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28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흑점
  2. 2006/05/27
    [영화]브이 포 벤데타.
    흑점
  3. 2006/05/11
    [인권영화제]혁명가를 만나다.
    흑점
  4. 2006/05/11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3)
    흑점
  5. 2006/05/11
    [공연후기]하이서울 락 페스티발
    흑점
  6. 2006/05/07
    [소설]살아남은자의 슬픔 - 박일문(3)
    흑점
  7. 2006/05/06
    [영화]피와 뼈(3)
    흑점
  8. 2006/04/25
    [영화]연애의 목적
    흑점
  9. 2006/04/22
    [영화]우드맨
    흑점
  10. 2006/04/15
    [영화]린다 린다 린다(2)
    흑점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 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심각한 물음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 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단순한 물음만이 진짜 심각한 물음이다. 그것은 대답이 없는 질문이다. 대답이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트이다. 달리 말해보자: 대답이란 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의 경계선을 긋는 행위인데,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런 대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란 뜻이다.)”


“전체주의적인 키치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당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경쟁자는 질문하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사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에는 이해가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가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자신 속에 Chaos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브이 포 벤데타.

에르메스님의 [이퀼리브리엄/브이포벤데타] 에 관련된 글.

 주위 사람들(특히 운동권들)이 이 영화에 대해 하도 언급을 많이 해서, 결국 나도 봤다.ㅋ

 

-

 에르메스는 이 영화를 “지리한 프로메테우스 세미나의 귀결. 전위의 조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라고 지적했지만, 나는 이 의견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브이라는 인물자체가 명백한 테러리스트이고, 헐리우드식 영웅들의 변조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 속의 대중들은 무지해서 브이의 tv연설 한번으로 바로 계몽되어버리고는, 브이의 가면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마치 중국 문화혁명에서 단 한가지의 붉은 책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홍위병의 획일성을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 것을 단순한 ‘전위조직으로의 귀결’로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이것을 “파시즘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도리어 재현하고, 폭력을 선과 악의 단순한 기준으로 갈라 손쉽게 이야기의 결론을 맺는” 이 영화의 태도라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 폭력의 판타지와 스펙터클 <브이 포 벤데타> 영화가 빠져든 파시즘의 함정.)
 물론 이 영화에서는 시민들의 궐기 후 “이제 어떻게?”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전에 대한 제시’에 주목했다. 영화에서의 혁명은 철저한 ‘브이’의 원맨쇼다. 하지만 정작 혁명의 그날에 브이는 죽는다. 그리고 죽으면서 그는 말한다. “나는 이전의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이다.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끌어 가야한다.”(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비슷하지 싶다.) 이것은 ‘이비’에게만 했던 말은 아닐 것이다. 이비가 말하듯이 “V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는 것”이다. 11월 5일 브이의 가면을 쓰고 그의 옷을 입고, 의회로 행진한 시민들은 결국 일제히 가면을 벗고 자신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브이는 한번 더 죽는다!. 이제 ‘브이’는 일종의 ‘상징’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영화는 주구장창 ‘브이’의 행적만 보여주지만 실제로 브이가 한일은 그리 많지 않다. 건물2개 폭파하고, TV에 나와서 뻔한 소리를 지껄였을 뿐이다. 나머지는 자기가 맘에 안드는 놈 죽이러 다닌다.(물론 그런 상황에서 작용하는 의미는 무척이나 다르겠지만 말이다.) 즉, ‘브이’는 실체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체게바라 티셔츠처럼. 이제 논의를 좀 깊게 들어가서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해 볼 생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동일한 감독 워쇼스키형제의 <매트릭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되어, 마침 요즈음 읽고 있는 책(<혁명을 팝니다>마티,2006)에 이 부분이 잘 정리되어있기에, 아래의 글은 그 책에 나오는 부분을 인용했다.
 



