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시간 2009/01/27 14:17

빈곤한 우리집

"아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는 아빠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멋대로 살지 않아.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살아. 밥은 여섯 시에 먹고 과일은 일곱 시에 먹지 않는다구. 화요일은 출판사로 가고 목요일에는 수영을 하지 않는다구. 엄마는 밥은 배고프면 먹고 과일도 먹고 싶은 때에 먹어...... 출판사는 필요하면 가고. 수영은 물론 귀찮다고 안해. 그래서 누구에게 나쁜데? 누가 피해를 보지? 그리고 엄마는 아빠 생각 하지도 않아. 엄마는 상처를 날마다 되새기고 있지 않는다구. 엄마는 말했어. 나쁜 과거가 오늘까지 망친다면 그건 정말 우리의 책임이라구."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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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본다. 지맘대로 거의 다하고 사는 엄마를 비난하며 네모 반듯한 삶을 사는 아빠 품으로 어느날 아들이 달려가버리지 않을까, 가벼운 공포속에서 이런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나,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 서자 역시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기적인 아이의 모습속에서 이제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이었을까. 이십대엔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또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위해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나 이젠 생계와 육아속에서 아둥바둥 살아남기도 힘들 정도이다. 물론 지금의 삶 또한 또 다른 현장일뿐이라고 생각해보지만 후배나 친구, 선배들조차 고만고만한 생활속에서 단지 자신이 일군 조그만 일가의 생계와 미래를 위해서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서글퍼지곤 한다. '내아이'를 위한 먹거리, 교육, 환경 - 그 고민들은 경제적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유기농산물과 대안학교등으로 손쉽게 선택되어지고 내가 아닌 모두를 위한 사회변혁으로 별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속에서 나는 쉽게 소외된다. 직장이 끝나고 집으로 오면 대충 인스턴트 음식을 활용해 간편하게 먹고 지쳐 쓰러져 자는 나같은 사람은 지극히 불성실하고 생각없는 엄마인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참 성장기이고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를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하고 성심성의껏 고민을 나눠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정말 서글프게도 '좋은 엄마'에 대한 압박은 결코 자본주의 시장에서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삶의 방식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이 어려운 경제상황속에서 잠시 쉬면서 뒤늦게 육아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방학이 되자마자 공부방을 거부하고 차려진 밥도 먹지 않은채 핸드폰을 꺼놓고 온종일 동네 pc방을 전전하는 열한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보호였고 나여야 했다. 근데 이젠 언제 그랬을까 싶게 아이는 밖엔 나갈 생각도 않고 친구와 놀지도 않는다. 이상하게 낮에도 또래아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초등 4학년쯤 되면 친구들은 거의 학원을 전전하고 학원친구들끼리 주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짐작은 했지만 정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방학이 끝나가면서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한다. 겨울방학은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이었고 앞으로의 성장을 위한 재충전의 계기였음을 굳게 믿고 싶다. 물론 나는 여전히 두렵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삶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그것이 내가 살고 싶었던 삶과 어떤 조화를 이루게 될지 알 수 없다. 아이는 성장하고 결국 언젠가 나를 떠날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이별이 서로에 대한 비난속에서 상처받게 되는 것이다. 더 솔직해지자. 소설속의 위녕처럼 어떻든 십수년간 키워온 나를 배신하고 비난하며 아빠든 누구에게든 떠나는 것, 그렇다. 그것이 사실 배신이 아니라는 것,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 - 아마 그런 이성적인 판단보다 결국 감정이 앞서게 될테지.  결국 아이와 함께 나 또한 열심히 성장해야 하는 걸..

 

소설에서 새엄마가 의붓딸을 보이지않게 학대하며 부녀사이를 이간질하는 모습은 기존의 '계모'역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족'과는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갈등끝에 화해는 했지만 십수년간 자신을 키워온 새엄마에 대한 호칭이  '아줌마'로 바뀌는 것, 결국 엄마가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는 것 등은 결국 '모성신화'를 벗어나지 못한 진부한 설정 아닌가. 하지만 멋져보이긴 한다.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는 친구같은 소설가 엄마, 전직 기자면서 책방을 하는 지적인 엄마의 남자친구이자 동시에 딸의 친구(젤 부럽당ㅜㅜ), 아이들을 돌봐주는 가사도우미, 언제든 쉴 수 있는 시골집, 필요할 땐 아이들을 대신 돌봐주는 독신 친구 - 여러가지로 현실에서 빈곤한 내겐 영화처럼 참 멋지고 부럽다..

 

어쨌거나 가족의 의미는 더더 고민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게다가 '고민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을!!' 강력하고 요구하고 싶다. "누나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부부생활을 상담하던 여자후배에게 강하게 조언하는 나를 보고 나중에 비난하듯 남자후배가 물었다. 그때 당황한 나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비수가 되어 내가슴을 후벼팠다. 누나처럼 - '이혼한 후 가난하고 힘들게' 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그 말, 한동안 나는 분했다.. 왜 '내가 어때서?'라고 곧바로 응수하지 못했던가. 이혼전과가 있는 나의 조언에 대한 폭넓은 남성들의 경계를 왜 미리 파악하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준비했다. 언제든 당당히 말하리라.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며 경제적 빈곤과 힘든 육아환경은 단지 내 탓이 아니란 것'을. 편견은 진보를 자처하는 우리안에 늘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세상에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박살나고 깨져야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결혼하고 애 낳으면서 일상에서만큼은 왕편견보수로 돌변하는 내가족주의자들을 위해서라도 '가족의 의미'는 더 부서지고 깨지면서 차츰 세상밖으로 넓게 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즐거운 나의 집' 에는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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