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13/03/08 09:48

로마제국 쇠망사

 

 

..일개 도시가 하나의 제국으로 팽창하게 된 경이는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로마가 쇠망한 것도 이 무절제한 팽창이 가져온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은 쇠망의 원리를 성숙시켰고, 정복의 확대에 의해서 파괴의 원인이 증가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는 우연히 인위적 기둥들이 허물어지게 되자 그 방대한 구조물은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졌다. 그 붕괴의 이야기는 간단명료하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가를 묻기 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데 놀라게 되는 것이다. 먼 지방의 전장에서 이방인과 용병의 악덕을 습득한 상승 군단들은 우선 공화국의 자유를 억압했고, 그 다음에는 황제의 존엄성을 침해했다. 역대 황제들은 자신의 안전과 나라의 평화를 걱정한 나머지, 로마 군대를 황제 자신과 적국에 모두 가공할 존재로 만들었던 군율을 물란시키는 졸렬한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격한 군율과 군무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마침내 콘스탄티누스의 편파적 제도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와해되었다. 그 결과 로마 세계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야만족들에게 압도되었다.

 

- 에드워드 기번(1737~94), ‘로마제국 쇠망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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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유럽여행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다른 세계와 문화를 책이나 텔레비젼이 아니라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말이다.  틀에 박힌 서유럽 여행 코스가 그렇듯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경유하면서 역사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역사 관련 책을 읽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잘 통합되지 않은 채 금세 잊혀지곤 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는. 서양의 문명과 문화는 의외로 참 익숙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했지만 어딜 가나 몇 번쯤 본듯한, 들은 듯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단지 머릿속에서 익숙했던 현장에 실제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신기할 뿐. 오히려 한국사와 문화에 더욱 무지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 온갖 술수가  판치는 로마의 역사 속에서 민중의 삶 또한 쉼없이 고통 받고 요동쳤을 것이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로마는 관광지로 거듭나 그 피의 현장들이 전세계에서 찾아든  사람들로 활기 넘치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평화.. 그  현장에서 제국주의의 역사를 읽으며 더욱 인류의 평화를 갈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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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8 09:48 2013/03/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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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3/03/07 12:39

나쁜 초콜릿 Bitter Chocolate

 

...‘공정함’ 또는 이것의 성숙한 형제인 ‘정의’는 초콜릿과 같은 사치품의 원료를 생산한 이들에게 좀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도덕적 올바름보다 더 큰 권력에 의해 그것들은 무시되거나 추방되었으며 지배층이나 시장의 윤리적 무감각에 대항해 맞섰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도덕적으로 애매모호한 소비 대중의 태도다. 이들은 항상 불의를 비난하면서도 대지의 과일을 가장 낮은 가격에 향유하려 한다. 많은 소비자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할 권리만이 유일하게 공정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로 일자리를 찾아 모험을 감행한, 내가 만났던 말리 소년들은 카카오 재배 현장에서 강제노동으로 생을 바치고 나서야 판형 초콜릿의 진정한 가격에 대해 고통스럽게 배웠다. 비록 그들은 판형 초콜릿을 본 적조차 없지만 말이다. 이제 그들은 그 가격이 그들과 같은 아이들, 초콜릿 맛이 무언지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수백명의 아이들이 노예노동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안다.

 

- 캐럴 오프, ‘나쁜 초콜릿(Bitter Chocolate)’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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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성도 꽤나 무뎌졌나보다. 물론 이 책은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초콜릿을 둘러싼 역사와 사실을 꽤나 면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불러오는 충격성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먼 나라에서 자행된 아동노동과 학대의 과정을 감정의 큰 변화없이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미 안팎으로 아동노동을 둘러싼 논란과 공정무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듣긴 했지만 말이다.

쉬는 동안에 책 읽기를 계속하며 드는 생각중의 하나가 내가 참 의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좀처럼 쉽게 빠져들지 않는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정함'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나쁜 초콜릿'의 대안일 '착한 초콜릿'도. 오히려 내가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세계 어떤 노동자도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일 뿐이다.

