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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신앙고백 2015/04/20 16:43

혁명기도원 비폭력 저항 모임 매뉴얼

이 문서는 2014년 9월부터 약 두 달간 진행된 "혁명기도원 비폭력 저항 모임"의 녹취록과 가이드 라인을 수록하였습니다.

 

사회적 차원의 영성과 행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 기독교 단체가 실제 현장에서 최대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목적으로 작성된 이 문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 혁명기도원

 

[비폭력 모임.pdf (1.24 M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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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0 16:43 2015/04/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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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려요! 2015/04/15 08:27

2015. 4. 15. 모임 안내

계속되는 구조조정,
비정규직/외주노동자의 증가.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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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5 08:27 2015/04/15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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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려요! 2015/02/05 13:22

전태일, 순교자

*혁명기도원은 2015년 2월 4일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해직자들과 함께 전태일 이콘을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 글은 축복식에 앞서 기도원 내부에서 공유했던 내용입니다.

 

 

1. 순교자의 정의
 

'순교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마르튀스(μάρτυς)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는 증인이라는 뜻인데, 교회는 말이나 글로 복음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한 이들을 부를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증언들은 많은 경우에 목숨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죽음과 동일시 되었다. 현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이들을 순교자(Martyr)로 부른다.

 


2. 전태일의 신앙
 

1) 신앙적 배경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독실한 신앙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소선은 기도를 통해 시력을 회복하는 체험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으며, 매일 개인기도 시간을 가졌다. 전태일 역시 일기와 편지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고백을 표현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해 고백하였으며(1970년 3월 중앙일보에 보낸 편지), 하느님의 계명인 안식일을 준수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1969년의 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고백하였다(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쓴 메모). 또한 그는 마지막 일기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잊지 않았다.

 

2) 교회 생활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과 함께 창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 놓기로 결심한 장소도 창현교회 임마누엘 기도원 건설 현장에서였다. 그는 언제나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3. 죽음의 계기

 

1) 작은 자들을 향한 사랑
'시다'로 불리던 여공들을 향한 전태일의 사랑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증언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전태일이 자신의 차비를 아껴 여공들을 위한 풀빵을 샀던 상징적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공부한 것도, 이상적 회사를 구상했던 것도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형제', '마음의 고향', '이상의 전부'로 불렀다.

 

2) 타인을 위한 죽음
1970년 8월, 삼각산에서 결심을 굳힌 전태일은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한다. 그는 자신의 결단이 갖는 이타적 성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그가 마지막으로 펼치려 했던 현수막 역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같은 내용들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이며, 인간의 힘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하느님의 법도를 행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마누엘 수도원에서 쓴 노트)라고 배웠던 전태일은 이미 나눔과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죽음에서도 그와 같은 원칙이 관철되기 원했다. 그는 자신의 헌신으로 인해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존엄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바랬고, 자신의 운동이 "나를 아는 모든 나"는 물론 "나를 모르는 모든 나"들을 통해 계속되기를 바랐다.

 


4. 죽음의 결과

 

1) 그리스도에 대한 재발견
전태일의 죽음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다. 안병무는 전태일을 통해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살았던 예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으며, 문익환은 그의 모습이야 말로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의 모습 그 자체라고 고백하였다. 복음서에 기록되었으나 추상적 신앙고백에 가려져 빛을 잃고 있었던 예수의 행적들이 그를 통하여 생생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오재식은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 쓴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천민의 친구로, 그들의 무리로, 그들의 아들로 그렇게 장터에서 뒹굴고 거리에서 서성대고, 들에서도 다짐했었다. 눈이 먼 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상한 자를 만지고, 찢긴 자를 위로하고, 억울하고 지치고 병들어가는 이웃을, 그들을 생각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었겠지."
이처럼 전태일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이 가진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2) 헌신된 신자들을 일으킴
전태일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켰으며, 그가 못다이룬 일을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실천했다. 이소선은 이후 청계피복노조 설립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2011년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어머니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서 인간의 존엄함과 약자 보호에 대한 성소(聖召, 부르심)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죽음 직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추도식에 참여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재확인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노동조합 설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3) 부활 신앙이 확산됨
전태일의 순교적 죽음은 인권을 위한 헌신을 불러일으킨것 외에 중요한 특징을 하나 더 가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널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민종덕은 전태일의 죽음 뒤에 이소선에게서 싹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 너의 그 사랑이 충만한 죽음이 어찌 헛될 수 있단 말이냐. 진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생각을 할 때 너의 죽음은 반드시 부활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오늘 사람들의 가슴마다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 그것이 더욱 강렬하게 꽃 피어나갈 것을 확신한다."(민종덕, "어머니의 길")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오재식, 문익환, 안병무 등의 글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그의 죽음이 목격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서 신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그의 생전과 별세 후에 그를 통해 일하셨다는 증거이다.

