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1/06
    파타야2
    만주개장수
  2. 2012/01/06
    파타야
    만주개장수
  3. 2012/01/06
    까따
    만주개장수
  4. 2012/01/06
    매홍쏜
    만주개장수
  5. 2011/12/25
    치앙마이
    만주개장수
  6. 2011/12/25
    아오낭
    만주개장수
  7. 2011/12/25
    랑카위
    만주개장수
  8. 2011/12/25
    쁘렌띠안(1)
    만주개장수
  9. 2007/03/01
    과녁
    만주개장수
  10. 2006/11/1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2)
    만주개장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EAN님의 [일관성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에 관련된 글.

EAN님이 추천해주신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작은 책은 검색해봐도 나오지 않고 대신 존 몰리뉴의 다른 저작을 찾았는데 바로 제가 찾고자 했던 내용이더군요.

두 권 모두 200페이지도 안되는 아주 얇은 책이지만 상당한 깊이가 있네요.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먼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라는 책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몇몇 쟁점들에 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까지는 문제되지 않으나 최소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우선과제로 두어야 하지 않느냐, 노동자가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라는 기준에 따라 정통성을 가늠하고 있다.

노선이 다를 뿐 우리의 목표는 어차피 같지 않느냐며 종파주의자라 몰아세우는 사람에게 "당신은 계급이 우선입니까, 민족이 우선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하지만 민족을 위해 맑시즘을 사용했다고 고백한 호치민을 나는 존경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이 계급과 민족을 동시에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건희가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와 하나로 뭉뚱그려질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폴 포트같은 사람과 함께 싸잡아 비난할 수 없도록 세밀하게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걷어내고 있다.

 

사회주의에 관심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솔직히 정작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복잡한 사회주의를 전부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애타는 갈증을 시원스레 해결한 기분이다.

문답형식으로 하나의 질문에 두 세 페이지 정도의 풀이로 된 구성인데 저자의 거침없는 통쾌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내공이 있는 분들이야 '뭐 이 정도쯤은 기본상식 아닌가?'하며 우습게 넘기시겠지만 나처럼 학습이 필요한 사람에겐 더없이 소중한 책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비폭력과 혁명

작년인가 '우리 모두를 위한 비폭력 교과서'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정말 훌륭한 책이다. 꽤나 배울 점이 많았다. 여러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주된 요지는 비폭력주의를 실천하자면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뒤따르지만 '폭력에 대항해서 폭력으로 승리했다고 해도, 결국 같은 폭력에 의해 멸망한다. 비폭력주의야 말로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준다.' 혹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며, 사회의 존재 양태의 비폭력화가 더욱 중요하고, 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이어야 한다.'로 보인다.

우리 모두를 위한 비폭력 교과서


허나 몇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사회주의가 아닌 비폭력주의를 기반으로 했기에 어찌보면 비폭력주의자로서는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레닌이나 체 게바라마저도 '폭력에 의한 혁명 지도자로서의 영웅이므로 시대에 따라 평가가 바뀔 수 있다'나 '테러를 당하는 쪽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과 같은 폭력이 선행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만 '인민의 해방'이라든가 '혁명'을 위한 테러 역시 폭력행위일 수밖에 없고 테러에 의한 폭력은 새로운 폭력을 불러 일으키며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그러나 테러를 통해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등이 그것이다.

 

일견 많은 진실을 내포한 말 같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넋 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만도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서로 경쟁시키는 (자본가는 링을 만들어 놓고 느긋하게 퍼져 앉아 대단한 자부심과 맥주캔을 양 손에들고 그 경쟁을 여유있게 구경하는) 지극히 구조적인 폭력적 체제이고 일반적으로 군대라는 폭력적인 조직과도 결합해 더 많은 이윤을 생산해 내는, 한마디로 폭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그런 폭력적인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법은 오직 혁명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폭력주의자의 입장에서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일단 비폭력주의가 점점 전파되어 가기 시작하면 지배계급의 마음까지 흔들어 결국 정치적 억압이나 문화적 소외, 실업, 빈곤 등의 구조적 폭력이 해결될거라 낙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겠지만 비폭력주의가 먹힐 가능성이 보이는 한계점은 너그럽게 봐줘도 중간계급까지이다.

 

그렇다면 폭력적이지 않은 혁명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물론 그런 혁명 방법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게 최선일 것이다.

허나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우리 노동자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그들은 소수이고 우리는 대다수라는 점이다.

우리의 혁명은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누르고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그림은 아주 쉽게 그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가 자신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고 영원히 이길 수 없을거라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는데 있다.


