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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처음'은 ...

  

2005년 여름,

 

대학원 논문을 쓰기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듯 자주 올라 왔습니다. 논문은 경기도 고양지역에서 있었던 철거민운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경기지역 중심으로 철거민 운동을 하던 한 단체와 만나 철거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서울까지 주구장창 올라왔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의 화려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아니 이 도시의 부끄러움이라도 되는 듯 숨기고픈 도시의 어두운 면,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자신의 주거권,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철거민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 서울 하늘에 이런 곳이 다 있나 하며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힘든 상황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용기에 더욱 놀랐던 것 같습니다. 일명 ‘철거민운동’ 이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철거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정당하다 하더라도 대부분 법적으로는 보장받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거의 권리, 생존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이들은 거대한 건설자본과 그들이 고용한 용역깡패, 지자체와 경찰들입니다. 사방에 그들의 편은 없습니다. 그래서 철거민 운동은 어떤 운동보다도 거칠고 힘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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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강한 자, 권력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자기주장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권력 앞에서 권력에 반하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 당시 제 생각으로 현명하지 않은 짓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들의 용기가 두려우면서도 존경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오지...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그런 목소리를 낸다는 건 저 로서는 사실 잘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도 여기 있으면 사람이 좀 될 수 있을까, 나도 여기 있으면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뭔지 배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까지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저는 서울로 상경해 빈민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습니다.

4년 동안 빈곤 관련 단체들에서 정신없이 활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하고 있는 일에 회의감이 밀려왔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뜨거운 감정으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운동이 열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과거 처음 빈민운동을 시작할 때의 마음, 조금은 가볍지만 즐겁고 기대에 찬... 그런 맘보다는 이미 머리가 굵어져 버리고 ‘척하면 척’이라는 듯,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고 보도자료, 성명서 쓰고 기자회견, 토론회 그리고 집회, 이것 저것 해도 안 되면 농성. 이 과정들이 쉬운 건 아니지만 이미 머리 속에 메뉴얼 책자 넘기듯 운동을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내 모습에 회의감과 ‘즐겁지 않음’, ‘행복하지 않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빈민운동단체에서의 활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민들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내가 왜 운동을 시작 했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그 때 가졌던 그 마음은 다시금 퇴색되어 버린 제자신이 정말 부끄러운 듯 합니다. 

 

이런 고민들 끝에 저는 지난해 5월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월세 16만원에 내 몸 하나 누이면 가득 차는 쪽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매우 조그만 지역이지만 남대문 경찰서 뒤와 그 길 건너에까지 적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정도의 사람이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 화장실, 공동 세면장에 당연히 주방은 없습니다. 여름에 난방 잘 되고 겨울에 냉방 잘되는 곳이 있다더니 여기가 그 곳입니다. 제가 사는 집은 온수가 나오지 않아 겨울 내내 제대로 씻지도 않고 산 것 같습니다. 여기 주민들은 과반수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슷한 소득, 즉 40만원-70만 원 정도의 소득으로 한 달을 살아갑니다. 쪽방촌. 이곳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도 ‘촌’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처음 들어 올 때, 여러 가지 고민과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차츰 차츰 주민들과 사귀어가며 주민이 되어가자.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자.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나가면서 나의 생각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저는 이곳에 갖 이사 온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쪽방주민들이 하루 종일 뭘 하시는지? 매달 20일이 되면 왜 그리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지? 앞집 형은 왜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잘 삐지는지? 등. 저는 아는 게 없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여기서 정말 이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그렇고 주민과 절대 동화될 수 없는 ‘가방끈 긴 놈’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그냥 여기서의 삶을 조용히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40만원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여기서의 행복은 무엇인지?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여기서의 생활도 7-8개월이 넘어 가자 몸이 근질 근질거려서 뭔가 해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민폐와 내가 거만 떨지 않으면서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쪽방신문’입니다. 배운 게 잘못도 아니고 배운 거 거만하지 않게 써먹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리고 주민들과 소통하고 이야기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쪽방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와 필요한 정보들을 담은 마을 신문을 내기로 한 것입니다. 일명 ‘쪽방신문’.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신문을 발행하기위해 쪽방주민들을 포함해 지역에 쪽방관련 사회단체들과 함께 쪽방신문을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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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신문을 계속 발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을 신문답게 잘 만들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신문답게’라는 건 저를 포함해 누구도 기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오히려 저의 부끄러움은 주민들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는 것이 주민들과 논의들을 거치고 주민들 몇 분이 글을 써주시지만 취재를 하거나 글 쓰는 과정, 편집하는 과정들이 주민 모두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난 여기에 뭔가를 가르치러 왔는가? 배우러 왔는가?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거드름 떨면서 지금 뭔가를 쓸데없이 가르치려 들고 있는 건 아닐까? 모두 함께 행복했으면 하고 시작했는데, 막상 나만 행복한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로 저는 최근에 많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마을신문을 멈추진 않을 것입니다. 가가호호 방문해 신문을 드리면 기뻐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처음에 어설프더라도 일단 이런 일은 시작하면 취지가 어찌되었든 어떤 신선하고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 질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기대도 되기에 일단 가 볼만큼 가볼 생각입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습니다. 저에게는 2005년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부푼 기대와 설레임들. ‘해야 되서 한다’기 보다는 ‘하고 싶어서 한다’는 맘. ‘가르치려는 맘’보다는 ‘배우려는 맘’이 컸던 그 처음은 저에게 끊임없이 고여서 썩어버리지 않게 하는, 계속 흐르게 하는 힘 입니다.

 

* 한백교회 '삶의 고백'에 적었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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