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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4)

'할례고백'의 데리다가 '진리', '가족', '고백'이라는 제은유를 동결시키는 이유를, 우리들은 여기서부터 간단하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리다의 은유=개념 계에서는 그 3자가 모두, 투명하고 이상적인 우편제도에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68년의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를 시작으로, 데리다는 많은 텍스트에서 진리의 문제 계와 가족의 문제 계를 결합한 논술을 진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항상, 정보가 매개(에크리튀르)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발신지의 상태와 같은 상태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진리'의 진리성은 일반적으로, 정보의 전달과정에 따르는 열화, 사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감소시킨 이상상태로서 이미지되고 있다. 그리고 사고가능성의 그 배제는 또한, 정보의 전달경로를 완전히 소행하는 것, 바로 경로 자체를 무화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지폐를 받을 때, 그것에 각인된 중앙은행의 인장이나 제조번호에 의해서 지폐의 진정성을 신빙하는 것이고, 그 내력(지폐가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가)에 유의하는 일은 없다. 인장이나 제조번호는 특정의 지폐를 발신지(조폐국)까지 한 번에 소행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이 거쳐 온 구체적 경로를 말소해버린다. 역으로 경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위조지폐의 경우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야말로 '진리'를 지탱한다.(6) 반면 '가족'이라는 용어 또한, 정보의 전달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와 당신이 같은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배우 관계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조부와 조모를 공유한다는, 혹은 내가 당신의 자식이나 부모라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피'의 계열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당신의 계열과 겹치고 있다. 즉 배우 관계 이외의, 바꿔 말하면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는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가족'은, 피의 소행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 계열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정보(유전자)의 전달 경로이다. 진리는 지(知)의 우편제도, 가족은 피의 우편제도의 완전성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리고 데리다의 비판은 바로 그 완전성으로 향하고 있다.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 강조된 '에크리튀르는 부모 살해자다.'라는 테제와(7), 철학적 사고의 '사생아 bâstard' 성은 여기서부터 유도된다. 이 논문은 '산종'이라고 이름 붙여진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지만, 그 용어부터가 데리다의 발상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종=정자(semen)를 흩뿌려, 진리와 가족이 의지한 전달경로의 순수성을 교란하는 것. 아니 오히려, 순수한 전달경로 따위는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한 전달 경로라는 것은 어의모순이 될 뿐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 따라서 데리다의 '고백', 탄생의 순간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인생을 투명한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그 작업 또한, 기억의 순수성, 즉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정보전달의 순수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데리다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미 '그라마톨로지에 대해서'의 제2부에서 루소의 '고백'을 참조해 자세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은 일역도 나와 있으므로, 상세한 설명은 할애하자. 6) 이후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데리다는, 경로의 말소가능성과 진정성의 이 커플링이 낳는 모순을 철학적으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폐의 예에 관한 한, 그 모순은 전자 머니의 출현에 의해서, 이미 현실에서도 의문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되짚어 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완전히 현실통화를 모방한(즉 분산처리 결제가 가능한) 전자 머니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장 곤란한 과제는, 먼저 그 희소성과 진정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면에 그 익명성을 유지한다는 2중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다. 희소성과 진정성의 유지는 위조나 카피의 방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원리적으로 개개의 전자 머니(디지털 정보의 괴(塊))에 암호화한 시리얼 넘버를 부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대폭으로 침해한다. 어떤 전자 머니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건네졌는가, 그 정보가 발행은행에 집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순은 극히 데리다적이다. 경로의 말소가능성이라는 것은 정의상 그 소행가능성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경로를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즉 전자 머니의 진정성을 늘리고자 하면 할수록 경로의 현실적 존재가 확인되어, 개개의 전자 머니는 익명성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게 된다. 이상의 사태는 이론적으로는, 경로의 말소가능성이 진정성을 유지하는, 즉 '화폐는 그 내역과는 무관계하게 받아들여진다.'