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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통과 위기에 있습니다

한미FTA 통과 위기에 있습니다

조태근 기자가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민중의소리' 경제부 조태근 입니다.

연일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이제 완연한 여름이 온 것 같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요구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 이후 거의 3년 여 만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반값 등록금을 요구했습니다.

반값 등록금 못지않게 여러 중요한 이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불거졌습니다. 주한미군 고엽제 매립 의혹이나 저축은행 게이트, 또 대검 중수부 폐지와 같은 검찰 개혁 이슈들이 그것입니다.

오늘 드릴 얘기는 이런 이슈 보다는 상대적으로 주목받고 있진 못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한미FTA에 관한 것입니다.

2006년 1월 18일 밤 10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5개 방송을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된 신년연설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며 "조율이 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타결까지 약 400여 일 동안 지속된 한미FTA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의 연설 일주일 전인 같은 달 13일에는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뒤부터 전면 수입이 금지된 미국산 쇠고기(30개월 미만 월령)의 수입을 재개키로 했습니다. 연설 일주일 뒤인 26일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축소했고, 수입 자동차에 대한 배기가스 기준 적용을 2년간 유예하고, 지나치게 비싼 약값을 낮추려는 보건복지부의 약값 적정화 방안 시행도 미뤄졌습니다. 이른바 한미FTA협상을 위한 '4대 선결조건'입니다.

워싱턴에서 그해 6월부터 시작된 협상은 7월 2차 협상에 이어 9월, 10월, 12월 등 거의 매월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벌어졌습니다. 2007년 들어서도 1월 부터 3월까지 세 차례의 협상이 벌어졌고, 특히 3월에는 타결을 염두에 둔 부문별 고위급 회담과 장관급 회담이 집중적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협상 개시 선언 14개월만인 2007년 4월 2일 한미FTA협상이 타결됐습니다. 두 달 뒤인 6월30일 양국은 협정문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4월 미국에 30개월 미만으로 제한돼 있던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키로 했습니다.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첫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한미 쇠고기수입위생조건을 고쳐 광우병 위험 때문에 금지됐던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을 전면 허용하고,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수입금지조처를 취할 수 없도록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5월부터 촛불시위가 벌어져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에 대한 국민적 반대에 부딪히자 이명박 대통령은 재협상을 지시했고, 한.미 양국은 6월 재협상을 통해 "미국 쇠고기에 대한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수입을 제한"키로 합의했습니다. 국회에서는 지난 2009년 4월 22일 한나라당은 단독으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지난해 6월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FTA재협상을 요구했고, 지난해 12월 한국이 자동차 부문에서 대폭 양보함에 따라 재협상이 타결됐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각각 올해 여름 양국 의회의 비준안 통과를 목표로 막바지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는 늦어도 다음달 초까지 비준안 제출을 위해 의회와 협의중입니다. 미국은 협정 발효 뒤에는 추가로 한국의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시키겠다며 의회 내 일부 반대파들을 설득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명박 정부도 협정문 번역 오류로 철회했던 한미FTA 비준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했고, 한나라당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비준안 처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미FTA의 문제점은 이미 알려진 대로입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는 국내에 투자한 미국기업이 한국 정부.지자체의 법률.조례나 정책, 제도로 인해 손해를 보거나, 손해를 볼 것이 예상(기대이익.반사이익)되면 정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입니다. 정부.지자체 공공정책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조항입니다. 한미FTA 협정 내용을 위반하지 않았더라도 세금이나 보조금, 불공정거래 시정 조치 같은 상대국의 정책으로 기대하는 이익을 못 얻었다고 판단되면 일방적으로 해당 국가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비위반 제소' 조항과, 정부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관세철폐를 일시적으로 철회할 수 있는 무역 보복조치인 '스냅백' 조항도 대표적인 독소 조항입니다.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는 네거티브 방식의 개방으로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원인 중 하나인 월스트리트의 위험한 파생금융 상품이 들어올 수 있게 됐습니다. 지적재산권 부문에서는 특허가 살아있는 동안인 출원일로부터 20년에는 허가와 특허를 연계해 복제약 시판을 금지하는 '허가-특허' 연계 조항 때문에 국내 약값의 대폭 상승이 우려됩니다. 농축산업 부문에서는 모든 품목의 관세가 철폐돼 중장기적으로 한국 농축산업의 완전 붕괴가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위에서 언급된 모든 개방 조치들에 대해 한번 개방된 수준을 되돌릴 수 없도록 한 역진 방지조항(래칫 조항)때문에 한미 FTA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도 정부가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여기에 그나마 정부가 '이익의 균형'의 근거로 삼았던 자동차 부문에서도 지난해 재협상에서 미국이 요구한 대로 한국이 수출하는 자동차에 대한 관세 철폐 기한이 4년 뒤로 미뤄졌습니다.