-

(앞은 생략).....매트릭스의 철학에 대해 쓴 글은 많지만, 대부분이 틀렸다. 1부를 이해하려면 네오가 흰 토끼를 보게 되는 장면을 아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그가 친구에게 책을 건넬 때 책등에 장 보드리야르가 쓴 <시뮬라르크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책의 제목이 보인다.
 <매트릭스>를 평한 많은 비평가들이 영화의 핵심적 개념-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환영일지 모르며, 기계들이 우리의 뇌에 감각을 입력시켜 마치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와 서로 교류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을 “당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회의론적 사고 실험의 업데이트 버전으로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매트릭스>는 존재론적 딜레마의 재현을 의도한 영화가 아니다. <매트릭스>는 60년대에 근원을 둔 정치적 사상, 상황주의자 인터네셔널의 비공식지도자인 기 드보르와 그의 사도인 장 보드리야르의 작품에서 최고조로 표현된 사상의 은유이다.
 드보르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이며,1968년 파리 봉기의 주모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이론은 간단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든 참된 경험을 취해서 상품으로 변모 시킨 뒤, 우리에게 광고와 대중매체를 통해 되팔았다.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이, 상징과 재현의 체계에 불과하며 자체의 고유한 내부 논리에 지배되는 ‘스펙터클’안으로 들어왔다.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될 만큼 축적된 ‘자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산다. 스펙터클은 필요해진 꿈, 즉 “궁극적으로 잠자고 싶은 욕망만을 표현하는 수감된 현대사회의 악몽”이다.
 스펙터클의 세상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계급기반 사회의 철폐는 구식이 된다. 이런 사회의 신진 혁명가는 “욕망에 대한 의식과 의식에 대한 욕망” 두 가지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한 필요와는 독립된 우리의 고유한 쾌락의 원천을 발견해야만 하고, ‘스펙터클’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애써야만 한다. 네오처럼 우리는 빨간약을 선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반란과 정치활동에 관한 한, 체제의 사소한 문제들은 변화시키려 해봐야 소용없다.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하지가 무슨 대수인가? 혹은 누가 직장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모두가 덧없는 환영일 뿐이다. 상품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어떤 사람들이 더 가지고 어떤 사람들이 덜 가진들 누가 상관하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전체, 사회전체가 백일몽-우리가 총체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중략)..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에게 필요한 것은 수십년 간에 걸친 원칙에 의거한 연구와 철학적 반성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힘든 방법을 택했다. 죽음만이 저 너머의 ‘실재’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편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은 환영의 망을 훨씬 더 쉽게 뚫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약간의 인식적 불협화음-우리주변에 뭔가 옳지 않은 것이 있다는 징후-만 있으면 된다. 드보르의 견해로는 “근원이 가장 낮고 가장 일회적인 혼란들이 결국 세계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바로 문화 훼방이라는 개념의 근원이다. 전통적인 정치활동은 쓸모없다. 그건 마치 매트릭스 안에서 정치제도를 개혁하려 애쓰는 것과 같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접속을 끊어버려 스펙터클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스펙터클의 세상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상징적 저항 행위들을 통해 인식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면 된다.
 문화전체가 이데올로기 체제에 불과하므로 문화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로 반문화의 근원이다. <매트릭스>에서 시온주민들은 60년대 이후 반문화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구현이다. 깨어나 기계의 폭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반문화 견해에 따르면 적은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자들, 문화에 순응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주류사회’이다.
 
