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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들 청춘에 얼마든지 머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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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9.03.13 제751호]

[레드 기획] 스무 살 먹은 기형도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그의 시집을 ‘초침 부러진 여름밤’처럼 암송하는 사람들

 

신윤동욱 기자

3월이면 그리운 남자

 

 

 기형도, 3월의 사나이.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뒤 원고뭉치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세상에 나왔다.

 

 
 
» 기형도, 3월의 사나이.
 
 
 

기형도의 책들도 3월에 세상에 왔다. 1989년 3월에 발간된 시집에 이어 1주기 즈음인 1990년 3월엔 그의 여행기·일기·단상 등을 모은 <기형도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이 나왔고, 10주기인 1999년 3월엔 시인의 시·산문·소설 등을 한데 모은 <기형도 전집>이 발간됐다. 그리고 2009년 3월3일엔 기형도 20주기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가 나왔다. 여기엔 유고시집이 나온 뒤에 등단한 ‘포스트 기형도’ 세대 시인인 심보선, 김행숙, 김경주 등의 대담이 실렸다. 조병준, 김훈 같은 생전에 지인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산문도 담겼다. 독자들은 그의 시에서 우울을 읽지만, 지인들은 그를 명랑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여기서 우리는 저마다의 ‘기형도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 나라의 달”(‘비가 2’)

올해로 지천명. 1960년생인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 나이로 쉰 살이 되었다. 어느새 스무 해. 1989년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의 달”이 된 지 3월7일로 20년이 되었다. 그가 숨지고 두 달여 지나서 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도 그렇게 스무 살을 먹었다. 그는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비가 2’)이라고 단정했지만, 떠난 사람은 떠나지 않은 시로 여기에 남았다. 그리고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비가 2’)가 되어 스무 해 동안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비가 2’)을 밝혔다. 아니 밝히고 있다.

 

한 해에 1만부, 베스트에서 내려오지 않아

 

  

기형도 20주기를 맞아도 여전히 ‘기형도 현상’은 그치지 않는다. 20년에 24만 부.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판매된 숫자다. 아직도 한 해에 1만 부 이상이 팔리는 그의 시집은 오늘도 대형서점 시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기형도 시인은 오래전에 숨졌지만, ‘기형도 세대’는 아직도 태어나고 있다. 마흔의 여성에서 스무 살 청년까지, 그들의 가슴에 ‘내 청춘의 영원한 기형도’가 남았다. 그의 “못생긴 입술”(‘그 집 앞’)은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엄마 걱정’)으로 찾아와 눈물을 닦아주었고, 때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진눈깨비’)를 했던 어깨를 보듬어주었고, 때때로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질투는 나의 힘’)는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스무 해 동안에 누군가의 인생 굽이에서 그는 불현듯 위로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미안한 희망’은 벌써 스무 해가 흘렀다. 이주연(41)씨는 1989년 여름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기형도 시인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한 구절을 듣고 “몸은 소금기둥처럼 굳었고, 머리는 진공처럼 비었다”고 돌이켰다. 다음날 아침에 서둘려 서점에 달려가 <입 속의 검은 잎>을 품 안에 넣었다. 어느새 20대 청춘은 40대 중년이 되었다. 20년을 간직해온 시집에는 회색 연필, 검은 볼펜, 초록 펜으로 그은 밑줄이 겹치고 겹쳐 세월의 더께를 더했다. 10년 전 그는 기형도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나만이 알고 있는 내 안의 상처들을 조심스레 두드리고 핥아준다”고 썼다. 또다시 10년, 여전히 그는 “옷 입는 취향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시에 대한 느낌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낡은 표지의 시집을 꺼내볼 때마다 20대 초반의 나이로 돌아간다.

 

 
 
