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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22
    피임은 남녀 공동의 몫이다.(1)
    판다
  2. 2006/07/22
    동정심 따위는 버려라
    판다

피임은 남녀 공동의 몫이다.

 

피임으로 여성의 몸이 혹사당하고 있다.


   여성의 피임 합병증: 취약인구집단을 설정하는 것은 그 집단이 특수하게 건강에 취약한 이유를 분석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피임 합병증에 취약한 이유를 분석할 필요가 있나? 여성이니까 피임을 하다보면 합병증이 유발될 수도 있는게 아닌가? 내분비학 시간에 우리는 성호르몬에 대해 배운다. 그때 산부인과 수업과 비뇨기과 수업이 있는데, 산부인과 수업 중 두시간이 모두 여성의 피임과 가족계획에 할애되며 최소 십수가지 피임법과 그 장단점에 대해 배우게 된다. 반면, 비뇨기과 수업에 피임에 대한 얘기는 “공인된 남성 피임 방법은 콘돔착용과 정관수술인데 최근 호르몬 요법이 개발 중이고 미래의 남성피임요법은 호르몬제가 될 것이다”가 전부이다.


  왜 여성만 피임을 저렇게 열심히 해야하지? 물었더니 주변 친구들은 “임신은 여자가 하니까”, 혹은 “대신 남자는 콘돔을 쓰잖아”라고 한다. 임신 자체는 여자가 하지만 두사람이 함께 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콘돔은 피임률이 70~80%로 실패율이 클 뿐만 아니라 콘돔 사용으로 인해 어떤 합병증이 유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피임 합병증과는 무게가 다르다. 대표적으로 에스프로젠-프로게스테론 복합 피임제의 가능한 부작용으로는 프로제스틴에 의한 HDL 감소 및 LDL 증가, 당뇨 악화, 혈전생성 촉진 등이 있고 고혈압 환자는 사용해서는 안되며 흡연여성에서는 뇌졸중의 위험이 있다. 자궁내 장치는  방선균의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장착된 상태에서 임신이 되면 패혈성 유산, 조기 파수, 조기 진통/분만이 일어날 수 있다. 이외에도 에스트론제제, 살정제, 여성용 콘돔, 다이아프램, 자궁경부캡 등의 방법에 대한 수십가지 합병증이 명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피임, 그리고 피임의 실패로 인한 인공유산으로부터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고통은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다.


  임신도, 피임도 두 사람 모두 원해서 하는 것인데 왜 피임법은 유독 여성만을 위해 그리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이는 남성 피임법이 본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피임은 여성의 몫이다’라는 사회적 인식이 성에 대해 여성의 몸에 통제를 가하고 남성은 비교적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위에 세워졌고, 바로 그 인식이 의학지식의 생산양상을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면서 남성 호르몬제제가 개발되고 있는데 주로 테스토스테론제를 복용함으로써 LH와 FSH를 억제하여 정자형성과정 억제하는 것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 이 방법은 심각한 부작용이 없고 순응도가 높으며 호르몬을 중단했을 경우 정자형성이 이전상태로 회복되었다[2]. 문제는 정자형성이 완전히 억제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LH, FSH 분비 억제제나 프로제스토젠을 첨가하였을 때 정자형성감소효과가 현저히 향상되었다. 한달에 한번씩 맞는 주사제 호르몬도 개발되었는데 임상시험 참가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3], 1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호르몬제제 사용 후 정자농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이 보고되었다[4]. 남성 호르몬 피임제의 현실화를 예견하는 보고도 눈에 띈다[5]. 이는 적어도 남성 피임법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충분히 개발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동안 남성피임제가 부재했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분야의 연구가 특정한 사회인식과 그로 인한 남성피임의 수요의 부족이라는 자본주의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데올로기와 생산양식의 영향을 받음).