라는 이념이 처음부터 일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태는 소행적으로, 전자 머니 이전의 분산처리형 화폐, 예를 들어 지폐에 있어서의 이런 종류의 모순이 하고 있었던 역할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지폐가 이미 일종의 버추얼 머니라는 점은 자주 지적된 대로지만, 사실 그 가상(버추얼) 진정성은, 제조번호에 의한 경로의 말소=소행이, 이념적 가능성에 의해서 항상 유지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언제나 이념상으로 가능할 리 없다는 모순에 의해 지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데리다가 '대리의 이론'이라고 부른 것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7) La dissémination,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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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3)

이제, 이 '할례고백'과 같이 전형적인 후기 스타일로 쓰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먼저 이러한 말=어휘가 가진 통상적인 함의를 괄호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치부터 검토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먼저 인용한 여러 곳에서, ‘고백 confession’, ‘할례 circoncision’의 양자와 '할례고백 circonfession'과의 대치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오리지널적인 이야기=자기사(史)를 날조하고 강화하는 고백 및 할례의 제도는, '가족'적이며 '진실'을 보증한다고 데리다는 이야기한다. 그 제도에서는 나=데리다는 탄생의 순간부터 어떤 동일성을 각인되어, 아무리 여러 가지 인격상의 변천을 이뤘다하더라도 그 본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고유명의 문제에 직결되고 있다. 성질이 아무리 변했더라도 '나는 나다'라는 점, 그것은 확정기술의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단독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할례고백'을 시작한 것은, 그 단독성을 교란하는 '過巻き', 소위 유령의 목소리가 있는가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서는, 할례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써의 매킨토시, 즉 컴퓨터=정보기계에 대한 언급이 행해지고 있다. 인용부분만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실은 이 '할례고백' 전체를 통해서, 펜과 매킨토시의 대치는 고백=할례와 할례고백과의 대치에 병행하고 있다. 컴퓨터로 쓰지 않는 사람들은, 할례고백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기서는 말하자면, 기억(상기, 아르시브)의 펜적 형태와 매킨토시적 형태가 대치하게 된다. 한편으로 '고백', '할례', '진리', '가족', '펜'이라는 용어. 그리고 다른편으로 '할례고백', '반복가능 itérable', '매킨토시 셋 le bloe Macintosh'라는 은유군……. 그렇다면, 은유의 이 계열과 대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을 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할례고백' 이외의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되풀이 해 온 것처럼,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는 상호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해독하는 축의 하나로써, 이하 우리들은 '우편 poste'의 은유를 선택하도록 하자. 그 선택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편적 은유는 극히 초기부터 최근까지, 데리다의 많은 텍스트에서 일관되게 나타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최초 저작, "'기하학의 기원' 서설"에서 이미 그 은유는 나타나고 있다.(4) 후설은 기하학적 이념이 역사적 전승(탈레스가 발견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전하고, 또 누군가가 전하고...) 위에서 성립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원격 커뮤니케이션으로의 우편과 서간'이 지(知)의 구성에 대해서 하는 역할의 고찰, 이후 데리다가 사용하는 술어로 말하면, '그라마톨로지'의 고찰에 일보 전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면 후설은 전승의 불확정성을 없애버렸다. 데리다가 후설의 '초월론적 역사'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이미 검토한 것처럼 바로 그 양의성에 있어서다. 또, 같이 앞 장에서 다룬 논문 '서명 사건 콘텍스트'를 봐도 좋다. 어떤 발화가 문자 그대로인가 수사적인 것인가, 콘스터티브한 것인가 퍼포머티브한 것인가, 즉 '정상'인 것인가 '기생적'인 것인가, 그 구별을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데리다는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그 때 들고 나온 것은 수취인이 죽인 편지의 예였다.(5) 그리고 또 데리다는 80년의 '엽서'를 필두로, 문자 그대로 우편이나 텔레미디어를 테마로 한 텍스트를 다수 발표하고 있다. 우리들이 본 장에서 이후 읽게 되는 논문 '真理の配達人(진리의 배달인)'은, 이 저작에 포함되어 있다. 우편적 은유에 갖다 붙여서 정리하면, ‘에크리튀르’는 결국, 정보의 불가변적인 동시에 불완전한 매개로 생각될 것이다. 정보의 전달이 반드시 무엇인가의 매개(미디어)를 필요로 하는 이상,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자신이 발신했던 정보가 잘못된 곳에 전해진다든지, 그 일부 혹은 전부가 도착하지 않는다든지, 거꾸로 자신이 받고 있는 정보가 실은 기록된 발신인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내진 것이었다든지, 그런 사고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데리다가 강하게 비판하는 ‘현전의 사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사고를 최종적으로 제어가능하다고 보는 사고법을 의미하고 있다. 역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데리다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그런 종류의 사고 가능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믿을 수 없는 우편제도’라고 말해도 좋다. 4) L'origine de géométrie, pp.36-37. 일역 47-49항 5) Marges, p.375. 논문 일역 2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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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2)

