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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부리님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에 관련된 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이 유명한 맑스 이야기는 사실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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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나온 맑스의 원본은
독일 이데올로기 1부 1장 (관념론과 유물론) 4번째 주제인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원본의 핵심은 관념론 비판과 유물론 주장이지요.
관념론에서는 어떤 생각이 먼저 있고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다음에 구체적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사람들의 구체적이 삶이 먼저 있고 그 삶 속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보지요.
따라서 관념론에서는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본, 노동이라는 삶의 모습이 나온다고 보지만
유물론에서는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 노동으로 나뉘어진 삶을 살다보니 자본, 노동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neoburi님, leeus님이 문제 제기한신 내용은 물론 타당하지요.
가부장 / 자본주의 / 식민지 사회의 억압적 관계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으나 저항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충실히 받아들이는 여성 / 노동자 /피식민 인민 (파농).
두 분의 주장은 사실 관념론적 논리에 가깝습니다.
억압 상태의 여성 / 노동자 / 피식민 인민은 저항적이어야 한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이런 관념론에 의하면 댓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듯이 다음과 같은 말도 가능하죠.
부르주아는 자본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 (의식 / 이데아)
정말 그렇다 (존재 1 - 이데아에 충실한 삶)
그렇지 않다 (존재 2 - 이데아를 배반하는 삶)
유물론을 통해 해석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억압받는 구체적 삶 (존재)
그 억압적 삶이 괴로우니까 그것을 깨부수려는 의식을 고취한 상태 (의식 1 )
고통스럽지만 그 구체적 삶을 바꾸려는 의식도 노력도 없고 심지어 억압 관계를 내면화한 상태 (의식 2)
문제 제기나 현실 인식이 날카로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의 맑스 인용과 해석은
인용구절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오해라고 생각해요.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의식 1을 갖지 못하고 왜 의식 2를 갖느냐 하는 문제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죠. 두 분의 지적도 여기에 해당되겠죠.
그 이유는 제도화된 교육, 언론, 관습의 기계들 때문이지만, 이 기계들의 작동에 회의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의식1은 없어지지 않겠죠.
억압받는 여성 / 노동자 / 피식민지 인민이 자동적으로 로보트처럼 의식 1을 갖도록 유전자 코드가 짜진 것은 아니겠죠. 각종 지배 장치 속에서 오히려 의식 2를 더 많이 가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홍세화 선생은 자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배반한다"라는 말을 했지요.
억압 받는 사람들이 의식 1을 갖는 것은 억압자 입장에서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었고 현재도 그렇죠.
독일 이데올로기 영어 번역본: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german-ideology/ch01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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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구절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오해라고 생각해요--> 용감한 자만이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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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정적인 대응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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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반응이죠. 덧글은 '나'는 알고(자만) '너'는 모른다는 가정(알고보면 무지)의 억측성 이분법을 짧게 지적했더니 못알아들으시는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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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맑스 인용문은 분명 관념론의 오류를 논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 좋은 논지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관념론의 오류에 빠진 걸 지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교적, 정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 neoburi님, leeus님의 글 애독자입니다. 착하게 살지 말고 독하게 살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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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에 저 유명한 문구를 모르거나 그 맥락을 오독할 사람은 거의 없는 거 같아요. 거슬리는 것은, 진보넷에서는 (맑스관련하야)'내가 읽으면 정독(로맨스), 넘이 말하면 오독(불륜)'이런 식의 '내가옳다'심성구조self-righteous mentality가 넘쳐난다는 것이죠. 진보넷 철학자들이(그람시가 말한 '만인은 철학자다'라는 의미에서) 보다 불경시련 읽기들과 사유들을 한다면 좋겠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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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제가 읽고 들은 한국 진보 담론에서는 다음 같은 등식을 유포시켜 왔지요."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 "모든 노동자는 저항의식을 갖는다"
왼쪽은 맑스가 한 말이고 오른쪽은 맑스를 읽은 사람들이 한 말이지요.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오른쪽 말을 가지고 왼쪽 말을 비판하는 것이에요.
