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1/12/01 11:08

후기: 마리아의 도전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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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마리얌이 당신에게 문안합니다.

"살람 알레이꿈."

전쟁의 소식으로 흉흉하던 2007년 어느 날, 노트에 끄적인 그림.

 

 

 

 

1. 개신교 형제자매들께

  사실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성모송은 친숙하지 않은 텍스트 입니다. 어떨 때는 '천주교가 이단인 이유'의 대표적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성모송이지요. 저도 기독교인으로 산 시간의 대부분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던것 같습니다. 천주교를 '우상숭배 이단'으로 부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를 수록 제가 개신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워 졌으니까요.

 

  그랬던 저의 앞에 갑자기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저는 제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있었지요. 콜베가 바로 성모신앙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두가지 정도의 선택가능한 문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콜베가 '성모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멋지게 따랐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성모신앙으로 인하여'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열심히 웹서핑으로 콜베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고 천주교 서점에서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후자였습니다. 콜베가 건강상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향항 열정을 포기 하지 않게 한 힘, 그가 수용소에서 예수처럼 남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 힘…. 그 모든 것이 성모신앙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개신교인의 프라이드보다 중요한 것은 콜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저는 이것이 '내려놓음'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저는 여전히 일말의 회의를 가진 채로 성모송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콜베가 느낀 그것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었던 거지요. 묵상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모송은 옛 성도들과의 연대로 저를 초청했고, 그 연대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체험 안에서 콜베신부 또한 기쁨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것 아닐까요.

 

  연대와 기쁨, 이것이 성모송이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저에게 던져준 도전이었습니다. 제 글을 통해 여러분들도 이 도전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요. 못 들으셨다면 그것은 성모송의 문제가 아니라, 제 글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2. 가톨릭 형제자매들께

  동방과 서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가톨릭 전통(정교회, 천주교, 앵글로-가톨릭 성공회)에서 성모송은 가장 보편적인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서방교회 전통에 속한 천주교와 성공회는 매일 반복하는 묵주기도에서 성모송을 암송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모송은 마치 '밥'과도 같습니다. 그 밥을 먹고 막시밀리아노 콜베도, 로메로 주교도, 도로시 데이도, 테레사 수녀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밥이란게 그렇지요. 소중한 만큼 그 소중함을 잊기도 쉬운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같은 밥을 먹고 있으면서 우리는 콜베만큼, 로메로만큼, 테레사만큼 자라지 못하는 걸까요. 밥이 부족했던 걸까요 아니면 밥을 먹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저는 성모송 묵상을 통해 이런 고민을 여러분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밥 비유를 계속 써 보자면, 밥을 요리하는 다른 방법을 한번 시도해 봤다고 하면 될까요. 누구든 저의 요리를 맛있게 드셔 주셨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3. 다른세계를 꿈꾸는 '동지'들께

   세상의 높은 곳에 서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참 자주 절망을 경험하는것 같습니다. 몇년 전 대추리에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그리고 얼마전 용산에서 우리는 국가의 권력이란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의 물리력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무력감의 반복은 우리의 동지들을 '전향'의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어쩌면 무력감과의 긴 싸움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때, 자신의 동료가 사자의 먹이로 사라져 갈 때, 불타오르는 가족의 신체를 보았을 때 예수의 추종자들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배자들이 원했던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지배자들이 원하는 반응을 거부하기 위한 시도들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 줍니다. 저의 묵상 글에는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투쟁(글을 쓰던 당시에는 용산이 '현재'의 사건이었습니다)에 임할 때에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저의 고민은 짧고 엉성합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이 여러분의 싸움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독자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한 드림.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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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8 2011/12/0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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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4

성모송 묵상 7-"아멘"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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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을 던져 '아멘'을 보여준 사람,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그는 아마도 현대의 기독교인 중에, 아니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성모신심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있는 것처럼 그는 성모의 이름으로 된 공동체를 세운 사람이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그는 '사랑의 순교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나치 정부는 유태인을 보호했다는 혐의로 그의 몸을 감옥에 가두었다. 콜베는 그 곳에서 다른 수감자를 대신하여 '아사(餓死)'형을 선택했고 그 곳에서 길지 않던 삶을 끝냈다.

