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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솔/까/말]열네번째이야기, 참을 수 없는 ‘생명존중’의 가벼움: 장애여성의 선택에서 드러나는 재생산 정치

참을 수 없는 ‘생명존중’의 가벼움: 장애여성의 선택에서 드러나는 재생산 정치


 

  장애여성공감(부설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황지성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은 누군가(종종 그 사람의 집안 내력을 포함해)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나 학벌 등을 가리키는 말로, 이와 비교해 너무나도 평범한 나 자신을 위안하는 일종의 유머였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우월한 유전자’는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질’과 같은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MB정부 집권 하에 냉혹한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위세를 떨치면서 아무런 사회적 보호망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자기 몸 하나 뿐이다. 키와 외모는 물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은 돈만 있다면 철저히 관리되고 변형될 수 있다. 미래는 변형 가능하다. 여기에 인간 재생산이란 것은 그 자체로 미래와 결부된다.


 

우리나라는 낙태를 처벌하지만, 임신의 지속이 모체나 태아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의학적 손상이나 질병이 있을 시 예외적으로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있다(모자보건법 제14조). 그런데 신체 ‘건강함’이나 ‘정상성’이 곧 자본이나 경쟁력으로 등치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장애나 질병의 개념 또한 유동적이 되고 있다. 하나의 예로, 구순열(선천적으로 입술이 갈라지는 안명장애로 일명 ‘언청이’)은 요즘같이 발달한 성형수술 기술이면 비교적 간단한 수술만으로 완치 가능하지만, 산전검사(초음파시술)로 5개월 무렵 태아시기에 발견 가능해지면서 대부분 낙태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저출산 시대’, 아이가 귀한 시대라지만 태아의 장애나 질병 여부에 따라 생명에도 계급이 매겨지고, 여기서 ‘장애’ 혹은 ‘건강함’의 개념은 신자유주의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필자가 활동하는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에서 2011년 상담했던 한 신체장애여성의 사례는 충격적이다. 그 여성은 성폭력으로 임신한 상황에서 임신주수와 장애로 인한 신체적 위험 때문에 낙태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수많은 입양기관을 알아봤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입양시설들은 저출산에 따른 국가정책 상 해외입양을 자제하고 있으며, 국내입양가족은 장애가 있는 부모의 아이를 입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여기서 장애의 유전가능성 여부나 실제 태아가 장애를 가졌는지 여부는 물론 중요하지 않다. 국내 입양하는 부모들로부터 선택을 높이기 위해 입양기관은 산모의 IQ, 학력, 기타 사회적 배경과 장애의 유무 등을 까다롭게 심사하며(일부 기관들은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임을 거부 이유로 들었다), 국내 입양부모들이 입양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의 ‘건강함’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장애여성의 임신, 출산, 그리고 낙태 등을 둘러싼 제반환경 역시 급격히 달라지고 있으며, 실제 장애여성 개개인은 더욱 더 첨예하게 그것들과 갈등하기도 하고 모순을 겪고 있기도 하다.

재생산을 둘러싸고 지속되는 불안


 

 장애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거나 아예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아직까지 일반적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장애라는 몸의 차이가 ‘의존성’ 및 ‘독립할 수 없음’으로 의미화 되고, 사회적 체계가 그들의 독립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장애여성이 혈연가족이나 공동거주시설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많은 경우 결혼이다. 그리하여 실제 수많은 장애여성에게 결혼, 임신과 출산은 삶에서 매우 절박한 과정이고, 이는 일반적 통념을 위반하는 것이다.


 

결혼 후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장애여성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인정을 받거나 가족 역할로 부과된 임무를 실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엔 지속적 불안이 따라온다. 장애가 있는 내 몸에서 ‘정상적’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아이를 ‘정상적’으로 기를 수 있을까와 같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예측불가능성 속에서 불안을 야기한다. 장애가 있는 아내이자 며느리, 그리고 어머니로서 태어난 아이의 장애여부는 자신의 가족구성원으로서 지위를 더욱 위협할 수 있다. 역으로 장애인 어머니를 두는 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책이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특히 장애가 있는)아이 양육은 현재 삶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과 아이 모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임신 중의 많은 장애여성이 산전검사에 더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산전검사 결과 태아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시 십중팔구 임신중지를 선택하고자 한다. 태어나는 아이의 ‘정상성’, ‘장애/질병’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장애여성에게 ‘낙태 선택권’을 더욱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선택’의 맥락은 다시 말해, 장애여성이 독립적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회적으로 거의 ‘강제’ 되다시피 하는 결혼과 출산, 양육(장애아동의 사회적 존재가치 문제를 포함해)의 문제가 실상 사회적 책임은 없고 오로지 장애여성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만 귀결되는 모순에서 구성되는 ‘유일한/선택지’인 것이다.


