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4/19 22:55

고백록

'아버지여, 내가 진리를 찾고 있사오나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시며 다스려 주소서. 우리가 소년시절 배웠으며 또한 아이들을 가르쳤던 대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즉 세 가지 시간이 있지 않다고 가르칠 자가 누구옵나이까? 다른 두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의 시간만 존재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이까? 아니면 그것들이 존재하나이까? 그러나 시간이 미래로부터 현재가 될 때, 어떤 은밀한 곳에서 나오며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그것이 과거가 될 때 어떤 은밀한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옵나이까? 미래를 예언하던 사람들은 아직 현존하지 않는 예언한 사물들을 대체 어디서 보았나이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볼 수 없음이니이다. 그리고 지나간 사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면 마치 그것이 참된 것인 양 말할 수 없었나이다.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식별될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존재하나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를 해명한 '삼위일체론', 교회와 로마 제국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말론적 역사 철학의 기초를 확립한 '신의 나라'를 저술했고, '시편 강해' '요한복음서 강해'를 비롯해 이단에 대한 논박을 다룬 책 등을 펴내 서방 교회의 아버지로서 가톨릭 신학의 버팀목이 된 인물이다. 특히 '참회록'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고백록'은 단순한 회고록이라기 보다는 신에게 이르는 자신의 내적 영혼에 관한 심오한 상념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단락은 제 1권으로부터 제9권가지 이른바 자서전적 회상 부분으로서, 출생에서부터 회심에 이를 때까지 방종한 생활을 하며 지었던 최를 고백하고, 이것을 통해 주어진 신의 은총을 찬미하는 부분이다. 제2단락은 제10권 부분으로, 현재 히포의 주교로서 신에게 감사함을 고백하면서 자서전적인 앞부분과 철학적인 뒷부분의 내용을 이어 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제3단락은 제11권으로부터 제13권까지로서, 내용적으로는 '창세기' 제1장에 대한 주해를 통해 창조자로서의 신을 찬미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주제적으로는 기억과 시간,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심오한 시간론 사상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사상을 깊이 있게 음미해 볼 수 있다.

 

주님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이 이어지는 기독교 서적을 종교적 신념이 없는 자가 읽기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중간중간 언급되는 그의 여성관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헌신적인 어머니상과  유혹적인 창녀, 단 두 종류로 분류될 뿐이니 아무리 시대를 감안해도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 잘못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참회하는 모습은 종교적 입장과 시대를 떠나 감동을 안겨 준다. 또한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생활과 인식의 내용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게 되는지 엿볼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독자 또한 자신의 삶과 인식의 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모든 것은 신에게 환원된다. '신이 무엇을 만들지 않았을 때 시간이란 없었으며 신이 이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과 영원히 공존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신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단언할 수 있다면 세계에 대한 복잡한 해석과 고민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으므로 그 뜻에 따라 살면 그만일 것이다. 신의 영역, 그곳은 아직 내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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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9 22:55 2009/04/1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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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3/22 16:51

방법서설

한 개인이 국가를 그 밑바닥으로부터 모두 변화시키거나 올바로 재건하기 위해 전복시키거나 개조하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고 또 마찬가지로 학문의 전 체계나, 그 교육을 위해 학교에서 확립하고 있는 질서를 변혁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내가 그때까지 받아들여 믿어온 여러 견해는 모두 '자신의 신념'에서 일단 단호히 제거해 보는 게 최선의 길이다 라고 말이다. 나중에 다른 더 좋은 견해를 다시 받아들이고, 전과 같은 것이라도 이성의 기준에 비추어 올바르게 해서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낡은 기초 위에만 건설하고 젊은 시절에 믿어버린 여러 원리에만, 그것이 참됨인지 어떤지 검증해 보지도 않고 의거하기보다는, 이런 방식에 의해 훨씬 더 잘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데 성공하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도 여러가지의 어려움은 있더라도 대응책도 있고, 공공의 아주 작은 일을 개혁할 때에도 볼 수 있는 어려움과는 비교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의 커다란 조직은 일단 쓰러지면 재건하기가 매우 어렵고, 단지 동요되었을 경우라도 계속 유지하기조차 곤란하기 짝이 없으며, 더구나 그 붕괴는 매우 가혹한 상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큰 조직의 불완전한 점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들이 여러 가지의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결점이 많은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결점이 있어도 습관이 그러한 결점들을 크게 완화시켜 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습관은 부지불식 간에 결점의 대부분을 피하거나 교정시켜 왔다. 사려 분별만으로는 이 결점들에 이토록 잘 대처할 수는 없으리라.

