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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긴팔 못 입겠다
오늘의 햇빛은 날아갈 듯 들떠 있었지만 나는 좀 늘어져 버릴 정도였으니 이제 여름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만 뚜렷할 뿐 계절이 넘어가는 구간은 어찌나 희미한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2월부터 학교를 거니는 유령이 되어서 두어달이 지나고
몇 번의 기억에 남는 볕을 쬐는 동안 봄이 지나가 버렸다
올 봄은 그다지 열정적이지 못했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저 단조로와서 기억에 남지 못할 뻔 했을 따름이다
예상 밖으로 나는 봄과 여름의 경계를 분명히 나누었지만, 덕분에 많이 지치고 말았다
입에서 뱉은 나의 말은 봄볕처럼 따스할 줄 알았는데, 봄볕에 탄 내 얼굴처럼 가슴만 태웠다
그리고 입으로 뱉아내던 나는 돌처럼 심지가 굳었다
내 말은 굳어서 뱉아내는 게 아니라 뱉아낸 후 굳어진다는 게 봄의 교훈
봄밀알같은 귀한 충고를 안고 사고뭉치는 입을 닫는다
머리 전체로 귀는 열고, 입을 닫는다
旋律
요즘은 일기를 쓰는 데 너무 인색했다
고등학교 때도 시험기간의 절망감을 끄적거림으로 조금씩 해소시키곤 했는데,
대학교 다니는 지금도 비슷한 시기에 끄적이고 있다
아직 조금도 변하지 않은 내 모습이 씁쓸하다가 웃긴다.
당췌 이경탁의 행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얼마 전 내 24번째 진짜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그 좌표를 재확인하는 글을 써볼까하는 큰 꿈을 품기도 했었지만 피곤에 쩔은 내 손가락이 허락치 않았다.
아니, 그 좌표가 X축, Y축으로 이루어진 2차원 그래프의 어딘가에 희미하게, 그리고 성의없이 찍혀있을까봐 두려웠나보다. 스스로는 높은 산도 있고, 깊은 물도 흐르는 3차원의 지도의 한 가운데쯤 도달한 나를 기대하고 있지만, 실상은 경제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심심한 그래프의 출발점에서 얼마 더 가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어차피 내 삶이기 때문에 이런 의문을 가져도 정말 아무 의미 없지만, 내 삶은 객관적으로 재미없을까? 혹은 너무 재미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미는 둘째치고 도대체 어디쯤에 있은 건가?
이제 세상에 온 지 8400일이 지났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많은 행운의 도움을 받아 큰 굴곡이 없는 군대 생활을 마친지 4개월이 지났고, 학교로 돌아왔다. 큰 맘 먹고 산 새옷을 올해 최고의 황사가 닥친 날 개시하면서 올해의 봄과 처음 만났고, 종합관을 내려오는 길에 오늘 따라 괜찮은 온도를 선사해준 봄볕에 잠깐의 환희를 느꼈다. 정말 가까워지고 싶은 내 전공, 숫자놀음에 잠깐을 신음하다가 가까운 이들과의 잠깐의 대화에 그 신음을 토하고 중앙도서관으로 돌아간다. 저녁엔 나의 부족한 가르침을 받는 운이 없는 아이들에게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가네시로 가즈키의 이야기와 타블로의 가사에 감탄한다. 상대 본관 앞에서 여자 교복을 입은 남자 신입생들의 객기어린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부러워했다. 많은 이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았지만, 어리고 나름대로 생각이 많을 그들이 젊은 시절의 귀한 이야기 하나와 사진하나를 얻었음에 부러워했다. 영화가 보고 싶다. 매일 글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잘 보지 못할까봐 두렵다. 잘 쓰지 못할까봐,,, 두렵다. 이도 저도 안 될까봐 두려워 하다가 나는 또 숫자놀음에 빠진다.
솔직하지 못한 이야기 일테지만 나는 그 정도에 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그렇다.
지금 떠오르는 사진은 없다.
이렇듯 구체적이지 못하다. 총체적 문제에 허덕이는 나의 문장이 지금 나의 좌표인듯 하다.
旋律

유럽 영화에 '악!'하지 말지어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지니-
우연하게도 지금껏 내가 접한 독일 영화들은 다 잘 빠진 상업 영화들이었고, 코미디였다
굿바이 레닌, 파니 핑크(!), 그리고 내 남자의 유통기한
오히려 내가 차후에 소위 예술영화를 접한다면 당황스러워 할 정도로
다들 재밌는 부류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그 중 2개가 도리스 되리 감독 손에서 나왔다(파니 핑크, 내 남자의 유통기한)
한국, 미국 개그에 질린 사람이라면 그녀의 영화를 다 찾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신선한 비유(해마와 잉어), 균형적인 이성관, 해피 엔딩?
무엇보다 나와 맞는 코드의 코미디 ㅋㅋㅋ
가죽 란제리를 입은 이다가 채찍질을 하며 사랑을 갈구하던 장면과
사과를 던지며 오토를 유혹하던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긴, 역시 대단한 건 아이러니의 이용이었을까?
일단 영화의 원제 부터가 'The fisher man and his wife(어부와 그의 아내)'
영화 속 오토와 이다의 관계를 비틀고 있다
그리고 이다의 유토피아(아기와 오토를 위한 큰 마당이 있는 집)가 실현되려는 순간,
오토는 그 유명한 3줄 문방구 쓰레빠를 이다의 등에 명중시킨다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난 속물인가봐....
