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13/03/07 12:39

나쁜 초콜릿 Bitter Chocolate

 

...‘공정함’ 또는 이것의 성숙한 형제인 ‘정의’는 초콜릿과 같은 사치품의 원료를 생산한 이들에게 좀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도덕적 올바름보다 더 큰 권력에 의해 그것들은 무시되거나 추방되었으며 지배층이나 시장의 윤리적 무감각에 대항해 맞섰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도덕적으로 애매모호한 소비 대중의 태도다. 이들은 항상 불의를 비난하면서도 대지의 과일을 가장 낮은 가격에 향유하려 한다. 많은 소비자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할 권리만이 유일하게 공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로 일자리를 찾아 모험을 감행한, 내가 만났던 말리 소년들은 카카오 재배 현장에서 강제노동으로 생을 바치고 나서야 판형 초콜릿의 진정한 가격에 대해 고통스럽게 배웠다. 비록 그들은 판형 초콜릿을 본 적조차 없지만 말이다. 이제 그들은 그 가격이 그들과 같은 아이들, 초콜릿 맛이 무언지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수백명의 아이들이 노예노동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안다.

 

- 캐럴 오프,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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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성도 꽤나 무뎌졌나보다. 물론 이 책은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초콜릿을 둘러싼 역사와 사실을 꽤나 면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불러오는 충격성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먼 나라에서 자행된 아동노동과 학대의 과정을 감정의 큰 변화없이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미 안팎으로 아동노동을 둘러싼 논란과 공정무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듣긴 했지만 말이다.

쉬는 동안에 책 읽기를 계속하며 드는 생각중의 하나가 내가 참 의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좀처럼 쉽게 빠져들지 않는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정함'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나쁜 초콜릿'의 대안일 '착한 초콜릿'도. 오히려 내가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계 어떤 노동자도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일 뿐이다.

 

얼마 전에 나는 친구의 부탁으로 어떤 회사에서 나온 콩 제품을 마트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 제품을 선택하는 1~2초의 짧은 순간 망설임이 일었다. 처음부터 바른 먹거리를 표방했던 그 회사의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시간,  노동강도의 증가로 근골격계질환 등 직업병이 무더기로 발생했지만 회사에서는 작업환경 개선은 커녕 직업병 발생도 부인하며 오히려 해고 등으로 탄압했던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한동안 불매운동을 벌였고 나 역시 그랬다. 다른 부문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는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친구에게 그 제품은 시중회사에서 나온 유일한 것으로 꼭 필요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회사 제품은 친환경이나 국산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아주 잠깐 씁쓸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없는 상품'이 가능한가?

상품에 도덕적 기준인 '공정함' 또는 '착한' 등을 적용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기준으로 상품을 선택해야 한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최소생활비의 확보는 둘째치고, 과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은 과연 어떤 것, 몇 가지나 될까? 코트디부루아의 아이들만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아동'이고 '노예노동'의 형태라는 점이 더욱 극악할 뿐,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리나라 최대의 대기업 '삼성반도체'에 들어가  이름도 알 수 없는 화학약품을 다루며 일하다 몇년 후에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여성 노동자는 어떠한가. 불산 누출로 노동자가 죽어도 노동자 탓만 하며 사고 은폐와 책임회피에 급급했던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품질에도 불구하고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며 공공연하게 노동자를 감시하고 탄압하는 삼성의 제품에는 이러한 노동자의 피와 한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쁜 핸드폰''나쁜 냉장고 ' 등등, 삼성 제품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성뿐일까? 고등학교 실습생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다 의식불명 상태에 이르게 한 기아자동차는? 공정무역상품은 논외로 치고, 나쁜 상품이 아닌 상품이 존재하는 것일가? 아, 혹시 노동자 몇 명 죽는 것쯤 대수롭지 않으니  대충 착한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쁜 초콜릿'의 대안은 '착한 초콜릿'일 것이다. 공정무역의 긍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착한'이라는 표현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없는 상품은 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초콜렛의 달콤함을 온전히 맛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 시행되는 공정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 착취에 대한 조절은 가능하고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품이 생산되어 내 손안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거칠텐데 그들에게 모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는지는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 이러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 성과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착한'을 표방하는 상품을 '선택'할 수 없는 빈곤층에게까지 제발 도덕의 돌팔매를 날리지 않기를.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의 각성과 국제적 관심, 연대를 통해 코트디부아르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관심을 갖고 노동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면서 착취를 줄여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사례에서도 세계 인권운동가들의 활발한 활동과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노동운동은 부끄러운 점들이 참 많다. 아이들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즉각적인 구호 활동과 공정무역체계 구축을 통한 권리 확대를 이뤄낸 활동가들 앞에선 입장의 차이에도 숙연할 뿐이다. 더불어 삼성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기위해 열심히 뛰는 정도를 지나서 억압받고 고통 당하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인정받고 그 요구들을 쟁취해나가기를. 가장 중요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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