 

  나는 콜베신부에게서 일종의 '자유'를 본다. 이 자유는 사자굴에 같힌 다니엘의 자유이고 용광로에 던져진 그의 친구들의 자유이며 로마의 감옥에 같힌 바오로와 실라의 자유이다. 나아가 이 자유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 말라!"고 외치던 예수의 자유이다. 나치는 콜베의 몸을 가두었으나 콜베는 그를 가둔 나치의 권세를 없는 것으로 여겼다. 페르시아 제국의 짙은 먹구름을 뚫고 나타난 하느님의 임재(현존) 앞에 무릎 꿇은 다니엘처럼, 로마제국의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은 마리아치럼, 콜베는 나치의 권세를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 앞에 굴복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멘"이다. 성모송에 '아멘'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가브리엘을 향한 마리아의 '아멘'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어야 한다. 성서는 교과서의 지식을 밑줄 쳐가며 외우는 식의 아멘을 말한 적이 없다.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아멘은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의 표현이었다(신명 27). 이것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다. '네'라고 말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은 첫째 아들과 '싫다'고 말한 후 아버지의 뜻을 행한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는 둘째아들이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아멘'으로 응답했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1:28-31).

 

  성모송을 지속적으로 암송하는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의 결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난받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아멘'을 연습하는 것이다. TV의 소음과 세상의 지혜들에 길들어버린 우리가 '아멘'을 살기 위해서는 이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의 길은 마치 오랫동안 걷지 않아 잡초에 가려진 샛길과 같아서, 앞서간 이들을 따라 계속 걸어갈 때에야 다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p.s.

 

콜베 신부와 더불어 다음의 앞서간 이들을 '아멘'의 모범으로 함께 기억해 본다.

 

성모송에 평생 아멘으로 응답하고 살았던 사람들

: 마틴 루터, 울리히 쯔빙글리, 로메로 주교.

 

성모송을 몰랐으나 아멘은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들

: 더크 빌렘스, 마틴루터 킹.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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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4 2011/12/0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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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1:01

성모송 묵상 6-"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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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1일 종각.

이 곳에서 나는 보좌 앞에 서서 정의를 위해 탄원하는

요한의 묵시록(계시록) 6장의 성인들을 만났다.

 

 

 

  성모송의 전반부가 새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선언에 대한 동참이라면 후반부는 그 하느님 앞에 선 우리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우리가 개인으로써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앞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마리아로 대표되는 성인들, 그리고 그들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와 함께 하느님 앞에 선다.

 

  성서의 마지막 책은 우리가 서 있는 곳-하느님의 보좌(옥좌)앞-이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말 해준다.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 당했다고 명시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외치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겠습니까!"

 

  창세기에서 묵시록(계시록)까지의 모든 성서가 일관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하느님이 억울한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공감하시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역사에 뛰어들기도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간 이들과 함께 서 있는 시공은 바로 이 선택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모송의 마지막 문장은 하느님이 '죽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공감하시고, 이들의 희생을 끝내기로 결단하시는 순간, 그 분 앞에서 우리가 마음 속으로 되뇌이는 말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 서 있기를, 그리고 도둑처럼 우리 앞에 다가올 임종시에도 그런 사람이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주변사람들의 행위를 모방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포유류인 인간은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을 둘러싼 환경-물리적인것과 함께 문화적인 것도-을 자신을 지배하는 '권세'로 삼고 살아간다. 하느님보다 주위 환경들을 더 실제적인 권세로 체험할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어 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모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시나 세상의 권세는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라 우리의 걸음을 낮은 곳으로 향하기 원하시지만 세상의 권세는 우리를 고지를 향한 경쟁의 길로 향하게 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달력을 버리고 교회력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원했으며, 성찬례(주의만찬, 성찬식, 미사)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기를 원했다. 예수와 성인들의 삶에 대한 기억들로 채워진 교회력을 통해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 교회력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시간의 질서는 우리의 현재를 둘러싼 과거와 미래가 되어 우리를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새 피조물'이 되게 한다. 성찬례는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천상의 그것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서 예수를 발견할 때에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이전 세대와 현 세대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하는 하늘보좌 앞으로 변화된다. 마리아와 성인들은 바로 그 시공에서 우리의 손을 잡고 연대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도 그치지 않도록, 그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이들로 남도록 돕는 것이 성인들의 역할이다. 이 연대 밖에서 세상과 싸울 때의 우리는 얼마나 고독했던가. 그들을 잊고 살았던 때의 우리는 얼마나 세상 앞에 무력했던가.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싼 증인들이 있다.

