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4/10/27 10:42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월간 복음과 상황 2014.10월호)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여정훈(혁명기도원 원장)

 

일터에서 성폭력에 시달리던 박 집사는 평범한 중형 감리교회의 속장(구역장)이었다. 그녀는 성폭력을 문제 삼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사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는 농성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났다. 농성장에서 드린 예배를 통해 시편의 탄원 시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체험했다.
 

순복음교회 장로의 딸이었던 한 자매와, 군 생활 이후 20여 년간 교회 문턱을 밟아 본 적 없던 한 형제는 장사하던 건물에서 강제퇴거를 당한 후에 서울시와 조합의 책임 있는 대응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농성장에서 드리는 부활주일 예배에서 세례를 받았다. 투쟁을 계속할수록 그동안 남 이야기로 생각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기도와 말씀은 그들에게 2년 동안의 천막농성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혁명기도원’, 조금 수상한 이름의 연대
 

우리는 ‘혁명기도원’이라는 조금은 수상한 이름으로 위 두 곳을 비롯한 여러 현장들에서 연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파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가 되었다. 서로 농담처럼 “정교회만 오면 한국교회가 다 모인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개교회와 교파를 넘어선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농성장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몸은 함께 기도하는 이들의 모임이자 함께 만찬을 나누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매주 예배 후에 나누던 만찬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매주 신경 써서 음식을 장만했고, 어떤 이들은 집에서 만든 음식을 가져왔고, 어떤 이들은 오는 길에 간단한 먹거리를 사 오기도 했다. 먼 곳에서 택배로 막걸리를 보내준 형제도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경험은 아니었겠지만, 우리는 이 식사에서 오병이어를 체험했다. 광야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은 들에 있던 굶주린 갈릴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철거농성 천막에 모인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신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었다. 그 만찬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고, 하늘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았다. 거리 농성장에서의 예배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남았다.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나는 ‘낭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떠올리곤 한다. 낭만이라는 정서를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노래 가사 속 낭만이란 것은 조금 아프지만 달콤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 설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투쟁은 낭만적이다. 현장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고, 함께 물대포를 맞고, 함께 경찰과 차벽에 막혀 소리 지르고, 함께 단식하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때로는 개인을 초월하여 더 큰 무엇과 하나 되는 듯한 마음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아픈 동시에 아름다운, 아니 아프기에 찬란한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투쟁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경험들에 덧붙여 몇 가지를 더 경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예수를 찾아 온 갈릴리 민중들의 얼굴을 본다. 억울함을 풀어달라 호소하는 이의 목소리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음성으로 들리고,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의 폭력은 구세주의 등을 파고 든 로마 군병의 채찍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신앙체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공중 권세 잡은 자' 와의 싸움 중에 있다는 감각을 갖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신학자들은 이 경험을 “아남네시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 개념은 예배, 특히 성찬 성례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이 개념은 성찬기도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의 이야기들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말씀과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아남네시스)한다. 그런데 예수의 삶과 말씀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 세상에 침투하여 그것을 뒤집어 엎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그 나라의 삶을 살고, 그 나라의 성취를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우리가 과거의 인물인 예수와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미래는 온 세상이 초대 받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고, 제국의 폭력 아래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착취와 폭력을 방패삼아 평온을 누리던 이들이 심판 받는 날이다. 


우리의 낭만은 지나간 것에 대한 아련함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의 낭만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기대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투쟁 현장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낭만을 ‘종말론적 낭만’이라 부르려 한다.
 

 

투쟁의 자리에서 맛보는 기쁨
 

2011년 명동의 한 농성장에서 시작된 혁명기도원 정기모임은 청계천 옆 길바닥으로, 공사장 옆 농성장으로, 영업 중인 식당으로, 어느 부자동네 대로변으로 이어졌다. 마치 〈포켓몬스터〉에서 지우와 피카츄가 마을을 순회하며 친구들을 만나듯 우리는 각각의 현장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한 농성이 끝났을 때 그 친구들은 다음 현장에 위로와 축복을 전하는 이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만으로 채워진 사건은 아니다. 회심은 개인 안팎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심을 떠올릴 때에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투쟁의 기억들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의 전쟁은 종말론적 승리에 대한 약속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종말론적 낭만이 아니겠는가.