 

- 데카르트 '방법서설' 중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바로 '방법서설'에서 제시된다.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 끝에 '생각하는 것(사유)'이 본질임을 밝히고, 그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어떤 장소도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실체'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선언은 확실성의 기초가 인간 자신 그리고 주체적 자아 의식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그의 합리주의적 사상은  인간의 자연 정복에 대한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생태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으며, 물심 이원론적 사상은 아직도 비중 있는 논쟁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여러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 관한 서설'이며 철학적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양식 내지 이성은 만인에게 갖춰져 있다'는 이성주의적 신념 아래, 여성들을 포함한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씌어졌다. '방법서설'은 당시 학문의 혁신을 위한 방법론적 반성인 동시에 명증적인 이성의 인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데카르트 자신의 삶의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전체는 6부로 나뉘어 있으며 1부는 자선전적 고백으로 전통적인 학문에 대한 비판, 2부는 학문 방법의 주요 규칙, 3부는 잠정적 도덕의 규칙, 4부는 형이상학 - 하나님 및 인간 영혼의 존재 증명, 5부는 자연학, 6부는 장래 학문의 구성등의 내용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선 이 책은 가볍다.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달리 양적으로 짧아서 읽기 편해진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철학적 삶의 자세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은 그것이 단지 위대한 철학자만의 것이 아닌 시대를 한참 뛰어넘은 현재 우리의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나 역시 현실의 오류속에서 사상은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했다. 하지만 짧은 인식속에서 마치 절대신앙처럼 굳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그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불꽃처럼 부딪히게 될 때 그만 쉽게 절망하게 된다. 완전한 인간, 완전한 세계, 완전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지. (비록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했지만.)

 

'내 의견에 대한 비판자로서 나 자신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토론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진리를 뭔가 하나라도 발견했다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에게 이기려고 애쓰는 동안은 쌍방의 논거를 고찰하기보다는 진실다워보이는 것을 강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순간이 많다. 토론이랍시고 모였지만 서로가 자기 주장의 나열 외엔 아무것도 아닌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들 말이다. 현실에서 이성적 존재로서 합리적인 또는 과학적으로 사고하기란 멀고 힘들지만 습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란 간편하고 쉬운 것이다. 진실다워보이는 것, 어찌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겠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내용보다 껍데기에 취할 때가 많은 걸. 인간에 대해서조차도. 한 때는 내가 그런 시선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부분에서 소수자이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렇지 않고, 자본주의를 반대하지만 동화되는 순간,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의견과 선택이 종종 존재한다. 결국 자기 모순 속에서의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이것만이 변치 않는 진리겠지.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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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16:51 2009/03/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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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3/15 21:22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러나 연애하는 사람들의 친애에 있어서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사실 자기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자기가 무척 사랑하고 있는 그만큼 상대방은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그 전에는 모든 것을 약속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러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반면, 사랑받는 사람은 상대방을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며, 또 둘 다 자기에게 기대되었던 여러 가지 자질을 소유하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에 생긴다. 어떤 것들이 그 친애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의 동기가 되었던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할 때 그 친애도 없어지고 만다. 각자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질을 사랑했던 것인데, 이런 것들은 영속적인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의 친애도 일시적이다...

 

...누구나 살기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동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자신의 청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이지를 가지는 등등으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므로 또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쾌락은 모든 사람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쾌락 때문에 삶을 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산다는 것 때문에 쾌락을 택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 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산다는 것과 쾌락은, 사실 활동이 없으며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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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은 '인간을 위한 선'이란 제목으로 윤리학적 탐구의 과제와 성격 및 선과 행복의 정의, 덕의 종류가 서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제2권에서 6권까지는 이 책의 중심 부분으로 윤리적인 덕과 지적인 덕에 구체적인 덕목을 들어 가면서 세부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제7권에서 9권까지는 후반부로서 쾌락과 우애의 문제를, 마지막 10권에서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행복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면서 관조적 삶이 최상의 행복임을 논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지나 힘겹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렀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절감하며 그러나 과감하게 지나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종종 그렇듯 내게 흥미있는 구절은 늘 따로 존재한다. 바로 저명한 철학자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론이 그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놀랍고도 신기하다. 이천년 전의 연애 양상이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점과 '한갓' 사랑이 이들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논의 자체가 관념적이고 유치하게 치부될 때가 많은 현실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역이며 각자 알아서 잘(!)하면 될 뿐이다. 단 조직에 피해가 가지 않게.  나 역시 그렇게 가볍게 규정했지만 막상 연애과정속에서 앞뒤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모든 문제에서 드러나듯 신념은 너무나 단순하면서 빈곤했고 사랑과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했다더라'식의 뒷담화 수준에서 벗어나 담론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었던 내게,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이들의 논의 자체가 그 이해 여부를 떠나 놀라운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무엇 때문에 사랑한 것일까. 유용성 때문일까, 쾌락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어는 순간부터인가 그 사람이 대책없이 좋았고 실제로 함께 있으면 편리한 점이 많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했을까.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처럼, 동기가 되었던 쾌락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의미 또한 상실되었던 것일까. 상대방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므로 말이지. 하여튼 일정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공통된 활동영역 속에서 다시 마주치게 됐다. 나는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조직 활동을 시작한다. 단지 나를 위해서.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또한 다시 보고 싶다. 나는 결코 겉모습에 반하지 않는다. 그의 열정과 풍부한 인식, 따뜻함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멋져도 활동가가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분발하기를 바란다. 그의 모습에 여전히 가슴이 뛴다면 나는 멍청이겠지만 어쨌든 과거의 상처는 틀림없이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놓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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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21:22 2009/03/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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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2/13 12:50