 

  성모송은 우리가 항상 그들과의 교제 안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마리아를 부를 때에 우리는 가난과 힘없음으로 고통받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만나고, 또한 그들에게 공감하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그래서 성모송은 마치 골리앗과도 같은 세상 앞에 싸우려고 서 있는 당신을 위한 기도이다. 싸움을 촉구하는 민중가요 소리와 이길 수 없다는 탄식이 뒤섞여 소음이 되어버린 현장에서 당신은 당신을 지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당신은 더이상 투사가 아닌 예배자가 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이 선 공간은 전쟁터가 아닌 성전이 될 것이다. 그 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더이상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세상이 감히 막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다시 세상 앞에 설 것이다.

 

  앞서간 이들을 기억함으로, 또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되어 세상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곳으로 만드는 날이 곧 오기를 소원하며, 나는 오늘도 작은 목소리로 성모송을 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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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1:01 2011/12/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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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0:54

성모송 묵상 5-"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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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시대가 너무 답답할 때 난 이렇게 혼잣말로 되뇌인다.

"거룩하신 전태일과 이한열,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사도신경에 나와있는 '성도의 상통', '교통', 혹은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마리아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오늘날의 교회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화산맥'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화산맥은 역사의 저변에서 도도히 흐르다가 어느날 갑자기 솟아올라-예수가 그랬던 것처럼!-천지를 진동하게 만든다. 마리아를 '위인'이 아닌 '성인'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녀를 그 화산맥의 일부로써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혼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글자들이 모여서 단어를 이루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듯 말이다. 앞서간 성인 한사람 한사람은 다름에 오는 이들과 상호작용-교통, 상통, 통공-하면서 하느님이 세상이라는 책에 쓰시는 말씀이 된다. 우리 역시 그 책에 새로 쓰이는 글자로써, 앞서간 이들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가 대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이다. 그래서 이 부름은 새로운 부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새로운 부름은 마리아로 상징된 하느님의 백성 곧 구원의 화산맥을 이어온 많은 이들을 향한 부름이다. 우리는 이 부름 안에서 제국의 권세에 당당히 맞선 모세를 부르고, 국가에 의한 폭력을 경고한 사무엘과 나탄(나단) 예언자를 만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는 죽음을 택한 많은 이들-로메로 주교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열사 전태일-을 부른다.

 

  이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지금 천국과 비슷한 공간인 '낙원'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혹은 '전구') 할 수 있든지,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수면 상태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우리는 앞서간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중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부르고, 해결되지 않을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릴 때에는 나탄 예언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다윗을 부른다. 아마도 그들에게 중보기도를 구하는 것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내게도 일어나기를 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형식상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라고 되어있는 요청들은 내용상으로는 "제가 당신의 기도에 연대합니다" 라는 의미가 된다. 이 연대는 현실을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킨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의 목소리가 커져갈 때에 우리는 파라오의 군대와 바다 사이에 선 모세를 부를 수 있다. 이 부름을 통해서 모세의 담대함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방법이다.

 

  요즘 나는 종종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시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기를 구하곤 한다. 그가 꿈꾸던 나라는 아직 미완성이기에, 그가 하느님을 향해 올려드렸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요청할 때에 그의 기도는 나의 것이되고, 나의 기도는 미완으로 남은 그의 기도에 덧붙여져 그의 기도가 된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디트리히 본회퍼와 마틴 루터 킹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구했던 정의는 이 땅에서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신 본회퍼와 루터 킹,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하고 구할 때에 그들이 가졌던 용기와 사랑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들을 닮은 하느님의 일꾼으로 변화될 것이다.