한나라당은 이달 말 국회에서 공청회를 열어 피해대책을 논의하고,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비준안을 상정한 뒤 처리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미국에서도 다음주께 백악관이 한미FTA이행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분위기입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난 5월 한EU FTA비준안을 여당 단독으로 처리했습니다. 한미FTA도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을지 우려가 됩니다. 민주당은 여전히 강한 저지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고, 진보 정당들의 힘은 미약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민중의소리 조태근(taegun@vop.co.kr)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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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정부는 베트남을 그저 미국이 반정부 세력 소탕 작전을 돕기 위해 '고문단'을 파견한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어느 기자에게 "우리에게는 서른 개 이상의 베트남이 있다"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가 자신만만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쿠바 혁명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개발한, '진보를 위한 연합'이라고 이름 붙여진 라틴아메리카 안정화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는 듯했으며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볼리비아와 여타 지역의 게릴라 운동들도 모두 분쇄된 상태였다. 1960년대 중반에도 미국은 적시에 군대를 투입해 콩고의 반군이 친미 독재자 모부투의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았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대중 봉기 시도를 좌절시켰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미군이 개입할 필요조차 없었다.CIA의 도움을 받으며 수하르토 장군은 미수에 그친 좌파 장군들의 쿠데타를 빌미로 50만 명을 학살하고 제3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공산당을 분쇄했으며 독자 노선을 걷던 포퓰리스트 지도자 수카르노를 축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의 호언장담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베트남은 한국전쟁이 정리될 무렵인 1954년에 분단됐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보유하려 했지만 베트민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함으로써 프랑스의 시도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은 베트민이 베트남 북부만 통제하고 남부는 전국 선거를 치를 때까지과거에 프랑스 지배에 협력했던 자들이 통제하도록 놓아두라고 베트민을 설득했다. 프랑스의 전쟁 비용 대부분을 충당한 미국은 이제 남부에 수립된 정부를 지원하면서 약속했던 선거가 결코 치러지지 않도록 보장했다.

남부에서는 반정부 세력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다. 불교 승려들이 분신으로 항의를 표시했고 옛 베트민 투사들은 시골로 도망친 뒤 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머지않아 게릴라전이 곳곳으로 확산됐고 도시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았으며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게서 점점 더 많은 원조를 받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케네디 집권 초기에 4백 명이었던 베트남 파견 '고문'들은 그가 암살당할 무렵에는 1만 8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1965년에는 해병대가 다낭의 해군 기지에 상륙했고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미군 수가 3만 3천5백 명으로 증가해 그 해 말에는 21만 명에 달했다. 그동안 미 공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격 작전을 전개해, 남부와 북부를 가리지 않고 몇 날, 몇 주, 몇 년 동안 끊임없이 폭탄을 퍼부어댔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민족 해방 세력들이 싸움을 포기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한국전쟁과 달리 베트남전쟁은 정규군이 수행하는, 따라서 북측의 지배자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그 전쟁은 억압적인 정권에 맞선 자생적인 투쟁에서 비롯했으며,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민족 해방 운동의 선구자들로서 자신들의 이미지에 먹칠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그런 투쟁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미국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소모전에 말려들었다. 미군은 분단선 근처의 케산 지역에 전진 기지를 확보해 비싼 대가를 치러가며 해방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그 일대 농촌의 저항을 잠재우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기지를 버려야 했다. 미군은 도회지를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1968년 초 베트남의 음력 설날인 '테트'에 해방군이 감행한 기습 공격으로 거의 함락당할 뻔했다. 또한 미국은 솟구치는 베트남전쟁 비용 때문에 총 군비 지출이 30퍼센트 올라 미국 대자본이 이에 항의하는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자국 청년들이 전쟁의 공포와 징집에 반기를 들면서 미국 사회에 크나큰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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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EAN님의 [일관성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에 관련된 글.

EAN님이 추천해주신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작은 책은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고 대신 존 몰리뉴의 다른 저작을 찾았는데 바로 제가 찾고자 했던 내용이더군요.

두 권 모두 200페이지도 안되는 아주 얇은 책이지만 상당한 깊이가 있네요.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먼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라는 책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몇몇 쟁점들에 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까지는 문제되지 않으나 최소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우선과제로 두어야 하지 않느냐, 노동자가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라는 기준에 따라 정통성을 가늠하고 있다.

노선이 다를 뿐 우리의 목표는 어차피 같지 않느냐며 종파주의자라 몰아세우는 사람에게 "당신은 계급이 우선입니까, 민족이 우선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하지만 민족을 위해 맑시즘을 사용했다고 고백한 호치민을 나는 존경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이 계급과 민족을 동시에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건희가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와 하나로 뭉뚱그려질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폴 포트같은 사람과 함께 싸잡아 비난할 수 없도록 세밀하게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걷어내고 있다.

 

사회주의에 관심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솔직히 정작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복잡한 사회주의를 전부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애타는 갈증을 시원스레 해결한 기분이다.

문답형식으로 하나의 질문에 두 세 페이지 정도의 풀이로 된 구성인데 저자의 거침없는 통쾌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내공이 있는 분들이야 '뭐 이 정도쯤은 기본상식 아닌가?'하며 우습게 넘기시겠지만 나처럼 학습이 필요한 사람에겐 더없이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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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알리의 동영상

 

오, 이 말이 내 가슴에 그대로 꽂힌다.