고양이 인형이 계속 커지는 걸 보면서 얼마나 흐뭇했다구-
Oh~ lord! show me the money...
旋律

By 치호 (Ma friend :)
"쉬십시오. 단! 결!"
"어쭈, 하... 야, 신병 목소리 그거 밖에 안 나오지? 대가리 박아. 아, 얘는 진짜 백 번 굴려야 정신 차려. 백번. 김 일병님, 이런 꼴통도 참 역사적이지 말입니다?"
"야야, 그만하고 좀 재우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리고 너 괜히 초콜릿 못 받아놓고 그걸 얘한테 풀고 그러냐."
"아, 우울하게 또 왜 그러십니까? 야, 기상! 신병, 이 이 새끼 내일도 군화 상태 고따구면 진짜 죽여-버린다. 군화는 어떻게?"
"네?"
"네? 흐흐, 까고 있네. 군화는 어떻게!"
"여, 여자친구가 화장 고칠 때 거울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맑게, 깨끗하게, 자신있게 입니다!"
"그렇지! 뭐 영 바보는 아니구나. 내일, 지켜보겠어."
"예, 알겠습니다. 단! 결!"
그들은 찢어질 듯한 내 목소리에 드디어 조금 만족한 듯 보였다. 오늘 일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2시 10분이 조금 지났다. 지난 주에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 10일째 되는 날이다. 그 10일 동안 이렇게 매일 일과가 끝나는 9시부터, 5시간 이상을 같은 중대 선임병인 김 일병의 방에서 군화를 닦는 법과 군복을 다리는 법을 배웠다. 사실 그들은 나를 가르친다기 보다 괴롭히려고 부른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그냥 닦고, 다리기만 한다면 3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 텐데, 목소리가 작다,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심지어 생긴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등의 이유로 나는 수도 없이 엎드려 뻗치기를 반복했고, 수백번의 팔 굽혀 펴기를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욕을 들으며 운동을 한 후에는 팔과 인격이 이미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몸통뿐인 내 몸에 그저 대롱대롱 매달린 그 물체들을 가지고 내 방으로 돌아가서 내일 새벽 기상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카투사로 선발되고 나서 2달간의 군사 기본훈련을 받는 동안에 생각했던 자대와 지금 내가 도착해서 2년을 보내야 할 이 곳은 다른 곳이다. 미군과 함께 일하는 환경이라서 조금은 인권 존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희망은 너무나 유치한 것이었다. 선임병들은 내가 생각 따위는 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툭'
"Shit. Aey, watch your fuckin step, man!"
(젠장, 야 망할 앞 좀 보고 다녀!)
몸을 못 가누도록 취한 백인 병사 한 명이 내 어깨를 치고 복도를 비틀비틀 걸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복도는 온통 시끌벅적한 파티음악과 영어로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환상 속의 내 자대와 현실의 다른 부분 중 또 하나는 미군에 관한 것이다. 매일 밤 파티에 취해서 저급한 욕설을 내뱉고,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무례한 미국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더욱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하면서도 카투사의 100배에 달하는 봉급을 챙긴다는 사실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미국에서도 큰 명절인지, 오늘은 특별히 다른 날들보다 소음의 농도가 짙다. 세계에서 가장 신나는 음악의 드럼 소리가 쿵쿵 마음을 울린다. 내 쇄골 아래에 있던 것을 쿵쿵 위로 밀어올린다. 이 조그만 한국인은 그 혼돈의 복도에서 귀를 찢을 듯한 힙합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떨구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건물을 나섰다. 그 곳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내 숙소 건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따. 새벽의 길거리는 적막했다. 그런데 거리의 어딘가에서 슬며시 떨리는 듯한 소리가 찬 공기의 사이로 새나왔다. 누군가 그 순간의 나의 감정에 동조하고 있었다. 교차로에 있는 전화박스의 안에서 동산만한 흑인이 등줄기를 부들부들 떨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은 기존 전화박스의 디자인을 재고하게 만들 정도로 거대해서 마치 그의 몸에 전화박스를 칠해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거대한 몸보다도 더 큰 야구점퍼와 통이 큰 바지를 바닥에 질질 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건물 안에서 몸을 흔들어 대고 있던 그들 못지않게 쾌활함을 자랑할 것 같은 전형적인 흑인이었다. 그들에 비한다면 백인들은 오히려 양반 축에 속하는 흑인, 욕이 아니면 말을 이을 수 없고 그것을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떠벌리는 바로 그 흑인이었다.
"I'm gonna die in this fuckin country. Please baby, please."
(나 이 망할 나라에서 죽고 말거야. 제발... 제발...)
그는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거의 쓰러질 듯 전화박스에 기댄 체 본인의 덩치만큼이나 많은 양의 눈물을 뿜어냈다. 짙은 흙빛 눈동자를 품은 그의 눈망울은 약간은 불투명한 하얀색이어서, 피부에 닿은 그의 눈물이 마치 갈색처럼 보였다. 아니, 그는 그의 눈 자체를 흘리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내가 흑인의 눈을, 눈물을 그렇게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수화기를 먹어버릴 듯한 기세로 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1분 정도 두 명의 외국인은 기상시간이 가까워 오는 미군부대의 한 가운데에서 비슷한 무게의 무거운 눈을 달고, 특별한 날의 끝을 함께 맞이했다. 나에게는 새로운 날의 시작이라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칼같이 날이 선 내 군복을 옷장에 걸고, 군화를 살며시 바닥에 놓았따. 4시간을 내리 닦아서 그런지 군화는 유리를 덧씌운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일병의 눈에는 저것이 먼지투성이 치와와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은 아예 잠을 못 자더라도 내일은 선임병들과의 시간을 좀 더 줄여볼 요량으로 다시 구두닦이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가 10일 동안 공들여 만든 그 여성용 거울을 다른 한 손에 끼우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김 일병의 말이 생각나서 머리위로 군화를 집어 들었더니 검은색 군화의 바탕 위로 피곤에 절은 내 얼굴의 윤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피식, 어느새 나도 흑인.'
