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3/15 21:22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러나 연애하는 사람들의 친애에 있어서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사실 자기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자기가 무척 사랑하고 있는 그만큼 상대방은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그 전에는 모든 것을 약속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러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반면, 사랑받는 사람은 상대방을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며, 또 둘 다 자기에게 기대되었던 여러 가지 자질을 소유하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 그 친애도 없어지고 만다. 각자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질을 사랑했던 것인데, 이런 것들은 영속적인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친애도 일시적이다...

 

...누구나 살기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동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자신의 청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이지를 가지는 등등으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므로 또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쾌락은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쾌락 때문에 삶을 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것 때문에 쾌락을 택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 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쾌락은, 사실 활동이 없으며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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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은 '인간을 위한 선'이란 제목으로 윤리학적 탐구의 과제와 성격 및 선과 행복의 정의, 덕의 종류가 서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제2권에서 6권까지는 이 책의 중심 부분으로 윤리적인 덕과 지적인 덕에 구체적인 덕목을 들어 가면서 세부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제7권에서 9권까지는 후반부로서 쾌락과 우애의 문제를, 마지막 10권에서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행복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면서 관조적 삶이 최상의 행복임을 논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지나 힘겹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렀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절감하며 그러나 과감하게 지나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종종 그렇듯 내게 흥미있는 구절은 늘 따로 존재한다. 바로 저명한 철학자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놀랍고도 신기하다. 이천년 전의 연애 양상이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점과 '한갓' 사랑이 이들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논의 자체가 관념적이고 유치하게 치부될 때가 많은 현실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역이며 각자 알아서 잘(!)하면 될 뿐이다. 단 조직에 피해가 가지 않게.  나 역시 그렇게 가볍게 규정했지만 막상 연애과정속에서 앞뒤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모든 문제에서 드러나듯 신념은 너무나 단순하면서 빈곤했고 사랑과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했다더라'식의 뒷담화 수준에서 벗어나 담론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었던 내게,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이들의 논의 자체가 그 이해 여부를 떠나 놀라운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무엇 때문에 사랑한 것일까. 유용성 때문일까, 쾌락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어는 순간부터인가 그 사람이 대책없이 좋았고 실제로 함께 있으면 편리한 점이 많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했을까.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처럼, 동기가 되었던 쾌락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의미 또한 상실되었던 것일까.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므로 말이지. 하여튼 일정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공통된 활동영역 속에서 다시 마주치게 됐다. 나는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조직 활동을 시작한다. 단지 나를 위해서.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또한 다시 보고 싶다. 나는 결코 겉모습에 반하지 않는다. 그의 열정과 풍부한 인식, 따뜻함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멋져도 활동가가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분발하기를 바란다. 그의 모습에 여전히 가슴이 뛴다면 나는 멍청이겠지만 어쨌든 과거의 상처는 틀림없이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놓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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