나는 금메달을 강가에 던져버렸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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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과 혁명

작년인가 '우리 모두를 위한 비폭력 교과서'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정말 훌륭한 책이다. 꽤나 배울 점이 많았다. 여러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주된 요지는 비폭력주의를 실천하자면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뒤따르지만 '폭력에 대항해서 폭력으로 승리했다고 해도, 결국 같은 폭력에 의해 멸망한다. 비폭력주의야 말로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준다.' 혹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며, 사회의 존재 양태의 비폭력화가 더욱 중요하고, 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이어야 한다.'로 보인다.

우리 모두를 위한 비폭력 교과서


허나 몇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사회주의가 아닌 비폭력주의를 기반으로 했기에 어찌보면 비폭력주의자로서는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레닌이나 체 게바라마저도 '폭력에 의한 혁명 지도자로서의 영웅이므로 시대에 따라 평가가 바뀔 수 있다'나 '테러를 당하는 쪽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과 같은 폭력이 선행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만 '인민의 해방'이라든가 '혁명'을 위한 테러 역시 폭력행위일 수밖에 없고 테러에 의한 폭력은 새로운 폭력을 불러 일으키며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그러나 테러를 통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등이 그것이다.

 

일견 많은 진실을 내포한 말 같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넋 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만도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서로 경쟁시키는 (자본가는 링을 만들어 놓고 느긋하게 퍼져 앉아 대단한 자부심과 맥주캔을 양 손에들고 그 경쟁을 여유있게 구경하는) 지극히 구조적인 폭력적 체제이고 일반적으로 군대라는 폭력적인 조직과도 결합해 더 많은 이윤을 생산해 내는, 한마디로 폭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그런 폭력적인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법은 오직 혁명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폭력주의자의 입장에서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일단 비폭력주의가 점점 전파되어 가기 시작하면 지배계급의 마음까지 흔들어 결국 정치적 억압이나 문화적 소외, 실업, 빈곤 등의 구조적 폭력이 해결될거라 낙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겠지만 비폭력주의가 먹힐 가능성이 보이는 한계점은 너그럽게 봐줘도 중간계급까지이다.

 

그렇다면 폭력적이지 않은 혁명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물론 그런 혁명 방법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게 최선일 것이다.

허나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우리 노동자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그들은 소수이고 우리는 대다수라는 점이다.

우리의 혁명은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누르고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그림은 아주 쉽게 그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가 자신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고 영원히 이길 수 없을거라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는데 있다.


일단 혁명이 시작되면 노동자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생기리라 보지만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제도권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철저히 거세시켜 버리기에 노동계급의 혁명의 전망이 안개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계급에 대한 자부심과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사람 열외없이 단결한다면 고작 한줌밖에 안되는 자본가 계급 쯤이야 단숨에 엎고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요체는 노동계급의 대오각성이다. 혁명이 폭력적으로 진행될지 아니면 손쉽게 마무리될 지는 얼마나 많은 비율의 노동자가 혁명이라는 축제에 참가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자 세상을 원한다면 단결하고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미래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폭력주의자의 점잖은 타이름 쯤은 혁명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잠시 무시해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느 쪽이 진리에 가까운지 아직까지는 단정짓지 못하고 있다.

 


엔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 대중정당에서 최근에 당명을 바꾼 이념정당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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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할 자격

자기 전에 양치질 하면서 보려고 TV를 켰는데 BLACK WHITE 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웬 흑인 부부가 술집에 들어갔다.

내부의 손님들은 죄다 백인이었는데 다들 그 부부를 벌레보듯 쳐다봤다.

흑인 여성이 커피를 주문했는데 바텐더는 카드를 달라고 했다.

카드를 남편이 가지고 있는데 남편이 지금 주차장에 있다고 하니 카드를 주기 전까지 커피를 줄 수 없다며 걸인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 부부가 술집에 있는 동안 그 여성이 여러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다들 그다지 말을 받아주기 싫다는 태도였다.

그리곤 밖으로 나와 차에 탔는데 놀랍게도 그 부부는 백인이었고 흑인 분장을 한 것이었다.

단지 피부색과 가발의 차이밖에 없었는데 그 백인 술집에서 그 부부는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 프로를 보고나서 입에 거품을 문 채 깊이 생각했다.

내가 직접 다른 존재가 되어보지 않고서 그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혐오감조차 느끼고 있으면서도 실상 나는 과연 그들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나.

직접적으로 차별과 핍박을 받아보지도 않고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혹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과연 내가 그들과 연대할 자격이나 있는가.

가령 인도에 며칠 여행 갔다와서는 인도에 대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오해가 더 많이 쌓인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 아닐까?