1-a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89년부터 90년에 걸쳐 기록된 텍스트 ‘할례고백(割禮告白 Circonfession)에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만약 이제 와서 하나의 할례(Circonfession) [......]가 내 입술의 경계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만약 내 고백(Confession)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하게 하는 진리를 핥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속죄함 없이, 자신의 이 망연자실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에, [......] 그렇다면 나는 이 過巻き를 벗어날 것이기에, 過巻き, 그것은 진실이라는 것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는 한 고백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모든 형상과 모든 묘선(描線)이 부과하는 할례의 경험인 것이다, 고명(古名) 또는 남유(濫喩), 그러나 고백 혹은 할례라는 의식은 서로 닮았음이 분명하다, 가족에 속함으로써, 즉 장르=종에 속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나의 할례고백은 시작한다, 매킨토시 셋 안에서 층화된 장소에서, 상기(想起)적으로 반복=복제 가능한 동시에 상처 입기 쉬운 구조, double-sided/double density, 양면 트랙의 플로피 디스크, [......] 그 어리석은 자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는 에크리튀르를 쓸모없게 한다, ‘상사(원문은 曹長) 펜’ 을 가진 선량한 할머니를, 친적(親的)인 에크리튀르를, 내 아버지의 펜, 내 어머니의 펜을 쓸모없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분신 혹은 아르시브(archive)의 문제를 규제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이브함, 그것은 그들이 컴퓨터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 이 텍스트는 91년, 제프리 베닝턴의 텍스트 ‘데리다베이스’와 같이, Seuil사의 ‘동시대인’ 시리즈 중 한권 ‘자끄 데리다’로서 출판된다. 동 시리즈는, 그 밖에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피에르 크로소우스키(Pierre Klossowski)’ 등을 담은 사상가, 작가의 해설서 시리즈이고, 본래는 그 책에서도 데리다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손쉬운 해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데리다와 베닝턴은, 다음과 같은 복잡한 전략을 세운다. 먼저 베닝턴의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교육적으로, 데리다의 작업을 가능한 만큼 도식화한다. 이것은 그의 전기적 정보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기호', '증여', '무의식'이라는 31개의 키워드를 제시한 장부터 무시간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데리다베이스'라는 타이틀은 '데이터베이스'와의 주락(酒落)이 되고 있다). 반면 데리다는 바로 그 도식을 해체하기 위해, 병행해서 기묘한 자전적 텍스트를 집필한다. 그 텍스트는 59개의 단장(斷章)으로 구성되고, 하나의 단장 안에서는 마침표 없이 문장이 이어진다. 베닝턴에 의한 키워드화에 저항하기 위해 여기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유가 빈번하게 나오고, 복잡한 구문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들 두 텍스트는 같은 쪽에서, 위 3분의 2를 '데리다베이스'가, 아래 나머지를 '할례고백'이 차지하는 형태로 인쇄된다. 도식적인 사고와 은유적인 연상관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병렬되고 있는 이 텍스트는, 이후 말하는 '탈구축'의 2가지 면의 관계를 응축하고 있다. 가운데 인용 부분은 번역이 좀 어색하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 듯..-_-; 그리고 過巻き는 적당한 말을 모르겠음.. 누가 알려줘~~ 3)“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pp.12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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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1)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의해 둔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그 변화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데리다는 형식화의 끝에서 ‘텍스트의 장난’을 보았다고, 그리고 철학의 초월론적 프로그램을 해체해서 그것을 ‘실천’으로 해소시켜 버렸다고 생각되고 있다. 괴델적 결정불가능성의 폭로 이후에, ‘철학’에는 이제 텍스트 공간을 헤엄쳐 나가는 것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만약 이 이해가 올바르다고 하면, 우리들은 더 이상 데리다를 읽을 필요는 없다. 보다 정확하게는 읽어야할만한 것이 없다. 텍스트 공간 그 자체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間 텍스트성’이나 ‘저자성(著者性)의 탈구축’이라고 하는 술어에 따른 그 신비화는,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세속적 욕망이나 이데올로기를 감추는 것으로써밖에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리다의 텍스트는 그런 역할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70년대에 시작한 그의 ‘기묘한’ 텍스트 실천은, 이미 앞 장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많은 독자가 꺼리도록 만들었고, 다른 편으로는 데리다 특유의 스타일과 어휘에 매료된 연구자집단, 소위 ‘데리다 파’를 강력히 조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데리다 파의 제도적 영야(領野)에 있어서 ‘탈구축적인’ 작업 자체는 대량으로 생산되지만,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고 어떤 텍스트를 탈구축하지 않는, 그 선택에 깃든 욕망을 문제로 삼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은, 데리다가 유럽의 전통적 텍스트만을 읽는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굳이 소박하게 물었던 사이드가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이 이하에서 읽으려고 시도하는 데리다는, 그런 데리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가라타니가 읽었던 데리다와도 다르다. 