»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를 이틀 앞둔 3월5일, 서울 홍익대 앞 이리까페에서 ‘기형도 시를 읽는 밤’ 행사가 열렸다. 음악가이기도 한 성기완 시인은 이날 행사의 사회를 보았고, 기형도의 시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 곡을 붙여 불렀다. 소설가 성석제, 시인 이문재씨 등 고인의 지인들은 고인의 시를 낭독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그도 지나온 스무 해를 돌아보며 시인처럼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쥐불놀이-겨울 版畵 5’)라고 탄식했다. 그의 추억도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클래식 동아리 연주회에 선 남자친구에게 꽃다발 대신 시인의 시집을 건넸다가 “왜 나한테 이런 시집을 줬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른을 넘어서까지 치렀던 기나긴 사춘기의 홍역도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붙잡고 견뎠다. 그리고 불현듯 갔던 기형도 순례길. 2003년께 한번은 시인이 숨졌던 서울 낙원동 파고다극장에 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만 배회했다. 그동안 누군가 붙잡고 시인의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주변엔 공감할 사람이 없었다. 20년 동안의 고독을 비로소 올해 풀었다. 지난 3월5일 서울 홍익대 앞 이리까페에서 열린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서 영혼의 동지들을 만났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출판사에 다니는 윤김은주(36)씨도 기형도를 “퇴폐적으로 살고 싶었던 20대에 처음 만났던 시인”으로 기억한다. 그도 혼자만의 방에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빈집’)를 따라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는 “그렇게 조로하고 싶었던 철부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불로(不老)할 시인을 동경했다”고 돌이켰다. 물론 연애의 추억도 얽혔다. 서른 살 무렵에 만났던 애인이 유난히 기형도를 좋아해 시를 밤마다 전화로 읽어주거나 메일로 보내줬다. 그는 “‘엄마 걱정’을 적어 보내면서 가족 이야기를 한다든지, 기형도 시인의 일기에 나오는 ‘나에게 파카를 벗어준 머리가 길고 담배를 즐겨 피우던 키 큰 여자’를 인용하며 말을 건네는 식이었다”고 돌이켰다.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시인의 시는 그의 삶에 스며들어 의미가 깊어졌다.

 

우울은 맡기고 ‘출근의 힘’을 얻다

 

 

김효정(32)씨는 23살에 기형도를 만나 이제는 32살이 되었다. 2000년 서점에서 본 시집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암호 같은 ‘기형도’라는 이름이나 표지의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를 보는 순간, 손은 이미 시집을 뒤적이고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혼돈기였던 23살부터 28살까지 그의 시를 끼고 살았다”고 돌이켰다. 그 무렵에 그는 인디밴드 멤버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했다. 어떤 클럽 주인은 “그런 음악은 벽 보고 해! 사람들이 아는 카피곡도 하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더구나 음악뿐 아니라 말로도 누군가와 통하지 않던 때였다. 그는 최승자 시인의 ‘내 청춘의 영원한’처럼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었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오직 기형도의 시가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청춘의 열병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에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만 되새겼지 바로 뒤에 왔던 귀절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를 놓쳤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형도 시집에 먼지가 앉을 무렵에 그의 삶도 정돈돼갔다. 그는 “결국엔 기형도 시인의 ‘변화하지 않는 건 변화뿐’이라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32살 최현찬씨도 시간이 갈수록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는 눈이 변했다. 2006년 스물아홉의 여름, 그의 회사 책상엔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가을에 1’)가 붙어 있었다. 당시에 그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요즘엔 보편적인 삶을 노래한 구절에 눈길이 간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 2’). 그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서”라고 말했다.

 

그의 우울은 나의 우울을 대신하는 무엇이었다. 김소영(33)씨는 기형도의 시에서 ‘출근할 힘’을 얻었다. 김씨는 대학 새내기 시절에 기형도를 읽었지만 오히려 졸업할 무렵에 기형도를 재발견했다.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그도 남들처럼 등 떠밀려 취업했다. 대학문을 나서며 이미 청춘은 끝나버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진눈깨비’)를 되뇌고 되뇌었다. 그에게 <입 속의 검은 잎>은 “직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일하고 싸우고 술 마시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와 마음껏 고독하고 싶어서 읽은 시집”이었다. 시인의 언어는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오래된 書籍’). 이런 환멸과 체념을 담은 구절이 오히려 다음날 출근할 힘을 주었다. 퇴근길에도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진눈깨비’)를 떠올리며 묘한 위로를 받았다. 그는 “누군가 이렇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위안을 받은 시집이 서점에서 눈에 보이면 안쓰러워 한권한권 사모으고 선물했다. 그래서 집에, 회사에, 가방에 한 권씩 세 권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 기형도 시인에 관련된 책들은 그의 기일이 있는 3월에 모두 나왔다. 20주기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0주기에 나온 <기형도 전집>(왼쪽부터). 바탕에 깔린 것은 기형도 시인의 육필원고.
 