그래서 상선약수가 명구인가 보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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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농장 집 아들

 

변호사가 된 사탕수수농장 집 아들이 있었어. 의원선거에 나갈 만큼 정치적인 야심이 뚜렷한 인간이었지. 마침내 선거에서 당선이 되어 의원이 될 찰나에 운 나쁘게도 쿠데타가 일어났어. 독재자는 선거를 없던 일로 돌려버렸지. 변호사는 결론을 내리기를, 독재자의 쿠데타에는 인민의 쿠데타! 허접한 총과 사제폭탄을 준비해 1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재자의 병영을 공격하는 미친 짓을 했지. 태반이 목숨을 잃었는데 억세게도 운 좋은 변호사는 살아서 법정에 끌려가게 되었어. 맙소사. 말 많은 변호사를 법정의 피고로 끌고 간 것이야. 변호사는 당연히 스스로 변론을 했어. 얼마나 장황한 자기변론문이었는지 여기서 일부라도 옮기려고 한다면 내가 미친놈일 것이야. 책 한 권 분량이라니까.

여하튼, "판사 방망이를 두드려. 맘대로 해라.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 카스트로의 자기변론문은 이렇게 끝나. 그런데 코미디이지. 정작 2년 뒤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를 사면한 것은 독재자 바티스타였어. 멕시코로 망명을 떠난 변호사는 애초에 뜻을 굽히지 않았어. 법전 대신 총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동지와 총을 모아 다시 쿠바로 돌아오는거야.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이 재수 없는 변호사의 무장투쟁을 권력욕의 소산으로 비난해도 좋아.

하지만 말이야. 똥통의 구더기만큼 우글거리는 주둥이로만 정의를 희롱할 줄 아는 변호사 놈들 중에서 그 어떤 놈이 총을 들었겠어? 그 어떤 변호사 놈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 잘난 변호사 간판을 집어던지고 총을 들었겠어? 그 어떤 변호사 놈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목숨을 걸고 지켰겠어? 1/10이나 절반의 정의는 불의일 뿐이야. 하나의 정의가 정의인 것이지.

 

-유재현 '느린 희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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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TA LA VICTORIA SIEMPRE!

 

피델,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른다네, 자네를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자네가 나에게 자네 그룹에 합류하기를 청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대비해 누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지를 미리 말했을 때, 이 가능성은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났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로 현실임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혁명을 할 때-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말일세.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에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오늘에는 이 모든 것들이 덜 극적으로 보이네.

우리가 더욱 성숙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나 또한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 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네. 이제 나는 자네와, 동지들과, 그리고 이제는 나의 것이기도 한 자네의 인민들과 작별하려 하네. 나는 내가 점하고 있는 당의 직책과 장관직과 사령관의 직위, 그리고 쿠바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네.

이제 나와 쿠바를 잇는 어떤 법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네.

오직 공문서 따위로는 파괴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관계만이 나에게 남을 것이네.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건대,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또 한결같이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다만, 하나 내 잘못이라면 시에라 마에스트라 시절 처음부터 자네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자네의 지도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기질을 좀 더 빨리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 나는 경이로운 세월을 살았고, 미사일 위기가 계속되는 최근에까지 자네 곁에서 우리 인민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네. 이런 경우에는 어떤 국가원수도 자네만큼 영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터. 보고, 사고하고, 위험과 원칙을 형량하는 자네 뒤를 주저 없이 따른 것이 자랑스럽네.

하지만, 지구상의 다른 땅들이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 쿠바의 영도자로 남을 자네의 책임이 자네로 하여금 포기하게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것을 나는 하려 하네. 이제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내가 기쁨과 고통이 교직 하는 가운데 떠난다는 걸 이해해 주게.

나는 여기에 건설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희망을, 내가 사랑하는 자들의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남겨두고 가네. 나를 아들로 받아준 인민의 곁을 떠나네. 내 정신의 한쪽을 남겨두겠네. 새로운 전장에서 자네가 나에게 심어준 믿음을 간직하겠네. 우리 인민의 혁명의식과 내 의무의 가장 고결한 부분을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할 것이네. 내 아픔을 쉽게 치유하고 위로하는 바는 이것뿐일세.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쿠바에 대한 모든 책임을 벗고, 오직 이상형의 쿠바만을 기억하겠네. 그래서 다른 하늘 아래 내 최후의 시간이 도래한다면, 내 마지막 생각은 쿠바 인민들에게, 특히 자네에게 향할걸세. 자네의 가르침과 자네의 모범에 감사하네. 내 행동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충실하게 간직하려 노력하겠네. 나는 늘 우리 혁명의 대외관계에 집착하곤 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쿠바 혁명가의 책임을 완수할 것이며 또 그렇게 행동할 것이네. 나는 나의 아이들과 아내에게 어떤 물질도 남겨주지 않을 터.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들이 먹고, 교육받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가 줄 것이기 때문일세.

자네에게, 인민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어찌 말로써 다하겠는가.