 


5. 결론


전태일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가시적 교회에 깊이 헌신했고, 신앙의 기초적 가치인 창조주에 대한 경외와 이웃 사랑을 마음에 품고 몸으로 행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신앙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구체적 실천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이끌린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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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 <순교자 전태일>, 조아라(미카엘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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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13:22 2015/02/0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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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려요! 2015/02/05 13:12

[전태일 이콘 해설] by 조아라 (미카엘라)님

전태일 이콘 해설

조아라 (미카엘라)


혹시 이콘이 무엇인지 생소하신 분들이 계실까봐 간략히 이콘에 대해 설명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이콘”이라는 말이 바로 “이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콘은 “그림”, 또는 “모상(닮은꼴)”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어로 이콘이라고 읽히는 단어가 어원입니다.
이콘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학적이고 신화적인 해석부터 현실적이고 드라이한 해석까지 여러가지가 있고 초대교회가 존재하던 무렵부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갈릴 때까지 여러차례 번영과 파괴의 역사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역사만 한달 꼬박 공부해야 할만큼 내용이 방대하니 이 자리에서는 '이콘이 서방교회보다는 동방교회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정교회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계신 경우도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콘을 그리는데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됩니다. 구도, 색, 표현 하나하나까지 모두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설명드릴 수는 없고 오늘은 전태일 이콘에 사용된 색과 그 의미만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사정상 더 두껍고 화려한 액자를 사용하지 못했으나 본디 이콘은 두꺼운 틀에 신심을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을 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을 통해 내면, 혹은 신심을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제가 성공회는 잘 모르겠으나 가톨릭의 경우 성물이나 상본을 모시는 마음으로 정교회에서 이콘을 각 가정이나 성당에 모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이콘을 보실 때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서 입니다.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본받아 그의 제자로 따르고 닮은 삶을 살겠다는 마음인 것과 같이, 전태일 이콘 뿐만 아니라 어떤 이콘을 마주하셔도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우상 논쟁에서 자유로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망토와 머리에 동여맨 띠와 텍스트엔 붉은색이 칠해졌습니다.
붉은색이나 자색은 신성, 신적인 또는 제왕의 권위, 품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악과 피도 상징합니다. 구약부터 자주 등장하는 색이기도 하지요. 이런 여러가지 의미들 중 “순교자”의 의미로 사용된 색입니다.

전태일이 대표하는 “노동자”라는 의미를 어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초기 이콘들에서도 사용된 머리띠를 사용해 그 의미를 부여하고 순교자로서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뜻하는 역동적인 망토를 입혔습니다.
텍스트도 역시 순교자의 의미로 붉은색을 입혔습니다.

 

옷자락은 푸른색으로 표현했습니다.
푸른색은 신비, 가라앉음, 하늘, 하늘나라의 무궁, 육화적인 동경, 순수, 진리, 신뢰 등을 상징하며 모든 색 중에 가장 감각적이지 않고 정신적인 것으로 잔잔하고 평온함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전태일의 성스러운 삶의 신비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과 십자가는 흰색으로 표현했습니다.
흰색은 신들의 색으로 부활, 새로운 삶, 영원한 영광, 순진, 순수를 나타내는 색입니다.
성공회나 가톨릭에서 하늘에 관련된 축일이나 그리스도의 영광과 관련된 축일에 사제들이 흰색 제의를 입지요.
십자가. 즉 희생으로써 전태일의 고통이며 절규였던 불길이 거룩한 흰 불길로 거듭나게 됨을 표현합니다. 희생으로 영광을 입었으며 고통이 더이상 고통이 아니게 됨을 의미합니다.