글쓰기 수업 발표 때문에 급조한 단편이에요. 새벽에 울고있던(^^;) 나를 받아준 치호를 비롯해서 그림 실력이 없는 제 SOS에 응해준 친구들 고마워요. 그리고 그 때 그 친구 지금은 고국의 품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기를 바라며...
Peeeeace~
旋律
참고
- 위의 내용은 허구이며, 제목은 흑인과의 동질감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저는 모든 인종 차별적인 의견에 반대합니다.
불현듯 꿈결 같은 소리가 끔벅 닫힌 내 눈을 신경질적인 방향으로 찢어놓았다. 몇 시쯤일까? 벽에 걸려있는 시계에서
"네, 여보세요?"
"보소……. 아저씨."
경상도 남자다. 하고많은 사람의 장르 중에 하필이면 댄스음악이 시작된 것이다.
"예, 무슨 일이시죠?"
"내가 쪼끔 아까 1000원짜리 한 장은 넣고, 파워에이드를 눌맀디마...콜라가 나왔삣네. 이기 우예 된기고?"
"아, 그러셨어요? 지금 어디쯤이시죠?"
"이기? 어대긴 어대야..우리 집이지."
심지어 취했다.
"아,, 네. 댁이 어디신데요?"
"마포."
그 쪽은 얼마 전에 깔끔하게 손봐놓은 놈들뿐이라 오작동이 나올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
"아, 그럼 손님이 잘못 누르셨나봅니다."
"…….뭐라? 야 이 개 호로새끼야! 그면 니가 지금 내가 장님이라 그기가, 으이? 이런 마할 놈의 새끼, 그라는 니는 지금 어댄데? 어대냐고 이 개새끼야! 이런 에미에비도 없는 썅노무......(이하 생략)"
경상도 랩퍼의 댄스음악은 늘 나의 기대를 넘치도록 충족시킨다. 낮은 톤이라고 생각했던 어눌한 이 사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여고생으로 변한다. 대화(이런 걸 그렇게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시작 후 약 40초 만에 세상의 모든 욕을 다 듣고 말았다. 왜 1000원 한 장을 가지고
"손님, 손님? 일단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리고요. 제가 지금 먼 곳에 있어서 거기까지 직접 찾아뵐 순 없을 것 같네요. 지금 많이 취하신거 같은데, 일단 댁으로 들어가시고 내일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뭐라? 이 새끼야, 지금 내가 일로 오라카더나? 니 있는 데를 대라고 이 새끼야. 이런 귓구멍에…….(이하생략)"
"네, 손님 그러니까 내일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야, 야! 이……."
이젠 익숙할 때도 됐는데 습관처럼 다시 전화를 받다니, 잠이 깊이 들긴 했었나보다. 그런 깊은 잠도 한 번에 날려준 소중한 고객님이 감사할 따름이다. 가끔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수백 개의 음료수 박스를 나르고 돌아오면 누가 뭐래도 방바닥에 녹아들 정도로 잠이 들었다가도, 술에 취하거나 항상 취해있는 듯하다 사람들과의 거친 새벽대화 1,2분은 자양강장제처럼 나의 잠을 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음료수 박스들과 씨름하러 갈 아침까지 누구보다 명료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면서 죽 명상에 잠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참 욕이란 무엇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그 짧은 말 몇 개 덕분에 밤새 토끼눈을 만들고 있는 난 소심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그런 내 성격이 지루한 밤이 찾아오는 것을 더욱 부추긴다. TV나 라디오라도 틀면 혹시 잠들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날려버리는 것 같아서 쉽사리 버튼에 손도 대지 못한다. 그저 나의 3평 남짓한 좁은 방을 낱낱이 살펴보는 것으로 긴 밤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채광이 좋지 않은 탓에 겨우 한 모금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옷그림자들이 사라져서, 그것들이 결국엔 귀신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한다. 그리고 이 방 생활도 벌써 6개월째 접어들었다. 이젠 욕들어먹는 것도 익숙할 때가 되어서 버릇처럼
24시간 방송되는 케이블은 24시간 활기차다. 재탕방송국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나는 지금 이 순간 새벽 시간대의 케이블 방송, 특히 오락채널에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보낸다. 공중파 방송은 그 위엄을 상징하듯 혼자 사는 나에게 지직대는 화면 조정파를 쏘아 줄 뿐이다. 그 파장은 지금 같은 순간엔 매우 적절하지 않으나, 오락 채널의 전파는 나에게 노련한 입담의 남자 진행자와 새봄에 핀 꽃딸기처럼 싱그러운 여자 보조 진행자를 선사해 주었다. 그토록 진부한 사회자들의 조합만큼이나 전형적인 퀴즈쇼가 한창이었다. 요란한 문제 정답음과 합께 화면은 한 여인을 비춰 주었다. 똑똑해 보이는 여자다. 사회자와 몇 마디를 나누는 듯 했으나 나는 듣지 못했다. 드디어 졸음이 오는걸까하고 기대했지만 눈은 누구보다 또렷한 내 정신처럼 그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갑자기 당황한 듯 했다. 아니, 당황했다. 이내 몇 초간의 방송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정도의 침묵,, 여자는 나가버렸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의 몇 초간의 침묵,, 상황이 역시 좀 이상하긴 했지만 문제를 틀렸나보지? 그리곤 '역시 사람은 안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TV를 껐다. 다시 나는 풀지 못할 수면의 미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방 관찰 대신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뭘 틀린 거지?