-

 

 여기까지가 이 책에서 <매트릭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나아가 이 책은 이러한 반문화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
.....
 1960년대에, 베이비 부머들은 ‘체제’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반대를 선언했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탐욕을 비난하고, 매카시 시대의 원칙과 획일성을 거부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신세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된 걸까? 40년 후, ‘체제’는 별로 많이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소비자본주의가 수십년만의 반문화 반란을 겪고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모습으로 부상했다. 드보르가 60년대 초의 세상을 광고와 매체에 흠뻑 빠져있는 세계로 생각했다면, 21세기는 어떤 세상으로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수십년에 걸친 반문화 반란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반문화 사상이 기대는 사회이론이 허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지 않으며 스펙터클에서도 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단조롭다. 수십억의 인간들, 각자가 다소 그럴듯한 선의 개념을 추구하고, 서로 협력하고 애쓰며, 협력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단일의 체계는 없다. ‘문화’ 혹은 ‘체제’가 없기 때문에 문화에 훼방 놓을 수 없다. 모호하게 뭉뚱그려 말하자면, 때때로 우리가 공정하다고 인식하지만 대개는 명백히 불공정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제도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반문화 반란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고 확실히 비생산적이다. 반문화 반란은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의안들에 쏠릴 에너지와 노력을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점진적인 변화를 모조리 경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하 생략)

-<혁명을 팝니다>서론 중에서.


 

이후의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보시기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권영화제]혁명가를 만나다.

몇 일 전 밤샘 알바를 하고 오전에는 캠페인준비를 하고 낮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인권영화제를 보러 갔는데, 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자버리는 바람에 영화제에서 오랜만에 영준이 형과 ‘레드로자’님을 만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겨우 버티고 봤던 영화들은 별로 였고..

그래서 오늘 영화제를 보러갈까, 캠페인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종로로 향했는데,

좀 보다가 배고프면 밥먹으러 가야지 했던게 10시 넘어서까지 극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첫 번째 영화였던 <지하의 민중>은 계속 다른 생각이 나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두 번째, 홍콩WTO투쟁을 다룬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같은 경우에는 평소 같았으면 피했을(?) 나레이션으로 점철된 영화였지만 전 타임 때 고민했던 것이 집회방식에 관한 거여서 도움이 될까 해서 봤는데, 한국 사람들 너무 잘하더라...투쟁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는데 정말 울컥했다.

 

세 번째, <책임회피>는 버마에서 다국적기업과 군부독재세력이 손잡고  버마 민중들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버마 활동가가 군대를 피해 오지를 돌아다니며 그 증거를 수집하고 소송을 건다. 그 활동가가 갑작스럽게 자비를 들여 한국에 왔고, 예정에 없던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한국에 온 것도 '대우'가 똑같은 짓을 할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항상 장전된 작은 총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는데, 버마군대에 잡히면 고문 받고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말해버릴까 두려워서 자결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활동가 모두가 혁명가라고 생각하지만, 특히 그는 남달랐다.
그는 부드러우면서 강했고, 자유로우면서 열정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그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잘 안 되는 영어 쥐어짜서, 악수한번 할 수 있냐고,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그리고 악수를 하면서 지금 이 순간과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고, 내가 23살이라고 대답하자, 자기는 17살 때 ‘출발’했다고, 격려해주었다. 우리는 다시 악수를 했다.

 

 




진실을 외쳐라 (Speak Truth to Power), Kerry Kennedy Cuomo 지음

 

카사와 (Ka Hsaw Wa)

 

미얀마

 

-

나는 다른 학생 한 명, 주민 한 명과 함께 닷새 동안 정글 속을 걸어 카렌 지역으로 갔다. 마을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한 여성이 성기에 커다란 나뭇가지가 박힌 채 죽어 있었다. 마을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주민들은 군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동료를 치료해야 한다고 간호사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 1962년 이후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정권의 들은 그녀를 강간한 다음 살해했다.

-

나는 용기란 것이 힘에서 오는 건지 고통에서 오는 건지 잘 모른다. 언젠가는 어떤 사람의 증언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끔찍한 이야기였다. 어떤 활동가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려고 하다가 체포되었다. 군인들은 남편이 나타나지 않자 아기를 죽여 불에 구운 다음, 아기엄마에게 강제로 먹였다. 나는 싸워야 한다. 내가 겪은 고통은 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람들은 백배천배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

예전에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료들 중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손에 돈을 쥐고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무능력이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내가 등을 돌려 가버리면, 아무도 이 문제를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롤이 사랑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제 모델, 앨리스 리델.