 

투쟁의 자리에서 만난 복음은 고난 중에서 기뻐할 힘을 주는 것이었고, 그 기쁨은 현장에서 현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수가 마을들을 순회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기쁨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예수에게도 낭만은 종말론적 승리의 비전을 향해 움직이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현장을 찾는 것은 남에게 위로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다. 위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현장에 연대할 때에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현장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마치 우기를 기다린 사막의 강처럼 활력을 얻어 꿈틀댄다. 바로 그곳에서, 탄원 시와 수난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종말론적 희망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다. 그 임재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당신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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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10:42 2014/10/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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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4/06/01 17:19

[묵상] 최저임금 1만원의 복음

루가복음 12:16-20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1.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100억의 연봉을 받고 삽니다. 그들의 수입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자기가 직접 생산한 것을 팔아서 번 돈입니까?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깨끗한 부자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기는줄도 모르고 빼앗기는 것이 우리가 세상의 현실입니다.

 

2. 저는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자는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월급 덜 주고, 수당 안 주면서 빼앗은 것들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노동자를 노예로 보고, 죽지 않을 만큼의 밥만 먹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평등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를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 우리 소명일 것입니다.

 

3. 작년에 저는 "최저 임금 만원, 성경에 써 있네" 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조:성경에 계시된 최저임금 만 원의 비밀, 만천하에 드러나다!)오늘 저는 그 때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을 넘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창고를 채운 이들을 심판하고, 그들의 창고를 털어 빼앗긴 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 그것이 복음적 실천이라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4. 오늘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활동가 권문석의 추모제가 있는 날입니다. 모든 노동자가 해방된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스럽게 빛날 것입니다.

주여, 별세한 이를 평안히 쉬게 하시며, 영원한 빛으로 비춰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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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1 17:19 2014/06/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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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3/07/23 11:02

성경에 계시된 최저임금 만 원의 비밀, 만천하에 드러나다!

*이 글은 2013년 7월 22일, 최저임금1만원위원회 1차 전원회의에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최저임금 만 원의 비밀, 만천하에 드러나다!

-최저임금 만 원, 성경에 써 있네

 

1.

  아마도 68 최저임금 1만원 대회 당일 아침이었다. 나는 보통의 토요일처럼 점심시간쯤 일어나 KBS1에서 하는 국악프로를 볼 생각이었다. 대회가 있는 학동까지의 동선이 도저히 엄두가 안 났기에 대충 성경공부 하러 교회 가는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그 날의 계획이었다. 하기로 한 공연은 지난번 회의에 참석한 쌔미가 하면 될 일이었다. 쌔미는 나보다 노래도 잘 하고 기타도 잘 치니까. 그리고 학동 앞의 자리는 서울에 사는 멤버들이 채워 주면 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 계획인가!

  하지만 계획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연을 부탁하려 했던 쌔미에게 중대한 시험이 있는 날이 하필 그 날이었던 것이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았으나 당일 공연이 가능한 기도원 멤버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점점 확실해져 갔다. 나는 어쩔수 없이 애정하는 국악한마당을 제껴두고 사당행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 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전날 밤까지만 해도 학동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공연 레파토리 같은 것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예수님 간첩 사건'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 외에 최저임금이라는 주제를 부각해 줄 노래가 한 곡 정도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버스 안에서 마음 속으로 '주여' 하고 부르며 기도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과천을 지날 때 쯤, 불현듯 한 소절의 가사가 뇌리를 스쳤다.

 

"최저임금 만원, 성경에 써 있네."

 

 

2.

  가사와 멜로디는 갖춰졌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부른다는 것은 내가 정통 보수 기독교 단체인 혁명기도원의 일원으로서 이 노래 가사에 동의한다는 의미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나는 선교적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최저임금 투쟁의 상황은 나에게 '당신들의 신앙은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이 뇌리를 스쳤다. 예수는 가장 늦게 투입된 노동자도 생계에 필요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경이 누구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떤 복음서 저자는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높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라고 선포했다. 대기업이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간다면 그들의 몫을 깎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선에서 성경이 최저임금 1만원에 동의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6월 8일 학동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한달동안 일하고 팔십만원 받으면,

공과금을 다 내고 남은 돈이 없도다.