 

얼마 전에 나는 친구의 부탁으로 어떤 회사에서 나온 콩 제품을 마트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 제품을 선택하는 1~2초의 짧은 순간 망설임이 일었다. 처음부터 바른 먹거리를 표방했던 그 회사의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시간,  노동강도의 증가로 근골격계질환 등 직업병이 무더기로 발생했지만 회사에서는 작업환경 개선은 커녕 직업병 발생도 부인하며 오히려 해고 등으로 탄압했던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한동안 불매운동을 벌였고 나 역시 그랬다. 다른 부문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는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친구에게 그 제품은 시중회사에서 나온 유일한 것으로 꼭 필요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회사 제품은 친환경이나 국산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아주 잠깐 씁쓸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없는 상품'이 가능한가?

상품에 도덕적 기준인 '공정함' 또는 '착한' 등을 적용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기준으로 상품을 선택해야 한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최소생활비의 확보는 둘째치고, 과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은 과연 어떤 것, 몇 가지나 될까? 코트디부루아의 아이들만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아동'이고 '노예노동'의 형태라는 점이 더욱 극악할 뿐,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리나라 최대의 대기업 '삼성반도체'에 들어가  이름도 알 수 없는 화학약품을 다루며 일하다 몇년 후에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여성 노동자는 어떠한가. 불산 누출로 노동자가 죽어도 노동자 탓만 하며 사고 은폐와 책임회피에 급급했던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의 품질에도 불구하고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며 공공연하게 노동자를 감시하고 탄압하는 삼성의 제품에는 이러한 노동자의 피와 한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쁜 핸드폰''나쁜 냉장고 ' 등등, 삼성 제품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성뿐일까? 고등학교 실습생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다 의식불명 상태에 이르게 한 기아자동차는? 공정무역상품은 논외로 치고, 나쁜 상품이 아닌 상품이 존재하는 것일가? 아, 혹시 노동자 몇 명 죽는 것쯤 대수롭지 않으니  대충 착한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쁜 초콜릿'의 대안은 '착한 초콜릿'일 것이다. 공정무역의 긍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착한'이라는 표현에 반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없는 상품은 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초콜렛의 달콤함을 온전히 맛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 시행되는 공정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 착취에 대한 조절은 가능하고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품이 생산되어 내 손안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거칠텐데 그들에게 모두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는지는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 이러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 성과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착한'을 표방하는 상품을 '선택'할 수 없는 빈곤층에게까지 제발 도덕의 돌팔매를 날리지 않기를.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의 각성과 국제적 관심, 연대를 통해 코트디부아르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관심을 갖고 노동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면서 착취를 줄여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사례에서도 세계 인권운동가들의 활발한 활동과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노동운동은 부끄러운 점들이 참 많다. 아이들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즉각적인 구호 활동과 공정무역체계 구축을 통한 권리 확대를 이뤄낸 활동가들 앞에선 입장의 차이에도 숙연할 뿐이다. 더불어 삼성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기위해 열심히 뛰는 정도를 지나서 억압받고 고통 당하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인정받고 그 요구들을 쟁취해나가기를. 가장 중요하지만,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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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7 12:39 2013/03/0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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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3/03/06 10:57

Affluenza

 

..이타적인 자본주의는 우리의 기본 욕구, 즉 정서적인 애착, 공동체, 효율성, 자치 등을 충족시키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는다. 이제는 우리가 이기적인 성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증진하고 게임에 공정하게 임하려는 강력한 충동을 가졌다는 증거들이 많아졌다. 즉 우리의 유전자는 이기적인 만큼 이타적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주도권을 쥘지 결정하는 것은 양육 방식과 사회다. 정부는 능동적인 권고와 완벽한 입법을 통해 돈, 부동산, 외모, 명성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줄임으로써 바이러스 가치에 직접 도전해야 한다. 이타적 자본주의의 슬로건은 “당신의 욕망이 아닌 필요를 충족시켜라.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라. 경쟁 뿐 아니라 협동도 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현재의 정치 풍토는 말할 것도 없이 유권자 상당수가 바이러스에 눈이 멀어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지만, 내게는 이를 실현할 두 가지 제안이 있다. 첫 번째 제안은 부모 중 한 사람이 세 살 이하의 아이를 직접 돌볼 수 있도록 평균임금을 보장하자는 것이다.(중략)... 두 번째 제안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부의 상당 부분을 내놓게 하고 상위직의 보수를 평균 임금의 다섯 배 이내로 통제하자는 것이다(중략)...

