런 데리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가라타니가 읽었던 데리다와도 다르다. 앞 장의 말미에서 우리들은 2가지의 의문을 제시했다. 되풀이 해보면 그것은, (i) 데리다가 제기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고유명론, 즉 ‘유령’론이라는 함은 어떤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ii) 그 고유명을 파악하는 방법은 데리다 자신의 텍스트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두 가지의 물음이었다. 본 장에서는 후기 데리다의 작업을 형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으로써,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이론적 지형을 정리한다. 다시 한 번 확인해두지만, 여기서 ‘기묘함’이라고 불리는 데리다의 특징은, 결코 그 개인의 철학적 자질이나 시대적 배경(텔 켈 파의 영향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거기서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론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후기의 데리다는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괴델=가라타니적인 ‘형식화’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또 다른 구조, 70년대의 그가 때때로 ‘긴밀 구조 structure’라고 부르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2) 그리고 그가 생산했던 텍스트의 성질은, 그 구조로부터 역시 이론적으로 요청된다고 추측된다. 우리들은 이후 다시 가라타니를 다루게 될 것이다. 형식화의 제 문제가 가라타니에게 ‘전회(轉回)’를 강요했다고 한다면, 데리다에게는 무엇을 강요한 것인가 --- 본 장의 문제를 극히 단순히 그렇게 정식화한다고 해도,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2) cf. ex. La vérité en peinture, Flammarion (collection ⟪Champs⟫), 1978, p.38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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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4)

오타쿠의 스노비즘으로부터 보이는 시니시즘 그리고 이런 시점에서 보면, 전술한 것과 같은 오타쿠의 스노비즘은, 에도 문화의 형식주의 연장선 위에 있는 동시에, 또 이런 세계적인 시니시즘 흐름의 한 현상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스탈리니즘 하의 시민과 일본의 오타쿠들은, 확실히 정치적인 긴장도 사회적 조건도 달라, 이 양자를 비교하는 것은 골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양자 모두,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린 후, 무의미한 것에서 굳이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고 어느새 그 '굳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는 심리적인 과정에서는 공통되어 있다. 때문에 코제브는, 일본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채로, 오타쿠적인 감성의 태두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행하는 오타쿠론 중에서는, 전에도 다룬 오오사와 마사치가 이런 면을 다루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그는, 오타쿠의 특징을, 조락한 큰 이야기(초월적 타자의 심급)을 서브컬처로 메우려 한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거기서 지젝을 참고하고 있고, 위의 시니시즘론과 완전히 겹치는 형태로 오타쿠론을 전개하고 있다. 오오사와는 거기서, 오타쿠들에 있어서는 '제3자 심급의 제1차적 붕괴를 전제로 한, 제3자 심급의 2차적인 투사가 발생'하고, 그 투사는 현대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주42) 이 오오사와의 술어는 특수하지만, 이 책의 표현으로 고치면, '제3자의 심급'이라는 것은, 초월론타자=큰 이야기를 말하고, '2차적 투사'라는 것은 서브컬처에 의한 날조를 말한다.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본래의(1차적인) 큰 이야기가 붕괴하고, 그 전제의 근본으로써 페이크의 큰 이야기(2차적인 투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페이크를 손에서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 그리고 오오사와는, 이 전제 위에서, '虛構の時代の果て'나 '戰後の事象空間' 등의 저작으로 더욱 깊이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오오사와에 따르면, 전후 일본의 이데올로기 상황은, 45년부터 70년대까지의 '이상의 시대'와, 70년대부터 95년까지의 '허구의 시대' 둘로 나뉜다. 이 책에서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상의 시대'는, 큰 이야기가 그대로 기능하고 있던 시대, '허구의 시대'는 큰 이야기가 페이크로밖에 기능하지 않는 시대이다. 이 윤곽 안에서 오타쿠적인 이야기 소비-허구 중시는, '소비사회적 시니시즘의 미저(微底)한 형태'로서, 종전으로부터 80년대까지 일관된 흐름 위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95년의 옴 진리교 사건은, 바로 이 흐름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연합적군---및 그것에 동시대성을 느꼈던 사람들---이, 이상 시대의 종언(또는 극한)을 대표하고 있다고 하게 되면, 옴 진리교는, 허구 시대의 종언(극한)을 대표하는 위치를 맡게 된다.'(주43) 14년부터 89년까지 75년간은, 19세기적인 근대로부터 21세기적인 포스트모던으로 가는 긴 이행기였다. 이 이행기의 시대정신은 시니시즘 또는 스노비즘으로 특징지어지고, 그것은 냉전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과정이 45년의 패전으로 한번 절단된다. 그리고 역으로, 부흥기로부터 고도성장기에 걸친 일본은, 오히려, 교육기관이나 사회조직 등, 사회의 이데올로기 장치를 강화하고, 큰 이야기=국가목표를 부활시키는 것으로써 위기를 뛰어넘어왔다. 실제 이 시기의 효율적인 경제성장은, 전쟁 중의 총력전 체제가 남긴 법제도나 행정시스템에 의해 크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총합이 또다시 완만해진 것이 70년대이고, 그 결과, 일본에서는, 포스트모던으로의 이행이, 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급속하게 진전되었던 것이 아닐까. 오오사와가 논한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의 대립이 명확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일본의 독자적 상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42) '전자 미디어론', 279,286항 주43) '戰後の事象空間(전후의 사상 공간)', 128항. '虛構の時代の果て(허구의 시대 끝에서)', 40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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