숫타니파타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괴로움은 물질로 인해 생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남김없이 없애 버리면 괴로움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 법정, '숫타니파타'중에서

 

 

 

'숫타니파타'는 초기 불교의 경전이다. 법정스님이 풀어 쓴 것으로 시나 짧은 산문 형식이어서 부처의 가르침을 읽고 이해하기 편하다. 사실 진리란 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닐까. 종교적 입장과 관계없이, 진실한 삶 또한 최대한 단순하고 소박해야만 할 것이다.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이 구절이 참 마음이 든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예전에 공지영의 소설 제목으로 여성의 독립성을 주장하듯 또는 이혼을 권유하듯 유행처럼 사용됐던 구절이어서 꽤나 통속적으로 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 실연을 당하고 고통속에서 헤매일 때 종종 마음속으로 되새겨보면서 그 의미는 새롭게 살아왔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고, 외로운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굳이 슬퍼할 이유는 없다. 혼자서도 행복해질 방법을 찾아야만 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 집착을 조금쯤 덜어내면 그만큼 가벼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까. 무소유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말이지.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할진대, 어떤 과정을 통해 불교의 모습이 지금처럼 거대권력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아직도 엄마는 매년 석가탄신일이면 거르지 않고 가족의 이름이 씌여진 등을 켜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신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크리스마스만 챙겨 노는 우리들처럼, 엄마는 일년중에 석가탄신일 딱 하루와 종종 사찰쪽으로 여행갈 때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지극한 불교신자의 모습을 연출하신다. 덕분에 엄마 성화에 이끌려 나도 몇 번 절까지 해 본 적이 있는데 그윽한 향 냄새와 차가운 마룻바닥, 약간 컴컴한  절의 내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절에 들르게 되면 쭈뼜쭈뼛 주변의 눈치를 봐서 얼른 서투르게 삼배를 올리곤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신자도 아닌데 그 순간만은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약한 마음이 발현되는 걸까. 어쨌거나 현재 불교의 모습은 당연히 문외한인 내가 알 리 없다. 하지만 비종교인인 나도 궁금한 것이 몇가지 있긴 하다. 어째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는 한결같이 남성들인가? 종교속에서도 언제나 권력은 남성이 갖는다. 하긴 종교뿐이던가. 오랫동안 여자들의 영역으로 존재해왔던 미용, 요리, 세탁 같은 분야조차 고급상품화과정을 거치면 남성들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끊임없이 상품화하고 제도화시키는 자본주의적 기술이 아무래도 여성들에겐 부족한 것일까. 스님은 남자고 절에 소속되어 갖가지 궂은 일을 하는 각종 보살님들은 여자이다. 행사를 보면 가관이다. 몇몇 위엄있는 스님들과 뒤따르는 수많은 여성신도들. 수발하는 수많은 여성 보살들, 눈에 띄지 않는 비구승들. 돈과 권력과 남성. 다른 종교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여성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언급과 등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예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또한 여인이라는 단어가 '번뇌'로 상징되는 것과 성자는 순결을 지키고 성교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가르침은 여성을 단지 욕망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진리는 훌륭한 사찰과 멋진 불상 속에 존재하는가? 그옛날 대동강 물을 팔아먹듯 들르지도 않을 절의  문화재관람료만 챙기는 얌채 사찰의 모습은 도무지 불가사의하다.  

 

현장활동을 주도했던 언니가 불현듯 불교에 귀의한지도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다. 얍삽하게 결혼을 선택했던 나는 십수년만에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선배앞에 무너졌고 잔잔한듯 안타까운 모습으로 안아주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그게 벌써 작년이고 한동안 열심히 틱낫한과 법정과 달라이라마의 책을 읽었었다. 그리고 짧은 만남을 통해 참선을 배웠지만 게으름 때문에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하지만 슬픔을 걸러내는 그 과정을 통해 한결 평안해진 현재의 내모습이 존재한다. 이제 대보름이 지났으니 동안거가 끝났을 것이다. 아직도 열정적인 모습이 슬쩍 남아있는 그 스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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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12:50 2009/02/1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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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2/12 12:27

호밀밭의 파수꾼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야."