종이만 더럽힐 뿐이겠지.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

뜨거운 혁명의 열기로 얼싸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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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의 고공크레인에서의 투신사건)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 2003년 10월 22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의 오프닝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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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넌과 요코

 

1971년 1월 21일 좌파신문 <붉은 두더지>(Red Mole) 편집자 로빈 블랙번과 타리크 알리가 존 레넌과 오노 요코를 인터뷰하다

 

블랙번: 요코씨, 당신 앨범은 아방가르드 현대음악을 록과 결합시킨 것같은데, 그걸 들으면서 든 생각을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은 열차 등 모든 소리를 음악적 패턴으로 통합시키는데, 이건 일상생활에 대한 미학적 척도를 요구하고, 예술이 박물관과 갤러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요?

 

요코: 맞았어요. 저는 사람들이 억압에 벗어나 뭔가 함께 일할 거리를 갖고 뭔가를 만들어내도록 하고 싶어요. 그들은 자신을 창조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되요. 제 책[자몽]에서 한 거처럼 사람들이 뭔가 하도록 함으로써 사물을 개방적으로 만드는 이유죠. 기본적으로 세상에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요. 창조할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과, 창조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죠. 기성체제는 아무 책임도 못지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하죠.

 

블랙번: 노동자 통제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데…

 

레넌: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런 걸 시도하지 않았나요? 유고인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유로웠죠. 거기에 가서 자주관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고 싶어.

 

알리: 물론, 그랬죠. 유고인들은 스탈린주의적 패턴과 결별하려고 노력했죠. 그러나 무제한적 노동자통제를 허용하는 대신에, 강력한 정치적 관료주의를 부가했죠. 그래서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질식시키는 경향도 있었고, 지역 간 새로운 불평들을 낳는 시장 메카니즘으로 체제 전체를 규제했죠.

 

레넌: 모든 혁명은 개인숭배로 끝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중국도 대부를 필요로 한 것 같아요. 저는 쿠바에서도 체와 피델에 대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해요. 서구식 공산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에 대해 대부와 같은 가상적 이미지를 창조하겠죠.

 

블랙번: 그것 참 괜찮은 생각이네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영웅이 된다. 만약 그게 새로운 자위적 환상이 아니라면, 진정한 노동자 권력이 있다면, 그렇겠죠. 만약 자본가나 관료가 당신의 생활을 경영한다면, 환상을 보상할 필요가 있죠.

 

요코: 사람들은 자신을 믿어야 해요.

 

알리: 그게 핵심이죠. 노동자계급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이건 선전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노동자들이 움직여서, 자신들의 공장을 접수하고 자본가들에게 꺼지라고 말해야 하죠. 이건 바로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일이죠.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을 느끼기 시작했던 거죠.

 

레넌: 하지만 공산당은 거기에 못 미쳤잖아요?

 

블랙번: 그랬죠. 1천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는데, 프랑스 공산당은 파리 중심가를 점령한 거대한 시위대를 모든 정부청사와 기관에 대한 대대적 점거로 이끌지 못했고, 드골을 코뮌이나 원래의 소비에트 같은 새로운 민중권력기관으로 대체하지 못했죠. 그랬다면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겠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그걸 두려워했죠.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주도력을 발휘하도록 고무하는 대신에 상층에서의 교섭을 선호했던 거죠…

 

레넌: 대단했죠. 하지만 알다시피 거기에도 문제는 있어요. 모든 혁명은 피델이나 맑스, 또는 레닌 같은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에게 파고 들어갈 수 있을 때 일어나죠. 지식인들은 상당한 대중을 한데 모으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죠. 그들은 아직 각성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자가용과 텔레비전이 대답이라고 믿고 있죠. 당신들이 좌파 학생들이 노동자들에게 말하고, 학생들이 <붉은 두더지>에 참여하도록 해야 하죠.

 

알리: 맞는 말이예요. 우리는 그런 노력을 해왔고 앞으로 더 노력해야죠. 이번에 정부가 도입하려는 노사관계법안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있죠…

 

레넌: 그 법안이 제대로 적용될 것 같진 않아요.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노동자들이 거기에 협력하지 않을 거예요. 윌슨정부가 커다란 실망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히스정부가 더 나쁘죠. 언더그라운드는 박해받고 있고, 흑인 투사들은 지금 자기 집에서 살지도 못하지만, 그들은 남아공에 더 많은 무기를 팔고 있죠. 리처드 네빌이 말한 것처럼, 윌슨과 히스 는 아주 작은 차이 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 작은 틈 속에서 살고 있죠 ...

