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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주민 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이나 친척과 연락을 끊고 살거나 아무런 연고 없이 홀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
런 처지를 서로 아는 것일까? 종종 쪽방에서 오래 사셨던 분들이 돌아가시는 경우, 가족이나 친척들이 아무도 장례를 치루지 않는 데도
돌아가신 분들의 이웃들, 쪽방에서 고인과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인연이 있었든 쪽방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례를 치루고 함께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훈훈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월 5일,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마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장례는 쪽방에 살던 가까운 지인들 몇 분이 상주 역
할을 자청하였다. 친혈육은 아니지만 쪽방에서 동거동락한 정이 있기에 주민들이 상주 역할을 하고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애도를 표했
다. (이후 1월8일, 마귀님은 용미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심.) 마귀님을 아시는 분들이 고인이 되신 마귀님을 추모하며 그 분에 대한 기억들
과 장례식 때의 인상들을 적어 주셨다.
  
 
 
 
어이! 목사아저씨, 난 마귀인데 1000원만 줘바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처음에 나를 보고 했던 말이다. 형은 집도 없이 성남교회 아래 천막으로 덮힌 집 연
탄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곳에서 생활 한다는 사실은 너
무 큰 충격이었다.
 
 부랴부랴 가스와 가스 렌지를 창고 옆에 설치했다. 형하고 남진이 형이 같이 생활했는데 한겨울동안 가스비 나온다며 LPG 가스통 하나
를 다 사용하지 않고 남기신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 산소를 찾아 두 번이나 용미리 갔던 일 그리고 쪽방을 얻어서 이사를
하던 일 등이 가장 가슴에 남아있다. 
 
/ 동자동사랑방 엄병천 대표
 
 
애국가를 부르면서 떠나간 마귀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소리 없이 웃으며 보내드리고자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기위해 영안실을 찾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형님 조금만
이라도 더 있다가 가지, 왜 웃으면서 가지, 힘들게 갔냐며 아픔의 눈물을 흘리던 쪽방촌 이웃사람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면
서 “마귀야, 먼저 가서 내 자리도 만들어 놓고 기다려라. 나는 좀 있다 가려 한다. 마귀야 잘가라”하며 눈물 담긴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
시던 마귀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아가니>님의 노래 소리가 흐린 눈 내린 하늘위로 날려 가서 마귀형님을 부르며 편안한 배웅을 했으리
라고 본다.
 
 마귀 형님과의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맺은 쪽방촌 이웃들의 소중한 만남이 그때그때 단 한번의 만남으로가 아닌 영원한 만남으로 소중
히 간직 될 수 있도록 지금, 지금 주어진 시간에 단 한번 서로에게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이웃들에게 마음
속으로 사랑나눔을 가져다준 마귀 형님에게 깊은 명복을 빕니다.              
 
/ 최순규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 동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쪽방주민 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이나 친척과 연락을 끊고 살거나 아무런 연고
없이 홀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처지를 서로 아는 것일까? 종종 쪽방에서
오래 사셨던 분들이 돌아가시는 경우, 가족이나 친척들이 아무도 장례를 치루지 않는 데도
돌아가신 분들의 이웃들, 쪽방에서 고인과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인연이 있었든
쪽방주민들이 함께 모여 장례를 치루고 함께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훈훈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월 5일,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마귀>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돌아가셨다. 장례는 쪽방에
살던 가까운 지인들 몇 분이 상주 역할을 자청하였다. 친혈육은 아니지만 쪽방에서 동거동락
한 정이 있기에 주민들이 상주 역할을 하고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애도를 표했다. (이후
1월8일, 마귀님은 용미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심.) 마귀님을 아시는 분들이 고인이 되신 마귀
님을 추모하며 그 분에 대한 기억들과 장례식 때의 인상들을 적어 주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이! 목사아저씨, 난 마귀인데 1000원만 줘바라!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처음에 나를 보고 했던 말이다. 형은
집도 없이 성남교회 아래 천막으로 덮힌 집 연탄창고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곳에서 생활 한다는 사실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부랴부랴 가스와 가스 렌지를 창고 옆에 설치했다. 형하고 남진이 형이 같이 생활했는데
한겨울동안 가스비 나온다며 LPG 가스통 하나를 다 사용하지 않고 남기신 일이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 산소를 찾아 두 번이나 용미리 갔던 일 그리고 쪽방을 얻어서
이사를 하던 일 등이 가장 가슴에 남아있다. 
/ 엄병천
 
애국가를 부르면서 떠나간 마귀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소리 없이 웃으며 보내드리고자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기위해
영안실을 찾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형님 조금만 이라도 더 있다가 가지, 왜 웃으면서
가지, 힘들게 갔냐며 아픔의 눈물을 흘리던 쪽방촌 이웃사람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면서 “마귀야, 먼저 가서 내 자리도
만들어 놓고 기다려라. 나는 좀 있다 가려 한다. 마귀야 잘가라”하며 눈물 담긴 목소리
로 애국가를 부르시던 마귀형님의 가장 친한 친구 <아가니>님의 노래 소리가 흐린 눈
내린 하늘위로 날려 가서 마귀형님을 부르며 편안한 배웅을 했으리라고 본다.
 
 마귀 형님과의 생애 단 한번의 인연을 맺은 쪽방촌 이웃들의 소중한 만남이 그때그때
단 한번의 만남으로가 아닌 영원한 만남으로 소중히 간직 될 수 있도록 지금, 지금 주어
진 시간에 단 한번 서로에게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이웃
들에게 마음속으로 사랑나눔을 가져다준 마귀 형님에게 깊은 명복을 빕니다.              
/ 최순규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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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1

마귀라는 별명에 대해 주민 분께 물었더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구를 1000을 치신

다고 엄청난 고수라는 뜻에서 '마귀'라는 별명이 붙혀 졌다고 얘기해 주신다. 마귀님은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근처에서 계속 노숙을 하셨고 몇년 전부터 쪽방

에서 사셨다고 한다. 동네에서 그렇게 평판이 좋았던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마귀님을 알고 계셨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2

술먹고 욕하고 시끄럽게 해서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매일 술을 드셨고 동네에서도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시끄럽게 떠들석 했던 분이라 동네에서도 마귀님은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년은 알콜릭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나이와 병세로 인한 것인지 많이 조용해 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돌아 가신거라고 얘기해 주신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1

마귀라는 별명에 대해 주민 분께 물었더니,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구를 1000을 치신

다고 엄청난 고수라는 뜻에서 '마귀'라는 별명이 붙혀 졌다고 얘기해 주신다. 마귀님은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근처에서 계속 노숙을 하셨고 몇년 전부터 쪽방

에서 사셨다고 한다. 동네에서 그렇게 평판이 좋았던 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마귀님을 알고 계셨다.

 

* 마귀님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2

술먹고 욕하고 시끄럽게 해서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매일 술을 드셨고 동네에서도 무언가 

사고를 치고 시끄럽게 떠들석 했던 분이라 동네에서도 마귀님은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년은 알콜릭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나이와 병세로 인한 것인지 많이 조용해 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돌아 가신거라고 얘기해 주신다.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이 좁은 쪽방을 떠나셨지만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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