 

- 제롬 대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누구나 위태위태한 시절이 있다. 누가 나 좀 붙잡아 줬으면, 속으로 목메이게 외쳐댈 때가 있다. 이젠 아예 대놓고 공식적인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아이들뿐 아니라 겉으론 멀쩡해뵈는 어른들조차도 말이다. 누가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주변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가족과 친구들, 선생님 기타 주변환경 등등.. 아이들은 혼자 자라나지 않는다. 뿌린만큼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슷하게 거둘 수 있는 분야가 교육이다. 진심으로 사랑받고 나눌 줄 알며 믿음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거센 바람에도 많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도 그런 바램을 가져본다. 시련은 틀림없이 온다. 그것도 자주. 자신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물질적 세계로부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견뎌내고 극복하느냐이다.  부딪히고 깨지고 일어서는 과정의 반복속에서 더욱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울음이 앞서는 우리 아이도 눈물을 멈추고 당당하게 말하는 법 또한 알게 되리라.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내 손을 내줘야겠지. 절벽에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던,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벼랑끝에 내몰려 있던 홀든이 간절히 바랐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말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영화 '오래된 정원'에서였다. 공장에 들어간 여자후배가 오랜 투쟁끝에 요구사항을 외치며 옥상에서 몸을 날린후 머리가 깨진 시신과 핏자국이 회사에 의해 긴급하게 치워지는 장면에 경악했다. 20대초반쯤에 나도 현장에 있었고, 기본적인 요구사항에도 해고와 구사대로 응징하는 자본측과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분열되어 가는 동료들속에서 장난처럼 또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 있었다. 단지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지만,  한 인간의 죽음이 너무나 가치없고 허무하게 느껴져 영화의 진행과는 관계없이 정말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었다. 그러나 그때 생명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가치들의 의미는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소심해져서, 열정이 식어서, 투쟁으로부터 멀어져서, 나이들어서 또는 기타 여러 이유로 이제 나는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서 싸우기를 바란다. 죽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투쟁의 대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걸. 내 속과 우리, 그리고 세계 속 전 방면에 다양하게 존재해 있다. 적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싸움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떠나려는 홀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건 진정으로 아꼈던 동생 피비이다. 결국 가출을 포기하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는 홀든, 그도 이제 오랜 준비과정을 거친 후 겉돌고 헤매이던 속물들의 세계로 편입하게 될 것이다. 그가 희망을 갖고 꿋꿋하게 살게 되길 바란다. 얌전하게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가길, 여자들에게 집적대지 말기를, 그리고 정말 자신이 꿈꿨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아이들을 지켜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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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12:27 2009/02/1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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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2/09 00:10

바보

강풀 의 만화 '바보'

 

 

 

통장에 돈이 입금된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에서 열몇권의 책을 주문한 것이었다. 갑자기 책욕심이 생긴 것이다. 드문드문 도서관에서 빌려 한번 읽고마는 이야기 책이 아니라 두고 두고 내 곁에 함께 할 책들이 절실하게 그리웠다. 생각보다 책은 많이 비쌌고 읽는 시간도 훨씬 더 걸렸다. 언제까지 백수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 누가 책좀 읽으라는 것도 아닌데 쫓기는 것처럼 마음이 급해진다.

 

사실 비디오대여점에서 슬쩍 이 책의 표지를 표지를 봤지만 일부러 사지 않았다. 강풀의 책은 사고 싶은 만화책이다. 척봐도 알만한 책들 틈에 끼어온 이 책에 나는 먼저 손이 갔다. 술술 쉽게 읽히는 만화이기도 하지만 강풀 만화에서만 느껴지는 절절한 감동을 먼저 맛보고 싶어서였다. 정말 그의 만화속 등장인물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주인공 아닌 사람이 없고 바보 아닌 사람도 없다. 솔직히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 어떤 면에서 조금씩은 바보이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으며 또한 완벽하게 불완전한 사람도 없다. 어떤 면에서 어느 만큼 모자랄뿐, 그러나 겉으로 보여지는 건 아주 조금일 수도 있는 걸. 그리고 어떤 바보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사랑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걸. 그래서 영혼을 볼 수 있는 시선이 생겼으면 좋겠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겉모습으로 판단한다. 외모, 환경, 재산 등등 -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아주 작은 정보만을 제공할 뿐인걸. 30억짜리 집이라고 해야 감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는 깊은 시선을 나도 갖고 싶다.