최저임금 만원 생활임금 만원

최저임금 만원 성경에 써 있네."

 

  다행히도 노래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불러 주었을 뿐 아니라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은혜 받았습니다' 류의 덕담을 해 주었다. 하지만 최저임금 1만원이 얼마나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앞에서 떠올린 두 성경구절이 있었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최저임금 1만원이 성경의 메시지와 합치한다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사실 기본소득과 더 관계가 있어 보였고, 후자는 깎고 메우는 것 보다는 길을 만드는 것에 초점이 있어 보였다. 신약성경 또한 그런 과정은 통해 쓰여진 것은 사실이지만 - 신약의 저자들은 히브리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찾아냈는데, 사실상 그것은 '읽어내기'가 아닌 '읽어넣기'를 통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해석 같은. - 근대적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일정기간동안 믿는바와 말하는바 사이의 괴리를 안고 있었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60% 정도의 확신만을 가지고 ‘최저임금 만 원, 성경에 써 있네’를 외치고 다니던 어느 날, 믿음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특별한 어느 순간이 아닌 보통의 기도시간 중에. 혁명기도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아현 에서의 저녁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은혜로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시편을 읽고,복음서를 읽고, 복음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천년 동안 교회가 끊임없이 불러 온 찬송의 한 구절이 나를 사로잡았다.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이 노래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행하신 일들을 언급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데, 굶주린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 역시 하느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최저임금1만원 위원회가 처음부터 요구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날 사랑하심’ 만큼이나 – 어차피 성경엔 그 문장도 안 쓰여 있지만 - ‘최저 임금 1만원’도 확실히 성경에 쓰여 있다고, 아니 성경은 그보다 더 급진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선교학자들은 선교가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교회는 자신이 가진 전통과 언어를 재구성해야하기 때문이다. 혁명기도원은 최저임금에 대한 시대적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전통을 새롭게 발견했다. 우리가 새롭게 배운 바에 의하면, 기독교 전통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부의 분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은 복음의 일부였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식상해 보이는 명제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1만원 운동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이 운동은 우리의 눈을 밝히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의 빛이 아니었을까.

 

 

3.

  지금의 혁명기도원은 북극성을 보고 항해하는 작은 배와도 같다. 빛을 보았으나 어떤 경로로, 어떤 항해술을 사용해서 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 있다. 기도원의 조직은 느슨하고, 연대할 수 있는 활동가의 수도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투쟁의 전략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조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번 운동의 국면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기도원은 이름은 걸었지만 회의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단체였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이 더 막막하게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직구조가 우리 자신에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인지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도 미지수이다. 한편으로는 밀양, 강정 등지에서 끈기 있는 연대를 보여주는 수도단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애초에 기도원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때에 우리는 느슨한 조직이 갖는 장점을 찾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에 갑자기 조직의 성격을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대하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인지에 대한 물음이 우리의 다음 과제중 하나가 될 것이다. 계속 세상의 목소리에 응답하며, 그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발견하는 혁명기도원이 되기 위해 여러 동지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hoto by 장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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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3 11:02 2013/07/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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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3/06/23 23:20

학동 저녁기도를 마치고.

1. 최저임금 1만원 위원회 농성장에서 저녁기도 인도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입니다.

2. 성경은 부자를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라고 말 합니다. 최저임금 1만원은 급진적이어 보이지만 사실 하느님의 요구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3. 하지만 누군가가 '최저임금 1만원'을 슬로건으로 걸기 전까지 우리는 하느님이 요구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우리 눈이 열린 것이지요.

4. 성서와 전통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영감입니다. 

5. 혁명기도원을 통해 계속 깨닫는 것은 운동의 현장이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곳이고, 그 곳에서 비로소 말씀과 전통이 활력을 되찾는다는 사실입니다.

6. 오늘도 인도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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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alba.or.kr/xe/news/11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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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23:20 2013/06/2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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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2/04/05 13:29

성수요일, "한 몸을 이룹니다" 말씀 나눔.