 

- 올리버 제임스, '어플루엔자Affluenza'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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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국가에 살면서 '부자로 살고 싶은 욕망'을'질병'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올리버 제임스의  Affluenza에 쉽게 동의되지 않는 이유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부자를 꿈꾸게 만드는, 개인의 힘만으로 면역력을 갖기 어려운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필연적인 부작용일것이다.

나도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 하루 10시간을 넘나드는 고된 육체 노동에 치이지 않고 생활비 걱정 없이 여행 다니고 책 읽고 글 쓰고 사람들 만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런 욕망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우울증, 불안증, 각종 중독, 강박증 등 글쓴이의 주장처럼 질병으로 몸과 마음을 좀먹겠지만 그것이 어디 나만의 탓인가. 부자로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유지하고 성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인 것을. 그래서 작가는 '이타적인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이타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이타적인 ' 정부와 자본을 꿈꾸는 것이다. 맞다. 현실을 금방 뒤엎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잘 믿기지가 않는다.  개인적인 삶의 질곡 속에서 이타적인 유전자의 가능성을 불신하게 되었고 의심과 회의로 가득찬 채 골방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희망은 잘 품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미래를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노력은 해봐야겠다는 생각, 딱 그정도.. 미국, 캐나다, 스웨덴, 중국 등 여러나라의 다양한 부자병 환자들을 만나고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 작가는 책 결말 부분에서 구조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사회주의적인 절충을 시도한 두 가지 제안은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복지제도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부의 불평등에 대한 재조정 없이 가능한 대안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건강을 위해 자신의 정신세계라도 바꿔야 한다. 요즘 한창 유행인 힐링 열풍 역시 그렇다. 스트레스 없이 체념하고 포기하는 법,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기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여러 분야의 99%가  자신의 삶에 긍정정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평생 되새김질하면서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사회적 관심과 책임은 방관한 채 온통 개인의 능력으로 떠넘기는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 그 명확한 한계만큼이나 힐링'은 꼭 필요하고 절실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교수의 철학까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는 한 마디였다. 행복함을 느끼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고 공동의 노력을 쏟지 않는 한'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필연적인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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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6 10:57 2013/03/0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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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3/03/05 12:27

동물해방

 

 

·가축에서 온 고기를 식물성 음식으로 대체한다.

·구할 수만 있다면 공장식 농장에서 온 계란을 방사한 닭의 계란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계란을 먹지 말라.

·우유와 치즈를 두유, 두부, 또는 다른 식물성 식품으로 대체하라. 하지만 유제품이 들어 있는 모든 음식을 피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알아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내가 여기서 지지하는 지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물 착취를 반대하는 대중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러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가급적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매운동을 확산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획득하는 것이다.

 