 

죽음을 앞두고 승룡이에게 토스트 굽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동생을 당부하는 엄마의 모습은 안타깝다. 언젠가 나도 내가 갑자기 죽게 되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발생한 사고였으면 했고 그래도 제 아빠가 돌봐줄테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쓸테없는 생각 같지만 책임감은 때론 다양한 상상력을 요구하니까. 마지막에 아이가 된 승룡이가 엄마 손을 잡고 무수하게 내리는 별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고 서글프다. 저절로 눈물이 뚝뚝. 슬프게도 승룡이는 죽었지만 사람들 가슴에 반짝이는 별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화한다. 반짝반짝 작은 별 승룡이 - 왠지 '나도 아이와 함께 씩씩하게 별 보며 살아야지' 묘하게 희망을 갖게 된다. 밤하늘에 빛나는 그리고  내 가슴에 빛나는 반짝반짝 작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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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00:10 2009/02/0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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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2/08 02:16

국가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를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horos), 즉 최저음(neate)과 최고음(hypate) 그리고 중간음(mese)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또한 혹시 이들 사이의 것들로서 다른 어떤 것들이 있게라도 되면, 이들마저도 모두 함께 결합시켜서는, 여럿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인 절제 있고 조화된 사람으로 되네. 이렇게 되고서야 그는 행동을 하네. 그가 무슨 일을, 가령 재물의 획득이나 몸의 보살핌 또는 정치나 개인적인 계약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게 될 경우에는 말일세.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 성격 상태(습성:hexis)를 유지시켜 주고 도와서 이루게 하는 것을 올바르고 아름다운 행위로, 그리고 이러한 행위(praxis)를 관할하는 지식(episteme)을 지혜(sophia)로 생각하며 그렇게 부르되, 언제나 이 상태를 무너뜨리는 것을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관할하는 의견(판단:doxa)을 무지(amathia)로 생각하며 그렇게 부르네."

 

- 플라톤, '국가' 중에서

 

 

플라톤 하면 떠오르는 것은 고등학교 윤리수업때 잠깐 스치고 지났던 '이데아'나 '철인통치'같은 단어들이다. 처음엔 '철인'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무쇠같은 사람?' 태권브이같은 만화영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여튼 잠깐 주워들었던 그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국가'이다. 앞서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등등 그나마 상대적으로 짧고 쉬운 책을 먼저 읽어 대충은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젠장 '국가'는 어렵다. 술술 읽히지도 않고 이해도 안 가지만 어쨌든 힘겹게 책장을 넘겼고 다 읽고도 한참 멍했다. 다행히 올해 내 수강과목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때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면서 은근슬쩍 정리를 미루는 센스를 발휘해본다..

 

이 책에서는 올바름(정의)이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정의와 조건 및 타락과정, 예술, 교육 등등에 대한 다양하고 포괄적인 논의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10권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확한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흥미로운 부분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바로 국가의 타락과정이다. 플라톤은 국가가 타락해가는 원인은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 간의 불일치이고, 불일치의 시작은 통치자 계급의 욕망의 변질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아무리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라 할지라도 쇠퇴하기 마련인데 통치자 계급간의 불화속에서 바로 사유재산제에 의한 노예나 농노의 소유가 발생하면서 기개 부분이 우세해져 군인이 지배하는 체제가 되고 만다. 이러한 명예정 국가에서 돈벌이와 금전을 사랑하는 인간이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과두정 국가이다. 두번째 단계인 과두정 국가에서 빈부의 차이가 커지면서 혁명에 승리한 민중에 의해 민주정 국가가 등장하지만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에서 기인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 무지한 민중을 이용한 정치적 선동과 혼란속에서 참주제 국가로 전환하게 된다. 극단적인 자유에서 가장 심하고 야만스런 예속이 조성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는 플라톤의 통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 사람들은 고전을 읽나보다. 하여튼 관심있는 부분은 특히 민주정 국가의 이행과정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평등한 사람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에게 똑같은 평등' - 기계적인 해석이지만 의외로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한참 전 군가산점제도의 문제점이 부각되자 가장 많은 남자들의 불만은 '여자도 군대가라'였으니 말이다. 또한 플라톤은 민중의 선도자에서 참주로 바뀜의 시초가 부당한 고발, 추방, 살해의 시작이며 사람에서 늑대로 바뀌는 것으로 규정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곳곳에 있다. 여성과 관련해선 여자와 아이들을 공동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자질이 충분하다면 여성 통치자들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가족의 해체와 남녀 평등을 주장한 것일까? 또 유익한 혼인에선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 최상급의 아이를 탄생시켜야 하는데 단 통치자 외에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특히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이나 불구 상태인 경우 은밀한 곳에 숨겨 두는데 이것은 곧 영아 유기를 짐작케하는 것으로 신체적 조건을 중요시했던 것 그 당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혁명을 꿈꾸면서 국가에 대한 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거나 진짜 무식한 거겠지. 나는 후자이다. 무식한 것이다. 중국과 소련을 보면서 쓰레기사회주의라 생각났고 아직 쿠바엔 물음표를 갖고 있다. 또한 국가라는 말 자체가 억압으로 느껴져 싫고 무섭다. 국가는 언제 내 뒷목덜미를 낚아채갈지 모르는 깡패xx이며 얄팍한 월급명세서를 갉아먹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눈감는 도둑x이라는 감정적 인식이 지배한다. 시스템에 의한 피해의식,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반성한다. 나는 이런 공부를, 아주 다양한 세계와 주제에 대한 깊고깊은 고민을 진작에 했어야 했다. 말로는 남발했으나 체계화 되지 않았던 내 상상들 - 그 허상을 진작에 발견했어야 했다. 어쨌거나 머릿속을 맴도는 각종 의문부호들을 남겨놓고 이 책을 덮기로 하자. 혼자 읽기의 한계이다. 또다른 책읽기를 통해 또는 자문을 통해 차차 채워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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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02:16 2009/02/08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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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2/06 01:56