 

알리: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노동당은 인종주의적 이민정책을 도입했고, 베트남전을 지지했고, 또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새 법안을 도입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블랙번: 우리가 노동당과 보수당 사이의 작은 틈에서 살고 있는 게 사실일진 몰라도, 그런 한에서 우리는 무력하고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만약 히스가 그 틈에서 우릴 몰아내면 그는 의도와는 달리 우리에게 중요한 전환을 할 기회를 주는 거죠…

 

레넌: 네, 저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이렇게 구석에 몰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억압이 오는지 알아내야 하죠. 저는 희망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모닝스타>(영국공산당 신문)를 계속 구독했지만, 그 신문은 19세기에 있는 것 같아요. 시대에 뒤처진 중년층 자유주의자들이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우리는 젊은 층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되요. 그들은 가장 이상주의적이고 가장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죠. 어쨌든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야 해요. 그러나 어디에서 시작할지 알기 어렵죠. 우리가 가진 모든 건 댐에 갖다 댈 손가락 하나 뿐이죠. 저에게 문제는 제가 점점 현실적으로 되면서 대부분의 노동자계급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는 거죠. 알다시피 그들이 좋아하는 건 에겔버트 허퍼딩크죠. 지금 우리 음반을 사는 건 학생들이고 그게 문제요. 지금 비틀즈는 네 명의 다른 개인이고, 우리는 함께 했을 때 가졌던 영향력이 없어요…

 

블랙번: 지금 당신은 부르주아 사회의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려고 하고 있고, 그건 아주 더 힘든 일이죠.

 

레넌: 맞아요. 그들은 모든 신문을 소유하고 있고, 모든 배포와 판촉을 통제하죠. 우리가 함께 했을 때 정말로 음반을 낼 수 있던 건 데카, 필립스, EMI 정도였죠. 녹음스튜디오에 도달하기 위해서 전체 관료주의를 통과해야 했어요. 아주 미천한 처지여서, 앨범 전체를 녹음하는 데 12시간 이상을 확보할 수 없었는데, 초반에 우리가 그랬죠. 지금도 똑 같아요. 무명의 예술가가 스튜디오에서 한 시간을 지낼 수 있으면 행운이죠. 그건 계급질서죠, 히트곡이 없으면 다시 녹음할 수 없죠. 그리고 그들이 배포도 통제하죠. 우리는 애플(APPLE)사로 그걸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우리는 패배했어요. 그들은 여전히 모든 걸 통제하지요. EMI는 우리 앨범 <투 버진>을 싫어해서 그걸 죽였죠. 마지막 레코드의 겨우 그들은 레코드에 인쇄된 가사를 검열했죠. *같이 황당하고 위선적인 일이죠. 그들은 내가 노래하도록 해줘야 하지만, 그들은 감히 여러분이 그걸 읽도록 하지는 않았죠. 미친 짓이죠.

 

블랙번: 당신이 지금 더 적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더라도, 아마 영향력은 보다 집중적일 수 있죠.

 

레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먼저 노동자계급 사람들은 섹스에 대한 저의 개방성에 반대했죠. 그들은 누드에 당황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식으로 억압당하고 있어요. 아마 그들은 '폴은 괜찮은 청년이고, 그는 사고치지 않아'라고 생각하겠죠. 또 요코와 제가 결혼했을 때, 끔찍한 인종주의적 편지들을 받았어요. 주로 아들러쇼트에서 사는 군인들한테서 왔죠. 장교들이요. 이제 노동자들이 저희에게 좀더 친근한데, 아마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아요. 저한테 학생들은 지금 형제 노동자들을 각성시키려 할 만큼 반쯤 각성한 것 같아요. 각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시 가라앉을 거예요. 그건 학생들이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우회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란 걸 확신시켜 줄 필요가 있는 이유죠. 그리고 물론 자본주의 언론이 빅 페더[(Vic Feather: 1908∼76) 1969∼73년에 노총 'TUC'의 사무총장]와 같은 대변인들의 말만 항상 인용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 어렵죠. 따라서 유일한 것은 그들에게,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죠. 우리는 그들이 체제에 반대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시작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제가 앨범에서 학교에 대한 말한 이유죠. 저는 사람들이 틀과 단절하고, 학교에서 불복종하고, 혀를 내밀고 권위를 모욕하기를 바래요.

 

요코: 우린 정말로 운이 좋아요. 우리 자신의 현실, 즉 존과 저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는 것임을 알고 있어요.

 

레넌: 우리가 현실과 대면하면 할수록, 비현실이 이 시대의 주요한 프로그램이란 걸 더욱 깨닫게 되죠. 우리가 더욱 현실적으로 되면, 우리는 더 학대당하지만, 그래서 코너에 몰리다 보면 우린 더욱 급진화되죠. 그러나 우리같은 사람들이 더 많으면 더 좋겠죠.

 

요코: 우리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으로, 특히 체제와 하는 방식으로 전통적이어선 안되요. 우리는 새로운 것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해요. 그런 종류의 의사소통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하지 않으면 환상적인 파워를 가질 수 있죠.

 

블랙번: 의사소통은 운동을 건설함에 있어 중요하지만, 결국 대중적 힘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무력하죠.

 

요코: 베트남에 대해 생각하면 아주 슬퍼져요. 거기에선 폭력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죠. 이 폭력은 수세기 동안 영구화되고 있어요. 커뮤니케이션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현대에 우리는 다른 전통, 매일 창조되는 전통을 창조해야 되요. 지금 5년은 과거의 100년과 같아요. 우리는 역사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죠. 우리가 낡은 패턴을 깨뜨릴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회는 전례가 없죠.