앞 장의 말미에서 우리들은 2가지의 의문을 제시했다. 되풀이 해보면 그것은, (i) 데리다가 제기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고유명론, 즉 ‘유령’론이라는 함은 어떤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ii) 그 고유명을 파악하는 방법은 데리다 자신의 텍스트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라는 두 가지의 물음이었다. 본 장에서는 후기 데리다의 작업을 형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으로써,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이론적 지형을 정리한다. 다시 한 번 확인해두지만, 여기서 ‘기묘함’이라고 불리는 데리다의 특징은, 결코 그 개인의 철학적 자질이나 시대적 배경(텔 켈 파의 영향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거기서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론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후기의 데리다는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괴델=가라타니적인 ‘형식화’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또 다른 구조, 70년대의 그가 때때로 ‘긴밀 구조 structure’라고 부르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2) 그리고 그가 생산했던 텍스트의 성질은, 그 구조로부터 역시 이론적으로 요청된다고 추측된다. 우리들은 이후 다시 가라타니를 다루게 될 것이다. 형식화의 제 문제가 가라타니에게 ‘전회(轉回)’를 강요했다고 한다면, 데리다에게는 무엇을 강요한 것인가 --- 본 장의 문제를 극히 단순히 그렇게 정식화한다고 해도,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2) cf. ex. La vérité en peinture, Flammarion (collection ⟪Champs⟫), 1978, p.38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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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0)

그러고 보니 웹상에서 방점 찍을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그 밖에도 이탤릭체라든지, 진한 글씨체 같은거... 귀찮으니.. 위의 잡다한 효과들은 한글파일이나 PDF로 만들었을 때 확인하길..-_-; 제2장 두 개의 편지, 두 개의 탈구축 형식화의 제 문제에 대해서는 이하, 가라타니 코진이 80년대 전반에 행했던 일련의 작업, '내성과 소행(內省と遡行)', '隱喩としての建築(은유로서의 건축)', '言語. 數. 貨幣(언어. 수. 화폐)'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자. 따라서 여기서는, 이른바 '탈구축'이 '형식화의 자괴(自壞)' 운동 그 자체, 즉, 어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 그 내재적 역설로 도달하는 사고의 운동이라는 것을 확인해 둔다. 가라타니가 밝힌 것처럼, 그 운동은 형식적으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다. 실제 앞 장에서도 다룬 것처럼, 드 만에 따르면 '탈구축'이라는 것은, 텍스트를 오브젝트 레벨(콘스터티브)로 읽는가, 메타레벨(퍼포머티브)로 읽는가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정불가능성을 이용해서 텍스트의 최종적인 의미를 공중에 매달아 두는 전략 밖에는 없다. 그리고 '탈구축'은 그 결정불가능성을 통해서야 말로, 텍스트의 개방성이나 타자성을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라타니에 따르면, 데리다의 작업은 결국, 형식화를 밀고나감으로써 부정적(네거티브)으로 '외부'를 출현시키는 이런저런 운동의 한 변주로 해석된다. 그는 85년의 텍스트 '轉回のための八章(전회를 위한 8장)'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철학이 '내성'에 시작된다고 하면, 현상학은 그것을 미저화(微低化)하고 있다. 데리다가 만난 것은, 우리들이 거기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지만, 또한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저 패러독스이다. 그는, 하이데거처럼, "철학" 이전의 사고로 귀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철학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반전시켜 가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 데리다는, 현상학에 있어서의 명증성이 '자신에 대한 현전', 즉,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음성은 의식이 있다>>('聲と現象(음성과 현상)'). 이것은, 서구에 있어서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읽혀져 버렸지만, 그는, 단순히 철학 또는 현상학이, 배우는=듣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그런 태도로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현전'에 앞장서는 흔적 없이 차연의 근원성으로 소행한다. <<이런 흔적은, 현상학적 근원성 그 자체 이상으로 <근원적>이다 --- 만약 우리들이 <근원적>이라는 이 말을, 모순없이 보지하는 것이 가능하고, 다시 그것을 소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음성과 현상). 다시 소거되는 것이라고 해도, 이 근원적인 차연은, 우리들을 또다시 '신비주의'로 쫓아 내는 것이 된다. 데리다는, '초월론적인 것은 차연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때, 차연이 초월화되는 것이다, 라고 해도 상관없다.(1) 가라타니는 여기서, 하나의 주체(주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 일반을 '내성'이라고 명지하고 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을 자괴시키는 것으로 근원적 차연을 발견하는 데리다의 방법은, 최종적으로는 차이의 신비화. 초월화로밖에 귀결될 수 없다. 본 장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가라타니의 이 비판은 일면으로는 완전하게 올바르다. 실제, 후설과 소쉬르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한 데리다가, 자신의 작업이 갖는 가라타니적 의의를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데리다론은 가라타니의 이 일절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1) '內省と遡行' 講談社學術文庫, 88년, 293-29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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