마가(마르코)복음 12:1-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하였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였다. 그래서 또 다른 종을 많이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하였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였다. 그래서 또 다른 종을 많이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1. 이번 주는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 특별히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고난주간 입니다. 이 한 주간동안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과 싸우고,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체포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이 주간 예수는 아주 계획적이고 빠르고 정치적으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이 주간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평생 무엇과 싸우려 했는지, 또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는지를 집약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유대지역을 다스리던 이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여겼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그 잘못을 폭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로 인해 생명을 위협당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에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언자, 혹은 선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하느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있다고 판단될 때마다 용감하게 일어나 율법의 근본정신인 "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려 했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종들"은 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제 예루살렘의 상태가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들과, 그들과 연루된 상류층 시민들은 지금껏 자신들에게 불편한 말 하는 이들을 제거해 왔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두려워하고 약자에 대한 공감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전은 권력과 결탁된 자본에 잠식당해 버렸고, 사마리아인과 갈릴리 인들에 대한 혐오감은 극에 달했고, 그들의 경제는 농민과 어민들에 대한 착취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평화는 강대국 로마의 군사적 지원 없이는 유지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원수로 여겼던 갈릴리인들과 사마리아 인들을 사랑하라고,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빼앗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비유도 그 가르침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멸망이 당신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예수는 얼마나 슬펐을까요? 예루살렘의 미래에 닥칠 재앙, 살육과 파괴의 현장을 머릿속에 그리던 예수의 표정은 마냥 웃는 얼굴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4.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어제, 강정마을 송강호 형제의 구속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송강호 형제는 한때 교회 전도사로 일했고, 세계 곳곳에 하느님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두 발로 뛰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의해 이가 나가고 살이 뜯기는 고통을 당했고, 이제 죄인으로 분류되어 구속된다고 합니다. 이곳 현장에서도 대화를 원하며 비폭력으로 농성하던 사람이 건축시행사, 용역, 경찰로부터 물리적 폭력을 당했고 구청의 무관심으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강정과 북아현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 자기 몸을 고통에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증언하는 예언자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가진 자들의 죄악이 폭로됩니다. 우리가 그 일의 증인입니다. 예수는 그 죄악의 끝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폭력이 차오르고 차올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죽이게 될 때에, 그들의 운명 역시 끝나게 될 것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더 강한 군사력을 불러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사고 판 무기에 의해 죽을 것이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짓밟는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자비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죽이며 살  것입니다.
 
5.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성찬을 나누려 합니다. 성찬은 예수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예수를 기억합니다. 그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이 식탁은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그는 또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준다고 말 했습니다. 이 식탁은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서로 사랑하라" 라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이 식탁은 바로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치유하고, 나아가 온 세상이 회개하여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이 고난주간 동안에, 예수의 마음을 더 많이 묵상하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5.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성찬을 나누려 합니다. 성찬은 예수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식탁에서 예수를 기억합니다. 그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이 식탁은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그는 또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준다고 말 했습니다. 이 식탁은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서로 사랑하라" 라고 가르치신 분이십니다. 이 식탁은 바로 그 예수의 식탁입니다. 이 식탁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치유하고, 나아가 온 세상이 회개하여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이 고난주간 동안에, 예수의 마음을 더 많이 묵상하고, 그것을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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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5 13:29 2012/04/0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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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20 15:20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며

혁명기도원은 2011년 성탄절에

노방전도와 간증집회 및 떡만두국 끓이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세시, 시청 광장에서의 연합예배를 마친 후

우리는 명동 거리로 나가 성탄의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찬례는 항상 파송의 선언으로 끝납니다.

메시야 예수를 통해 생명을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그 생명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혁명기도원의 노방전도는 연합예배 프로그램과 직접 연계되지는 않지만

기독교 예배의 큰 틀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할 소식은

 

"엄마가 된 청소년 마리아"

 

"빈곤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요셉"

 

"노동자의 아들 예수"

 

"가난한 이에게 집과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에 대한 것입니다.

 

이 소식들이야말로 성탄의 본질적인 메시지 입니다.

 

 

성탄의 소식을 전한 후에 우리는 명동 까페 마리가 있던 곳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지난 여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계시들을 묵상할 것입니다.

