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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너적이며, 슈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더 이상 퇴폐주의 세계관으로부터도, 신의 죽음으로부터 온 급진적인 형이상학과 그로부터 이끌어 내온 모든 결과들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투명성이기 때문이다.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중에서
*
우리는 지금 근대적 기도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근대적 주체관에 기초한 이론의 한계를 보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소비하는 기호들뿐이다. 그들의 소비에는 어떠한 선험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가 부여해준 의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호들 자체가 흔들리고 변화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혹자들은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증후라고들 한다. 이제 생산의 거울에 의해서 형성된 근대적 주체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으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보았다. 이 파괴 속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허무주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야기 했듯이 암울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판단한 현재의 상태이고 그것을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그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거울은 파괴됐지만 기호는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은 기호가 지시대상의 선행성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기호는 그 자체가 지시대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인 것이다. 기호는 자신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대한다. 어쩌면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공리계일 수도 있다. 결국 기호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우리는 한번 빠진 기호적 의미체계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암울함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호체계 속에서 계속적으로 상징적 저항을 하고 있으며 그 저항에 의해서 기호체계는 그 형태를 확대해 간다. 이것이 역사이며 인간사회의 흐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가 분석을 시작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 그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있는 기호의 의미체계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근대적인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주장을 이야기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의 개입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미를 계속적으로 발산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다.
-이재우, “장 보드리야르: 기호의 장벽과 상징의 저항”, <철학의 탈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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