 

  지금 당신은 앞서간 이들 중 누구를 닮고 싶은가? 성모송 묵상은 당신과 그 사람 사이의 깊은 교제를 열어주는 문이 되어줄 것이다.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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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0:54 2011/12/0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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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0:50

성모송 묵상 4-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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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집 앞에서.

이 사진을 찍고 4년 후에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2000년동안 우리의 교회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선포해 왔다.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처럼 신체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스쳐가는 시간에 의해 조각되고(어느 시인이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의해 주조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 안에는 그 사람 개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그녀를 스쳐간 체험들과 그/그녀가 거했던 공간들이 뒤엉킨 채로 공존한다.

 

  예수의 경우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신앙을 기독교인들은 2000년가량 지켜 왔다. 우리가 전해받은 거룩한 책은 예수가 완성된 채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우리의 책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루가 2:52)

 

  그 또한 우리처럼 이 땅의 것들을 양식으로 삼아 자랐다. 단백질,  지방, 칼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마리아를 둘러싼 환경과 같은 것들. 예를 들어 로마제국 군대의 폭력, 헤로데(헤롯)의 언론통제, 배고픔, 저항운동들과 그것의 실패로 인한 잔인한 죽음들, 회당에서 드렸던 예배. 이런 체험들이 예수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을 것이고, 예수가 할 수 있는 말,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이것들의 조합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선언한 우리 신앙의 의미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완전한 그래서 자기 안에 갇힐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고, 관계를 통해 형성된 인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린 가난한 이들의 환유라면, 예수를 잉태하고 낳은 이는 마리아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께 나신 예수'가 복되다는 말은 다른세계를 위해 애써온 이들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를 향한 복의 선언을 통해 우리는 민중의 희망을 지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는 투쟁의 덧없음으로 좌절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희망이다.

 

  성모송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 선물을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다정한 속삭임이 아닐까.

 

200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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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0:50 2011/12/0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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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0:48

성모송 묵상 3-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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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전쟁의 공백기에 스리랑카 자프나에서.

아이들은 웃을 수 있었다. 함께이니까.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았다고 해서, 언제나 그 기쁨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승리에 대해 들었지만 기쁘지 않은 것은 단지 당신 혼자가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인 뉴스로 가득 차 있다. 여전히 약자에 대한 폭력은 자행되고 있다. 슬프게도 4대강 사업의 삽은 이미 역사하고 있고, 가슴아프게도 용산참사를 해결해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유죄'를 선언받았으며, 사람을 총으로 쏠 수 없다고 고백한 하동기와 백승덕은 징역을 구형받았다. 이런 뉴스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어둠에 잠식된다. 처음에는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며 들었던 소식들에 우리는 점점 무감각 해져 간다. 급기야는 우리는 그것을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로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향해 흔드는 손짓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피로감으로 인해 사탄의 권세 아래로 다시 귀속된다. 마치 광야에 지쳐 이집트의 고기와 향신료를 그리워하게 되었던 이스라엘처럼.

 

  루가복음의 1장은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목이 말라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벙어리가 된 즈가리야(사가랴), 다섯 달을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엘리사벳. 이들의 기다림은 아마도 루가복음을 쓰고 읽었던 공동체가 느꼈던 갑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를 보았지만,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겠다고 고백했지만, 세상의 어둠 앞에서 점점 무뎌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한 공동체.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상태는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느낀 절망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들은 절망에 머무르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들은 기다리고 있는 엘리사벳이 이미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립 한다. 잉태라는 문학적 장치는 "왜 우리는 이미 임한 하느님의 승리를 체험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느님은 이미 그분의 일을 성취-단지 '시작' 하신 것이 아니다-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백성 안에 숨겨져 있다." 이렇게 공동체는 스스로에게 다시 선언한다.