일단 혁명이 시작되면 노동자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생기리라 보지만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제도권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철저히 거세시켜 버리기에 노동계급의 혁명의 전망이 안개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계급에 대한 자부심과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사람 열외없이 단결한다면 고작 한줌밖에 안되는 자본가 계급 쯤이야 단숨에 엎고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요체는 노동계급의 대오각성이다. 혁명이 폭력적으로 진행될지 아니면 손쉽게 마무리될 지는 얼마나 많은 비율의 노동자가 혁명이라는 축제에 참가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자 세상을 원한다면 단결하고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미래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폭력주의자의 점잖은 타이름 쯤은 혁명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잠시 무시해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느 쪽이 진리에 가까운지 아직까지는 단정짓지 못하고 있다.

 


엔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 대중정당에서 최근에 당명을 바꾼 이념정당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중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연대할 자격

자기 전에 양치질 하면서 보려고 TV를 켰는데 BLACK WHITE 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웬 흑인 부부가 술집에 들어갔다.

내부의 손님들은 죄다 백인이었는데 다들 그 부부를 벌레보듯 쳐다봤다.

흑인 여성이 커피를 주문했는데 바텐더는 카드를 달라고 했다.

카드를 남편이 가지고 있는데 남편이 지금 주차장에 있다고 하니 카드를 주기 전까지 커피를 줄 수 없다며 걸인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 부부가 술집에 있는 동안 그 여성이 여러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다들 그다지 말을 받아주기 싫다는 태도였다.

그리곤 밖으로 나와 차에 탔는데 놀랍게도 그 부부는 백인이었고 흑인 분장을 한 것이었다.

단지 피부색과 가발의 차이밖에 없었는데 그 백인 술집에서 그 부부는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 프로를 보고나서 입에 거품을 문 채 깊이 생각했다.

내가 직접 다른 존재가 되어보지 않고서 그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혐오감조차 느끼고 있으면서도 실상 나는 과연 그들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나.

직접적으로 차별과 핍박을 받아보지도 않고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혹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과연 내가 그들과 연대할 자격이나 있는가.

가령 인도에 며칠 여행 갔다와서는 인도에 대해 다 안다는 듯 떠드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오해가 더 많이 쌓인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 아닐까?

그래서 상선약수가 명구인가 보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

고등학교 시절 정동이의 전도에 의해? 교회를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당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몇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이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탐스럽게 매달아 놓고, 다른 건 다 먹어도 되지만 이것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 생각 없다가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 아닌가?
엄마 뱃 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는 정동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그걸 왜 내한테 묻노?"했다.
나에게 전도를 했으면 A/S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무조건 믿어라, 믿으면 된다며 억지를 부렸다.
주일교사 선생님께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역시 선생님이셨다.
성경 내용에 대한 궁금증은 죄가 아니라 당연한 거라며 이렇게 설명하셨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지혜롭게 됨) 되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뱀의 꾀임에 빠져 그것을 먹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증거라는 설명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꼭둑각시가 아닌 판단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인가?'이다.
기독교에서는 선악과 사건을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며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채권-채무자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말하고 있다.
원죄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먹은 거라고 한다면 선악과란 것을 대체 왜 만드셨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것도 그러하거니와 노아 식구들만 남았을 때 하나님은 그 이전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원죄는 계속 남아있다는 것인가?

매트릭스 2에서 아키텍처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 말대로 과연 나의 자유의지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은 내가 의식 못하는 지배자의 결정에 불과한 것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기

누군가 내 걱정을 해주거나 하면 반사적으로 거부감부터 든다.

나에게 인사치레로 애는 언제 가지냐고 묻는 말에도 내 사생활 중 가장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부분을 캐묻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감이 불쑥 일어나곤 한다.
그런 질문을 인사치레로 흘려듣지 않고 의미를 따져 들을라치면 기분 나쁜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애는 언제 가질거냐'는 질문은 '결혼한 사람은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엄청난 폭력이다.
보라. 분유값 한푼 보태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멀쩡한 사람을 임신 시키려 한다.
이게 폭력이 아니고 뭔가?
그렇다면 결혼이란 건 아기를 낳을려고 하는 건가?
분명 그런 사람도 있긴 있을거다. 그런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서 결혼했지, 설마 나같은 놈을 세상에 한 놈 더 꺼내놓고자 결혼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나를 낳아 키우시느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여유를 자식 뒷바라지에 쏟아 부으셨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애초에 본질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자유의사를 가진 실존적 존재 아니던가.
명절이나 제사 때 친척분들을 만나면 '늙어서 후회한다'고 말씀들을 하신다.
나에게 나름대로 애정이 있어서 하는 말씀이신 것 같으나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을 책임진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사회보장만이라도 해줘야 애를 낳을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개인에게 질병ㆍ실업ㆍ빈곤 등이 갑자기 닥쳤을 때 이 사회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 커녕, 담담히 그를 자살바위로 인도한다.
자식 낳는 것만이 노후를 든든히 받쳐주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가 내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아이 가질 생각을 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다.