旋律
"자, 이제 리허설 끝났고요. 30분 후에 응원단 입장 끝난 후에 바로 시작할거에요. 그리고... 하하하 언니, 법원 왔어요? 얼굴이 완전 판결 떨어지기 전 피고네. 에이,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니까요. 근데 정말 응원단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저희가 좀 곤란해지는 것도 있지만 그건 방청객 알바 좀 쓰면 되니까 걱정할 것까진 없고, 본인이 문제 푸는데 모티베이션도 되는 차원에서 부모님이나 가족 분들 오시는데……. 지금이라도 연락하시는 건 …, 아,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방송시간 맞추기 힘들겠네요. 저도 일개 작가라서 촬영 스케줄 아귀 맞춰주지 않으면 모가지가 아담한 사이즈로 얇아져서, 하하 생방송이라는 게 원래 좀 어설프고 그런 거거든요. 언니가 이해 좀 해줘요. 괜찮죠?"
"네, 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리고 사회자를 괜히 돈까지 줘가면서 사회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니까 그냥 따라가면 되고요. 언니가 말씀하신 대로 너무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전해드렸으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떨지만 않으면돼, 떨지만 않으면! 또 뭐지? 아, 맞다! 전화찬스. 하실 분이랑 미리 연락은 되셨겠죠?"
"아…, 예."
"오케이, 그럼 저는 주조정실 잠깐 올라가봐야 되서, 근데 언니 말 참 조용조용하게 하시네. 저 같은 남성완전체와는 사뭇 다르네요. 하하, 부럽다. 그럼 돈 많이 버세요!"
"네, 감사……."
그녀는 튼튼해 보이는 다리로 부실하기 짝이 없는 세트 뒤쪽을 쿵쿵 울리며 급히 사라졌다. 건강하고 붙임성 있는 여자다. 방송이라는 이곳 생리에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여기에 있는 다른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터프한 환경 탓에 빠르게 적응되어 버린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센스도 있다. 입에 발린 감사의 말을 전하기 전에 퇴장해준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잠깐 솟아나는 듯 했다. 난 일부러 응원단을 부르지 않았다. 스태프들의 질책이 두려워서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고 둘러대 버렸다. 오히려 나의 긴장감을 덧붙일 다른 눈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긴장이 되서 정신이 없다. 이제 평소 나와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저지르기 25분 전. 어쩌자고 이렇게 전 국민에게 돋보이는 일을 할 생각을 하게 됐을까? 붙임성 좋은 작가와의 면접 후에 그녀가 '전국 시청률 7%밖에 안 나오는 여기서 썩어도 인정도 못받는데…….' 하면서 넋두리 하던 것이 생각난다. 전 국민 까지는 아니라 해도 약 630만개의 눈이 나를 실시간으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이런 기분을 참아내는 것이 시청자 입장일 때는 터무니없이 많이 준다고 생각했던 우승 상금의 대가일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상금의 양은 오히려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아,. 그 놈에 상금. 사회 초년인 내 씀씀이에 약가느이 여유를 마련해 보자고 난 이 짓을 결행하게 됐다. 방 월세부터 휴대폰 요금까지 내 수입에서 나가게 되고 보니, 예산 계획엔 고춧가루가 끼어들 정도의 틈도 없어졌다. 문제를 최대한 많이 맞춰서 좋은 가습기와 새 블라인드를 사고 싶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계획이라도 좀 세울 여분의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 혼자 책보는 습관에서 얻은 상식, 묵히면 김치도 못 담글 그것을 누군가에게 3박 4일 동안 강의할 것도 아닌데(나의 성격상 대화중에 잠깐 꺼내지도 못할 것이 뻔하다.),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이사의 최선책은 없다. 약간은 힘이 난다. 오늘 기필코 …….
"저기요, 여기 서 계시면 안되거든요. 이런 선 같은데 걸리면 서로 곤란하잖아요. 멍하니 계시지 말고 저-기 출연자 대기실 가계세요. 작가님이 예기 안 해줬어요? 빨리요."
"네? 아, 예 죄송합니다."