프로타고라스

"영혼의 양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학문이네. 그럼 내가 자네에게 충고를 좀 하지. 소피스트들은 마치 육신의 양식을 파는 장사꾼처럼 자기 상품을 선전하고 다닌다네. 그러므로 우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네. 먹을 것을 파는 장사치들도 그들의 상품에 대하여, 몸에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면서 제법 유익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마구 떠들며 선전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에게서 물건을 사는 소비자들도 상품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이라는 영혼의 상품을 지닌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이 나라 저 나라로 갖고 다니면서 수요자들에게 파는 사람들이라네. 그들은 제법 그럴듯하게 자기 상품을 선전하지만, 그 상품이 영혼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 플라톤, '프로타고라스'중에서

 

 

나는 인간의 성악설을 믿는다.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간은 착하지 않다. 영유아기 아이들은 본능에 충실하며 그만큼 이기적이고 충동적이며 때때로 폭력적이다. 어느덧 힘의 논리속에서 차츰 서열이 정해지고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도 쉽게 한다.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 지속적인 훈육과 학습속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움을 갖추게 된다. 좀 다른 얘기지만 그런 점에서 나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어느정도 이기적인 본성을 완화시켜줄 수는 있으나 뿌리뽑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의 문장처럼 영혼의 양식은 영혼의 상품으로 활용된다. 오랫동안 교육은 기득권 소수만을 위한 값비싼 상품으로 존재해왔으니 뭐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극을 달리는 건 당연지사다. 제도적으론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지만 심지어 영아기부터의 사교육시장에선 각종 교육관련 상품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이 소용돌이속에서 소위 '강남엄마들'의 경제력과 정보력은 그 어느때보다 빛을 발하고 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할까나? 그래도 차마 굴종의 삶을 떨치고자 참교육을 소리높여 외쳤던 그 시절은 싹 잊어버리고 우리 아이만 이 냉혹한 자본주의 시장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학부모된 자로서 열심히 돈벌고 학원 뺑뺑이시키며 빡세게 공부시킬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대안교육의 문턱도 결코 낮지 않다. 평균적으로 학원뺑뺑이 돌릴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니 내용은 둘째지고 빈곤층에겐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학교까지는 무상교육이라서 점심도 주고 돈도 별로 안 든다니 그나마 감사히 여겨야겠네.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바랬었다. 내가 아이를 키울때쯤이면, 그런 무모한 희망을 품은 때가 19년 전인데 기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전교조랑 참교육학부모회도 엄연히 있는데 말이다. 이제는 이 사회가 되려 유치원생,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여성, 노인, 실업자 등등 전 세대와 계층을 아울러 공부하라고 윽박지른다. 취업관련 학원엔 젊은이들이 자격증 학원엔 아줌마, 아저씨들로 빈 자리가 없을 지경이며 취직 안되는 국비교육이 넘쳐난다. 평생교육은 자기자신의 학문 수양을 위해서가 절대 아니고 무한경쟁사회에서의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 직장에서도 예전엔 자기 일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친절교육도 받아야하고 자꾸자꾸 새로 생겨나는 자격증도 시대에 맞게 구비해둬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더 공부해야 하고 더 이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오히려 한번쯤 박차고 나오는 쪽을 선택해도 좋을텐데 아이들 문제에서만큼 부모들은 기존의 시스템에 쉽게 타협한다. '현실이 그러니까' - 종종 현실은 우리의 이상을 좀먹는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더욱 견고해지지. 이 숨막힘을 우리 모두 적당히 견뎌내는 한 말이지.

