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영화 2013/12/07 18:56

빵과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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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7 18:56 2013/12/0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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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10/08/08 01:35

공기인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행이 지난 구모델 공기인형 노조미,

그녀는

혼자 사는 중년남성의  일방적인 대화 상대와 성욕 해소의 도구이기도 하고

어린 남자애의 훔쳐보기와 자위의 대상이기도 하며

연인과 결별한 젊은 남자에게 애인 대역으로서 죽임과 살림의 과정속에 쾌감의 대상이 된다

인간처럼 밥 먹는 것을 흉내내는 노조미,

사랑하는 남자의 행위를 모방하여 그의 공기를 빼내려던 노조미,

마지막 순간에 모두에게 생일 축하 받는 것을 꿈꾸는 노조미,

그러나 섹스인형에게 마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각각 다른 남성들의

각각 다른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

세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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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1:35 2010/08/08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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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09/06/21 12:30

The Reader 2

                 

 

 

 동영상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DDE2077C4C8F80C0C028F8E711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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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화자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던 바로 그 어린 '남자'이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물론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지만 몇년후에 법정 앞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녀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용기도, 완전히 모른척하고 살아갈 뻔뻔함도 갖지 못한다. 그랬다. 그는 단지 감성적이고 소심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그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를 변호하려는 것일까? 그녀 아니면 자기 자신? 그의 내적 갈등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했고, 가석방 전날 만난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숨김없이 드러났다. 결국 그녀는 그날 밤 자살하고 만다. 이제 그는 그녀를 대신해 학살에서 살아난 유태인 작가에게 화해를 청하고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온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는 비겁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희끗희끗 변하도록 그는 마음의 벽을 쌓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 그녀를 외면했다. 당연히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할 시간. 그리고 사실 누구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는 유태인 학살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단순한 하수인일 뿐이었다. 정작 학살의 책임자로 법정에 세워지고 중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쉽게 용서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순수하게만 그녀를 사랑해서일까? 혹시 지식인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때때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도 있음을. 중요한 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조금씩은 불완전하고 크든 작든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자기반성과 변화이다. 적극적으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 사랑한다면 더욱더 말이지. 그래서 그녀가 아쉽다.. 그러나 책 읽어주던 멋진 그 남자 - 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기회를 갖게 되겠지.. 

 

왜 이 영화에 연연하게 되는 건지 잠시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 현실앞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이 싫었던 모양이다. 알지만 바꾸지 못하는, 지식의 무력함 말이다. 그는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말많고 해박한 이론가들일 수도 있지만 뒷전에서 무심하게 책이나 읽고 이렇게 글이나 써대는 나일 수도 있다. 예전에 종종 침묵하는 대다수 민중에 대한 갑갑함으로 좌절하곤 했는데 어쩌면 요몇년간의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 무척 찔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모두가 최전선의 투사가 될 수는 없음을. 전체운동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빛깔과 모양에 맞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운동은 결코 빛나는 이십대, 삼십대에 끝나지 않는다. 활동가들조차 굳이 경험과 나이에 걸맞는 '자리' 와 '역할'에 연연하는 강박관념은 한편으론 우습다. 머리가 하얗게 세져도 민중들속에 섞여 조화롭게 투쟁할 수 있는 힘, 죽을때까지 운동은 쭈욱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고개를 넘은 셈이고, 지금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추스리면서 내 빛깔을 찿게 될 시간. 이런 허접한 글들 또한 그 속에 존재한다. 이 엄혹한 시절의 한끝에서 그렇게 나를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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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2:30 2009/06/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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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영화 2009/06/16 22:20

The Reader

                   

 

동영상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vid=DDE2077C4C8F80C0C028F8E711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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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도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읽지 못하는 세계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똑똑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나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그 누군가는 분명히 남성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음성을 통해 사랑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도 행복감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치명적으로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책을 읽어주는 남자와 듣는 여자, 영화 속 장면은 행복한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슬픈가? 책은 마치 또 하나의 권력처럼 느껴진다. 아름답고 연륜있는 그녀가 갖지 못한 능력, 훨씬 어린 남자는 그것을 갖고 있음으로써 그녀와 동등해지거나 오히려 우위에 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세상의 기준에 꼭 맞게 보이지 않는 그들의 관계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가 떠남으로써 끝난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덧 유태인 수용소의 충실한 감시원이 되어 교회 안에서 타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둔다. 감시 - 그것이 그녀의 임무였으므로. 정작 책임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고 유태인 학살의 주범으로 재판 과정에서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지켜보던 남자는 소리없이 절규한다. 그녀의 잘못은 무엇인가? 무지함 또는 무관심 - 그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과 세상에 대해서. 그러나 그랬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그녀와 법대생으로 참관하는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변호사가 된 그가 보내온 테이프를 통해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그리고 수년만의 만남임에도 아직도 정의와 그녀에 대한 감정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뒤로 하고, 그동안 둘 사이를 이어온 소중한 책들 위에 올라서서 자살하고 만다.

 

보고 나서도 가슴이 설레듯 아리듯 잠 못 이루는 영화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바로 이런 영화 말이다. 왜일까? 감성적인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내게도 결핍된 지식에 대한 열등감으로서 지적인 허영심이 존재한다. 당연히 똑똑한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잘난 척하는 꼴은 차마 못본다. 나를 넘어서는, 그러나 나를 뛰어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지적 능력..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그렇게 부러우면 스스로 똑똑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도넘게 천재수준을 원하지 않는 한 따지고 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을ㅋ 하여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순진하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와 지적이고 멋진 남자의 공식은 아주 질릴 지경이다. 실제로 사제간도 아닌데 언제어디서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어하는 남자들과 당연하듯 질문해대는 여자들, 그 틈에서 내 어중간한 감수성과 지식은 늘 밀리게 마련이다. 그럼 나는 어느 쪽일까? 책을 읽어주는또는 듣는 - 물론 어중간하다 그러나 사실 둘 다이고 싶다. 어느 한쪽이든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어 주고, 듣고 싶다. 같은 여자들끼리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신나겠지. 아, 언젠가 나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랑하는 그와 함께 책 읽을 수 있기를.. 그때 이 영화도 다시 봐야지. 물론 그이와 같이ㅋ

 

영화속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슬프다. 그녀는 살아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다. 용서는 그렇게 구해야 한다. 죽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므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6/16 22:20 2009/06/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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