스태프 중 하위 서열로 보이는 튼실한 어깨를 가진 사내가 바쁘게 내 발아래 선들을 정리한다. 아아, 난 또 다시 혼자 멍하니 있었나 보다. 이 버릇으로는 정말 돈도 벌 수 없는 골칫거리다. 한참 생각에 빠질 때의 난 시선을 4차원을 관찰할 수 있는 곳에다가 단다. 그리곤 한 시간 정도 미동도 안 할 때도 있다. 그래, 모델일이라면 누군가 나를 써줄지도 몰라. 멍하니 있을 때의 내 표정은 예술가들에겐 꽤 여러 가지 의미의 영감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사실 나에게도 그 표정은 신비해서 손에 넣고 싶지만, 손에 쥐면 본래의 투명함을 잃고 회색 빛으로 사라져 버리는 어항 속에 투명물고기 같은 것. 멍해짐을 깨닫고 내 얼굴이 궁금해서 거울이라도 볼라치면 이미 시선은 의식을 품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멍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신비한 얼굴은 사라지고 거울 속엔 사회적인 나, 단정해진 나만이 남을 뿐이다. 그 표정을 그림에서나마 처음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일은 나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 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불가능한 상상. 방송출연으로도 이렇게 과도 긴장을 일삼는 내가, 하물며 수 시간동안 사람들이 나를 시선으로 벗기는 일을 감당해 낼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 버릇 또한 홀로 남는 때만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이라는 거울이 나타날라치면 이내 난 사회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나의 사방을 거울이 둘러싸고 있다면 좋겠다. 내가 가는 어디든, 내가 있는 어느 시간이든 찰나의 내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오랜 의문도 해결될 텐데. 혹시 시간이 좀 지나서 미래에는 그런 거울패션이 유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철학적인 문제에서 생활로 넘어올 수 있을텐데 말이다. 자기탐구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품은 패션 디자이너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역시 오래 살고봐야 할 일이다.
'쿵!'
"아, 나 오늘 왜이러지. 죄송합니다. 죄송……. "
"하아… 저 새끼 또 지랄이네. 야, 야야! 너 이 쌍놈의 새끼 오늘 첫방이야? 왜 물건 소중한 줄을 몰라, 이 호로새끼야. 내가 정신 차리랬지? 어? 차리랬지? 이게 얼마짜리 장비인줄 알기나 해! 하여튼 너, 한번만 더 지랄하면 바로 모가지야. 알았어? 병신, 정신은 다 빼…(이하생략)"
아까 전 건장한 어깨의 청년이 세상의 모든 욕으로 혼나고 있었다. 저런 신기할 정도의 걸쭉한 욕지거리는 참 오랜만에 듣는다. 그는 사과의 말을 끝내보기도 전에 몇 번의 신체적 다독거림과 함께 스튜디오 안의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할 정도의 무안을 당한다. 아까 전 나에게 그 청년이 했던 냉정한 태도 때문에 그이를 안 좋게 생각했던 게 미안하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정신을 놓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에게 어떤 방해도 되지 않을만한 장소로 이동해서 마음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튜디오는 마치 하나의 큰 방 같았다. 강당이나 공연장같이 입체적인 모양의 건물이 아니라 정말 심심한 직육면체의 방이었다. 천정으로 몇 개의 철근같은 조명지지대에 사람 머리만한 것부터 공룡 머리만한 것까지 갖가지 조명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세트라는 이름의 방송 화면의 배경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여자인 내가 별 생각 없이 주먹을 휘둘러 댔다가는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바람구멍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본디 공연 예술의 배경이란 그런게 아닌가 하고 애써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 색상과 모양새 또한 조잡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급조하다.'라는 표현은 방송 세트를 위한 말이었을까? 큰 스튜디오는 사람들로 복잡했지만 실제로는 가짜들로 텅 비어있었다. 사회에서 막강한 오피니언 세터로서의 힘을 과시하는 방송의 위엄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카메라뿐이었다. 카메라는 확실히 미래에서 온 듯한 기계덩어리 같다. 조정하는 사람보다 더 큼지막한 그 물체가 아이의 종아리만큼이나 굵은 선들을 쏟아내어 놓으면, 어깨청년들이 그것을 따라다니면서 정리한다. 원격조정으로 공중을 떠다니는 형식의 작은 카메라도 보였다. 그것은 뱀보다도 유연한 유기적 생명체였다. 강한 조명이 조잡한 세트를 때리면, 이 전능한 거울들이 그들을 호화롭고 존재감 있는 '집'으로 새로 비추어내는 것이다. 재창조라는 것은 '전능함'이 갖추어야할 절대필요조건. 결국 방송이라는 것의 본질을 그 스튜디오 자체가 표현하는 듯했다. 이기적으로 큼직하고 전능한 거울이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란의 도움을 받아 풍성한 듯한 그림을 발산한다. 그러나 그 실체는 지저분하고 텅 빈 방에 놓인 한쪽 면만이 좋재하는 나무판에 불과한 것이다. 원시 부족사회의 종교행사같지 않은가? 위쪽에 위치한 큰 카메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계획적으로 떠들어댄다. 하긴, 예술이란 그런 종교행사에서 생겨났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나는 방송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러는 사이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종교행사시간이 다 된 것이다.
"이제 긴장하시고요. 하나, 둘, 셋, 자! 나가세요!"
말 그대로 등 떠밀려 나간 허술한 스튜디오 안으로 방청객들의 환호성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은 내가 얕보았던 방송의 기습이었다. 그 강렬한 합창과 지금 녹화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의 긴장된 눈빛은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스튜디오의 진짜였다. 그리고 그 기습은 넋을 놓고 있던 나를 아프게 때렸다. 열띤 환호에 귀가 홀리고, 진정으로 강렬한 조명에 눈이 홀려, 사회자와 기억도 나지 않는 인사를 나누고, 2, 3문제를 직관에 가깝게 풀어버렸다.
"와, 일사천리로 3단계까지 끝내셨습니다. 조용해 보이시는 외모와는 달리 실력자셨군요. 자, 다음 주제, 선택해주세요!"
"문학, 하겠습니다."
"자, 4단계 문제, 문학! 주세요."