 
 

‘거리의 상상력’이 닿은 시민기자

 

 

그리고 문득문득 거리에서 기형도를 마주친다. <입 속의 검은 잎> 뒷면의 시작 메모는 시인의 시만큼 애송됐다. 김소영씨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종로에서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는 시인의 메모를 떠올렸다. 때로는 내리는 눈을 보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졌지만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결국엔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눈발과 같은 시인의 운명을 생각했다. 오래된 거리를 걷기를 좋아하는 신영수(28)씨도 곳곳에서 기형도 시인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는 법학도란 ‘형용모순’을 달고 살았던 그는 2000년대 중반 두어 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살았다. 그는 “신림동 골방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시가 큰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이따금 동네 거리를 거닐며 신림중학교를 졸업한 시인의 이력도 떠올렸다. 지금은 기형도 시인이 일했던 <중앙일보> 근처의 회사에 다녀 공간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오후 4시의 희망’)고 시인이 노래한 곳에서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기억할 만한 지나침’)가 쌓인 대기업 종합상사 법무팀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기형도를 기억하고 문학을 꿈꾼다.

 

오승주씨는 2008년 촛불집회 거리에서 기형도 시인을 생각했다. 오씨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촛불집회 기사를 썼다. 촛불집회가 계속될수록 기사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 보였고 그것을 문학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시인의 시작 메모.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가 ‘거리의 상상력’을 위해 지불한 고통이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기형도의 시를 처음 만난 시절도 떠올랐다. 1997년 대학에 들어간 오씨는 이른바 IMF 학번이다. 그는 “토익 서적이 도서관을 점령했고,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과는 맞지 않았으며, 실직 가장의 자식들이 대학 등록금이 없어 군대에 간 시절이었다”며 “심사가 복잡하고 회의가 밀려들던 당시 분위기와 기형도 시의 정서가 맞았다”고 돌이켰다.

한승미(30)씨가 기형도 시를 가슴으로 읽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IMF 한파는 대학으로 가는 길마저 막았다. 그는 대입에 실패했지만 재수를 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건설현장 소장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일감이 떨어졌다. 집안 형편을 원망하며 6개월을 방황했다. 그래서 유년의 가난을 시에 담아낸 ‘위험한 家系·1969’ 같은 시가 마음을 울렸다. 그는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나의 어려운 상황을 시인이 대신해 말해줘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기형도는 문학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기형도에서 황동규를 거쳐 랭보까지, 지금도 틈틈이 시를 찾아 읽는다. 나중엔 대학에 들어가 문학 수업도 들었다.

 

스무 살 청년의 눈매 ‘살아 있는’ 친구

 

 

그처럼 ‘위험한 家系·1969’의 첫 줄,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같은 구절을 읽으며 가족의 가난과 유년의 추억을 떠올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기형도 시를 읽으며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엄마 걱정’)를 떠올리고, 해진 빨간 내복을 입은 누이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 이들이 적잖다. 이정희(26)씨도 “시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의 풍경은 제가 살았던 그곳과 닮았고, 바람병을 앓으신 아버지는 젊은 날에 쓰러진 내 언니의 이야기였다”고 돌이켰다. 또 한승미씨는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대학시절’)고 썼던, 고뇌하는 80년대 대학생 기형도를 2008년에 이해했다. 한씨는 지난해 난생처음 집회에 나갔다. 그는 “갈수록 촛불집회에 대한 전경들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며 “시대에 몸을 던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경계인으로 있었던 시인의 고민이 절절히 와닿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마음의 겨울에 한씨는 기형도를 읽는다. 한씨는 “기형도 10주기 무렵엔 IMF로 어려웠고, 20주기엔 또다시 경제위기가 닥쳤다”며 “이렇게 어려움이 닥치면 새삼 그의 시집에 손길이 간다”고 말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문학청년 기다빈씨에게도 기형도는 각별하다. 기씨는 중학교 국어 참고서에서 ‘엄마 걱정’을 처음 읽었다. 그는 “성이 같다는 별것 아닌 이유로 시집을 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커가면서 기형도 시의 의미도 달라졌다. 그는 “처음엔 그냥 멋있었고, 문학상을 타면서 글쓰기에 자신이 붙었던 고교 2~3학년엔 ‘포도밭 묘지 1’ 같은 새로운 형식의 산문시가 좋았다”며 “지금은 시가 솔직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의 아픔을 드러내는 솔직함, 그러나 엄살이 아닌”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형도 시를 읽으면 “술자리에 그가 옆에 앉아 단둘이 얘기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스무 해 전에 천국으로 떠났지만 그의 시는 오늘도 스무 살 청년의 “눈매가 살아 있는” 친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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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길지만

결론은

그의 시와 함께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

나의 본과 1학년 때처럼

다시 입속의 검은 잎이 읽고 싶군  지선이도 보고싶고  기숙사 1층 휴게실의 술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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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2 21:01 2009/03/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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