 

알리: 전역사에서 어떤 지배계급도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한 적이 없고, 저는 그런 변화를 보지 못했어요.

 

요코: 하지만 폭력은 단지 개념적인 것만은 아니죠. 아시겠지만, 저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청년에 관한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는 허리 아래쪽 몸통이 없어졌죠. 그는 단지 고기 덩어리일 뿐인데,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더라고요.

 

레넌: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모든 것이 쓰레기였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거죠…

 

요코: 하지만 폭력에 대해 생각해봐요. 그건 우리 아이들한테도 일어날 수 있어요…

 

블랙번: 하지만, 요코,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은 변화가 없는 데,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권력과 재산을 보호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공격받죠. 북아일랜드의 보그사이드와 폴스 거리의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자신을 권리를 위해 시위했다고 특수경찰에게 무자비하게 공격받았어요. 1969년 8월 어느 날 밤에 7명이 사살 당하고 수 천명이 집에서 쫓겨났죠. 그들에겐 자신을 방어할 권리도 없나요?

 

요코: 그게 바로 그런 상황이 생기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이유죠.

 

레넌: 그렇죠.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할거죠?

 

블랙번: 압제자에 대한 민중의 폭력은 항상 정당해요.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요코: 하지만 새 음악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의사소통의 채널로 세상은 변화될 수 있어요.

 

레넌: 그래요, 하지만 제가 말했듯이 아무것도 제대로 바뀌지 않았어요.

 

요코: 아니, 무언가 바뀌었고 나은 쪽으로 바뀌었죠. 제가 말하는 모든 건 아마 우리가 폭력없이 혁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죠.

 

레넌: 하지만 투쟁 없이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어요…

 

알리: 그게 핵심이죠.

 

레넌: 핵심에 다가가면 그들은 민중들이 어떤 권력도 갖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들은 그들을 위해 연기하고 춤출 모든 권리를 주겠지만, 실질적 권리는 주지 않죠…

 

요코: 핵심은 혁명 이후에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지 못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길 거라는 점이죠.

 

레넌: 혁명 뒤에도 상황을 유지하고 모든 상이한 견해를 조정하는 문제가 있어요. 혁명가들이 상이한 해결책은 갖고 그 때문에 상이한 그룹들로 분열하다가 개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죠. 그게 변증법이 아닌가요?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적에 대해 단결해야 하고, 새로운 질서를 공고화해야 해요. 답이 뭔지는 몰라요. 명백히 마오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공을 계속 움직이게 하고 있죠.

 

블랙번: 위험은 일단 혁명국가가 창출되면 새로운 보수적 관료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거죠. 이 위험은 혁명이 제국주의에 의해 고립되고 물질적으로 궁핍하면 증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레넌: 일단 새로운 권력을 잡으면, 그들은 공장과 철도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현상유지를 수립해야 되죠.

 

블랙번: 그래요. 하지만 억압적 관료주의가 혁명적 민주주의 체제 하의 노동자들보다 반드시 공장이나 철도를 더 잘 돌릴 수 있는 건 아니죠.

 

레넌: 그렇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 내부에 부르주아적 본능을 갖고 있죠. 우린 모두 피곤해져서 약간 쉴 필요가 있어요. 목표를 성취한 다음 어떻게 계속 모든 것을 유지하면서 혁명적 열정을 지속할 수 있나요? 물론 마오는 중국에서 지속하고 있지만, 마오가 가고 난 다음 어떻게 될까요? 그는 또 개인숭배를 이용하죠. 아마 필요하겠죠. 제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대부같은 인물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흐루시쵸프 회고록을 읽었는데, 제가 알기에 그는 다소 어린 아이 같지만, 그는 개인을 종교로 만드는 게 나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게 기본적 공산주의 사상의 일부인 것 같지 않아요. 여전히 민중은 민중이고, 그게 어려움이죠. 만약 우리가 영국을 접수하면 우리는 부르주아지를 일소하고 민중을 혁명적 정신상태로 유지하는 일을 해야 되요.

 

블랙번: …영국에서 진정으로 대중들에 의해 통제되고 대중들에게 책임지는 새로운 민중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면, 여기선 기본적으로 노동자권력인데, 혁명을 할 수 없죠. 오직 진정으로 뿌리깊은 노동자권력만이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할 수 있죠.

 

요코: 그게 젊은 세대가 장악할 때 상황이 달라지는 이유죠. 레넌: 저는 이곳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전진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자유롭게 지방의회를 공격하고 또는 대학의 억압을 파괴한 학생들처럼 학교당국을 파괴하도록 자유를 주어야 되요. 민중들이 더욱 단결해야 하지만, 그건 이미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여성들도 아주 중요해요. 여성이 참여하지 않고 해방되지 않는다면 혁명은 없어요. 남성의 우월성에 대해 배우는 방식은 매우 미묘하죠. 요코 덕분에 제 남성성이 어떤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녀는 열정적인 붉은 해방주의자이고, 비록 제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같을 때에도 제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재빨리 보여주었죠. 바로 그 때문에 저는 항상 급진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데 관심이 많은 이유죠.