"스위스 출신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인 이것은 '연애'라는 활동에 대한 분석적인 접근으로 세간의 관심을 이끌어낸 소설입니다. 주인공 '나'와 디자이너 '클로이'의 우연한 만남에서 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을 철학적, 심리적으로 풀이한 것이 특징인 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내가 자신있다고 자부하던 책읽기에 대한 문제가 내 발목을 세차게 찍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머리를 찍혔는지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 이래선 안되는데.
"자, 시간이 가고 있고요. 아, 좀 힘든 문제가 나온 거 같네요. 그래도 결정을 빨리 내려야죠."
"전화찬스 쓰겠습니다."
"네! 전화찬스 선택하셨습니다. 아슬아슬했던거 아시죠? 누구에게 하실 건가요?"
"남자친구…."
"아, 남자친구…에게 하실거군요. 하하하, 네. 지금부터 45초 드립니다. 자! 전화 연결 들어갑니다!"
내가 생각해도 괘나 비슷한 내 성대모사였다. 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조명이 어두워지며 나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작렬했다. 그것이 그 날 내가 방송에게 받은 공격의 하이라이트. 내 머릿속은 하얗게 되다 못해 칼에 찔린 듯 피를 뚝뚝 흘리는 듯 했다. 그러나 머리 안쪽으로 흐르는 나의 선혈을 닦아주어야 마땅할 그가 전화를 쉽사리 받지 않았다. 신호는 23초가 지나도록 계속 울려댔다. 뚜- 뚜- 사실 그에게 방송 출연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부쩍 더 바빠진 그가 이런 일로 부담을 느끼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어떤 이유로든 나와 관련된 일로 자신의 일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설사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일보다는 그의 일이 그 자신에게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만 한다. 혹시 나는 그런 배려를 핑계로 '나의 일'이라는 자신의 영역을 수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역시 그런 행동은 나의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날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주려 하는 것이 보이면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앞에서는 입을 닫는다. 그러면 그도 나의 본심을 읽으려는 시도를 접고 입을 닫는다. 그걸 뻔히 보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나의 눈빛을 그가 다 읽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굳게 입을 닫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이에 입맞춤이 많은 이유도 그런데서 나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키스란 참 편한 일이다. 서로에 대한 요구를 일축하고 다문 입을 부딫치면 그만이지 않은까?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요구 표현. 아니, 요구의 무시. 그래도 그런 식의 배려가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열 배나 증폭시킬 줄 알았다면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방청객과 670만 시청자들은 칠칠지 못한 여자의 말로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7초가량 남았을 때 드디어 신호음이 멈추었다.
'철컥'
"여보세요?"
"여보세요? 오빠, 나야. 왜…전화 늦게 받았어?"
라고 하다니. 나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사회자의 도움 없이 방청객을 웃긴 것이다. 이제 스스로도 포기했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으나 그가 나를 도와주었다.
" 나중에 응? 우리 나중에……."
"뭐? 여보세요, 오빠? 오빠?"
예상치 못한 나의 대화센스에 가볍게 분위기가 올라있던 방청객과 사회자는 일순간 그의 대화센스에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 얼버무림은 무슨 의미였을까? 왜 그는 7초 정도의 짧은 시간을 다 넘기지 못하고 먼저 전화를 끊은 것일까? 나는 그런 그 때문에 왜 그토록 많은 고민을 하고, 결국 방송에 대한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까? 이렇게 무시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아, 나는 왜……. 3, 4초 정도 허락되었던 나의 사색의 시간을 깨주는 역활은 역시,
"네, 안타깝지만 전화찬스 시간이 다 지났네요. 오늘 남자친구 분이 많이 혼나겠는데요? 자, 정담은?"
그 날, 하루 중 유일하게 나의 멍해지는 버릇이 도움을 주었다. 그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상념이 정답으로 튀어나왔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세상에, 정답입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사회자와 내 눈앞의 스태프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한껏 기분이 뜰떠 보였다. 생방송의 묘미와 이번 달 최고의 장면을 건졌다는 희열감 때문인지 스태프들은 사회자에게 분위기를 이어가라는 뜻의 제스처로 팔을 공중으로 힘차게 돌려댔다.
"자, 이제 조금 쉬어갈까요? 히야, 정말 대단하세요. 많이 당황하셨을텐데. 보통은 이럴 경우 오답률 백프로죠. 이제 남자친구는 차후에 해결하시도록 하고, 본인에 대한 질문을 좀 하죠. 오늘 보여주시는 모습처럼 조용하신 가운데 특이한 점을 감추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일단 이름부터 예상을 확 깨주는 분입니다. 성부터 말이죠, 이런 성이라면 혹시 중국 분은 아니시죠, 후. 루트씨?"
20여 년간 익숙해진 방식의 전개. 방송에서도 같은 식일지는 몰랐는데 역시 사람이 있는 곳은 다 똑같다. 어린 시절부터 이름 이야기가 나오면 난 말을 거두곤 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유치원 때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친구들 얼굴에 생채기도 내면서 반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내 이름이 절대 사람들의 관심과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체념해 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쯤부터는 학기 초에 출석을 부를 때 그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하더니, 그 때부터는 존재감을 없애는 방식으로 나는 내 이름에 대한 놀림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하자면 무관심이 나를 놀리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무기였다. 그리고 그 무기는 그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확실한 성능을 발휘했다. 나는 점점 더 조용한 학생이 되었고, 못난 외부인들을 배제시킨 아름다운 나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렇게 겨우 잊어버린 줄 알았던 트라우마가 강렬한 조명, 그리고 학창시절에 알았던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선과 함게 거짓된 공간에서 나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지금 실연마저 당한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극적일 수 있을까? 무관심으로 반격해주기에는 내가 너무 당황했고, 앞에서는 담당PD가 빠질 듯이 계속 팔을 공중으로 붕붕 돌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뱉아낼 수가 없다. 당황스러운 이 순간을 깨어 주는 것도 역시,
"어떻게 들으면 무슨 과일 이름 같기도 하구요. 계속 후.루.트. 후.루.트. 부르다보면……"
아, 안 돼. 제발. 노래까지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미 너무 아프다.