  의학연구는 개별적으로 보면 '나름' 과학적인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철저하게 사회적 영향하에 놓여있고 비가치중립적이다. 피임에 있어 남성은 건강을 해칠 일이 거의 없는 반면 여성이 ‘취약인구’가 된 것은 임신과 피임이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의학과 의료을 지배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피임이 남녀 공동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었다면 남성에서도 다양한 피임법들이 개발되었을 것이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감수하는 피임법들이 요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의학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는 의학이 독립적인 과학이 아님을 인식하고 좀 더 많은 사회철학적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참조
[1]Amory JK. Male hormonal contraceptives. Minerva Ginecol. 2006 Jun;58(3):215-26

[2] Meriggiola MC, Cerpolini S, Bremner WJ, Mbizvo MT, Vogelsong KM, Martorana G, Pelusi G. Acceptability of an injectable male contraceptive regimen of norethisterone enanthate and testosterone undecanoate for men. Hum Reprod. 2006 May 26; [Epub ahead of print]

[3] Liu PY, Swerdloff RS, Christenson PD, Handelsman DJ, Wang C; Hormonal Male Contraception Summit group. Rate, extent, and modifiers of spermatogenic recovery after hormonal male contraception: an integrated analysis. Lancet. 2006 Apr 29;367(9520):1412-20.

[4] Wu FC. Hormonal approaches to male contraception: approaching reality. Mol Cell Endocrinol. 2006 May 16;250(1-2):2-7. Epub 2006 Mar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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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 따위는 버려라

 
보건의료학생의 진료봉사활동-사회문제의식과 연계되어야  한다.                                                                                         

                                                                              

  매년 TV에서 하는 소아암 기금마련행사에서 삭발한 창백한 아이들이 골수 검사를 받으면서 비명을 지른다. 그 고통스런 모습에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 “우리 ‘영희’가 빨리 나을 수 있게 모두 마음을 모아서 도움을 주세요“ 라는 진행자의 열정적인 멘트에, 화면 왼쪽 상단에 일원단위로 올라가는 기금액수를 보며 우리는 하나 둘 씩 전화기를 들고 적은 액수지만 기쁜 마음으로 입금을 한다.                      

 

 보건의료학생이라면 진료봉사활동에 매력을 느끼고 많이들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방학이면 대거 진료봉사동아리나 국내, 해외 캠프를 통해 봉사활동에 나선다. 빡센 일정이라도 하고 나면 가슴 뿌듯하고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다. 의료시설에서부터 소외된 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위해,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노숙인들을 위해,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마음이 따뜻한’ 우리들은 ‘불쌍한’ 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내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더욱이 진료를 받은 ‘불쌍한’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친절히 그들을 진료해준 의료인들에게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며 연신 허리를 굽힌다. 그러기에 봉사자들은 더욱 더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 훌륭한 자선활동에, 나는 딴지를 걸고자 한다. 

         

 왜 가난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은 ‘운 좋게’ ‘친절한 타인‘의 동정심 어린 베품을 받아야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돈도 없고 운도 없으면 그냥 아파야 하나? 돈이 없으면 누군가의 자선에 의해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당연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야 있지만 '현실적으로' 환자를 돌려보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기부와 진료봉사이다. 과연 그런가? 그보다도 경제력과 상관없이 치료기회가 보장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을 계속 양산해 낼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동정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기부와 봉사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치료 못 받는 ‘딱한’ 사람들을 ‘자선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누구나 건강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금마련 행사와 자원봉사자 모집은 도움을 받는 대상이 불쌍해 보일수록 성공률이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질병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여 표면적 증상이 경미해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환자들은 (HIV 감염 환자와 같은) 도움으로부터 배제된다. 게다가, 기금마련과 진료봉사는 질병 발생 후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서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민에 소홀하기 쉽다. 겨울에 따뜻하게 잘 곳이 없다면 당연히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오늘 그 사람에게 약을 준다고 해도, 머물 곳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다시 아플 수밖에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래서 시인 브레히트가 노숙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선사업가를 두고 “그러한 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네, 그러한 식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네” 라고 노래한 것이다.                                

   

 기금마련과 진료봉사활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연대활동으로서의 진료봉사도 얼마든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앞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 없이 이루어지는 맹목적인 기부나 봉사활동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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