 

-

"어느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것들이니까."고양이가 말했다.

"하지만 난 미친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아." 앨리스가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아, 그건 어쩔수가 없어." 고양이는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여기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거든. 나도 미쳤고, 너도 미쳤어."

"내가 미쳤는지 네가 어떻게 알지?"

앨리스는 화가 났지만 눌러 참으며 물었다.

"넌 틀림없이 미쳤어." 고양이가 자신있게 말했다. "안그러면 이런 덴 오지 않았을테니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6.돼지와 후춧가루. 중에서

 

 



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

-여왕의 오럴섹스 취미

 

 

1

 

나는 나의 백성들을 밑으로 데려갔다

 

절망과 불만을 구별하는 것이 오리앵무새의 과제였다

한 번도 단어 카드를 제대로 물어오는 법이 없었다

헤맸다, 왜일까

 

여왕은 안심이 되었다

 

태엽장치 돼지들은 성문앞을 오가며 쓰다 달다 말이 많았고

뒤죽박죽이 좀 심한 녀석들은 단칼에 혀가 짤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밤이 되면

여왕의 숲에 쓰러져 얌전히 코를 고는 것이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비둘기를 데려오는 시간......)

 

이쪽으로 가면 석 달 열흘 춤만 추는 광대 원숭이가 나오고

저쪽으로 가면 밤낮 겨울 봄 슬픔을 길어올리는 울보토끼가 살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나뭇등걸에 서서 체셔 고양이가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었다

 

 

2

 

나는 너무 강해서 백성들의 혀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 리차드! 이 매정한 사람....

소설광인 앨리스 부인은 탁 소리나게 책장을 덮었다

 

여왕이 보내온 수백 장의 카드 앞에서 오리 앵무새는 골머리를 앓았고

 

태옆장치 돼지들은 성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가 큰 녀석들은 변을 당했고 대부분은

배가 고프면 고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여왕의 숲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허공에서 장미를 따고

품속에서 죽은 비둘기를 확인하는 시간.......)

 

누군들 소리치고 싶지 않을까, 그런 순간이 오면

이빨을 부딪혀 박자를 만들어봐요

으들들 으들들들 자신을 좀 곱씹어봐요

궁정의 개구리 악사들이 숲 주위를 돌며 도토리를 두드렸다

 

한편, 앨리스 부인은 마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에 읽었던 본격 러브로망 제24탄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으므로

크로켓 경기에 참석하라는 여왕의 전갈이 묵살했다

여왕은 앨리스 부인의 목을 치는 대신

숲 중앙에 펼쳐진 눈물 호수에 검은색을 엎질렀고

 

겨울이 왔다

 

 

3

 

결국 모든 것은 진력이 나게 마련이다 크로켓이든 카드놀이든

 

앨리스 부인은 창밖으로 펼쳐진 눈세계를 바라보다,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는 스케이트를 어깨에 메고

생쥐들과 함께 눈물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혹한이 휩쓸고 간 숲 속의 고요한 아침

 

태협장치 돼지들의 함성도 오리앵무새의 구슬픈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술을 맞춰보는 시간)

 

이것 봐, 올겨울엔 아무도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어

눈물 호수 앞에서 앨리스부인이 소리쳤다

칼자국 하나 없는 이 빙판 좀 봐!

 

그녀는 생쥐들과 함께 빙판을 내달렸다

 

언제나 그렇듯, 왼편은 원숭이 오른편은 토끼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지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

구름을 흔드는 웃음소리,

하늘에 걸린 체셔 고양이의 얼굴

 

스케이트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물이 얇게 배어나왔고

나쁜 냄새가 났다

 

 

* 이탤릭체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공연후기]하이서울 락 페스티발

대추리 때문에 우울한 마음을 달랠 겸,

이라는 핑계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락페스티발을 다녀왔다.