 

덕이 그 당시에 얼마나 고귀한 개념이었는지는 동양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교육에 대한 논쟁은 여러 분야의 학문이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의 현실속에선 좀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여튼 교육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 내용과 방법만큼 인간의 모습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주 조금 독특한 삶을 살고 있는 나와 내 아이에게도 아주 조금 다른 교육내용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학습했거나 학습하게 될 것들 - 한부모가정이나 빈곤, 노동에 대한 편견  등등 - 속에서 자신이 아닌 기득권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게 될 때 우리는 자주 좌절하게 될 것이다. 우선 당당한 내공을 갖기 위해 이런 오래되고 답답해보이는 책들을 끝까지 던지지 않고  읽는 중이다. 그리고 내 아이 역시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우고 뻔뻔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공부와 훈련 - 즉 초등학교 4학년에게도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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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6 01:56 2009/02/06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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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1/27 14:17

빈곤한 우리집

"아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는 아빠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멋대로 살지 않아.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살아. 밥은 여섯 시에 먹고 과일은 일곱 시에 먹지 않는다구. 화요일은 출판사로 가고 목요일에는 수영을 하지 않는다구. 엄마는 밥은 배고프면 먹고 과일도 먹고 싶은 때에 먹어...... 출판사는 필요하면 가고. 수영은 물론 귀찮다고 안해. 그래서 누구에게 나쁜데? 누가 피해를 보지? 그리고 엄마는 아빠 생각 하지도 않아. 엄마는 상처를 날마다 되새기고 있지 않는다구. 엄마는 말했어. 나쁜 과거가 오늘까지 망친다면 그건 정말 우리의 책임이라구."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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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본다. 지맘대로 거의 다하고 사는 엄마를 비난하며 네모 반듯한 삶을 사는 아빠 품으로 어느날 아들이 달려가버리지 않을까, 가벼운 공포속에서 이런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나,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 서자 역시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기적인 아이의 모습속에서 이제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었을까. 이십대엔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또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위해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나 이젠 생계와 육아속에서 아둥바둥 살아남기도 힘들 정도이다. 물론 지금의 삶 또한 또 다른 현장일뿐이라고 생각해보지만 후배나 친구, 선배들조차 고만고만한 생활속에서 단지 자신이 일군 조그만 일가의 생계와 미래를 위해서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서글퍼지곤 한다. '내아이'를 위한 먹거리, 교육, 환경 - 그 고민들은 경제적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유기농산물과 대안학교등으로 손쉽게 선택되어지고 내가 아닌 모두를 위한 사회변혁으로 별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속에서 나는 쉽게 소외된다. 직장이 끝나고 집으로 오면 대충 인스턴트 음식을 활용해 간편하게 먹고 지쳐 쓰러져 자는 나같은 사람은 지극히 불성실하고 생각없는 엄마인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참 성장기이고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를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하고 성심성의껏 고민을 나눠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정말 서글프게도 '좋은 엄마'에 대한 압박은 결코 자본주의 시장에서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삶의 방식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이 어려운 경제상황속에서 잠시 쉬면서 뒤늦게 육아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방학이 되자마자 공부방을 거부하고 차려진 밥도 먹지 않은채 핸드폰을 꺼놓고 온종일 동네 pc방을 전전하는 열한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보호였고 나여야 했다. 근데 이젠 언제 그랬을까 싶게 아이는 밖엔 나갈 생각도 않고 친구와 놀지도 않는다. 이상하게 낮에도 또래아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초등 4학년쯤 되면 친구들은 거의 학원을 전전하고 학원친구들끼리 주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짐작은 했지만 정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방학이 끝나가면서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한다. 겨울방학은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이었고 앞으로의 성장을 위한 재충전의 계기였음을 굳게 믿고 싶다. 물론 나는 여전히 두렵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삶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그것이 내가 살고 싶었던 삶과 어떤 조화를 이루게 될지 알 수 없다. 아이는 성장하고 결국 언젠가 나를 떠날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이별이 서로에 대한 비난속에서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더 솔직해지자. 소설속의 위녕처럼 어떻든 십수년간 키워온 나를 배신하고 비난하며 아빠든 누구에게든 떠나는 것, 그렇다. 그것이 사실 배신이 아니라는 것,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 - 아마 그런 이성적인 판단보다 결국 감정이 앞서게 될테지.  결국 아이와 함께 나 또한 열심히 성장해야 하는 걸..

 

소설에서 새엄마가 의붓딸을 보이지않게 학대하며 부녀사이를 이간질하는 모습은 기존의 '계모'역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족'과는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갈등끝에 화해는 했지만 십수년간 자신을 키워온 새엄마에 대한 호칭이  '아줌마'로 바뀌는 것, 결국 엄마가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는 것 등은 결국 '모성신화'를 벗어나지 못한 진부한 설정 아닌가. 하지만 멋져보이긴 한다.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는 친구같은 소설가 엄마, 전직 기자면서 책방을 하는 지적인 엄마의 남자친구이자 동시에 딸의 친구(젤 부럽당ㅜㅜ), 아이들을 돌봐주는 가사도우미, 언제든 쉴 수 있는 시골집, 필요할 땐 아이들을 대신 돌봐주는 독신 친구 - 여러가지로 현실에서 빈곤한 내겐 영화처럼 참 멋지고 부럽다..