그 곳에서 혁명기도원은 하느님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았고,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 했습니다.

 

명동을 지나 우리는 여성가족부 앞으로 향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귓가에 생생한 승리의 소식이 그 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곳에서 울고 있는 당신의 딸들을 위로하셨고,

말씀으로 다시 일으키시어, 계속 싸워 낼 힘을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지난 여름에서 겨울까지의 시간을 묵상하며 감사의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여성가족부 건물 앞에서 우리는 향린교회로 갑니다.

지난 12월 18일, 서울사람연대 에서는 다른 투쟁현장에 전달할 만두를 빚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끓이는 떡만두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다른 현장으로부터 온 지지와 사랑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포이동으로부터 온 만두가 들어간 떡만두국을 재능 농성장의 동지들과 나누어 먹으며

지지와 사랑을 표현하려 합니다.

 

 

혁명기도원은 작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하늘과 땅 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연대세력들과의 상통(communion)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해 주세요.

 

 

평화를 빌며,

2011. 12. 20. 원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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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0 15:20 2011/12/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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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8 11:06

신나는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과 함께!!!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동지, 그러니까 일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삼아 지켰습니다.

 

동지였던 것이 언젠가부터 양력 12월 25일로 굳었지만,

이 날의 의미 -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 는

24일 밤에서 25일로 이어지는 기독교 예배를 통해 매년 반복됩니다.

이 예배가 의미하는 것은 '세상은 가장 깊은 밤과 같으나,

하느님 나라의 승리 소식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따라

혁명기도원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증언하기 위해

12월 25일 성탄절 저녁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들을 부르며

하느님 나라의 소식이 적힌 피켓을 들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상징하는 코스프레도 조금..)

종로와 명동 일대에서 노방전도를 하려 합니다.

 

 

재능교육, 강정마을, FTA, 또 여기저기에서 철거에 맞서는 투쟁들이 계속 되는

우리의 시대는 어쩌면 역사의 밤과 같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칠흑의 밤과도 같았던 헤로데(헤롯) 통치 기간에

세상을 비추는 빛이신 메시야 예수가 태어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을 되새기며 25일을 세상의 빛 예수님과 함께 보내실 분들

여기 여기 붙으세요.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루가복음 1장, 성모마리아 송가 중에서)

 

 

 

 

2011. 12. 8. 대림 2주 목요일에,

빛을 기다리며, 혁명기도원장 드림.

 

 
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p.s. 행사 후에는 떡만두국을 끓여 먹습니다.

 
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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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8 11:06 2011/12/0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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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5 11:03

"뉴타운 간첩파티" 후기 겸 감사의 말.

먼저 기획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 해 주신 기획단,

특히 물심양면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미술팀 없이는 행사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저희는 이번 파티를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뉴타운 간첩파티"가 아니었다면

기독교 전통에서 '하늘나라의 간첩'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아니 사실은 그것이 유대-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 이었다는 것을,

저희는 결코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완전히 기독교적 언어로만 이루어진 기도문과 노래를 들고 여러분 앞에 서면서

혹시나 저희가 파티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간첩호칭기도"의 한 문장 한 문장을 기쁘게 읽어 주신 여러분 덕에 저희도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기도회 후 박정근 동지가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라는 말을 해 줬을때, 

저도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획단을 비롯하여 함께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저희는 기독교의 언어와 의례가 어디에서,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배웠습니다.

이 체험이 혁명기도원의 다음 걸음을 인도하는 표지판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통받으시는 그 곳에 함께 서고,

그가 걸어 가시는 길로 따라가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많은 조언과 기도 부탁 드립니다.

 

 

혁명으로 이끄시는 하늘 나라의 참 간첩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구세주 강생 2011년 12월 5일, 혁명기도원장 드림.