 

근로기준법 책의 색은 검정색입니다.
검정색은 지옥 어두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 가장 높은 경지의 고행 등을 상징하며 수도사와 고행자들의 색입니다.
왜 검은색 바탕인지 더 설명드리지 않아도 이해되실거라 여겨져요.

 

후광과 근로기준법 글씨는 금빛입니다.
사물은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갖게 되지요. 빛의 반사가 없다면 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금은 불멸의 경이적인 색으로, 깨끗한 광휘를 표시하고 태양의 찬란함을 반영한 신성한 색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광은 거의 대부분 금을 입히지요. 구태여 근로기준법이라는 텍스트에 금빛을 입힌 이유는 그것이 전태일의 목숨을 건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배경은 노란색입니다.
빛과 가까운 성스러운 색입니다.
지금 전태일이 성스러운 곳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전태일 이콘은 파격적이라는 Dancing Saints 이콘들만큼 대놓고 파격적이진 않지만 조금 규칙을 벗어난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산의 문제도 있었고, 좀 더 그리스 이콘의 느낌을 차용하고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제가 공부한다고 했는데도 실수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렸으니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 세상에 나왔으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저의 부족함까지 함께 봉헌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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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엔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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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13:12 2015/02/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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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신앙고백 2014/12/01 16:45

소위 "동성애 반대"에 대하여.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1서 4:18.

 

최근 서울시 인권헌장 제정과 관련하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성소수자들이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올 것이니, 회개하고 이성애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지옥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의 행동 때문에 자신들이 받을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1서 4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던 거짓말을 멈춥시다.
그리고 사랑합시다. 사랑만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2014. 12. 1. 혁명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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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1 16:45 2014/12/0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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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4/10/27 10:42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월간 복음과 상황 2014.10월호)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여정훈(혁명기도원 원장)

 

일터에서 성폭력에 시달리던 박 집사는 평범한 중형 감리교회의 속장(구역장)이었다. 그녀는 성폭력을 문제 삼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사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는 농성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났다. 농성장에서 드린 예배를 통해 시편의 탄원 시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체험했다.
 

순복음교회 장로의 딸이었던 한 자매와, 군 생활 이후 20여 년간 교회 문턱을 밟아 본 적 없던 한 형제는 장사하던 건물에서 강제퇴거를 당한 후에 서울시와 조합의 책임 있는 대응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농성장에서 드리는 부활주일 예배에서 세례를 받았다. 투쟁을 계속할수록 그동안 남 이야기로 생각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기도와 말씀은 그들에게 2년 동안의 천막농성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혁명기도원’, 조금 수상한 이름의 연대
 

우리는 ‘혁명기도원’이라는 조금은 수상한 이름으로 위 두 곳을 비롯한 여러 현장들에서 연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파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가 되었다. 서로 농담처럼 “정교회만 오면 한국교회가 다 모인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개교회와 교파를 넘어선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농성장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몸은 함께 기도하는 이들의 모임이자 함께 만찬을 나누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매주 예배 후에 나누던 만찬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매주 신경 써서 음식을 장만했고, 어떤 이들은 집에서 만든 음식을 가져왔고, 어떤 이들은 오는 길에 간단한 먹거리를 사 오기도 했다. 먼 곳에서 택배로 막걸리를 보내준 형제도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경험은 아니었겠지만, 우리는 이 식사에서 오병이어를 체험했다. 광야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은 들에 있던 굶주린 갈릴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철거농성 천막에 모인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신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었다. 그 만찬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고, 하늘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았다. 거리 농성장에서의 예배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남았다.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나는 ‘낭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떠올리곤 한다. 낭만이라는 정서를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노래 가사 속 낭만이란 것은 조금 아프지만 달콤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 설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투쟁은 낭만적이다. 현장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고, 함께 물대포를 맞고, 함께 경찰과 차벽에 막혀 소리 지르고, 함께 단식하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때로는 개인을 초월하여 더 큰 무엇과 하나 되는 듯한 마음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아픈 동시에 아름다운, 아니 아프기에 찬란한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투쟁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경험들에 덧붙여 몇 가지를 더 경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예수를 찾아 온 갈릴리 민중들의 얼굴을 본다. 억울함을 풀어달라 호소하는 이의 목소리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음성으로 들리고,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의 폭력은 구세주의 등을 파고 든 로마 군병의 채찍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신앙체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공중 권세 잡은 자' 와의 싸움 중에 있다는 감각을 갖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신학자들은 이 경험을 “아남네시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 개념은 예배, 특히 성찬 성례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이 개념은 성찬기도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의 이야기들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말씀과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아남네시스)한다. 그런데 예수의 삶과 말씀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 세상에 침투하여 그것을 뒤집어 엎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그 나라의 삶을 살고, 그 나라의 성취를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우리가 과거의 인물인 예수와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미래는 온 세상이 초대 받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고, 제국의 폭력 아래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착취와 폭력을 방패삼아 평온을 누리던 이들이 심판 받는 날이다. 


