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1/12/01 11:09

성무일과, 혁명적 일상으로의 초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성무일과에 대한 글을 쓰고싶습니다만, 그것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A.G. 마르티모의 『시간전례』(가톨릭대학교출판부)를 따라잡을 수 없고, 성무일과를 전염시키는 효과에 있어서는 로버트 벤슨의 『중단 없는 기도』(IVF)를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위의 역사적 명저 두 권을 꼭 읽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저의 관심은 앞의 두 저자분들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관심은 2009년 말 성모송 묵상인 「마리아의 도전」을 쓰던 때의 관심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관심이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때부터 였던것 같습니다만, 결정적 순간은 2008년에 찾아왔습니다. 촛불의 밤은 꿈들의 향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권력의 형태 곧 인간관계의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꿈들이 현실을 압도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노래와 춤과 촛불. 그것은 가히 현실을 무시하고 나타난 천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가르쳐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고, 다른 세계의 파편을 옆사람의 초에 옮겨주었습니다. 그 날의 우리는 '마치 꿈 꾸는 것 같지'(시편 126:1) 않았던가요!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가 꿈과 같은 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유목민의 후손들은 어느날 갑자기 현재와 미래/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사건들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숨통을 죄던 지배체제가 미증유의 사건들로 인해 삽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이것은 출애굽기 7-13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책은 그 일을 일으킨 힘은 바로 '주님의 손(15:6)' 이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집트는 그들에게 현실이었고 그것이 극복된 세상인 하느님 나라는 이들에게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꿈이 현실을 압도하며 나타났습니다. 잠시이지만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으로 하느님의 손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꿈의 클라이막스!- 사건 이후 이들은 다시 현실 속으로 던져집니다. 마치 촛불의 밤들 이후 다시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진 우리처럼 말이죠. 하느님의 백성들은 다시 '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는 무효하다고 선언되었으나 그들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라는 현실이었습니다.

 

성무일과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새로운 현실인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되었지만 제국의 '현실'에 의해 형성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를 위하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계명들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신명기 6:24)".

 

그가 말하는 '오늘'은 현실을 압도하고 나타는 하느님의 손이 역사하는 꿈의 시간입니다. 그 꿈의 시간 속에 계속 살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일단 그 꿈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6:21-25)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의 주기를 그 이야기에 비추어 재구성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계절절기들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여 출애굽이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일년 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과월절(유월절), 추수절(칠칠절), 초막절 등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은 상징적 예전들과 함께 지켜지고, 예전들은 출애굽 이야기와 연결되어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집트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현실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물려받은 초대교회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오늘'이 출애굽과 관련된 꿈의 시간이었다면 초대교회에게 '오늘'은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질병, 배고픔, 사회적 장벽등이 사라지는 꿈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선조들처럼 이 꿈의 시간이 로마제국이라는 현실을 압도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시간을 재구성 했습니다. 그것이 대림절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입니다. 그 시간 안에서 원래 존재했던 축제일들이 예수의 생애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축일들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신 축제와 관련되었던 동지는 이제 빛이신 예수의 오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재사회화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이미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의해 사회화 되었습니다. 이 사회화의 내용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권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의 항목을 포함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쟁을 통해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협력하는 것을 기뻐하고 함께 사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 통장의 잔고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믿던 사람이 그런 것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국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던 사람이 이제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무일과는 메시야 예수를 통해 재구성된 시간질서의 가장 작은 단위 입니다. 우리의 1년은 그의 탄생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일생을 경축하는 하나의 큰 단위이고, 매주 금요일에서 주일에 이르는 시간은 수난과 부활을 찬양하는 작은 단위이며,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그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 삶을 의미합니다. 성무일과는 이것을 더 철저화 하여 하루의 삶까지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통치자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침기도에서 우리는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하고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라는 말로 화답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하느님, 우리를 어서 구원하소서'하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잠을 깨는 순간 '현실'속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이 이 현실을 압도하고 구원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시기를 희망합니다. 그 후에 아침기도는 기쁨의 찬양인 시편 95편 혹은 100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쁨은 두려움을 내쫓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메시지를 넘겨 주엇습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꿈의 시간 안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낮기도는 지속적인 인도와 보호에 관한 시편으로 시작되어 감사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아침기도를 통해 대안적 현실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성공회 기도서가 낮기도용 성서 본문으로 제안하는 구절중 하나인 말라기 1:11은 하느님의 통치를 현재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무일과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장차 임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예수 안에서 이미 현실이 된 '다른 세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질 녘에 드리는 저녁기도는 아침기도와 같은 시작송가로 시작하지만, 시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인 '은혜로운 빛이여(Phos Hilaron)'라는 찬양시를 낭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희망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대개 저녁을 빛이 사라지는 시간으로 체험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 어둠 속에서도 참 빛이신 예수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 안에서 루가(누가)복음의 찬양시들이 이어집니다. 가난한 여성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세상에 나타날 다른 미래를 기대하며 기쁨의 탄성을 외치고, 노쇠한 시므온은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의 등장을 보며 타는 목마름으로 버텨온 수십년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녁기도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에게 물려준 이들이 해 지는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다는 점(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창세기 1:5)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밤기도는 우리가 여전히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이 그 한계를 탓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한순간 스쳐지나간 빛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만 어둠의 습관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꿈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자주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에 굴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으로, 세계의 미래를 위한 모델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기도는 우리를 책망하는 대신 위로합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를 가리우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혁명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벽과 싸우다 지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우리는 촛불의 밤들을 통해 앞서 간 성도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출애굽, 예수와의 만남, 촛불의 밤들은 안병무의 은유를 빌리자면 한 화산맥의 다른 분화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들을 거친 사람들은 꿈이 현실을 압도하는 순간들을 보았고, 그 순간을 항구적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도들을 했으며, 그 시도의 결과인 성무일과를 우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2008년 봄 어느 날 밤에 옆사람의 양초에 불꽃을 옮겨주던 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무일과는 그 촛불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증인들과 예수의 증인들로부터 그것을 넘겨 받았습니다. 그 촛불을 넘겨 받을 때에 우리는 계속 꿈꿀 수 있는 힘 또한 함께 넘겨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가히 혁명적 일상이 아닙니까?

 

 

201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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