 

공연장안에서 담배를 못피우게 해서

-담배불을 붙이자 마자, 검은 양복입은 아저씨가 달려오는 시츄에이션-,.-

하이~튼 하이 서울...하면서 욕하다가,

그날이 어린이 날이라 그런지 주위에 아이들이 많아서 참았다.

 

짧게 나마 후기를 남기자면,

 

뷰렛은 뷰렛답게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었는데 중간에 "락은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의 음악입니다."라는 멘트에 흥이 확 깨버렸다.

 

델리스파이스는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는데 사운드가 별 차이 없어 왜 했나 싶더라.

 

사실 그날 공연에서 가장 기대했던건 '못'과 푸른새벽 한희정의 듀엣이었는데,

그냥 따로하지 싶었다. 같이 부른 '스무살'은 도저히 못 들어주겠더라.

 

이외에도 여러 공연이 있었는데, 잘 기억은 안나고,

그중에 가장 인상에 남은건 '강허달림'이라는 연륜있는 여성이 부르는 블루스와

'이상은'이었다. 이상은의 공연은 실제로 처음보았는데,

무심한듯 하면서도 그 특유의 아우라가 있더라.

 

앵콜곡으로 '언젠가는'을 들으면서 담배 피우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이런게 인상에 남은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은건가 싶기도 하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설]살아남은자의 슬픔 - 박일문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베르톨드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어차피 '라라'처럼 살 수, 혹은 죽을 수 없을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강해져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피와 뼈

(스포일러 전혀 없음.)

 

광화문에서 열린 평택촛불집회 갔다가 돌아와서 꿀꿀한 기분에, 꿀꿀한 영화나 볼까 해서, 이 영화포스터에 다케시아저씨 표정이 만만치 않게 꿀꿀했던 기억이나, 보았다가 제대로 꿀꿀해졌다. 참새 짹짹, 돼지 꿀꿀.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그나마 겨우 얻을 수 있는거라고는, 어차피 구원 따위 없다는 거다.

생각이란건 하면 할 수록 하지 않는게 좋다.

언젠가 누가 나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태어나고 싶냐고 물었을때,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자살은 구원도 도피도 아닌, 죽는거다. 죽는다는건, 그냥 죽는거다.

쓰레기통에서 아무리 잘나봤자, 잘난 쓰레기다.

그래, 태어난게 죄라면 죄다.

 

오오냐, 그렇다면.

이 모든 괴로움, 외로움, 서러움, 더러움들 다.

꾸역꾸역 입속에 쑤셔 넣어, 우걱우걱 씹어서, 꿀꺽꿀꺽 삼켜주리다.

그리하여 나, 무럭무럭 자라나리라.

 

 




No Religion - 한대수

 

No religion can ever heal you
No thoughts nor pain can ever release you

It's just a photograph a photograph of ancient summer's
breeze Life's a mirage
No Marx nor Lenin can ever free you
NO stocks nor bonds can ever secure you
It's just a stream of tears of young girls virgin
fears Life's a mirage
No cause or might can ever assure you
No Tao no how can ever teach you
It's just a dusty trail of old man's broken dreams Life's a mirag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연애의 목적

(* 늦게나마, 듀나님이 말한 의무감을 실천(?)하고자 한다.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봤겠지만.흠흠.)

 

몇 일간 계속 한 심각하는 영화들을 봤다. 오랜만에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은 나는, 머리나 식힐 겸 가벼운 영화 하나 보자는 생각에 <연애의 목적>을 보았고, 덕분에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나는 영화 중후반까지 이유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감정 이입은 커녕, 도저히 정이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이 문제를 사람과의 관계와 소통의 문제로 '변질'시키고, 결국엔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이를 '정당화'한다. 영화 후반부에서야 이유림이라는 인물을 겨우 이해하게 되고 그를 동정하게 된다. 영화의 꽤 높은 완성도와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는 이 과정에 큰 힘을 보태준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무서움' 이다.