..동물 복리 단체가 가장 중요한 형태의 잔혹한 처우에 반대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창립 당시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와 ‘미국 동물학대방지협회’는 과격한 집단들로, 그 당시의 일반인들의 생각을 훨씬 앞질러 갔다. 현재와 같이 당시에도 그들은 수많은 극악한 학대의 희생양이었던 가축에 대한 학대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동물 학대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단체들은 재력을 갖고, 회원수가 증가하고,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서서히 자신들의 급진적인 정신을 상실하였으며, ‘체제’(establishment)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관료, 사업가, 과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동물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물을 식용이나 연구용으로 사용하는 데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창립자들을 고무했던 동물 착취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칼은 무뎌지게 되었다. 협회는 사소한 개혁을 위해 근본 원칙을 수없이 양보하였다. 그들은 조그마한 개선이 아예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에 비해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화는 동물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그 이상의 개선이 필요하지 않다고 대중들을 안심시키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동물 복리 재단의 재산이 늘어나자 또 다른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동물 복리 협회들은 자선 단체로 등록되어 설립되었다. 이러한 법제상의 지위 때문에 그들은 세금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정치 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자선 단체로의 등록을 조건으로 그와 같은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직 정치 활동만이 동물들이 처한 환경을 개선시키는 유일한 방법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규모 단체들은 대부분 자선 단체로서의 지위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행동은 자제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잔혹한 처우에 대항하는 조직적인 캠페인을 광범위하게 버리는 대신, 유기견을 거두어들인다든가, 개인의 이유 없는 학대를 고소한다든가 하는 안전한 활동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인간 아닌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시사하는 바에 관한 잘못된 추론 또한 우리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흔히 우리들 자신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야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친절하다는 것을 뜻했다. ‘야수 같은’, ‘짐승 같은’이라고 하거나 ‘짐승처럼’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잔인하고 거칠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죽일 때 최소한의 이유라도 갖고서 죽이는 동물은 인간 동물(human anima)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는 사자나 늑대가 다른 동물들을 죽이기 때문에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굶주려야 한다. 반면 인간은 운동 삼아,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자신들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그리고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죽인다. 또한 인간은 탐욕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 종의 구성원을 살해한다. 나아가 인간은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물들을 죽이기 정에 괴롭히고 고문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 피터 싱어(1946~), ‘동물 해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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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해방, 여성 해방.. 그리고 이제는 동물 해방?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폭정,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동물들을 대신해 피터 싱어가 이 책을 쓴 것은 1975년이다. 사회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는 시차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동물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가한 듯 보인다. 열렬한 보신탕 소비국가임에도 몇 년간 동물 특히 개 관련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증가했고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게도 몇 가지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작년에 TV동물농장에서 투견 훈련 중 목을 줄로 천정에 매달아 런닝머신을 달리지 않으면 목이 조이게 만드는 장치 때문에 정말 살기 위해 달려야 하는 상처투성이 개를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고말았다.  또한 동물 실험을 마치고 일반 가정에 입양된 개의 인간에 대한  공포 역시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몇 달 전엔 일본의 돌고래 포획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피로 물든 붉은 바다는  선정성과 잔혹함을 뛰어넘어 도살 과정에 대한 문제와 고래 뿐만 아니라 육식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니 이제 그만 동물을  보호하고 자연에게 돌려주자는 수준의 프로그램과 사회적 인식,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멧돼지와 철새로 인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농민, 방사능에 오염된 바다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민. 소 값이 떨어지고 사료값만 오르니 굶기며 시위하는  축산민과  사료를 보내주는 동물보호단체, 지구 위에서 인간의 삶은 참 여러가지 모양새로 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착취 즉 '동물 실험', '공장식 축산' , '학대' 등등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피터 싱어는 '종차별주의'와 '동물해방운동'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이 동물에 속해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표현이다. 그리고 해방 운동이란 '인종'이나 '성'과 같은 자의적인 특징에 기초한 편견과 차별과 편견을 종식시키기 위한 요구이다.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인식 속에서 계급과 계층을 비롯한 거의(?) 모든 억압과 착취에 반대한다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흔한 수법인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적 논리로 접근하고 설득해가는 이 책은 그래서 내겐 시원시원하고 매력적이다. 물론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도 충분히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실천방식'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웰빙이다 머다 해서 채식의 중요성은 폭넓게 인식되어 왔고 주변에서도 종종 채식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실천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먹을거리에서부터 오는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아마 나 자신의 육식에 대한 강한 욕구와 현실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잘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ㅠㅠ 하지만 아쉬운 것은 개인 실천 의지를 강조하기보다는 조직화된 운동으로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모색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의 역사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여타 다른 운동과 비슷한 큰 줄기의 성장과 변화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운동의 패턴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의 참신함과 혁신적 취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적 저변을 확대해가면서 오히려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뒤잇는 새롭고 급진적인 단체의 등장이 필요해진다. 감히 말하자면 어딜 가든 어떤 분야에서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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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5 12:27 2013/03/0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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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3/03/04 19:51

PROPAGANDA

 

 

..하지만 오늘날 또다시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소수가 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대중의 생각을 조종함으로써 대중이 새롭게 얻은 힘을 소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 가능해졌다. 현재의 사회 구조 안에서는 그러한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든, 금융이든, 제조업이든, 농업이든, 자선이든, 교육이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오늘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달성하려면 선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선전은 보이지 않는 정부의 실행 부대다.

 

..아마도 많은 주부들이 건강에 해로운 가공 음식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분명하게 말하고 주 의회나 연방 의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바람직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조직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주부들의 그와 같은 바람이 효과적인 법령의 형태를 띠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든 않든 요구를 조직하고 실현하려면 선전의 힘이 필요하다.