우리의 낭만은 지나간 것에 대한 아련함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의 낭만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기대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투쟁 현장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낭만을 ‘종말론적 낭만’이라 부르려 한다.
 

 

투쟁의 자리에서 맛보는 기쁨
 

2011년 명동의 한 농성장에서 시작된 혁명기도원 정기모임은 청계천 옆 길바닥으로, 공사장 옆 농성장으로, 영업 중인 식당으로, 어느 부자동네 대로변으로 이어졌다. 마치 〈포켓몬스터〉에서 지우와 피카츄가 마을을 순회하며 친구들을 만나듯 우리는 각각의 현장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한 농성이 끝났을 때 그 친구들은 다음 현장에 위로와 축복을 전하는 이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만으로 채워진 사건은 아니다. 회심은 개인 안팎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심을 떠올릴 때에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투쟁의 기억들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의 전쟁은 종말론적 승리에 대한 약속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종말론적 낭만이 아니겠는가.

 

투쟁의 자리에서 만난 복음은 고난 중에서 기뻐할 힘을 주는 것이었고, 그 기쁨은 현장에서 현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수가 마을들을 순회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기쁨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예수에게도 낭만은 종말론적 승리의 비전을 향해 움직이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현장을 찾는 것은 남에게 위로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다. 위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현장에 연대할 때에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현장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마치 우기를 기다린 사막의 강처럼 활력을 얻어 꿈틀댄다. 바로 그곳에서, 탄원 시와 수난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종말론적 희망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다. 그 임재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당신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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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10:42 2014/10/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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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신앙고백 2014/06/27 15:35

<분더바 투쟁 승리에 대한 혁명기도원의 성명서>

분더바의 승리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하합니다!

101일의 농성 끝에 드디어 분더바 투쟁이 협상을 통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게 주인이신 두 분과 함께 서로의 인간됨을 놓지 않고 건물주의 양심적인 대처와 원만한 협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늘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몸과 마음으로 함께해 주신 이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믿습니다. 두리반, 카페 12pm, 놀란곱창, 신신원, 곱창포차에서의 승리는 참으로 기적적이었으며, 이번 분더바의 승리도 또 하나의 작지만 큰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걸고 마련한 가게를 보상금 한 푼 받지 못하고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홍대의 소규모 점포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명도집행의 위기 앞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위기가 단순히 건물주의 죄된 심성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위기의 배후에는 불의한 법과 제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건물주의 선의나 투쟁을 통한 협상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법과 제도의 개선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에스겔)은 하느님의 성전으로부터 물이 차고 넘쳐 그 물이 온 세계로 뻗어 가며 새로운 물길을 내는 환상을 봅니다. (겔 47:1-12) 이 물은 닿는 곳곳마다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부터 물이 흐르기를 고대합니다. 그 물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어 일방적인 폭력 앞에 내던져진 이들을 살리는 물입니다. 강제 명도집행 앞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쫓겨나는 힘없는 이들을 위한 물입니다.