 

  마리아의 잉태 소식 역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처럼 기다림에 지친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게 선포된 기쁜 소식이다. 갈릴리의 가난한 여성, 혼전임신을 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인 민중의 환유라 할 수 있다. 가난, 배고픔, 게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 이것들이 지금 하느님의 백성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다림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마리아는 어쩌면 기다림을 멈추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는 않았을까. 하느님은 이런 마리아 안에 새로운 세상을 두셨다. 어둠의 권세에 굴복한 세상은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다른 세계를 기다리던 엘리사벳은 그것을 알아보고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이 인사는 금과 은으로 번쩍이는 하늘의 여왕을 향해 올려진 찬사가 아니다. 지루한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던 엘리사벳이 또다른 '기다리는 자' 마리아에게 건넨 인사이다. 함께 고통받는 이들끼리 건넨 연대의 인사, 지쳐가는 서로를 북돋워 주는 위로의 인사였던 것이다.

 

  이 인사로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서로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세계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이 "기뻐하며 뛰놀았다"고 전한다. 보이지 않아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다른 세계, 그것이 이 인사로 말미암아 다시 빛을 내게 되었다. 지금 우리도 함께 싸우다 지쳐가는 동지들을 위해 축복의 인사를 건네야 하는 시점에 있는것 아닐까. 용산에서 싸우는 당신 안에, 촛불을 들었던 당신 안에, 한때 대추리를 위해 기도했던 당신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당신은 복된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실 날이 곧 온다고.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이렇게 말이다.

 

200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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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0:48 2011/12/0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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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0:41

성모송 묵상 2- "기뻐하소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리랑카의 고산지대 누와라엘리야에서 만난 해맑은 웃음의 아이.

하느님 나라가 기뻐하는 자의 것이라면,

하느님 나라는 정녕 어린 아이의 것이리라.

 

 

  가브리엘의 인사에 고개를 숙인 마리아에게 처음 들린 메시지는 "기뻐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까. 갈릴리는 여전히 로마와 유대의 식민지였고, 마리아 역시 그 땅에 속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를 둘러싼 권력관계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유대와 갈릴리에서 일어난 많은 혁명운동들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운동들의 중심에 섰던 '메시야'들은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새들과 개들의 먹이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을 받기 얼마 전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요셉이라는 남성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다. 가난과 차별의 멍에 위에 가사노동의 짐까지 새로 지게 된 마리아에게 어떻게 천사는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천사의 메시지는 어떻게 보면 마리아에게 현실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는것 같기도 하다.

 

  "기뻐해라. 지금 주어진 삶을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라."

 

  실제로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설교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 그 때는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많은 좋은 사람들을 잃어버린 이유가 이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조선에서,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권세를 인정하고 복종하라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떠나갔다. 그들의 흔적은 이제 기독교 안에 있지 않고, 대종교와 원불교 안에 새겨져 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벽안의 선교사들이 그랫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수긍을 요구하고 있는걸까?

 

  앞서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다니엘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다니엘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페르시아의 권세를 잡은 자와의 싸움에서 미카엘이 승리를 거두었다' 라고. 그리고 천사는 다니엘에게 말한다. '세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손에 있다'고. 천사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을 멸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실 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천사가 다니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이유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현실을 수긍할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사실은 반대이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때때로 세상의 권력들을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절할 것을 거부했고, 제국의 군인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나치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다 죽음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다 제국의 사법제도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다니엘보다 더한 것을 믿었다. 그들은 다니엘이 본 그 환상이 지금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을 일으키시어, 자신의 나라를 이미 건설하시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예수" 이 이름이 기독교인의 기쁨의 근원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기쁨은 우리를 좌절로부터 건져준다. 좌절은 세상의 권세가 우리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것 같다. 스타크래프트에서 퀸에 의해 감염된 마린처럼 좌절에 감염된 어제의 용사는 제국의 가장 충실한 종이 된다. 70-80년대 더 좋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권세와 맞딱드려 좌절을 느끼는 순간 권세의 종이 되었다.

 

  "거 봐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철이 없었던 거지."