 

..대중은 자신의 견해와 습관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의 실체를 갈수록 꿰뚫어보고 있다. 자신의 생활이 전개되는 과정에 대해 알면 알수록 대중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광고를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대중이 광고 방법에 대해 아무리 까다롭고 냉소적으로 나온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반응하게 되어 있다. 대중은 늘 음식을 필요로 하고, 오락을 갈구하고,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지도자를 따르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 ‘프로파간다PROPAGANDA’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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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선전가는 ... 소비 관행에 변화를 가져올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피아노를 팔기 위해' 가정음악실'이라는 개념을 보급했던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 전략가로서 필적할 만한 적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책 내용은 지금 현실에 적용해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보이는 또는 보이지않는 엄청난 물량의 자본의 선전선동의 영향력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든다. 나의 성향이야 어떻든, 어떻게든 내 의식속에 그리고 무의식속에 파고들테니 말이다. 결국에는 반응하게 되어 있다니. 자본이 주는 음식에 얌전하게 길들여진,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간단 말인가. 결국 나도 그 대중속의 한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삼켜버리고 움직이지 않는.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믿기에는  최근 몇년간 너무 피동적인 삶을 살아왔나 보다. 그렇다고 대중 선전과 조직의 힘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되겠지만.

 

곧 봄이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책 읽는 시간, 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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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4 19:51 2013/03/04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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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2/07/01 15:09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

 

'물질적 측면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널리 보고되어왔다. 세계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지만, 여성 노동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어 왔다. 여성은 대부분 남성보다 30~40%  정도 낮은 임금을 받고,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여성이 관리직과 행정직에 종사하는 비율은 10~20%에 불과하며 권력, 정치 및 의사 결정 순위에서 매우 낮은 위치에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이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얻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가끔은 내가 많은 노력을 들일수록 환자들은 더욱더 많이 요구하는데, 이때는 마치 환자들이 내 피를 빨라먹는 것처럼 느껴지죠. 누군가에게 가혹한 요구를 한다고 느껴지는 위치에 있는 것은 좋지 않아요(Handy, 1991:827)'

 

 

- 레슬리 도열,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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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는 동안 나와 동료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자주 했다. 간호는 고된 육체노동이면서 한편으로 끊임없는 감정노동을 요구받는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건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온갖 질병 속에서도 유독 '돈'이 되는 질병일수록 신약개발과 연구가 가장 활발하며 보건의료 시스템의 발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엔 수많은 중소병원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경쟁은  치열해지고 의료의 질과 서비스는 더욱 중요해졌다 . 환자 및 가족, 즉 구매자의 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지 못하면 경쟁 속에서 결국 도태될 뿐이니 점점 더 서비스에 목을 매는 것이다. 결국 탐욕적인 자본의 이윤추구는 부족한 인원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병원 노동자들이 웃는 얼굴로 쌔빠지게 뛰어다니도록 내몰고 있다. 내가 담당한 환자들의 불만족은 '컴플레인(complain)'으로 승화(?)되면서 다양한 언어폭력과 고용불안의  형태로 목줄을  죄어온다. 간호가 갖는 긍정적인 의미와 자부심도 잠시, 노동이 지속될수록 팔다리만 퉁퉁 붓는 게 아니라 심장까지 퍼렇게 멍드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고객과 하녀가 아닌  평등한 관계속에서 ' 인간의 얼굴을 한 보건의료' 가  언젠가는 꼭 실현되겠지..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 중요해진다. 나와 그녀들의 계급과 인종과 국가..즉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말해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왜 아픈지, 어떻게 치료해야하는지 얘기해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문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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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15:09 2012/07/0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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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2/03/01 00:01

이기적 유전자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논의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성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는 보통 개체 행동에서도 이기성이 나타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개체 수준에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는 특별한 유전자들도 있다. 이 문장에서 '한정된'과 '특별한'이라는 용어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 반대라고 믿고 싶어도, 보편적 사랑이나 종 전체의 번영과 같은 겉은 진화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 우리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 녀석인지 이해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이기적 유전자의 의도를 뒤집을 기회를, 다른 종이 결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것에 덧붙여 말하자면, 유전되는 형질이 고정된 것이어서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 행동을 하도록 지시할지 모르나, 우리가 전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유전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 이타주의를 학습하는 것이 더 어려울 뿐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학습되고 전승되어 온 문화에 지배된다.'

