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1/12/01 10:54

성모송 묵상 5-"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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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시대가 너무 답답할 때 난 이렇게 혼잣말로 되뇌인다.

"거룩하신 전태일과 이한열,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사도신경에 나와있는 '성도의 상통', '교통', 혹은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마리아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오늘날의 교회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화산맥'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화산맥은 역사의 저변에서 도도히 흐르다가 어느날 갑자기 솟아올라-예수가 그랬던 것처럼!-천지를 진동하게 만든다. 마리아를 '위인'이 아닌 '성인'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녀를 그 화산맥의 일부로써 기억한다는 의미이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치 혼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글자들이 모여서 단어를 이루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듯 말이다. 앞서간 성인 한사람 한사람은 다름에 오는 이들과 상호작용-교통, 상통, 통공-하면서 하느님이 세상이라는 책에 쓰시는 말씀이 된다. 우리 역시 그 책에 새로 쓰이는 글자로써, 앞서간 이들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마리아는, 그리고 그녀가 대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이다. 그래서 이 부름은 새로운 부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새로운 부름은 마리아로 상징된 하느님의 백성 곧 구원의 화산맥을 이어온 많은 이들을 향한 부름이다. 우리는 이 부름 안에서 제국의 권세에 당당히 맞선 모세를 부르고, 국가에 의한 폭력을 경고한 사무엘과 나탄(나단) 예언자를 만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는 죽음을 택한 많은 이들-로메로 주교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열사 전태일-을 부른다.

 

  이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지금 천국과 비슷한 공간인 '낙원'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혹은 '전구') 할 수 있든지,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처럼 수면 상태에 있어서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우리는 앞서간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중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부르고, 해결되지 않을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릴 때에는 나탄 예언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다윗을 부른다. 아마도 그들에게 중보기도를 구하는 것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내게도 일어나기를 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형식상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라고 되어있는 요청들은 내용상으로는 "제가 당신의 기도에 연대합니다" 라는 의미가 된다. 이 연대는 현실을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킨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의 목소리가 커져갈 때에 우리는 파라오의 군대와 바다 사이에 선 모세를 부를 수 있다. 이 부름을 통해서 모세의 담대함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방법이다.

 

  요즘 나는 종종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시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기를 구하곤 한다. 그가 꿈꾸던 나라는 아직 미완성이기에, 그가 하느님을 향해 올려드렸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전태일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요청할 때에 그의 기도는 나의 것이되고, 나의 기도는 미완으로 남은 그의 기도에 덧붙여져 그의 기도가 된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디트리히 본회퍼와 마틴 루터 킹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구했던 정의는 이 땅에서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신 본회퍼와 루터 킹,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하고 구할 때에 그들이 가졌던 용기와 사랑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들을 닮은 하느님의 일꾼으로 변화될 것이다.

 

  지금 당신은 앞서간 이들 중 누구를 닮고 싶은가? 성모송 묵상은 당신과 그 사람 사이의 깊은 교제를 열어주는 문이 되어줄 것이다.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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