 

  그리고 우리에겐 여러 모로 그들의 때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정권이 돌아왔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때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희망이 주는 기쁨이 아닌,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이미 그 나라가 임한 것처럼 기뻐하라'는 선언이 주는 그 기쁨 말이다. 그렇게 믿고 기뻐하는 이들 안에 실제로 그 나라가 임한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자처했던 사울이라는 이름의 기독교인은 칼도, 위협도, 죽음 마저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성모송의 두 번째 문장은 그 기쁨 안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그 기쁨의 강으로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함께 들어가 뛰어 놀 수는 없는걸까. 나는 그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200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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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0:41 2011/12/0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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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1/12/01 10:36

성모송 묵상 1-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잠시 휴전중이었던 스리랑카에서 만난 젊은 엄마.

마리아가 웃었다면 아마 이런 얼굴이 아니었을까?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인사했다.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이여!"

 

  은총을 가득히 입은 여인 마리아. 2000년의 기독교 전통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참 쉬운 일로 만들었다. 우리는 마리아를 하느님이신 예수의 어머니로, 하늘의 여왕으로, 순종의 모범으로 기억한다. 우리 기억속의 그녀는 그녀가 입은 은총의 크기에 걸맞게 깨끗한 옷을 입고, UFO같은 후광을 악세사리처럼 뒷통수에 달고 있다. 개신교인으로서 그런 이미지의 마리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아마 대부분은 흰 옷을 입고 조신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앉아 가브리엘이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해받은 거룩한 책은 마리아를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성서는 마리아가 정복당한 땅, 죽임이 끊이지 않던 그 곳 갈릴리에서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마리아는 죽음의 땅에 앉아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가난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 역시도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하루 세끼 식사를 다 못 하는 사람이었을테고, 군인들이 나타났다고 하면 숨죽이고 집 안으로 숨어야 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갈릴리 사람들처럼 혁명가 유다가 처형당할 때에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2000여명을 보았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그녀가 살던 세상은 마르스의 지배 하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두꺼운 구름처럼 드리운 그 권세는 마치 두꺼운 카페트와 같아서 한줄기 빛도 통과시키지 않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마태오가 전하는 말 처럼 그 곳은 버림 받은 '이방의 땅' 이었고, 그 땅의 사람들은 '흑암에 앉은'이들 같았다(마태 4:14-16).

 

  바로 이곳 갈릴리에서 마리아는 가브리엘을 만난다. 하느님의 사자와 국가 권력의 싸움에 대해서는 다니엘의 한 구절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에게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던 천사는 '페르시아의 군주'에 의해 무려 20일동안을 지체해야 했다(다니엘 10:13). 페르시아의 권력이 20일동안 다니엘을 불안하게 했을 것이다. 그동안 다니엘은 하느님의 나라가 패배했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평화, 사랑, 자비 그런 것 따위는 이미 제국의 창에 찔려 힘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제국의 구름 위에서 계속 일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승리를 당당히 선포하신다.

 

  "큰 은총을 입은 자여!"

 

  하느님의 승리는 이 인사와 함께 선포되었다. '어둠에 균열이 갔다' 는표현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하느님은 그것을 없는 것으로 여기신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인사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 인사하신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이여!"

 

  성모송의 첫 구절은 우리의 청각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리라고 요구 한다. 어둠의 권세가 이미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은 때에,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의 음성을 듣는 이를 찾고 계실 것이다. 그 음성을 들었던 다니엘을 기억하자. 또 마리아를 기억하자. 지쳐 쓰러져서 '안된다. 그건 꿈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좀비들의 대열에서 벗어나자. 세상은 더 평화로운 곳일 수 있다. 성정체성 때문에, 가진 돈이 적어서 불행해야 하는 세상은 끝날 수 있다. 인간이 온 지구의 생명들 앞에서 회개하는 날이 올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그 것을 보았고, 우리 역시 그 것을 보도록 가브리엘의 초대를 받았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이여!"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 인사에 고개숙여 응답할 생각이다. 다음에 이어질 놀라운 메시지를 기대하면서.

 

 200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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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0:36 2011/12/0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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