 

'..그러나 암컷보다도 수컷이 자식을 돌보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쏟는 동물도 있다. 이와 같이 아비가 자식에 헌신하는 예는 새와 포유류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어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도대체 왜일까? 최근 칼라일 T.R. Carlisle이 그 해답을 가르쳐주었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에 배아를 가지고 있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아 버린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도망쳐서 암컷을 트리버스의 '가혹한 구속'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봉쇄하고 먼저 도망칠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으로 제공된다. 아이를 내버려 확실히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 곁에 남아 돌볼 것인가의 결단은 모두 암컷의 몫이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에서는 아비가 자식을 돌보는 경우보다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물고기를 비롯한 수생 동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기 때문에 암컷이 '자식을 품은' 채 혼자 남을 필요가 없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재빨리 도망치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능하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있다. 반면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바울해 버리면 암컷이 준비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릴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난자를 방출할 가치가 없으므로 산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난자를 방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를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사라짐으로써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 수컷을 트리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의 자식 돌보기가 왜 물속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깔끔하게 설명한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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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종종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그동안 꿈꾸었던 세상이 적어도 내 생이 끝나기 전엔 결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고해지는 듯하다.  4년 동안 매일매일 직장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을 통해 더욱 그렇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 진화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가능해지지만 그만큼 회의감도 깊어진다..내게 필요한 건 변화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모색, 그치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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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1 00:01 2012/03/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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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2/02/26 21:35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노동조합은 경제적으로 이윤에 대해 결코 공세적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이윤의 공격에 대항하려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방어,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임금율을) 아래로 억누르는 경향에 직면하여 노둥자 계급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조합의 과제는 자신의 조직을 통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시장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은 중산계층이 프롤레타리아화되면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에 계속 파괴된다. 둘째, 노동조합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즉 사회적 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몫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몫은 노동 생산성이 향상함에 따라서 자연적인 과정처럼 숙명적으로 계속 낮아진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기 위해서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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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 속에서 사회 개혁과 혁명을 위해 생명조차 내던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죽음을 택하거나 살해된 숱한 혁명가들 그리고 활동가들..그러나 살아서 우리는 불과 몇 십년을 못버틴다. 운동조직에서도 20대와 30대를 넘어서면 자신의 삶속으로 사라지는 숱한 사람들, 진리처럼 그 역사 또한 반복된다. 나 역시 스스로의 활동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결국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경계선 안쪽에 서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삶은 더욱 악화됐으니까. 그리고 내가 발 딯고 있는 이 곳이 내 아이도 살아야 할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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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21:35 2012/02/2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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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1/06/19 12:58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니?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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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베케트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고통이 삶을 장악해버린 시기를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끝끝내 살아남는 것은,

삶을 지배하는 고통을 넘어 서는 또는 고통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각자의 그 무엇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기쁨이나 희망 또는 행복이나 사랑같은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느껴지고 적절하게 표현이 가능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들은 고도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그들 기다림의 끝은 죽음이겠지

'고도'의 상징은

수많은 인간에게 각자 다른 의미일 것인데,

나 역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혼란 속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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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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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12:58 2011/06/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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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11/05/01 01:37

한낮의 어둠

 

 

'넘버원은 거칠고 느리며 무뚝뚝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장 단단한 닻의 사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사슬은 지난 몇 년 동안 닳고 닳아 약해졌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배한 이유이다.'

-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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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의 책 소개 문구는 충격적이었다.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슬프고 우울해진다. 이른바 사상투쟁에서 나는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 이유는 입장의 유보가 아니라  자세한 내용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성장한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입장은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직관이었다. 제발로 찾아간 조직을 떠나온 것도 한참만에 다른 조직을 선택한 것도 나만의 기준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단지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반목하는 현장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더 견딜수 없는 건 다른 척, 센 척 하지만 조그만 권력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결국 누구나 비슷해지는 활동가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이었다. 혹시 운동조차 수컷들 권력투쟁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 의심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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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메이데이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인가 나는 노동절 집회에 가끔씩 얼굴만 내민다. 개인적인 사정은 둘째치고 메이데이에도 아무날 아닌척 일해야 하는 중소사업장 노동자라는 정체성은 변함 없지만, 이제 내 가슴은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다.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했던 '동지'라는 말, 그러나 가슴이 울리지 않는다. 사라진 열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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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1 01:37 2011/05/01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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