 

사족1. 이 영화에 대한 글들을 찾아보면 별 쓰레기 같은 것들이 다 있다. 그나마 읽어볼 만한 글은 이거다.

 

사족2. 이유림 같은 인간들이 학교 선생이랍시고 거기 붙어있는 한, 나는 설령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다고 해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이유림보다 더 한 인간들이 학교에, 이 사회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등학교 자퇴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좀 더 일찍 그러지 못한 것을, 그리고 자퇴이후에 나의 행보를 조금 후회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족3. 영화에 관한 사진을 하나 올릴까 하다가. 도저히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우드맨

(스포일러가 잔뜩 있지만, 영화를 안보셨으면 글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거에요.아마)

 

 

이 영화는 '특수한 상처'를 가진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다른 상처들을 가진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남자가 가진 ‘아동성애증’(pedophilia)이라는 특수한 상처는 현실 경험 속에서 수시로 과거의 기억들을 플래시백시키며 그를 괴롭히고, 동시에 그의 내면적 욕망과 항상 충돌한다. 주변 환경(직장동료, 그를 감시하는 경찰관)들 또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특히나 소아성애증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혹은 공포적으로 강박적인- 미국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1시간 2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동안 영화는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동성애증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우호적으로-무리하게 하다가는 자칫 엄청난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래도 영화는 균형을 잘 잡은 편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 집중한다. 신인 여성 감독인 Nicole Kassell의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연출은 이를 꽤 잘잡아 낸다.
어떤 사람들은, 월터가 공원에서의 로빈과 대화 장면을 “다시 범행을 저지르려고" 했던 것으로, 캔디맨을 구타하는 장면을 “자기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하던데, 나는 이에 별로 동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머리카락 냄새 맡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가 여동생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서 12년동안 감옥에 있었지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그때 일을 고백하면서 '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냐'라고만 할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타인에게는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의 동생도, 극중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했던 '로빈'도 그랬듯이. 그래서 그는 '캔디맨'을 때림으로써 인간 대 인간으로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신을 (좀 과격하게ㅋ)반성했던 것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은 캔디맨이 아이들을 꼬시는 장면을 보면서 "만약 저 차에 타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그 아이가 원해서 일거야"라고 하며 외면한다. 공원에서 '로빈'에게 자신의 무릅에 않기를 권유(?)하는 장면도 그리 폭력적이지는 않다. 물론, 권력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그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닌 '폭력'으로 작용할수도 있다.) 

 

 케빈 베이컨과 그의 실제부인인 키라 세즈윅의 연기도 좋았지만, 잠깐 출연하는 아역배우, Hannah Pilkes의 연기도 만만치 않다. 특히 공원에서 케빈 베이컨과의 대화 장면은 영화전체를 통틀어서 감정의 떨림이 극대화된 장면이다. 그녀는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목소리와 눈빛을 가지고 있다. 역할에 힘입은 바가 크겠지만. 한쪽 얼굴을 찡그리면서 “11살은 싫어요.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나이일 거에요.”라고 말할 때(물론 영어로ㅋ)는 가슴이 콩닥거리더라.ㅋ

 

삶을 관통하는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족1. '성해방'이 되었을때, pedophilia도 포함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특성상 '권력관계'가 작용하지 않을수없으니.

 

사족2. 얼마전 한국에서 연속적으로 아동성폭행 사건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놈 꼬추한번 만져보자"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그런데 "요년 보지 한번 만져보자"는?)  아동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고 충분히 필요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전자족쇄""사형제도"등에 대한 논의 또한 이성적으로(제발!!이성적으로)되어야 한다. 사람을 가장 비이성적으로 만드는건 '공포'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영화]린다 린다 린다

 (스포일러가 있지만, 영화를 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되면서도 이런데 예민한 사람들은 괜히 후회하지 말고 그냥 읽지 마세요ㅋ)

 


 