 

 

[간첩호칭기도 전문]

http://blog.jinbo.net/rev_pr/1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by. 감성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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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5 11:03 2011/12/0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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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6:21

재능교육 기도회 말씀 나눔, 12월 1일.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의 목요일입니다. 대림절 첫 주는 전통적으로 메시야 예수의 다시 오심을 묵상합니다. 메시야, 즉 왕의 다시 오심이라는 주제는 구약에서부터 발전된 주제입니다. 제국의 통치 아래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민중은 하느님의 심판, 그 분이 제국의 시대를 끝내시고 새로운 새 시대를 여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로마 제국의 폭력적 질서 아래서 고통받던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로마 제국의 시대를 끝내고 예수가 왕으로 오실 것을 기대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오 복음 21:33-46에도 심판과 구원이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는 그의 생애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성전을 향해 심판의 말들을 외칩니다. “이 곳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너희는 저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예수는 성전이 제국의 통치기구가 되고, 성전의 봉사자여야 할 이들이 제국의 대리자가 되어 버린 현실과 싸우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쓴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50년쯤 후에 이 복음서를 썼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던 바리사이파에게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점점 아웃사이더의 자리로 밀려나고, 공동체에서 존경받던 바리사이파의 미움을 받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 50년 전에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성전 권력자들의 미움을 샀던 그 분, 예수를 기억했습니다. 이제 예수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버림 받은 예수처럼 그들 또한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오늘 본문 42절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 이것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45절에서 이들은 예수의 적이었던 “사제들”과 자신들의 적인 “바리사이파”를 한 데 묶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가 권력에 의해 포위당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포위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5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며, 그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건축에서 이 머릿돌은 건물 전체를 완성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이 고난 받은 예수를 높이셔서, 그를 통하여 당신의 새 나라를 만드셨듯이, 지금 버림 받은 우리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이것은 절망을 넘어서게 하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싸움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들은 결국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지금은 그들이 강해 보이고,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내리누르려 하지만, 메시야 예수를 다시 일으키신 그 하느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계신다.” 이 외침에 귀 기울여 봅시다. 생명의 하느님, 가난한 자와 약한 자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기에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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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6:21 2011/12/0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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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9

성무일과, 혁명적 일상으로의 초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성무일과에 대한 글을 쓰고싶습니다만, 그것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A.G. 마르티모의 『시간전례』(가톨릭대학교출판부)를 따라잡을 수 없고, 성무일과를 전염시키는 효과에 있어서는 로버트 벤슨의 『중단 없는 기도』(IVF)를 따라잡을 수 없을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위의 역사적 명저 두 권을 꼭 읽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저의 관심은 앞의 두 저자분들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 관심은 2009년 말 성모송 묵상인 「마리아의 도전」을 쓰던 때의 관심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관심이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때부터 였던것 같습니다만, 결정적 순간은 2008년에 찾아왔습니다. 촛불의 밤은 꿈들의 향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권력의 형태 곧 인간관계의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꿈들이 현실을 압도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노래와 춤과 촛불. 그것은 가히 현실을 무시하고 나타난 천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가르쳐 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고, 다른 세계의 파편을 옆사람의 초에 옮겨주었습니다. 그 날의 우리는 '마치 꿈 꾸는 것 같지'(시편 126:1) 않았던가요!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가 꿈과 같은 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유목민의 후손들은 어느날 갑자기 현재와 미래/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사건들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숨통을 죄던 지배체제가 미증유의 사건들로 인해 삽시간에 마비되어 버렸습니다(이것은 출애굽기 7-13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책은 그 일을 일으킨 힘은 바로 '주님의 손(15:6)' 이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집트는 그들에게 현실이었고 그것이 극복된 세상인 하느님 나라는 이들에게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꿈이 현실을 압도하며 나타났습니다. 잠시이지만 꿈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으로 하느님의 손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꿈의 클라이막스!- 사건 이후 이들은 다시 현실 속으로 던져집니다. 마치 촛불의 밤들 이후 다시 '이명박 정부'라는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진 우리처럼 말이죠. 하느님의 백성들은 다시 '현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는 무효하다고 선언되었으나 그들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집트라는 현실이었습니다.

 

성무일과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새로운 현실인 하느님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되었지만 제국의 '현실'에 의해 형성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를 위하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계명들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신명기 6:24)".