 

어쨌거나 가족의 의미는 더더 고민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게다가 '고민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을!!' 강력하고 요구하고 싶다. "누나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부부생활을 상담하던 여자후배에게 강하게 조언하는 나를 보고 나중에 비난하듯 남자후배가 물었다. 그때 당황한 나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비수가 되어 내가슴을 후벼팠다. 누나처럼 - '이혼한 후 가난하고 힘들게' 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그 말, 한동안 나는 분했다.. 왜 '내가 어때서?'라고 곧바로 응수하지 못했던가. 이혼전과가 있는 나의 조언에 대한 폭넓은 남성들의 경계를 왜 미리 파악하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준비했다. 언제든 당당히 말하리라.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며 경제적 빈곤과 힘든 육아환경은 단지 내 탓이 아니란 것'을. 편견은 진보를 자처하는 우리안에 늘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세상에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박살나고 깨져야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결혼하고 애 낳으면서 일상에서만큼은 왕편견보수로 돌변하는 내가족주의자들을 위해서라도 '가족의 의미'는 더 부서지고 깨지면서 차츰 세상밖으로 넓게 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즐거운 나의 집' 에는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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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14:17 2009/01/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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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시간 2009/01/23 02:57

향연

이러한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사랑보다 더 훌륭한 협력자를 찾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득시켜보고자 한다네. 사실 나도 방금 디오티마가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신을 존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까 말일세. 그래서 나 자신은 사랑에 관한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특별히 수행의 대상으로 삼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장하고 싶다네.

 

- 플라톤, '향연' 중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는 노력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좋음을 수반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사랑은 좋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려는 갈망이 된다. 그러한 목적에 도달하려면 우리 인간의 영혼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상승은 언제나 로고스를 동반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단일성에서 출발하여 아름다운 영혼들과 훌륭한 직업. 지식들의 단일성을 거쳐 앎의 단일성을 향해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앎'이라는 마지막 단계의 앎을 위한 예비 단계들일 뿐이다.즉 연속적 앎은 직관이라는 불연속적- 그 연속성을 단절시키고 초월해버리는- 직관에 의해 완성된다.

 

- 박희영, '향연'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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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하면서 사랑에도 철학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가슴이 터질것같은 열정은 예상보다 빨리 식었고 감정적인 마무리는 두고두고 뒤끝을 남겼다. 물론 나름 연애에 대한 원칙들이 있긴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활동에 대한 교감 및 진로 모색- 같은 유치하면서 단순한 그러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그러나 상대방에게 푹 빠져있을 때 그런 것들은 가볍게 무시되거나 최소한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 법이다. 또한 사랑은 개인의 은밀한 영역이다. 활동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안전하게 그리고 최대한 티안내고 조용하게 연애는 이뤄져야 하며 불가피하게 깨졌을 경우에는 신속하게 정리되어야만 한다. 이런 경우 대개는 십중팔구 여성이 조직을 떠나게 되지만. 한편 결혼까지 이르게되면 애 낳고 키우랴 사랑은 이제 생활의 전영역으로 확장되지만 그만큼 고민하고 토론할 기운은 상실된다. 삶의 전 영역이 사랑의 과정이며 또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부재를 느끼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랑은 현실 밖의 환상으로 승화된다..

 

사랑은 무엇인가? 각자의 정의는 다양하겠으나 구체적인 양상은 단순하다. 멋진 말을 많이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실천과 내용이 그만큼 멋져지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다 그렇게 단순한지 자기에게만 특별한 경험일뿐 뒤로 물러서면 미세한 차이만 있고 다 비슷하게 보인다. 또한 이성간의 사랑을 토대로 한 짝짓기와 종족번식의 과정은 지금까지 인류의 맥을 이어왔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하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갖겠지. 수많은 인간중의 하나인 나의 관점으로도.

 

고전읽기는 단순하지만 어렵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의 긴 얘기를 들을 때면 '대체 뭘 주장하려는 거지?' 답답증에 속이 터지는데 플라톤의 대화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쉽게 읽히지만 끝까지 찬찬히 읽어야 했고 솔직히 이해 안 가는 부분도 많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중요한 탐구방식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굳이 향연까지는 아닐지라도 술자리든 차를 마시면서든 사랑의 의미를 확장시켜보고 그 수행까지 사이비소크라테스처럼 권장해보는 것, 재밌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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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02:57 2009/01/23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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