"후루트루트~ 후루트루트~ 후루트루트~따따따! 후루트루트~ 후루트루트, 뭐 이런 예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인도노래도 생각나는데요. 하하하, 도대체 이런 이름은 누가 지어주신거죠?"
사회자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목으로 경쾌한 인도 춤까지 선보이면서 고등학교 때 나에게 가장 큰 시련을 주었던 그 노래를 670만 시청자에게 선사했다. 머릿속으로 버림받은 여인의 얼굴이 TV화면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센스 있는 PD라면 그 얼굴 위로 사료화면과 배경음악을 넣는 것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모든 이를 배려하려 했을 뿐이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남자친구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홀로 방송에 나왔고, 마음에도 없는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꺼내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버티면서 이 자리에 서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지금 나를 비웃고 있다. 내가 타인들에게 주었던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 내 감정을 의도적으로 반대로 읽는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기본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실연당한 여자의 작명에 대한 사연이 그리도 궁금할까? 그 길로 나는 배려의 마음을 접기로 결심했다. 빠른 걸음걸이로 방송국을 나와 버렸다.
집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 주변을 몇 시간째 서성이고 있다. 그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정말 배려의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도 그런 말을 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을 텐데 내가 끼어들어서 혼란을 가중시키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그에게 그럴 정도로 큰 집착을 느끼지 못았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까? 주머니가 부르르 떨렸다. 역시 나의 애정은 그리 약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순간 그 진동이 그의 전화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전화를 건 것은 성난 여자였다.
"저 조작가에요……. 뭐에요? 네? 뭐냐고요! 오늘 당신 때문에 제가 어떻게 된 줄 알기나해요? 아아, 맞다. 모르시겠네. 뒤도 안 돌아보시던데 제가 무슨 소리를 하나 모르겠네요. 참나, 하나만 물어볼꼐요. 방송 왜 나온 거예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본인 책임감 문제잖아요. 아니 도대체 왜! …휴, 됐습니다. 됐고요. 그렇게 가신 거 분명한 계약위반이니까 출연료 일절 없습니다. 그냥 그거 통보해 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역사에 남으신 거 축하드리고요. 연말이나 케이블에 종종 자료화면이나 재방으로 나갈 거니까 꼭 직접 보세요. 꼭 입니다! 예?"
아니야.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역시 말이 참 빠른 편이다. 단번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근처에 있는 벤치에 주저 앉고 말았다. 엉덩이에 전기 충격을 가한 것 같은 느낌이 온다. 겨울 밤이 깊었다. 몸도 좀 녹일 겸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고, 동전을 동전대로 기계 안쪽으로 굴러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누구에게든 얘기해야 한다. 자판기에는 그 순간 내가 말을 걸어야 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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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업체명일까? 아니면 오늘 나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조롱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나는 전화를 받을 그 누군가를 가만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퍼부어 주리라. 혹시 그 사람이 방송가의 짐승들 못지않게 억세게 살아가는 치라면 어쩌지? 그래도 전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나도 누구 하나만은 짓밟아야 살아날 기력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을 것 같았다. 댄스음악으로 된 컬러링이 나의 전투의지에 불을 지핀다.
'철컥'
"미안합니다."
"……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바람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얼굴을 도려내던 1월의 어느 겨울 밤, 나는 20년 만에 실로 가장 큰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말 그대로 어디엔가 고여있는 물을 쏟아버린 것처럼 나는 철철 울었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남자는 크게 당황한 듯 보였지만, 타인의 마음을 우연히 읽어버린 탓에 서른 입성을 코 앞에 둔 소심한 여자의 한풀이를 온통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의 목소리는 나처럼 느리고, 울림이 둥글고 고르게 퍼져서 긴 여운을 남겼던 기억이다.
旋律
"Aey, K.T. Remember that your life is just started now. I bet ya you'll be great, son."
"I really appreciate, Sergeant Hickman. I hope to see you sooner or later. till then take care yourself"
나와 군생활을 1년 반을 같이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간 흑인 중사 도널드 힉맨과
전화로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난 아름다운 캠프 레드클라우드와 영원히 이별했다.
내가 미군 속에서 생활하면서 느낀건 '사람사는 곳은 역시 다 똑같다.'라는
진부한 사회학적 결론이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고학력자이던지 저학력자이던지 그 소속에서 조금씩의 영향을 받을 뿐,
사람은 어느 집단이든 있어야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한명씩 있을 뿐이다.
주로 웃는 사람, 주로 찡그리는 사람, 주로 무표정을 하는 사람,
일을 만드는 사람, 일에 딴지를 거는 사람, 일에 무심히 따라가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음악을 하는 사람, 어떤 종류의 재생기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
활기찬 사람, 다정한 사람, 조용한 사람, 냉정한 사람,, 기타등등 기타등등 기타등등..