 

블랙번: 항상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좌파에도 최소한 상당한 남성중심주의가 있었죠. 비록 여성해방의 발전이 그걸 없애는 데 도움을 주지만요.

 

레넌: 그건 말이 안되요.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이란 걸 깨닫지 못하고서 어떻게 민중권력을 얘기할 수 있어요?

 

요코: 어떤 사람과 동등하지 않으면 그들을 사랑할 수 없어요. 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에 남성에게 매달리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죠.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증오하는 이유죠.

 

레넌: 역도 마찬가지죠.

 

요코: 만약 집 주변에 노예가 있다면 어떻게 집 밖에서 혁명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여성들에게 문제는 만약 우리가 자유로우려고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외롭게 된다는 거죠. 아주 많은 여성들이 노예가 되려고 하고 남성들도 대개 그걸 선호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항상 '내 남자를 잃지 않을까'하는 위협을 무릅써야 되는 거예요. 아주 슬픈 일이죠.

 

레넌: 물론 절 만나기 전에 요코는 이미 상당히 해방되어 있었죠.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 싸워나가야 했어죠. 연예계는 완전히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서, 우리가 만났을 때 요코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죠. 거기엔 의문의 여지가 결코 없었죠. 우리는 50:50의 대등한 관계를 가져야 했죠. 그렇지 않았으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빨리 배우죠. 요코는 그 2년 전에 <노바>지에 여성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여성은 이 세계의 깜둥이'라고 말했어요.

 

블랙번: 물론 우리는 모두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에 살고 있고, 심지어 우리 문화도 연관되어 있어요. 비틀즈 음악이 <미국의 소리>에 계속 나오던 때가 있었죠…

 

레넌: 러시아인들은 우리가 자본가의 로봇이라고 표현했지만, 제 생각에도 그래요…

 

블랙번: 러시아인들은 아주 멍청해서 뭔가 다르다는 걸 보지 못했죠.

 

요코: 사실을 제대로 보자구요. 비틀즈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20세기의 포크송이었죠. 그 틀 안에서 의사소통을 원한다면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블랙번: <서전트 페퍼>가 발매되었을 때 저는 쿠바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라디오에서 록음악이 막 연주되기 시작하던 때죠.

 

레넌: 그들이 록앤롤이 코카콜라와 똑같지 않다는 걸 이해하길 기대해 보죠. 우리가 꿈을 넘어 가면 이 일은 쉬워져요. 그게 바로 제가 요즘 보다 강한 메시지를 담아서 히피를 흉내내는 10대 소녀의 이미지를 떨쳐내려고 노력하는 이유죠.

 

블랙번: 당신의 최신 앨범은 시작하기에 매우 간단한 것같지만, 복잡한 앨범의 가사, 템포, 멜로디가 점차 이해하게 되죠. '우리 엄마는 죽었어'라는 트랙은 '세마리 눈먼 쥐'라는 동요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건 어린 시절의 상처에 관한 거죠.

 

레넌: 음조는 그렇죠. 그것은 일본 하이쿠 시조와 같은 종류의 감정이었죠. 저는 최근에 일본의 하이쿠에 빠졌는데, 아주 환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명백히, 정신에서 환상 전체를 빼버리면, 대단한 정확성만 남죠. 요코는 저에게 이런 하이쿠를 오리지널로 보여줬죠. 하이쿠 시조와 롱 펠로의 차이는 엄청나죠. 길고 화려한 시구 대신에 하이쿠는 '나무 탁자 위의 흰 사발에 노란 꽃잎'라는 식이죠. 전체적 그림을 보여주죠. 정말로…

 

알리: 현재 영국에서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존?

 

레넌: 저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정말로 불행한 상태를 인식하도록 하고, 그들을 둘러싼 꿈을 깨뜨림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훌륭한 자유언론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동차와 TV가 있고 인생에서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죠. 노동자들은 사장들이 군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엿먹는 걸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어요.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의 꿈을 꾸고 있어요. 그건 심지어 자기 자신의 꿈은 아니죠. 노동자들은 흑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학대당하고 억압당하고 있으며 자신이 다음이라는 걸 깨달아야 해요. 노동자들이 이 모든 걸 깨닫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정말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죠. 노동자들이 접수하기 시작할 수 있죠. 맑스가 말한 것처럼,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인 거죠. 저는 그게 영국에서 잘 적용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또 군대에도 침투해야 되요. 왜냐면 군대는 우리 모두를 죽이도록 잘 훈련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억압받는 곳에서 이 모든 걸 시작해야 해요. 저는 자신의 필요가 큰데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거짓이고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분 좋게 느끼도록 하는 게 아니라, 기분 나쁘도록 느끼고 끊임없이 그들이 생계임금을 얻기 위해 겪는 타락과 비참함을 직접 느끼도록 하는 거죠.

 

 

- 기관지 노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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