우리는 이 물이 십자가에서 권력자들의 불의를 폭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흐르기 시작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어 생명을 얻고, 그 물을 수많은 이들이 마실 수 있도록 물길을 내는 일에 초청받았음도 믿습니다. (요 7:37-38)
한 번 흐른 물길은, 그 물이 끊이지 않는 한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흐르기 시작한 이 물은 우리를 통해 보호받지 못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로 흐를 것입니다. 주거세입자와 상가세입자의 권리를 지키고 그들의 신음에 응답하는 법과 제도의 제정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물길을 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의 강물이 닿는 곳에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것입니다.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볼 것입니다. 정의가 하느님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갈 것입니다. (시 85:10-11,13)

강한 자와 약한 자의 평화를 위해서는 정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진실에 대한 정직한 갈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가 무너지고 진실이 가리워진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며 그를 따르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며, 기도하며, 노래하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싸우고, 웃고, 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정의의 뒤를 따라 평화를 인도하며 우리는 묵묵히 걸을 것입니다.

그 발걸음에 여러분의 발걸음 또한 더해지기를 기다립니다. 함께 기적을 이룹시다. 더 이상 그 기적이 없어도 되는, 하느님의 강물이 차고 넘쳐 온 세계를 살리는 그 날까지!

구주강생 2014년 6월 27일 혁명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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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7 15:35 2014/06/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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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려요! 2014/06/05 19:40

퀴어퍼레이드 축복 대성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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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초대합니다!

 

행사 관련 혁명기도원 성명서를 보시려면,

http://blog.jinbo.net/rev_pr/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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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5 19:40 2014/06/0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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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칼럼 2014/06/01 17:19

[묵상] 최저임금 1만원의 복음

루가복음 12:16-20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1.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100억의 연봉을 받고 삽니다. 그들의 수입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자기가 직접 생산한 것을 팔아서 번 돈입니까?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깨끗한 부자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기는줄도 모르고 빼앗기는 것이 우리가 세상의 현실입니다.

 

2. 저는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자는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월급 덜 주고, 수당 안 주면서 빼앗은 것들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노동자를 노예로 보고, 죽지 않을 만큼의 밥만 먹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평등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를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 우리 소명일 것입니다.

 

3. 작년에 저는 "최저 임금 만원, 성경에 써 있네" 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조:성경에 계시된 최저임금 만 원의 비밀, 만천하에 드러나다!)오늘 저는 그 때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을 넘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창고를 채운 이들을 심판하고, 그들의 창고를 털어 빼앗긴 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 그것이 복음적 실천이라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4. 오늘은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활동가 권문석의 추모제가 있는 날입니다. 모든 노동자가 해방된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스럽게 빛날 것입니다.

주여, 별세한 이를 평안히 쉬게 하시며, 영원한 빛으로 비춰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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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1 17:19 2014/06/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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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신앙고백 2014/05/31 17:14

[성명] 퀴어문화축제, 이대로 놔 둘 것인가?

1. 2014년 퀴어문화축제가 6월 7일 신촌 일대에서 열립니다.

 

이 행사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이고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서대문 구청은 돌연 행진 허가를 취소했고, "동성애자 교정 사역" 으로 유명한 이요나, "안되는건 안돼"라는 노래를 부른 알피큐 등의 사역자들이 신촌 한 교회에서 집회를 열어 축제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 그들은 이성애 이외의 성적 지향은 "죄"이며, 거룩하고 올바른 것인 이성애적 성향으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해당 행사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마태 5:36) 존재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라는 말씀도 받았습니다.

 

4. 우리가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의 색깔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정죄함으로 다른 사람의 성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눈의 들보를 빼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논할 수 없음도 분명합니다.

 

5. 우리가 빼내야 할 우리 눈의 들보는 바로 혐오와 분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아닌 혐오와 분노로 하느님의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 12:15)고 권합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퀴어문화축제가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행사가 되게 하기 위해, 앞서간 세대의 성도들과 함께, 한 예언자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선언합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

 

7. 이제 우리는 퀴어문화축제를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 축제가 더 기쁜 축제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축하합시다.

구세주 강생 2014년 부활 6주 토요일, 혁명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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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31 17:14 2014/05/3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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