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씨는 기자같지 않고 참 순해요..."

 

순하다는 말, 난생 처음 들었다. 월요일 출근길에도 나는 순한 사람이야 생각하며 날듯이 걸었다. 순한 상태는 정확히 오전 10시 17분까지만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야근을 하면서도 흐뭇하다.


순. 순.

순,  이 글자가 이리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아이가 생기면 순아, 부를 수 있게 이름 짓고 싶다.

지순. 조순. 유순. 서순. 홍순.

이제보니 조순이란 사람이 있고 박 시장도 순자를 쓰는구나.

학교의 고남순. 이순신. 박휘순. 유관순.

순두부처럼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아이가 되면 좋겠다.


순하다는 말이 나를 이리도 기쁘게 할 줄이야. 도장의 한 여선배가 해준 말이다. 나도 순한 사람일 수 있구나, 눈시울이 시큰할 정도다. 더 순한 사람이 돼야지 룰루랄라 하고 있다. 

 

수 년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똑똑하다는 말이었다. 2년 전, 같이 입사를 준비하던 한 선배가 "난 어릴 땐 똑똑하다는 말이 좋았는데, 이제는 예쁘다는 말 듣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예쁘다는 말이 성과나 업무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더 좋아진다니? 한 1년 전쯤, 누가 어떤 사람이 좋냐고 묻자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좋고, 싫은 사람은 일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불성실하거나 일을 척척 해내지 못하는 이와는 착해도 친구하기 싫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똑똑하다는 말에 별 감흥이 없다. 대신 예쁘다는 소리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일 잘한다, 똑똑하다는 류의 말을 들어도 무덤덤하다. 여전히 순하다와 상반되는 내용의 말들을 듣기도 하지만, 생활 전반에서 적당히 게을러지고 느긋해진 것을 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고, 일 때문에 이따금씩 상상도 못하게 괴로운 일을 겪으면서 일보다 내 심신 편한 게 중하다 싶었고, 일을 잘할수록 일이 몰린다는 진리를 직접 체현하고 싶지 않고, 아무리 일을 잘해도 비열하고 거짓되고 겸손하지 못한 어느 선배가 우습고 불쌍해 보이면서 등등...

 

순하다는 말 한 마디에, 오랜만에 초딩처럼 벅차게 기쁜 나를 보며 깨닫는다. 이제 내가 깊이 열망하는 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자격이 있는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인 것 같다.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4/21 21:49 2013/04/21 21:49

Trackback URL : http://blog.jinbo.net/peel/trackback/413

  1. 비밀방문자
    2013/04/25 16:09 Delete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Previous : 1 :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 222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