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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하고 적대시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과한 기쁨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마초를 통해 얻는 기쁨은 물질적 소비의 기쁨을 희석할 수도 있었다. 소비는 금욕주의가 조장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금욕과 마찬가지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연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였다.
대마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협하는 존재로 비추어졌다. 자본주의는 대마초를 거두는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대마초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적으로 완화시키면서도 대마초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담배의 미덕은 대마초보다 훨씬 기쁨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에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담배가 대마초보다 해롭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금욕을 둘러싼 계급 간의 불화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부터 빚어졌으며 부단한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 대중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금욕적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때는 없었다. 대마초는 바로 그 억압과 저항 사이에 위치해왔다.
- 후략


- 유현 '대마를 위한 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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