힉맨은 '다정하고 농담을 잘하는 아저씨'라는 항목에 넣을 수 있는 분이다
전역하기 몇 일전 주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위에 나누었던 저 말을 어떻게든 바깥세계로 나가는 나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한다.
고맙기도 하지.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내게 전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열정적으로 앞으로 전진해서 멋진 나의 삶이라는 것을 확립하라는 뜻의 화이팅이었을게다
그리고 그 문장의 의도는 정확히 나에게 전달되어
인순이씨가 부른 거위의 꿈만큼이나 감동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 바깥세계에서의 17일째가 막 시작되었다.
나는 느즈막히 일어나 밥을 끓여먹고 장학금 관련 서류를 정리해 학교로 나가기까지
자그마지 4시간을 소요했다....ㅡㅡ;
나른한 나에 대한 벌인지 요즘 들어 삶이 다이나믹해졌다.
벌치곤 너무 오래만이라 무거운 것.. 타이밍까지 기가 막힌다..
막힌 기를 뚫으려 팔짝팔짝 뛰고 있는 내 머리속으로 힉맨이 전한 문장이 스친다.
그래, 난 해석을 잘못했던 거야. 이놈의 카투사 야매영어...
삶은 "이제" 시작된게 아니고 "그저" 시작되는 거였다.
예고 따윈 없다.
화이팅은 알아서하고 어서 짐을 챙겨야 한다.
.
.
.
.
그러니 장학금을 저에게 주세요. 듣기로 학교에 돈이 많다면서요...네?
旋律

아아.. 드디어 끝나간다, 군생활. 말년휴가 나온 수도승으로서 연애시대를 이번 폐인 수련의 경전으로 삼았다. 처음엔 이 드라마를 볼 생각이 그득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그러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왠지 차분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이 왜 칭찬하는지를 안다.
내가 쓰고 싶은건 찌질이들의 판타지다. 어떤 작품들을 예로 드는 건 굴욕감이 드는 행위지만, 굳이 들자면 위대한 '캣츠비'나 플라이 대디같은 속도감 있는 사람이야기를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이라고 써 놓은 것들의 속도를 어렴풋이 측정해보니, 오히려 최근에 내가 쓰게 될 이야기들은 연애시대에 가까운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연애시대는 느리다. 물론 심심찮게 등장하는 맛깔나는 코미디와 복잡한 인간관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드라마 자체의 배경음악처럼 느린 호흡을 지닌다. 마치 드라마가 계속 말하려고 했던 '깨달음은 항상 늦다.'는 것을 작품 전반에 걸쳐 말해주는 것 같다. 손예진이 연기한 은호가 없었더라만 이 느린 드라마가 16부작에서 끝나긴 힘들었을게다. 그녀는 얼핏 우물쭈물하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무조건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저돌적인 이미지의 동진(감우성 粉)보다 그녀는 훨씬 쉽게 감정을 몸으로, 아니 입으로 나타내는 듯 보였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음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고 말하고, 이제 만나는 일은 그만두자고 말하고, 마침내 떠나간 그를 보면서 몸서리치게 아파한다. 동진과 은호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를 면전에 뿌리는 시발점은 대부분 은호로부터다. 그리고 쉼없이 찾아오는 다른 사랑들에 인색하다. 착한 듯 보이지만 동진의 연애에 비하면 '사귄다'는 관계표현이 너무나 어색해 보일 정도로 그들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솔직한 은호에 반대적인 동진의 캐릭터가 나에겐 더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동진은 은호를 걱정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은호와 그 측근들에게는 툴툴대고 빈정거리기 일수다. 그의 진심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나는 감정표현을 연습하는 중이다. 특히 스스로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힘겹게 익히고 있다. 언제 봉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 그리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느낌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위안하고 있지만, 동진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솔직해질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은호와 동진처럼 완전히 만난다면 용기는 발휘되는 것일까? 내가 30대가 아님이 아쉽다. 그랬다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자신을 좀 더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다 드라마가 좋은 탓이다. ThanX- 연애시대
旋律
여담 - 손예진이 7화에선가? 내가 즐겨입는 어깨에 단추달려있는 옆줄무늬 옷을 똑같이 입고 나와서 깜짝놀랐다. 왜 감우성도 아니고 하필 손예진이 입고나와...--? 난 남자다. 손예진이 보이쉬한 캐릭터를 연기했을 뿐일꺼야.. 그럴꺼야... 그리고 거의 매일 듣는 Corinne Barley Rae의 'Put your records on'이 던킨 도넛 장면에서 너무 자주 나와서 다시 한번 화들짝! 역시 내 감수성엔 플라이 대디보다 연애시대 쪽이 맞나봐- 그 원작자 얼마 전에 자살했다던데,,, 손예진 연기 정말정말 잘한다. 그 동안 무시해서 죄송합니다.


위대한 시덥잖은 소재, 더 위대한 플롯, 위대한 연기 크크..
대단했습니다
결국 가장 침착했던 The Dude가 위대한 레보스키였어
허풍쟁이 미군, 생각없는 20대 여자, 좀팽이 부자영감, 치졸한 비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소재로 웃겨줘서 고마웠어
그나저나 어제 꿈에서도 그렇구...
왜 자꾸 귀가 잘리는거야?
모를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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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키 네코- 난 정말 작은거 있는데-ㅋ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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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도리스 되리 감독 서울여성영화제에 몸소 오셔서 대담회까지 가지셨었다는 거 ㅋㅋ 나 올해도 걸출한 분 하나 오시지 않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올해는 못 모신 듯.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