"모든 노동자는 저항의식을 갖는다" 라는 가설이 잘못됐다고 해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말을 문제 삼는 것이 참 이상하다는 것이 저의 글 읽기입니다.
왼쪽 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의식, 관념, 언어 등이 생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적 의식, 관념, 언어 등을 구체적 삶과 떨어진 하나의 독립체로 생각하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지요.
물론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에 대한 비판적 글 읽기도 당연히 필요해요.
그러나 맑스가 본문에서 주장하지도 않은 가설을 가지고 원래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이런 글 읽기 방식을 훈고학적이니 독선적이니 하고 말하시면 할 말 없지요.
반대로 너부리님 글에 제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결국 비생산적인 감정싸움 밖에 안 되지요.
논쟁을 통해 서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넓혀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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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혹은 본질이라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들은 현상이죠. 근본테제를 정치동력으로 움직이게 할라믄, 겉으로 보아 깨는 것 같은 현상들을 통해서도 볼 필요가 있다는 지극히 심플한 단상. 본질만 믿고 현상을 보지 않는 것도 관념론이죠? 내가 볼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맑스[주의]의 핵심작업)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배반하는 현상들을 우리들 스스로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어라. 믿고 있는 것들만 쳐다 본다고 답이 안 나온지는 꽤 되었자녀라.진보넷에서 너부린 "비생산적인 감정싸움"도 나쁘지 않다고 봐여. 진보넷 블로거들을 눈팅해 보니 몰랑몰랑하면서도 맹신하는데도 있고, 무엇보다 나름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서 일을 끝내 '비생산적인 감정싸움'이 되게 하지는 않더라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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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혹은 본질이라고 과연 볼 수 있을까요?결국 본질과 현상이라는 서양 철학의 논쟁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본질이라는 것이 현상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까요? 본질과 현상을 굳이 나누는 이유는 무엇이고 꼭 그렇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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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매기님의 맑스읽기/맑스적용하기/맑스실천하기가 하나의 방식일 순 있겠죠... 하지만 저는,예를 들어, "맑스가 본문에서 주장하지도 않은 가설을 가지고 원래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요."라고 말씸허신 방식으로 맑스를 사고하거나 실천해서는 망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요... 혹시 훈고학 논문 쓸 때는 필요하겠지만요... 저한테 중요한 것은 '변화' '변혁'이에요... 맑스 속에서 뱅뱅도는 건 질색입니다. 이러면 아무리 설명이 잘됐다손 설득불가...
같은 맥락이지만 다음, "인용구절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오해라고 생각해요." 라는 지적도 참 고루해요... 역시 훈고학적이죠...(그리고 오해좀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시니, 저로서는 제 문제의식과 글 쓴 맥락에 대해서도 그런 방식으로 읽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 글의 맥락을 다 안읽으셨거나 오해하셨을 수도 있고요...)
저는 맑스가 라쌀에게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 라는 것을 맑스에게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맑스적 실천일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맑스가 라쌀에게 그렇게 말한 맥락은 자신의 이론을 뻔지르르하게 속류화시킨다는 뜻이었다는 것이 맑스의 '논지'라는 사실 때문에, 꼭 맑스가 라쌀과 토론했던 그런 장면과 비슷한 때에만 이 얘기를 써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관련한 테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맑스를 디립다 파면서 공부허시는 분덜... 제발 맑스가 벌떡 일어나서 "야 이 미친놈들아, 현실을 봐... 내가 이지경 되라고 그런 얘기를 지껄인줄 아냐?" 라고 통탄헐 일좀 고만했으믄...
전 필요하다면 맑스가 관념론이라고 부른 것들에 대해서도 수용할 거에요... 노나매기님이 그런 딱지를 안붙여도 쪼매는 알어요... 그런 딱지붙여서 남는 것 역시 망해가는 운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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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새 글로 올립니다. http://blog.jinbo.net/nonameggy/?pid=4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