 

 

명절 때마다 '남자 어른들은 앉아서 놀고 왜 여자들만 몸살 나도록 일하는가'가 항상 불만이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른들이 하던 행동을 나 자신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축구

94년 월드컵이었을 거다.

친구들이 우리집에 맥주를 사들고 와서 경기를 관람했다.
나는 축구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그 중계를 보지 않고 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애국자가 아니'라는 둥, '니가 우리나라 사람 맞냐'는 둥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경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지, 내 친구들은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거나 큰 소리로 응원을 하곤 했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경기가 끝나고 결과는 예상대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졌다.
그런데 한가닥 기대를 안고 경기를 관람한 나의 친구들은 그 실망감과 상실감을 분노로 승화시키더니 어딘가에서 보상받고자 하다가 급기야 홀로 방에 앉아 있던 나에게 와서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에 패한 원인은 바로 '내가 경기 응원을 안했기 때문'이란다.
그런 유치한 발상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궁금했고, 또한 나에게 그렇게 커다란 능력이 있는 줄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군대에 갔는데 일요일이 되자 고참들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뜀박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역시 '안하겠다'고 했다가 순식간에 험상궂게 변하는 고참의 얼굴을 보고는 '저 축구 진짜 좋아합니다. 단결!'이라 외치며 부리나케 운동화를 신고 달려 나갔다.
허나 마음은 열심히 뛰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계속 헛발질만 해댔다.
그 다음 일요일엔 안되겠구나 싶었던지 골키퍼를 시켰다.
군대 축구의 과격성을 아는 사람은 족히 알겠지만 정말 와일드한 경기방식이다.
얼마나 공을 세게 차는지 나는 공을 잡는 골키퍼가 아니라 공을 피하는 피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 후부터 나는 상병 중간 호봉 때까지 응원단장을 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나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내 친구가 일깨워준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
근데 그 능력이란 내가 응원을 한다해서 이기게 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응원을 안하면 지게 되는 능력이었나보다.

문제는 대부분의 고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자기들끼리 즐기는 데만 끝나지 않고 후임병에게 동참하기를 강요하고, 꺼려하면 소대 발전의 걸림돌이라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며 제멋대로 화를 낸다는 데 있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된 현대화된 군대에서 박정희 시대 때에도 과다했던 대규모 사병 인원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러니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휴일날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싶은 쫄다구에게 축구하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공격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북한을 남침야욕에 불타는 괴물로 그려놓고 사람들을 겁주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들.
한낱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 축구경기에까지 알량한 '애국심'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사람들을 '국가와 민족'으로 묶어 놓아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작과 다를 바 없다.
제도 교육 12년과 보수권 미디어를 통해 애국심을 강요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군대에 가서는 충성심까지 강요 당한다.

2002 월드컵에서 4강에 들어가려 하니 매스컴에선 이것으로 인해 앞으로 창출될 이익이 몇 십 조원이라 떠들어 댔다.
모든 것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천박한 버릇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창출된 이익이 과연 우리에게 제대로 분배되었나, 아니면 SK와 삼성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나.

필요에 의해 동원되었음에도 자신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일이다.
억지로 끌려갔으면서도 제대하고 나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러 갔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에게 국가란 반쪽짜리인 '대한민국'뿐인가?
우리가 과연 학교에서 배운대로 단일 민족인가?
만일 단일 민족이라 치더라도 단지 그 이유로만 통일이 되어야 하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기장 검사

오늘 인권위의 '일기장 검사 관행'관련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아직까지 초등학생의 일기장을 검사하는 구태가 남아있을 줄 몰랐다.
한편 지금까지도 내겐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5학년 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내게끔 해준다.
작문을 그다지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는 놀다보니 일기 쓰는 것을 까먹어 버렸다. 까짓거 내일 이틀치 쓰면 되지 하고 미뤄뒀는데 다음날이 되니 또 미뤄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거의 한달 치를 미루게 되어버렸다.
그럴 즈음, 담임 선생이 '한달이나 일기장을 제출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고 했다.
음... 오늘 밤을 일기 쓰느라 꼬박 새워야 되겠구나 하며 후회와 번민이 교차하는 순간 '나한중이, 이리 나와'
어이없게도 사전 1차 경고도 없이 체벌이 가해졌다.
아동의 양쪽 볼이 성인 남자의 두터운 손바닥에 좌우로 쉴 새없이 마음껏 유린 당했다. 교탁에서 교실 끝까지. 다시 교실 끝에서 교탁까지...사실상 체벌이라 할 수도 없다. 나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없는 범죄가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분명 교육 목적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건... 포마드 바른 40대 중년 남성의 욕구불만의 더러운 찌꺼기 배설 행위라 할 만하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 시간 동안 린치를 가하며 그 사내는 나에게 뭘 원했을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사내는 내 귀를 잡고 옥상으로 끌고 가더니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초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즈음엔 구타에도 탄력이 붙어 상대가 조그만 초등학생이란 사실은 이미 문제될 것도 없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장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맞아본 일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결코 없으리라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다.
그 사내의 직업이 교사였던 것을 감안해볼 때 그는 과연 나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려 '사랑의 린치'를 가했을까?