최근에 우울할 때 마다 처방전으로 보았던 일본식 코미디 영화들 -박치기, 스윙걸즈, 거북이도 의외로 빨리 난다, 메종 드 히미코, 별이 된 소년 등- 이 나름의 효과들을 꽤 거두었기에, '린다 린다 린다'를 보게된 것도 순전히 이러한 맥락의 무척이나 실용적인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다지 발랄한 영화는 아니었고, 나는 영화를 보다가 술 먹자는 연락에 나간 것이 한번, 무척 피곤한 상태에서 보다가 졸아버린 것이 한번, 그래서 결국 세번에 걸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서 축제 공연을 위해 3일전에 급조된, ‘파란마음’이라는 팀명을 가진 후줄근한 스쿨밴드에 관한 내용이다, 라기보다는 그냥 영화가 '스쿨밴드 그 자체'이다. 영화전개는 실제 스쿨밴드가 공연을 준비하는 연습과정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다. 영화 속에서 그나마 스펙타클 한 사건이라고는 공연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비 맞으며 열심히 뛰어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마지막 공연 날까지 그녀들을 조용히 따라가며 지켜보는데- (정말 조용히! 극중 방송반이 캠코더로 찍은 화면을 제외하고는 - 영화전체에서 클로즈업 샷이 내 기억으로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풀샷이고 많이 들어 가봤자 웨스트 샷 정도.) 그 마지막 무대 또한 그리 화려하지도 않다 -우연히도(?) 비가 내려주는 바람에 그나마 사람들은 꽤 있었지만서도.
 

이거 오늘 한국에서도 개봉 된다고 하던데, 정말이지 "와~배두나다~"하면서 몇몇 극장에 걸렸다가 일주일 만에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질 운명을 가진 그런 영화다.
 

만만치 않게 후줄근한 (대)학교밴드를 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장면에 그때의 일들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영화에서 나오는 ‘블루하트’라는 그룹의 음악도 꽤 괜찮아서 조만간 조조로 다시 보러 가 볼 생각이다.

 

사족1. 써놓고 보니 정작 영화 얘기는 별로 없다. 뭐 형식을 갖춘 평론을 쓸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사실 그럴 능력도 없고ㅋ). 위와 같은 이유로 영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 번역도 문제가 좀 있었던 거 같고. 조만간 극장에서 보고 다시 써봐야겠다.

 

사족2. 올릴만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 네이버에서 '린다 린다 린다'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잘 어울린다' '나는 달린다' '비가내린다' 와 같은 전혀 생뚱맞은 것들이 종종 눈에 띄인다. 그 중 최고는 '이거다'.ㅋ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クソッタレの世界のため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빌어먹을 세계를 위해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全てのクズ共のために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모든 쓰레기들을 위해서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僕や君や彼等のため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나와 그대와 그들을 위해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明日には笑えるように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내일은 웃을 수 있도록


世の中に冷たくされて 一人ボッチで泣いた夜
삶을 살다가 냉정한 취급을 받고 외톨이인 채로 울었던 밤
もうだめだと思うことは 今まで何度でもあった
이제 틀렸다고 생각한 적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지
眞實の瞬間はいつも
진실한 순간은 언제나
死ぬ程こわいものだから
죽을 만큼 무서운 법이니까
逃げだしたくなったことは 今まで何度もあった
도망치고 싶어진 적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어


 *Repeat


なれあいは好きじゃないから
한통속이 되는 건 싫으니까
誤解されてもしょう

誤解されてもしょうがない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어

それでも僕は君のことを いつだって思い出すだろう
그래도 나는 그대를 언제라도 생각해내겠지

 *Repeat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クソッタレの世界のため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빌어먹을 세계를 위해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全てのクズ共のために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모든 쓰레기들을 위해서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一人ボッチで泣いた夜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외톨이인 채로 울었던 밤
終わらない歌を歌おう ……あつかいされた日日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 취급 당한 날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