 

그가 말하는 '오늘'은 현실을 압도하고 나타는 하느님의 손이 역사하는 꿈의 시간입니다. 그 꿈의 시간 속에 계속 살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일단 그 꿈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6:21-25)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의 주기를 그 이야기에 비추어 재구성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계절절기들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여 출애굽이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일년 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과월절(유월절), 추수절(칠칠절), 초막절 등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들은 상징적 예전들과 함께 지켜지고, 예전들은 출애굽 이야기와 연결되어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집트가 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현실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물려받은 초대교회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오늘'이 출애굽과 관련된 꿈의 시간이었다면 초대교회에게 '오늘'은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질병, 배고픔, 사회적 장벽등이 사라지는 꿈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선조들처럼 이 꿈의 시간이 로마제국이라는 현실을 압도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시간을 재구성 했습니다. 그것이 대림절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입니다. 그 시간 안에서 원래 존재했던 축제일들이 예수의 생애라는 꿈의 시간 안에서 정합성을 갖는 축일들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신 축제와 관련되었던 동지는 이제 빛이신 예수의 오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재사회화 전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이미 우리를 둘러싼 것들에 의해 사회화 되었습니다. 이 사회화의 내용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권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의 항목을 포함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쟁을 통해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협력하는 것을 기뻐하고 함께 사는 삶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 통장의 잔고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믿던 사람이 그런 것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국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던 사람이 이제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무일과는 메시야 예수를 통해 재구성된 시간질서의 가장 작은 단위 입니다. 우리의 1년은 그의 탄생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일생을 경축하는 하나의 큰 단위이고, 매주 금요일에서 주일에 이르는 시간은 수난과 부활을 찬양하는 작은 단위이며,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그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 삶을 의미합니다. 성무일과는 이것을 더 철저화 하여 하루의 삶까지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통치자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침기도에서 우리는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하고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라는 말로 화답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하느님, 우리를 어서 구원하소서'하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잠을 깨는 순간 '현실'속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이 이 현실을 압도하고 구원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시기를 희망합니다. 그 후에 아침기도는 기쁨의 찬양인 시편 95편 혹은 100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쁨은 두려움을 내쫓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메시지를 넘겨 주엇습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꿈의 시간 안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낮기도는 지속적인 인도와 보호에 관한 시편으로 시작되어 감사의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아침기도를 통해 대안적 현실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성공회 기도서가 낮기도용 성서 본문으로 제안하는 구절중 하나인 말라기 1:11은 하느님의 통치를 현재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무일과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장차 임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예수 안에서 이미 현실이 된 '다른 세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질 녘에 드리는 저녁기도는 아침기도와 같은 시작송가로 시작하지만, 시편으로 들어가기 전에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인 '은혜로운 빛이여(Phos Hilaron)'라는 찬양시를 낭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희망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대개 저녁을 빛이 사라지는 시간으로 체험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 어둠 속에서도 참 빛이신 예수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 안에서 루가(누가)복음의 찬양시들이 이어집니다. 가난한 여성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세상에 나타날 다른 미래를 기대하며 기쁨의 탄성을 외치고, 노쇠한 시므온은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의 등장을 보며 타는 목마름으로 버텨온 수십년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녁기도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에게 물려준 이들이 해 지는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았다는 점(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창세기 1:5)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밤기도는 우리가 여전히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이 그 한계를 탓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한순간 스쳐지나간 빛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만 어둠의 습관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꿈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자주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에 굴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으로, 세계의 미래를 위한 모델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기도는 우리를 책망하는 대신 위로합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를 가리우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혁명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벽과 싸우다 지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우리는 촛불의 밤들을 통해 앞서 간 성도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출애굽, 예수와의 만남, 촛불의 밤들은 안병무의 은유를 빌리자면 한 화산맥의 다른 분화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들을 거친 사람들은 꿈이 현실을 압도하는 순간들을 보았고, 그 순간을 항구적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도들을 했으며, 그 시도의 결과인 성무일과를 우리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2008년 봄 어느 날 밤에 옆사람의 양초에 불꽃을 옮겨주던 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무일과는 그 촛불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증인들과 예수의 증인들로부터 그것을 넘겨 받았습니다. 그 촛불을 넘겨 받을 때에 우리는 계속 꿈꿀 수 있는 힘 또한 함께 넘겨 받았습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가히 혁명적 일상이 아닙니까?

 

 

201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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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9 2011/12/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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