그 사내에게 있어 '일기장 검열'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 사내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권력 행사의 한계는 어디까지라고 생각했을까?

그 일로 인해 아직까지도 분노를 삭히지 못할 만큼 내 가슴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아로새겨지게 되었지만 그 사건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체험이고, 그런 사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지극히 우연이었을 뿐이라 자위하듯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저엔 학생의 사생활이 담긴 사적 기록을 공적으로 검열할 수 있도록 장치된 시스템이 분명히 빌미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사내는 물론, 다른 몇몇 교사들도 일기 검열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너는 어제 학생이 해서는 안될 행위를 했다'며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경우도 빈번했다.
이건 바로 '작문능력 향상'이란 허울 좋은 목적 아래 학생들의 사생활을 앉아서 감시하려는 CCTV가 아니고 뭔가?
또한 지극히 은밀하고 개인적인 일은 검열될 일기장엔 기록되지 못한다. 일기를 문학이라고 본다면 교사의 검열에 대비한 자기검열로 창작의욕을 상실케 만드는 폐단이며, 생활의 기록이라 본다면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을 검열이란 무식한 제도 덕에 잃어버리게끔 하는 잔인한 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인권위 의견,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 2005.4.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글 속에서 피어오르는 혐오감

자본주의만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유일한 체제라 생각하는 습관들은 제도권 교육에서의 반복적인 주입학습을 통해 세뇌당한 흔적이라고 한 발 양보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시장의 원리랍시고 정글의 법칙에 의해 경제적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기는 미성숙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마음 속 한 켠에 피어오르는 혐오감을 감춰둘 곳이 마땅찮아 내심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살인 조직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서 보람과 긍지를 얻으려 하지 비판적인 생각이나 후회를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군대에 대해서만큼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군대란 태생적으로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국민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이 있긴 하나 살인은 어차피 살인일 뿐이다. 내 가족과 내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한다면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자기 손으로는 절대로 살인할 수 없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살인 도구를 쥐어 주는 짓은 너무나 야만적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대체복무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보다 선행돼야 함과 동시에 또한 중요한 것은 징병제 철폐다.
군생활로 인한 인간성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두고 우리는 '사람 됐다'고들 말한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인간성 개조를 강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군대 다녀왔다는 우월감과 보상심리에 젖어 아직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이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서도 당연하게들 생각한다.
'일당 몇 백 원에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과 의미 없이 힘든 노동과 춥고 더운 날씨와,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독감 등을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 등을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일종의 보상심리, 또한 징병제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군대를 찬양하고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징병제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개인의 존중 받아야 할 개성보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의 비중이 이 나라에서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는 현상엔 바로 이 징병제가 크게 한몫하고 있다고 본다.
양심의 자유란 것이 그들에겐 전과자 딱지와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하고 소중한 것임에도 모두들 민족과 국가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혹은 단지 남의 얘기라 여기고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나아가 비웃기까지 한다.
더욱 비참하고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의 안위도 아닌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임에도, 그것에 대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살인 연습

2년 전쯤 우리 가게에서 일했던 아르바이트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 했다.
분명 힘든 생활일 텐데도 편지 내용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밝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나는 진정한 평화란 모든 이가 다 같이 무기를 버릴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사람인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몸소 실천한 그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 동네에 칼 가게가 하나 생겼다.
들어가서 칼을 구경하다 보니 전부 생소하게 생긴 칼들뿐이기에 가게 주인에게 무엇에 쓰는 칼입니까? 물으니 '사람 찌를 때 쓰는 칼입니다' 하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섬찟하겠는가?
같은 논리로, 모든 남자들 손에 '사람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총을 억지로 쥐어주고 2년 간 살인 연습을 하라고 하고 있다. 이건 더 섬뜩한 얘기 아닌가 말이다.
대표적인 살인 도구인-총 쥐는 것 말고 다른 대체복무로 다른 이들과 공평하게 복무를 하겠다는 사람을 굳이 교도소로 보내어 고생시키고 전과자로 만들어서 출소 후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선사해 버리는 이런 형편없는 나라에서 나는 살고 있다.
이런 나라를 강제로 지키라 하다니 에라이, 나라도 안지키겠다.
징병제가 하루 속히 폐지되어 사람들이 군대식 사고 방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군인이란 사나이로 태어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경찰, 세무사, 속기사같은 다만 특수한 직업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가가 시키는 일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때론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