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4/10/27 10:42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월간 복음과 상황 2014.10월호)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여정훈(혁명기도원 원장)

 

일터에서 성폭력에 시달리던 박 집사는 평범한 중형 감리교회의 속장(구역장)이었다. 그녀는 성폭력을 문제 삼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사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는 농성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났다. 농성장에서 드린 예배를 통해 시편의 탄원 시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체험했다.
 

순복음교회 장로의 딸이었던 한 자매와, 군 생활 이후 20여 년간 교회 문턱을 밟아 본 적 없던 한 형제는 장사하던 건물에서 강제퇴거를 당한 후에 서울시와 조합의 책임 있는 대응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농성장에서 드리는 부활주일 예배에서 세례를 받았다. 투쟁을 계속할수록 그동안 남 이야기로 생각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기도와 말씀은 그들에게 2년 동안의 천막농성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혁명기도원’, 조금 수상한 이름의 연대
 

우리는 ‘혁명기도원’이라는 조금은 수상한 이름으로 위 두 곳을 비롯한 여러 현장들에서 연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파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가 되었다. 서로 농담처럼 “정교회만 오면 한국교회가 다 모인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개교회와 교파를 넘어선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농성장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몸은 함께 기도하는 이들의 모임이자 함께 만찬을 나누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매주 예배 후에 나누던 만찬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매주 신경 써서 음식을 장만했고, 어떤 이들은 집에서 만든 음식을 가져왔고, 어떤 이들은 오는 길에 간단한 먹거리를 사 오기도 했다. 먼 곳에서 택배로 막걸리를 보내준 형제도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경험은 아니었겠지만, 우리는 이 식사에서 오병이어를 체험했다. 광야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은 들에 있던 굶주린 갈릴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철거농성 천막에 모인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신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었다. 그 만찬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고, 하늘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았다. 거리 농성장에서의 예배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남았다. 

 

 

현장에서 체험하는 종말론적 낭만
 

나는 ‘낭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떠올리곤 한다. 낭만이라는 정서를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노래 가사 속 낭만이란 것은 조금 아프지만 달콤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 설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투쟁은 낭만적이다. 현장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고, 함께 물대포를 맞고, 함께 경찰과 차벽에 막혀 소리 지르고, 함께 단식하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때로는 개인을 초월하여 더 큰 무엇과 하나 되는 듯한 마음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아픈 동시에 아름다운, 아니 아프기에 찬란한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투쟁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경험들에 덧붙여 몇 가지를 더 경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예수를 찾아 온 갈릴리 민중들의 얼굴을 본다. 억울함을 풀어달라 호소하는 이의 목소리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음성으로 들리고,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의 폭력은 구세주의 등을 파고 든 로마 군병의 채찍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신앙체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공중 권세 잡은 자' 와의 싸움 중에 있다는 감각을 갖게 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신학자들은 이 경험을 “아남네시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 개념은 예배, 특히 성찬 성례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전통적으로 이 개념은 성찬기도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의 이야기들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말씀과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아남네시스)한다. 그런데 예수의 삶과 말씀은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 세상에 침투하여 그것을 뒤집어 엎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그 나라의 삶을 살고, 그 나라의 성취를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우리가 과거의 인물인 예수와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미래는 온 세상이 초대 받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고, 제국의 폭력 아래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이 기억되고, 착취와 폭력을 방패삼아 평온을 누리던 이들이 심판 받는 날이다. 


우리의 낭만은 지나간 것에 대한 아련함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의 낭만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기대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투쟁 현장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낭만을 ‘종말론적 낭만’이라 부르려 한다.
 

 

투쟁의 자리에서 맛보는 기쁨
 

2011년 명동의 한 농성장에서 시작된 혁명기도원 정기모임은 청계천 옆 길바닥으로, 공사장 옆 농성장으로, 영업 중인 식당으로, 어느 부자동네 대로변으로 이어졌다. 마치 〈포켓몬스터〉에서 지우와 피카츄가 마을을 순회하며 친구들을 만나듯 우리는 각각의 현장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한 농성이 끝났을 때 그 친구들은 다음 현장에 위로와 축복을 전하는 이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만으로 채워진 사건은 아니다. 회심은 개인 안팎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심을 떠올릴 때에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투쟁의 기억들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의 전쟁은 종말론적 승리에 대한 약속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종말론적 낭만이 아니겠는가.

 

투쟁의 자리에서 만난 복음은 고난 중에서 기뻐할 힘을 주는 것이었고, 그 기쁨은 현장에서 현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수가 마을들을 순회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기쁨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예수에게도 낭만은 종말론적 승리의 비전을 향해 움직이는 무엇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현장을 찾는 것은 남에게 위로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다. 위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현장에 연대할 때에 그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현장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마치 우기를 기다린 사막의 강처럼 활력을 얻어 꿈틀댄다. 바로 그곳에서, 탄원 시와 수난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종말론적 희망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가.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다. 그 임재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당신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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