 


 

‘맞춤아기’ 기술과 정상/비정상의 기제 재생산


 

임신과 출산을 위해 병원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장애여성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의료기술과 장애를 가진 몸의 역동은 ‘정상성’에 대한 가치판단 문제와 결부돼 매우 첨예해진다. ‘생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발달한 의료기술은 한편으로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받으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고, 일정정도 그러한 기대에 부응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질병과 건강의 개념이 급진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질병의 치유, 건강한 생명의 탄생 등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도 자유로운 소비와 선택의 장으로 포섭됐다. 그리하여 철저한 자기계발의 사명을 띤 개개인은 미래와 결부된 재생산의 문제 역시 의료기술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날이 발달하여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산전검사 또한 이러한 정치경제․문화적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그러나 산전검사를 통해 태아에게 이상이 발견됐을 시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는 것은 생각해볼 지점이다). 소위 ‘맞춤아기’ 기술로 알려진 착상전유전진단(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 PGD)은 체외수정을 통해 생성한 배아를 유전자검사를 통해 선별해 내는 기술이다. 배아단계에서부터 유전적 장애나 이상이 발견됐을 시 ‘폐기’ 가능하다는 면에서 태아의 낙태와 같은 성격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전적 성격의 장애를 가진 여성에게 재생산적 선택지가 넓어졌다고 진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태어나는 아이의 ‘정상성’을 둔 장애여성의 선택은 이미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제적 횡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이형성부전증이라는 유전적 장애를 가진 한 여성은 비싼 유전자검사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PGD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결국 골이형성부전증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았다. 이에 병원은 기술이 있는데도 이를 이용하지 않고 장애아를 낳는 ‘선택’을 한 그 장애여성을 비난했다. 임신 중에는 태아보험 가입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애를 지표로 아이가 장애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근거를 들어 보험회사로부터 태아보험 가입을 거절당한 것이다. 더구나 골이형성부전증 장애는 진단․치료기술 또한 거의 계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살면서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몸의 고통은 더욱 끔찍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결국 발달한 의료기술은 정상/비정상의 기제를 강력하게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정상성’의 선택을 사실상 ‘강제’하고 있다. 장애아 출산을 예방할 수 있는데도 이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영원한 ‘비정상’이 되어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선택’으로 구성된다.
 


 


 


 


 

장애여성의 선택에서 진정한 ‘생명존중’의 의미 되새겨야


 

임신중지와 여성 재생산권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각축할 때마다 재생산권리 그리고 생명의 범주를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와 같은 문제가 매번 난관에 봉착하는 듯하다. 특히 임신중지 논의에서 항상 대립하는 양상을 띠는 것은 ‘여성의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이다. 재생산과 관련해 여성의 인격, 선택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태아의 지위를 임의로 재단하는 보수적 생명론자의 논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장애여성의 입장에서 (‘비장애’ 여성 중심의) 여성재생산권 운동이 불편한 것만도 아닌데 또 그렇다고 적극 한 목소리를 내기가 선뜻 어려운 지점이 있어왔다.


 

여성재생산권운동이 오늘날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변화하는 몸의 ‘정상성’, ‘건강함’에의 욕망, 그리고 그것과 교차하는 신자유주의적 ‘선택’, ‘자유’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오늘날의 정치경제․문화 논리는 더 많은 개개인들의 몸에 다양한 방식으로 침투해 들어가 자발적으로든 타율적으로든 ‘정상성’의 통제를 가하며, 이러한 통제의 기제는 ‘선택’과 ‘자유’라는 수사 아래 은폐되고 있는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볼 때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과 인식 범위에 따라 ‘정상성’을 판가름하며, 때문에 태아나 신생아의 ‘정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상이할 수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정상성’의 기준이 나날이 높아지고 새로워지고 있는 추세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재생산 통제 역시 유동적이며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와 관계된 모든 선택, 즉 장애를 가진 태아를 태어나게 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살게 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 모두의 책임은 오직 여성 개인의 ‘선택/결정권’이란 이름으로 짐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태어나는 아이에게 장애로 인한 고통을 대물림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렇지 않게 할 선택권을 엄마가 과연 가지고 있는가, 태아 단계에서 낙태를 선택하는 것과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를 죽게 내버려두거나 유기하는 것 사이에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개별 장애여성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적극적으로 산전검사를 받고, 장애아를 낳았다고 비난하는 병원에 저항감을 드러내고, 태어난 아이가 장애를 가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죽게 내버려두라고 하는 주변 사람들과 맞서 치료해 살리는, 이와 같은 일견 모순된 선택들을 하고 있다.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생명론자의 논리는 오히려 우리사회 장애여성을 포함해 모든 여성을 억압하고 심지어 그들의 생명마저 위협하고 있다. 진정한 ‘생명존중’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제기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사회가 기본적 몸 경험과 선택에서 다양하게 모순을 겪고 있는 취약한 여성들의 구체적 현실에 이제라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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